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사와 에이이치
연표
1840
[부농의 장남으로 출생]
무사시국 한자와군 지아라이지마무라(현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아버지 시부사와 이치로우에몬 모토스케와 어머니 에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에이지로와 이치사부로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40년 3월 16일 무사시국 한자와군 지아라이지마무라(현 사이타마현 후카야시)에서 아버지인 시부사와 이치로우에몬 모토스케(1810년 ~ 1871년)와 어머니인 에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에이지로(栄二郎)와 이치사부로(市三郎)였다. 이후, 에이이치로(栄一郎), 도쿠다유(篤太夫), 도쿠타로(篤太郎) 등의 이름을 갖게 된다.
1845
[독서와 학업 시작]
5세부터 아버지와 독서를 시작했고, 7세 때 사촌 형 오다카 아쓰타다에게 사서오경과 『일본외사』를 배웠다. 검술은 오카와 헤이베에로부터 신도무념류를 배웠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5세부터 아버지와 함께 독서를 시작했으며, 7세 때에는 사촌 형인 오다카 아쓰타다(尾高惇忠)에게서 사서오경과 『일본외사』를 배웠다. 검술은 오카와 헤이베에(大川平兵衛)로부터 신도무념류(神道無念流)를 배웠다.
1854
[상업적 경험을 쌓다]
14세 때 혼자 쪽잎을 매입하러 다니면서 상업적 재능을 키웠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유럽의 경제 시스템을 흡수하고 현실적인 합리주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4살 때에는 혼자서 쪽잎을 매입하게 되었는데, 이 때의 경험이 훗날 그가 유럽의 경제 시스템을 흡수하기 쉬운 밑바탕을 만들어내었고, 이것이 이후 그의 현실적인 합리주의 사상으로 이어졌다는 평이 있다.
1858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18세 때 (1858년) 아쓰타다(惇忠)의 여동생인 오다카 지요(尾高千代)와 결혼하여, 이름을 에이이치로(栄一郎)로 바꾸었다.
1861
[에도 유학 및 지사들과의 교류]
에도로 나와 가이호 교손의 문하생이 되었고, 치바 에이지로 도장에 입문하여 검술 수행을 하는 한편 근황지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1861년에 에도로 나와 가이호 교손(海保漁村)의 문하생이 된다. 또 북진일도류를 가르치는 지바 에이지로(千葉栄次郎) 도장에 입문하여, 검술 수행을 하는 한편 근황지사들과 관계를 맺는다.
1863
[막부 타도 계획을 세우다]
존왕양이에 눈을 떠 다카사키성 탈취, 요코하마 화공 공격, 조슈번과의 연대를 통한 막부 타도 계획을 세웠으나, 사촌 동생 오다카 조시치로의 필사적인 설득에 따라 계획을 중지했다.
그 영향 때문에 1863년에 존왕양이에 눈을 떠, 다카사키성(高崎城)을 탈취하여 무기를 빼앗고, 요코하마를 화공(火攻)으로 공격한 뒤 조슈번과 연대하여 막부를 무너뜨린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아쓰타다의 남동생인 오다카 조시치로(尾高長七郎)의 필사적인 설득에 따라 계획을 중지하게 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섬기다]
가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의절 형식을 취하고 교토로 갔으나, 근황파가 약해진 교토에서의 지사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에도 유학 시절 교류했던 히라오카 엔시로의 천거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섬기게 되었다.
가족의 피해를 막기위해 아버지로부터 의절을 당하는 형식을 취하고 교토에 나오지만, 8월 18일의 정변 직후였기 때문에, 근황파가 약해진 교토에서의 지사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는, 에도 유학 시절부터 교제를 하고 있었던 히토쓰바시 가문(一橋家)의 가신인 히라오카 엔시로(平岡円四郎)의 천거에 의해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섬기게 된다. 주군을 모시는 동안에는 히토쓰바시 가문(一橋家)의 영내(領内)를 돌아다니면서, 농병(農兵)의 모집에 종사하였다.
1866
[유럽 방문을 통해 서양 문물 경험]
막신이 된 후 쇼군 대리인 도쿠가와 아키타케의 수행원으로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석하고 유럽 각국을 방문하며 선진 문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주군인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자 에이이치도 막신이 되었는데, 파리 만국박람회에 쇼군 대리인으로서 출석하는 도쿠가와 아키타케의 수행원으로서 어감정격육군부조역이라는 직함을 얻어, 프랑스로 간다. '파리 만국박람회'를 시찰한 뒤, 유럽 각국을 방문하는 아키타케를 수행했다. 각지에서 선진적인 산업, 군비, 사회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1868
[유럽 시찰 후 일본 귀국]
파리 만국박람회 시찰과 유럽 방문을 마치고 요코하마항으로 귀국하여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사회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파리 만국박람회와 유럽 각국에 대한 방문을 끝낸 후, 아키타케는 파리에서 유학을 하게 되지만, 대정봉환이 일어남에 따라, 1868년 5월에 신정부로부터 귀국을 명받았고, 1868년 10월 19일에 마르세유에서 귀국 길에 올라, 같은 해 12월 16일에 요코하마항으로 귀국하였다.
1869
[주식회사 제도 도입 및 대장성 입부]
신정부의 부름을 받아 대장성에 들어가 대장소보사무취급 관직을 맡았고, 프랑스에서 배운 주식회사 제도를 일본에 도입하며 시즈오카 상법회소를 설립하여 근대 경제 시스템 구축에 기여했다.
귀국 후에는 요시노부가 시즈오카번에서 일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으나 이후 다시 「이제부터는 너의 길을 가거라」하자 시부사와는 그 뜻을 받들었다. 이후 프랑스에서 배운 '주식회사 제도'를 일본에 도입하였고, 1869년 1월에 신정부에서 빌린 돈을 갚기위해 시즈오카 상법회소(商法会所)를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오쿠마 시게노부의 설득으로 10월에는 일본 대장성에 들어가게 된다.
1872
[지폐료 장 취임]
대장성 관료로서 개혁안 기획 입안, 도량형 제정, 국립은행조례제도에 관여했으며, 1872년에는 지폐료의 장에 취임하여 독일에서 인쇄된 '메이지통보' 업무를 다루었다.
대장성 관료로서 개혁안에 대한 기획 입안을 하거나, 도량형의 제정과 국립은행조례제도(国立銀行条例制定)에 관여하였다. 1872년에는 일본 국립인쇄국 지폐료의 장에 취임하였다. 독일에서 인쇄된 '메이지통보'(통칭 게르만 지폐) 업무를 다루었는데 위조 지폐 사건의 발생도 적지 않았다.
1873
[대장성 퇴직]
예산 편성을 둘러싸고 오쿠보 도시미치 및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한 끝에,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대장성 관료직에서 물러났다.
예산 편성을 둘러싸고, 오쿠보 도시미치 및 오쿠마 시게노부와 대립하여, 1873년에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퇴직했다.
1874
[실업계 투신 및 제일국립은행장 취임]
관료 시절 설립을 주도했던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 은행)의 장이 되어 실업계에 몸담기 시작했다. 이후 77국립은행 등 많은 지방은행의 설립을 지도하며 일본 금융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얼마뒤 관료 시절에 설립을 주도했었던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 은행)장이 되었고, 이후에 계속 실업계에 몸을 둔다. 또, 제일국립은행뿐만 아니라, 77국립은행(七十七国立銀行) 등 많은 지방은행의 설립을 지도하였다.
1875
[상법강습소 설립]
실업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상법강습소(현 히토쓰바시 대학)를 설립하여 근대 상업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1875년 상법강습소(商法講習所)를 설립한다.
1880
[500개 이상 기업 설립에 기여]
제일국립은행장을 넘어 도쿄가스, 도쿄해상화재보험, 오지제지, 도쿄증권거래소, 기린 맥주 등 500개 이상의 다종다양한 기업 설립과 경영에 관여하여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은행들 외에, 도쿄가스(東京瓦斯), 도쿄해상화재보험(東京海上火災保険) (현 도쿄해상일동화재보험[東京海上日動火災保険]), 오지제지(王子製紙), 전원도시(田園都市) (현 도쿄 급행 전철]), 지치부시멘트(秩父セメント) (현 태평양시멘트[太平洋セメント]), 제국호텔, 지치부철도, 게이한 전기 철도, 도쿄증권거래소, 기린 맥주, 삿포로 맥주, 동양방적(東洋紡績) (현 토요보[東洋紡]), 대일본제당(大日本製糖), 메이지제당(明治製糖), 시부사와창고(澁澤倉庫) 등, 다종다양한 기업의 설립에 관여하였는데, 그 숫자가 500개 이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1887
[류몬샤 조직]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경영 철학과 사상을 따르는 경영자 및 관리직들이 모여 류몬샤를 조직했다. 이 모임은 쇼와시대 초기에는 수천 명의 회원을 헤아릴 정도로 성장했다.
1887년 무렵에, 시부사와(渋沢)를 추앙하는 경영자와 관리직(管理職)이 모이는 류몬샤(龍門社)가 조직되었고 쇼와시대(1926~1989년) 초기에는 그 회원의 숫자가 수천 명을 헤아렸다.
1889
[지역 정치 활동 시작]
1889년부터 1904년까지 15년간 후카가와구회 의원을 역임하고 구회 의장에도 선출되어,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1889년부터 1904년까지 15년간에 걸쳐, 후카가와구회(深川区会)의원을 역임하였고, 구회 의장에도 선출되어, 후카가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890
[귀족원 의원 칙선]
1890년 9월 29일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었으나, 다음 해인 1891년 10월 29일에 사임했다.
1890년 9월 29일에는 귀족원 의원으로 칙선되어, 같은 해 12월 15일에 열린 제1회 제국의회 귀족원 본회의에 출석하였는데, 이후에는 출석하지 않고 다음 해인 1891년 10월 29일에 사임하였다.
1903
[일인협회 설립 참여]
러일전쟁 발발 1년 전, 인도와의 무역 중요성을 인식하고 오쿠마 시게노부 등과 함께 일인협회 설립에 관여했으며,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
러일전쟁 발발 1년 전인 1903년, 인도와의 무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시부사와는, 오쿠마 시게노부 등과 함께 일인협회(日印協会)의 설립에 관여하였으며 그 제3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1912
[민간 외교 활동 시작]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 등으로 미일관계가 악화되자, 미국의 보도기관에 일본 소식을 전하는 통신사 설립을 제안했다. 이는 현재의 지지통신과 교도통신의 기원이 되었다.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 (1912년)에서 보이는 '일본 이민 배척운동' 등으로 인해 미일관계가 악화되었을 때에는 미국의 보도기관에 일본의 뉴스를 보내는 통신사를 만들어 일본에 대한 이해를 높이자고 제안하였다. 이 계획을 성공시키지는 못하였지만, 이것이 현재의 지지통신사(時事通信社)와 교도 통신사의 기원이 되었다.
1916
['논어와 주판' 저술 및 도덕경제합일설 주창]
《논어와 주판》을 저술하며 유소년기에 배운 『논어』를 기반으로 '도덕경제합일설'을 주창했다. 이는 윤리와 이익이 양립하며, 부는 독점하지 않고 사회 전체를 풍족하게 하기 위해 공유하고 환원해야 한다는 그의 경영철학의 핵심이다.
1916년에 《논어와 주판(論語と算盤)》을 저술하여 '도덕경제합일설(道德經濟合一說)'이라는 이념을 내세웠다. 유소년기에 배운 『논어』를 기반으로 하여 윤리와 이익의 양립이라는 이념을 내세웠는데, 시부사와는 경제를 발전시켜서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풍족케 하기 위해서 부는 전체가 공유하는 것으로서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였고 이를 스스로도 명심하였다. 『논어와 주판』에는 그 이념이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부(富)를 이루는 근원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인의도덕(仁義道徳)이다. 올바른 도리의 부가 아니라면, 그 부는 완전히 영속할 수가 없다.'
1923
[간토 대지진 재해 복구 활동]
간토 대지진 재난 시 대진재선후회 부회장이 되어 기부금 모으기를 위해 활동하며 사회 복지 분야에서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간토 대지진 재난 때에는 대진재선후회(大震災善後会)의 부회장이 되어 기부금 모으기를 위해 활동했다.
1926
[노벨평화상 후보 지명]
일본국제아동친선회를 설립하여 미국과 일본 인형을 교환하는 등 교류 증진에 힘썼으며, 이러한 민간 외교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26년과 1927년에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일본국제아동친선회를 설립하여 파란 눈의 인형과 일본의 인형(市松人形)을 교환하는 등, 교류 증진에 힘썼다. 이런 공로들을 인정받아 시부사와는 1926년과 1927년에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지명되었다.
1931
[중국 수해 복구 지원 활동]
중국에서 일어난 수해 복구를 위해 '중화민국수해동정회' 회장을 맡아 의연금을 모집하는 등, 민간외교 선구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31년에는 중국에서 일어난 수해 복구를 위해 '중화민국수재동정회(中華民国水災同情会)' 회장을 맡아 의연금을 모집하는 등, 민간외교 선구자로서의 측면도 보여주었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사망]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를 관통하며 일본 근대화와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향년 92세로 사망했다.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를 관통하며 일본 근대화와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1931년 11월 11일 향년 92세로 사망하였다.
2024
[2024년 일본 1만 엔권 지폐 인물로 선정]
2024년 상반기 집행된 지폐 개정에서 일본 1만 엔 지폐의 초상 인물로 결정되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경제인으로서, 또 초대 지폐두(紙幣頭)로서 일본은행권 지폐의 초상 후보자로 몇 번이나 선발되었고, 천엔 지폐(1963년 발행)에서는 최종 선발까지 남았지만, 결국 채용되지는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