쑨원
연표
1866
[중국 근대 혁명의 선구자, 쑨원 탄생]
청나라 광동성 향산현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혼란한 시대 속에서 일찍이 청조 타도의 뜻을 품었습니다.
1866년 11월 12일, 청나라 광동성 향산현 취형촌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너져가는 청조를 침략하는 열강을 보며 청나라 타도를 꿈꿨습니다.
1879
[서구 문명과의 첫 만남, 하와이 유학]
13세에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가 유학하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체험했고, 이후 홍콩에서 서양 의학을 배워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연 과학적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3세가 되던 1879년,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하와이 화교 자본가인 큰형 쑨메이의 도움으로 하와이 호놀룰루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곳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몸소 배우고 느꼈으며, 1892년 홍콩으로 돌아와 홍콩 서양 의학원에서 의학을 배우며 서구식 민주주의와 자연 과학적 사고방식을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1894
[혁명운동의 시작, 흥중회 창립]
의대 졸업 후 개업의로 활동하다가 청조의 개혁 주장을 이홍장이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 하와이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흥중회를 조직하며 본격적인 혁명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광저우 무장봉기를 시도했으나 밀고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의대를 졸업한 후 잠시 개업의로 활동하던 쑨원은 1894년,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에게 개혁적인 주장을 담은 편지를 보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같은 해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강령으로 하는 흥중회를 조직했습니다. 1895년 1월에는 홍콩에도 지부를 결성했으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청일전쟁 패배로 청조의 무능함이 드러나자,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으나 가담자의 밀고로 무산되었고, 쑨원은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1896
[런던 사건과 삼민주의 구상]
일본 망명 후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되었으나 스승의 도움으로 풀려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유명해진 그는 런던 체류 중 대영박물관 도서관에서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며 그의 혁명 이념인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의 윤곽을 형성했습니다.
1896년, 일본을 떠나 영국에 머물던 중 청나라 공사관에 체포되는 위기를 겪었으나, 다행히 의대 시절 스승이었던 제임스 캔틀리의 도움으로 무사히 풀려났습니다. 석방 직후 기자회견에서 영국을 격찬하며 유명세를 얻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해외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중국 혁명의 핵심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영국 런던에 체류하면서 대영박물관 도서관을 드나들며 약 9개월간 카를 마르크스와 헨리 조지 등의 경제학자들의 저술을 탐독하고 사회 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으며, 이때부터 그의 혁명이념인 '삼민주의'(민권·민족·민생)의 윤곽이 형성되었습니다.
1905
[중국 혁명 세력의 통합, 동맹회 창립과 삼민주의 공표]
일본 도쿄에서 흥중회, 화흥회 등 여러 혁명단체를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중국 동맹회)를 창건하고 총리에 추대되었습니다. 동맹회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조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했으며, 쑨원은 기관지 《민보》 발간사를 통해 삼민주의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몇 년간 일본, 하와이, 베트남, 시암,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 사상을 전파하고,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제국, 프랑스 등의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했습니다. 1905년 8월, 일본 도쿄에서 흥중회, 화흥회 등의 단체를 기반으로 '중국혁명동맹회'(중국 동맹회)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건하고 총리에 추대되었습니다. 동맹회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민국 창립, 토지 조유의 균등'을 강령으로 채택했고, 쑨원은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民報) 발간사를 통해 삼민주의를 발표했습니다.
1911
[우창 봉기로 촉발된 신해혁명과 대총통 당선]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우창 봉기가 일어나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해외에 있던 쑨원은 급히 귀국했습니다. 혁명정부의 외교적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 후, 12월 29일 난징에서 각성대표회의에 의해 초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습니다.
1911년, 청조의 철도 국유화 정책에 대한 민간의 불만이 폭발하여 우창 봉기가 발생하고 신해혁명이 전개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덴버에 체류 중이던 쑨원은 이 소식을 접하고 '혁명 성공을 위해 서구 열강의 간섭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서 외교 활동을 펼쳐 혁명 정부에 대한 차관 중지 등의 확약을 받아냈습니다. 12월 21일 홍콩으로 귀환하여 상하이에서 정부 조직을 논의한 후, 12월 29일 난징에서 열린 각성대표회의에서 16표를 얻어 초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당선되었습니다.
1912
[아시아 최초의 민주 공화정, 중화민국 수립]
난징에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식을 갖고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선포하며 아시아 최초의 민주 공화정을 수립했습니다. 이는 그의 혁명 활동의 가장 큰 결실이었습니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은 난징에서 열렬한 환영 속에 총통부에서 취임식을 갖고 서약했습니다. 임시대총통직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1912년 1월 1일을 '민국 원년'으로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민주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며, 이는 쑨원의 오랜 혁명 활동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습니다.
[위안스카이와의 타협, 대총통직 양위]
청조를 무너뜨릴 힘이 부족했던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청조 퇴위를 설득할 것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대총통직을 양보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위안스카이의 설득으로 선통제가 퇴위하자, 약속대로 그에게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습니다.
임시정부를 수립했지만 청조를 완전히 무너뜨릴 만한 세력이 부족했던 쑨원은 청조 진압을 지휘하던 북양군벌의 거두 위안스카이와의 협상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쑨원은 위안에게 청조를 설득하여 퇴위시킬 것을 요청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대통령의 지위를 양보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청조를 설득하여 선통제가 1912년 2월 12일 퇴위 조서를 발표하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청조는 멸망했습니다. 쑨원은 약속대로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에게 임시 대총통직을 물려주었습니다.
1913
[위안스카이 독재에 맞선 제2차 혁명 실패]
권력을 잡은 위안스카이가 독재 정권을 수립하고 국민당 인사들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쑨원은 위안을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하며 제2차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권력을 잡은 위안스카이는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대통령 중심제로 법을 개정하며 독재정권을 수립했습니다. 그는 서구 열강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받아먹는 매국 행위와 독재 정치를 일삼았고, 유력한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국민당 이사장 대리 쑹자오런을 암살하는 등 전횡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에 쑨원은 위안을 무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하며 1913년 7월 '제2차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은 실패했고, 쑨원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914
[망명지에서 새로운 혁명 조직, 중화혁명당 창설]
위안스카이의 독재와 황제 등극 야욕에 맞서, 쑨원은 일본 도쿄에서 구 혁명당원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결성했습니다. 이 단체는 훗날 중국국민당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와 황제 등극 야욕이 노골화되자, 쑨원은 1914년 7월 일본 도쿄부에서 구 혁명당원들을 모아 중화혁명당을 결성했습니다. 이 중화혁명당은 훗날 중국국민당의 모태가 되는 중요한 조직이었습니다. 혁명당원들은 곧 국내로 들어와 위안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토원군을 재조직하며 위안의 황제 등극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1919
[혁명 노선 전환,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
5.4 운동을 계기로 '위로부터의 혁명' 노선을 버리고 '아래로부터의 혁명' 노선으로 선회하여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칭했습니다. 조직의 공개화, 당원의 등급 폐지 등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919년 5.4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쑨원은 '중화혁명당에 대중성을 도입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기존의 '위로부터의 혁명' 노선을 버리고 '아래로부터의 혁명' 노선으로 선회하여 1919년 10월 10일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칭하고 총부를 상하이에 두었습니다. 중국국민당은 기존 중화혁명당과 달리 비밀당 조직을 공개적으로 운영하고, 당원이 당수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규정을 삭제하며 당원의 등급을 폐지하는 등 조직상에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1923
[소련과의 연대, 제1차 국공합작의 시작]
'쑨원-요페 공동선언'을 통해 '연소용공'(聯蘇容共) 정책의 기본을 마련하고, 중국국민당 개조 선언을 발표하며 공산당 당원들의 개인 자격 국민당 입당을 허용했습니다. 이는 제1차 국공합작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922년 6월 진형명의 반란 이후, 쑨원은 소련의 코민테른과의 연계를 모색했습니다.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의 힘이 미약하다고 판단하여 쑨원을 협조자로 지목했습니다. 쑨원은 처음에는 합작을 거부했으나, 중국공산당 주도의 노동운동 확산에 주목하며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입당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습니다. 1923년 1월 1일, 소련 외교관 요페와의 협의를 통해 '쑨원-요페 공동선언'을 발표, '연소용공' 정책의 기본을 마련하고 '중국국민당 개조 선언'을 발표하여 당의 개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에 따라 공산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입당하게 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의 기초가 다져졌습니다.
1924
[국공합작 공식화, 혁명사업의 새로운 단계]
광저우에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주관하여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 국공합작을 공식화했습니다.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3대 정책을 확립하고 삼민주의에 반제·반봉건적 내용을 추가하며 혁명사업의 새로운 발전을 선언했습니다.
1924년 1월, 쑨원의 주관으로 광저우에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여 공산당과의 합작을 이루었습니다.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1. 소련과의 연합, 2. 공산당과의 연합, 3. 노동자·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 정책을 확립했습니다. 또한 대회 선언에서 쑨원은 삼민주의에 반제·반봉건적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이 대회의 소집은 쑨원의 혁명사업이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일본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 강연]
병이 깊어가는 와중에 일본 고베에서 '대아시아주의'를 주제로 마지막 공식 강연을 했습니다. 일본이 서구의 '패도문화'를 따를 것인지 동양의 '왕도문화'를 지향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경고하며, 중국과 일본 중심의 아시아 연합을 주장했습니다.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한 북벌군이 진격할 즈음, 1924년 10월 베이징 정변이 일어나자 쑨원은 국정 논의 요청을 받아 광저우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시찰 도중 그의 몸에는 암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일본 고베에 들렀을 때, 1924년 11월 28일 현립 고등여학교에서 '대아시아주의'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습니다. 이 강연은 쑨원의 일생에서 최후의 공식적인 강연이자 가장 유명한 발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쑨원은 여기서 일본이 '이욕과 강권에 기반하는 서양의 패도문화'를 따를 것인지, '도덕과 인의에 기반하는 동양의 왕도문화'를 발양하여 중국과 일본 중심의 아시아 대연합을 이룰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1925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의 서거]
베이징으로 향하는 도중 간암으로 쓰러져, 동지들에게 혁명의 완수를 당부하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60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서거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1929년 난징 중산릉에 안장되었습니다.
1924년 11월 베이징으로 향하던 쑨원은 간암으로 쓰러졌습니다. 1925년 2월 24일, 그는 아들 손과와 송자문 등 증인들 앞에서 "나는 30년 동안 중국의 자유평등을 얻기 위한 국민혁명에 모든 힘을 다했다. 동지들은 필히 내가 쓴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 《제1차 전국대표대회선언》을 따라 계속 노력하고 관철해달라."는 첫 유언을 남겼습니다. 한 달 뒤, 그는 다시 두 번째 유언을 통해 "나는 국사에 진력하다 보니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다. 내가 남긴 서적과 의복, 주택 등 일체는 나의 처 쑹칭링에게 주어 기념으로 삼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은 간암으로 베이징에서 향년 60세의 나이로 작고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2년간 베이징 벽운사에 임시 안치되었다가, 1929년 6월 1일 난징 시외의 중산릉에 안장되었습니다.
1968
[대한민국 독립운동 지원 공로 인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 43년 만인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습니다.
쑨원은 한국의 독립 운동 지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에 커다란 일조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의 사후 43년 만인 1968년 12월 1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