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준 (군인)
연표
1915
[출생 및 어린 시절]
경상북도 김천군에서 태어나 유아기에 황해도 평산군에서 잠시 지낸 후, 1919년 만주로 이주하여 장춘과 하얼빈 근처 농촌을 전전하며 성장했습니다. 1928년 가족이 하얼빈의 인화료로 이주했습니다.
신현준은 1915년 10월 23일 경상북도 김천군에서 태어나 지난날 한때 황해도 평산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부모를 따라 1919년 2월 만주로 이주하여 장춘과 하얼빈 근처 농촌을 전전하며 성장했습니다. 생계가 어려워지자 1928년 1월 빈민구제기관인 하얼빈의 인화료로 가족이 모두 이주했습니다.
1932
[만주국군 통역 활동 시작]
하얼빈 보통학교 고등과를 중퇴하고 만주 파견군 14사단 사령부의 사단참모 다데이시 대위의 전속 통역으로 종군했습니다. 이후 만주군 제5관구 고문부와 보병 제34단 본부에서 통역으로 근무했습니다.
1932년 2월 하얼빈 보통학교 고등과를 중퇴하고 만주 파견군 14사단 사령부의 사단참모 다데이시 대위의 전속 통역으로 종군했습니다. 1934년 2월 14사단 작전참모 세키하라 대좌의 권유로 만주군 제5관구 고문부에서 1935년 3월까지 통역으로 근무했습니다. 1935년 3월부터 세키하라 대좌의 후견 아래 청더에 있는 만주국군 보병 제34단 본부에 배속되어 단장을 수행하면서 통역을 담당했습니다.
1936
[봉천군관학교 입학 및 임관]
일본이 만주에 세운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 9월 제5기로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박격포중대 견습 군관으로 복무한 뒤, 12월 보병소위로 임관했습니다.
1936년 6월 만주국의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고 1937년 9월 제5기로 졸업했습니다. 1937년 10월부터 박격포중대에서 견습 군관으로 복무한 뒤, 같은 해 12월 보병소위로 임관했습니다.
1937
[항일 빨치산 부대 진압 작전 참여]
보병소위로 임관 후 대각진 부근에서 이장명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부대 진압 작전에 소대장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습니다. 이듬해인 1938년 4월 제5군관구 예하 보병 제5사단 제6련에 배치되었습니다.
1937년 12월 보병소위로 임관 후 대각진 부근에서 이장명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 부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배장(소대장)의 한 사람으로 작전에 참가했습니다. 1938년 4월 제5군관구 제5교됴내 예하 보병 제5사단 제6련에 배치되었습니다.
1938
[간도특설대 창설 및 활동]
연길지구사령부에 부임하여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세력 공격 등에 가담하였습니다. 12월 1일 제6관구 옌지(연길)지구사령부에 부임해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2월 15일 제1기 지원병 입대식을 열었으며, 해산 시까지 항일 세력을 108차례 공격하여 172명을 살해했습니다.
1940
[창씨개명 및 배속장교 임명]
우다카와 요시히토(宇田川義人)로 창씨개명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국경사변종기장을 수훈받았으며, 12월에는 훈춘농업고등학교와 훈춘협화회 청년훈련소의 배속장교가 되었습니다.
1940년 우다카와 요시히토(宇田川義人)로 창씨개명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국경사변종기장(國境事變從軍記章)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12월 훈춘농업고등학교와 훈춘협화회 산하 청년훈련소에 배속장교가 되었습니다.
1941
[만주국군 중위 승진 및 전보]
만주국군 중위로 승진했습니다. 이후 1942년 2월 안투현 청년훈련소 배속장교로 전임 근무하다가 1943년 4월 간도특설대로 원대복귀했습니다.
1941년 3월 중위로 승진하였습니다. 1942년 2월 안투현(安鬪縣) 청년훈련소 배속장교로 전임해 근무하다가 1943년 4월 간도특설대로 원대복귀하였습니다.
1943
[팔로군 토벌 작전 참가]
간도특설대는 중국공산당 산하 팔로군 토벌작전을 지원하라는 만주국 치안부의 명령을 받고 러허 방면으로 출동했습니다. 이때 간도특설대 기관총 박격포 중대에서 백선엽 소위와 함께 근무했습니다.
1943년 12월 간도특설대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 토벌작전을 지원하라는 만주국 치안부의 명령을 받고 러허방면으로 출동했습니다. 이후 간도특설대 기박련(기관총 박격포 중대)에서 백선엽 소위(봉천군교 9기)와 함께 근무했습니다.
1944
[대위 진급 및 팔로군 교전]
대위로 진급했으며, 같은 해 8월 만주국군 보병 제8단 제6연장(중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박정희, 이주일 등이 장교로 복무하던 제8단에서 제6련을 이끌고 팔로군과 교전했습니다.
1944년 3월 1일 대위로 진급했습니다. 같은 해 8월 만주국군 보병 제8단 제6연장(연대장 겸 중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보병 제8단에는 박정희·이주일·방원철 등이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신현준이 이끄는 제6련은 팔로군과 교전했습니다.
1945
[광복군 제3지대 핑진대대 대대장 활동]
베이징에서 광복군 제3지대 핑진(평진)대대 대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는 '해방 후 광복군'으로 불리며, 박정희의 비밀 광복군설을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베이핑(베이징)에서 광복군 제3지대 핑진(평진)대대에 들어가 대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이주일은 제1중대장을, 박정희는 제2중대장을 맡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며, 신현준은 광복군 활동이 해방 이후에 이루어졌음을 증언하며 박정희의 비밀 광복군설에 대한 중요한 반박 근거를 제공했습니다.
[일제 패망과 만주국군 해체]
일제 패망 후, 제8단의 군인들에 의해 직위 해임되고 무장해제를 당했습니다. 이후 박정희, 이주일 등과 함께 베이핑(베이징)으로 이동했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후, 8월 17일 일본인과 신현준을 비롯한 조선인 장교들은 제8단의 군인들에 의해 직위 해임되고 무장해제를 당하였습니다. 제8단 제3영 예하 제7련으로 전속되어 9월 미윤(밀운)으로 이동한 후 제8단을 떠나 박정희·이주일 등과 함께 베이핑(북평: 베이징)으로 갔습니다.
1946
[귀국 및 조선해안경비대 입대]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여 귀국했습니다. 이후 봉천군관학교 동기생 정일권의 권유로 해안경비대총사령부 견습사관으로 입대했습니다.
1946년 5월 6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8일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봉천군관학교 동기생 정일권의 권유로 해안경비대총사령부 견습사관으로 입대했습니다. 12월 한국군 중위로 정식 임관했습니다.
1947
[해병소령 진급 및 부산기지 사령관 임명]
해병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부산기지 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1948년 5월 조선해안경비대 진해특설기지참모장을 역임했습니다.
1947년 9월 해병소령으로 진급하면서 동시에 부산기지 사령관에 임명되었습니다. 1948년 5월 조선해안경비대 진해특설기지참모장을 역임했습니다.
1948
[여순사건 진압 참여]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다음, 해상에서 저항세력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다음, 해상에서 저항세력을 진압했습니다.
1949
[대한민국 해병대 초대사령관 취임]
약 380명의 병력으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될 때 초대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당시 계급은 중령이었으며,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1949년 4월 15일에 약 380명의 병력으로 해병대가 창설될 때 초대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당시 계급은 중령이었으며, 신현준은 박정희를 비롯하여, 정일권, 백선엽, 이한림, 김석범, 원용덕, 김창룡 등과 함께 국군 내의 대표적인 만주군 인맥이었습니다.
1950
[미국 은성훈장 수훈]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 작전과 도솔산 전투 등에서 해병대가 큰 전과를 올리는 데 공을 세워 미국 은성훈장을 수훈받았습니다.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 작전과 도솔산 전투 등에서 해병대가 전과를 올리는 데 공을 세웠고, 이에 대한 공로로 1950년 10월 미국 은성훈장(미국 은성훈장)을 수훈받았습니다.
1953
[해병대 사령관 이임 및 제1여단장 취임]
해병대 사령관 임기를 마친 뒤, 새로 창설된 해병대 제1여단(현 해병대 제1상륙사단)의 초대 여단장을 맡았습니다.
1953년 해병대 사령관 임기를 마친 뒤 새로 창설된 해병대 제1여단(현 해병대 제1상륙사단)의 초대 여단장을 맡았습니다.
1956
1956년 대한민국 국방대학교에서 행정학사 1기로 졸업했습니다.
1961
[국방부 차관보 역임 및 군 예편, 외교관 활동 시작]
국방부 차관보 임기를 시작하여 7월 4일까지 재직했습니다. 같은 해 해병 중장으로 예편하였고, 이후 초대 모로코 대사와 초대 바티칸 시국 주재 대사를 지내는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1961년 1월 9일 국방부 차관보에 임명되어 7월 4일까지 재직했습니다. 같은 해 해병 중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이후 초대 모로코 대사와 초대 바티칸 시국 주재 대사를 지내는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제5대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도 역임했습니다.
1974
[바티칸 시국 주재 대사 임명]
주교황청 대한민국 대사관 바티칸 시국 주재 대사 임기를 시작하여 1981년 3월 7일까지 재직했습니다.
1974년 2월 12일 바티칸 시국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1981년 3월 7일까지 임기를 수행했습니다.
1988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신민주공화당 당무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2004
[해병대 발전기금 기탁 및 장학회 설립]
해병대 창설 55주년을 기념하여 해병대 발전기금으로 1억원을 기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해병대 발전과 인재양성을 위한 '신현준 장학회'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2004년 4월 해병대 창설 55주년을 기념해 해병대 발전기금으로 1억원을 기탁했습니다. 해병대사령부는 이 기금을 토대로 해병대 발전과 인재양성을 위한 '신현준 장학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2007
2007년 10월 15일 91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유해는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장군1-273)에 안장되었습니다. 유가족으로는 장남 신옹목 등 2남 4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