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바 료타로

num_of_likes 81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작가, 소설가, 논픽션작가, 평론가, 역사소설가 + 카테고리

일본의 국민적 작가로 불리는 시바 료타로는 역사 소설, 논픽션, 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특히 독특한 시바 사관과 작가 개입형 서술 기법으로 일본 역사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며 폭넓은 독자층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NHK 대하드라마로 가장 많이 제작된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23

[출생]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약제사 아버지 후쿠다 고레사다와 어머니 나오지 사이에서 둘째 아들 후쿠다 데이이치로 태어났습니다.

오사카부 오사카시 미나미 구 난바니시간다 정(현 나니와구 시오쿠사)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약제사 아버지 후쿠다 고레사다와 어머니 나오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형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누나와 여동생이 한 명씩 있었습니다.

1926

[유년기 외가 생활]

각기병으로 인해 세 살 때까지 나라현 기타가쓰라기군 다이마 정(현 가쓰라기시)에 있는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각기병 때문에 세 살 때까지 나라현 기타가쓰라기군(北葛城郡) 다이마 정(當麻町, 지금의 가쓰라기시)에 있는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1930

[초등학교 입학]

오사카시 난바 시오쿠사 심상소학교(현 오사카 시립 시오쿠사 다테바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오사카시 난바 시오쿠사 심상소학교(難波塩草尋常小学校, 오사카 시립 시오쿠사 다테바 소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성격은 밝았으나 학교 생활을 싫어해서 개구쟁이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1936

[중학교 진학 및 독서에 몰두]

사립 우에노미야 중학교로 진학한 뒤, 꼴찌에 가까웠던 성적에 충격을 받아 공부에 매진하여 상위권에 들었으며, 이 시기부터 도서관에 드나들며 방대한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사립 우에노미야 중학교(上宮中学校)로 진학했습니다. 입학 뒤의 성적은 300명 중에 꼴찌에 가까웠고 이에 대해 본인도 놀란 나머지 당황해 공부에 매진해 2학기에는 상위 20등을 차지했습니다. 이때 읽게 된 이부세 마스지(井伏鱒二)의 『이와타 군의 쿠로』(岩田君のクロ)에서 감명을 받았고, 3학년부터 마쓰자카야(松坂屋) 옆에 있던 오쿠라아토 정(御蔵跡町)의 도서관에 드나들기 시작해 오사카 외국어학교(大阪外国語学校)를 졸업할 때까지 온갖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동서고금의 여러 분야에 걸치는 방대한 분량의 서적을 독파하고 난 뒤에는 낚시나 장기와 관련된 책까지 읽었다고 합니다. 반은 취미로써 등산을 좋아해 오사카 주변의 명산을 주로 찾기도 했습니다.

1942

[오사카 외국어학교 입학]

구제 오사카 외국어학교 몽골어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어학보다는 독서를 즐기며 러시아 문학이나 사마천의 사기를 애독했습니다.

1940년에 구제(旧制) 오사카 고등학교(大阪高等學校), 이듬해에는 구제 히로사키 고등학교(弘前高等學校)를 지망했지만 불합격되었습니다(고등학교 진학 당시 집안 사정으로 사립으로 진학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공립으로 하라는 아버지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1942년 4월에 구제 오사카 외국어학교(大阪外国語学校, 신제 오사카 외국어 대학新制大阪外国語大学의 전신으로 이후 오사카 대학 외국어학부로 바뀌었다) 몽골어학과(蒙古語学科)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 학생의 대부분이 그러했듯 후쿠다 역시도 어학을 싫어했고 와세다 대학의 중국문학(中国文学)으로 편입할까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독서는 여전히 좋아했고 러시아 문학이나 사마천의 사기를 애독하였습니다.

1943

[학도병 징집 및 입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오사카 외국어학부를 임시 졸업하고 효고현 가토군 가와이 촌(현 오노시) 세이노가하라 전차제19연대에 입대했습니다.

1943년 11월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오사카 외국어학부를 임시 졸업(이듬해 9월에 정식 졸업처리되었다)하고 효고현 가토군 (효고현) 가토군(加東郡) 가와이 촌(河合村, 지금의 오노시 (효고현)오노시小野市) 세이노가하라(青野が原) 전차제19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군대 내에서 보기 드문 「하이쿠 모임」을 열어 집합 신호에는 늘 가장 늦게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1944

[대학 정식 졸업]

오사카 외국어학부를 정식으로 졸업했습니다.

학도병 징집 후 임시 졸업 처리되었던 오사카 외국어학부를 정식으로 졸업 처리되었습니다.

1945

[신세계신문사 입사]

패전 후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던 재일조선인 류수현이 운영하던 신세계신문사에 입사했습니다.

패전 뒤에는 다시 도서관에 드나드는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돌아온 뒤 오사카 이쿠노구 이카이노(猪飼野) 히가시5초메(東五丁目)8에 있던, 재일조선인 류수현(柳洙鉉)이 운영하던 신세계신문사(新世界新聞社)에 오타케 아키히코(大竹照彦)와 함께 입사하였습니다.

[패전과 작가 원점]

만주 쓰핑 육군전차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 무단장 구루메 전차제1연대에 배속되었다가, 본토 결전을 위해 니가타현을 거쳐 도치기현 사노시로 옮겨 육군 소위로써 패전을 맞았습니다. 이 패전 체험은 그의 작가 생활 원점이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44년 4월 만주 쓰핑 시쓰핑의 쓰핑 육군전차학교(四平陸軍戦車学校)에 입교해 12월에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에 만주 무단장(牡丹江)에서 전개된 구루메 전차제1연대(久留米戦車第一連隊) 제3중대 제5소대에 소대장으로써 배속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45년에 본토결전(本土決戦)을 위해 니가타현을 거쳐 도치기현 사노시로 옮겼고, 이곳에서 육군소위로써 패전을 맞았습니다. 그때 어느 젊은 장교가 미군(연합군)이 도쿄를 공격하러 올 경우 도치기에서 도쿄로 이동해 공격한다는 작전에 「시민과 병사들이 혼란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당시 일본 육군 대본영(大本営)으로부터 와 있던 도호쿠 출신의 소좌참모(少佐参謀)에게 질문했는데, 참모는 「(전차로) 치어 죽이면서 나아가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22살이었던 일본군 장교 후쿠다 데이이치, 시바 료타로는 「난 어쩌다 이딴 멍청한 전쟁이나 벌이는 나라에서 태어난 거지? 언제부터 일본인은 이렇게 멍청해져버린 거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고, 「옛날의 일본인은 좀 더 성실했을 게 틀림없는데」로써 「22살의 나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으로 소설을 썼다」라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사노에서의 패전 체험은 그후 시바 료타로의 작가생활의 원점이었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패전 뒤에는 다시 도서관에 드나드는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1946

[신일본신문 입사]

오타케 아키히코와 함께 신일본신문 교토본사에 입사했으며, 이 무렵부터 30세 이후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46년 다시 오타케와 함께 신일본신문(新日本新聞) 교토본사(京都本社)에 입사했습니다. 동료로는 아오키 신지로(青木幸次郎)가 있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30세가 넘어서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종교 관련 기사를 썼는데 2년 뒤에 회사가 도산하면서 다시 산케이 신문 교토지국에 입사하였습니다.

1948

[산케이 신문 입사 및 기자 활동]

회사가 도산한 후 산케이 신문 교토지국에 입사하여 후쿠이 지진, 가와다 준 실종 사건 등을 취재했습니다. 가와다 준 사건에서 '노년의 사랑'이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2년 뒤에 회사가 도산하면서 다시 산케이 신문 교토지국에 입사하였습니다. 입사해서 한 달도 안 되어 1948년 6월 28일 오후 후쿠이 지진(福井地震)이 일어났고, 그날 후쿠이로 취재를 나갔습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가인(歌人) 가와다 준(川田順) 실종 사건을 취재했고, 「노년의 사랑」(老いらくの恋)이라는 말을 붙였는데 이것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1949

[오사카 본사 이동]

산케이 신문 오사카 본사로 이동했습니다.

이듬해 오사카 본사로 이동하였습니다.

1950

[금각사 사건 취재 및 첫 결혼]

금각사 방화 사건에 대한 기사를 썼고, 오사카 대학 의국의 약제사와 만나 첫 결혼을 했습니다.

1950년에는 금각사 방화 사건에 대한 기사를 썼습니다. 이 무렵 교토의 지샤 순례(寺社周り)나 교토대학을 맡아 그 결과 교토의 밀교사원에서 기이한 승려들과도 만났고, 이시야마 전투 때 혼간지 측 군량 조달책의 자손이 운영하던 과자점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교토대학에서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가이즈카 시게키(貝塚茂樹) 등 교토학파의 학자들도 취재하는 등 훗날의 역사소설이나 에세이를 집필하는 동인이 되는 만남이었습니다. 이는 훗날 시바 료타로 자신이 쓴 회상기(대부분 『시바 료타로의 생각』司馬遼太郎が考えたこと에 수록)에 실려 있습니다. 그 뒤 문화부장、출판국 차장을 맡았습니다. 같은 해에 오사카 대학 의국(医局)의 약제사와 만나 첫 결혼을 하였습니다.

1952

[장남 출생]

장남이 태어났습니다.

첫 결혼 후 장남이 태어났습니다.

1954

[이혼]

첫 결혼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혼했습니다. 장남은 친가인 후쿠다가에서 조부모가 양육했습니다.

1954년에 이혼하였고, 장남은 친가인 후쿠다가(福田家)에 맡겨 조부모가 양육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결혼이나 태어난 아들이 있다는 것은 일절 공표되지 않았습니다.

1955

[본명으로 작품 발표]

《명언수필 샐러리맨》을 본명 후쿠다 데이이치로 발표했습니다.

《명언수필 샐러리맨》(名言随筆・サラリーマン, 六月社)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필명이 아닌 본명 후쿠다 데이이치로 발표하였고 그 밖에도 「만두전래기」(饅頭伝来記) 등 자신의 본명으로 발표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나아가 당시 친하게 지내던 나리타 아리히사(成田有恒, 데라우치 오요시寺内大吉)의 권유로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1956

['시바 료타로' 필명으로 작가 데뷔]

「페르시아의 환술사」가 제8회 고단구락부상에 응모하여 수상했으며, '시바 료타로'라는 필명으로 작가 데뷔를 했습니다.

1956년 5월에 「페르시아의 환술사」(ペルシャの幻術師)가 제8회 고단구락부상(講談倶楽部賞)에 응모하는데, 「시바 료타로」라는 이름으로 투고한 이 소설은 당시 소설가 가이온지 주고로(海音寺潮五郎)의 극찬을 받아 수상에 성공하였고, 이 작품이 시바 료타로의 데뷔작이 되었습니다. 또한 데라우치와 함께 잡지 《근대설화》(近代說話)를 창간하고 이 《근대설화》와 함께 《오모시로 클럽》(面白倶楽部), 《소설 클럽》(小説倶楽部) 등 동인지에 작품 발표를 이어나갔습니다.

1958

[첫 작품집 출판]

'시바 료타로' 필명으로 첫 작품집 《하얀 환희천》을 출판했습니다.

1958년 7월에 「시바 료타로」의 이름으로 첫 작품집 《하얀 환희천(歡喜天)》(白い歓喜天)을 출판하였습니다. 당시 시바 료타로는 야마다 후타로(山田風太郎)와 함께 전기소설(伝奇小説)의 담당자로써 주목받았을 뿐 그가 본격역사소설의 대가가 되리라는 예상은 없었습니다. 이후 그는 산케이 신문에 「올빼미의 도성(梟のいる都城)」(훗날 《올빼미의 성》으로 제목을 바꾸었다)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1959

[재혼]

같은 산케이 신문의 기자 마쓰미 미도리와 재혼했습니다.

1959년 1월 같은 산케이 신문의 기자 마쓰미 미도리(松見みどり)와 재혼하였습니다.

[거주지 이전]

오사카시 니시구 나가호리의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12월에 오사카시 니시구 (오사카시)니시구 나가호리(長堀)의 아파트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난카이 호크스 시절의 야구선수 노무라 가쓰야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소설 『오사카 사무라이』(大坂侍) 『올빼미의 성』을 발표하였습니다.

1960

[나오키상 수상]

『올빼미의 성』으로 제42회 나오키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오사카 사무라이』(大坂侍) 『올빼미의 성』을 발표하였으며, 1960년 『올빼미의 성』으로 제42회 나오키상(直木賞)을 수상했습니다.

1961

[전업 작가 전향]

산케이 신문사를 퇴사하고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산케이 신문사를 퇴사하고 작가생활에 들어 갔습니다.

1962

[본격 역사소설 연재 시작]

《료마가 간다》, 《타올라라 검》 등 본격적인 역사소설 연재를 시작하며 역사소설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62년부터 《료마가 간다》, 《타올라라 검》, 1963년부터 《나라 훔친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바 료타로는 역사소설가로써의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무렵의 작품들부터 시바는 작가 자신이 작중에 수필 형식으로 개입해 해설하는 기법을 완성시켰습니다.

1964

[마지막 거처로 이주]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될 후세시 시타고사카(현 히가시오사카시)로 옮겼습니다.

1964년에는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될 후세시(布施市) 시타고사카(下小阪, 지금의 히가시오사카시東大阪市)로 옮겼는데, 가까운 곳에 인근의 대지주(大地主)로 우에노미야 고등학교(上宮中学)부터의 동급생인 야마타쿠 시게오(山澤茂雄)가 살고 있었고 평생 교류가 이어졌습니다(「近所の記」). 후에 그는 「외잡스러운 토지가 아니면 살 마음이 들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1966

[기쿠치 간 상 수상]

기쿠치 간 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았습니다.

1966년 기쿠치 간 상(菊池寛賞)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뒤에도 《나라 훔친 이야기》를 계속 써 나갔고, 《신사 타이코기》(新史太閤記),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 《성채》(城塞) 등의 작품들을 집필하였으며, 이들 네 작품은 '센고쿠 4부작'이라 불리게 됩니다.

1971

[《가도를 가다》 연재 시작]

기행수필 《가도를 가다》를 《주간 아사히》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부터 기행수필 《가도를 가다》(街道をゆく)를 《주간 아사히》(週刊朝日)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1972

[《언덕 위의 구름》 연재 완료 및 요시카와 에이지상 수상]

메이지 일본의 인간군상들을 그린 《언덕 위의 구름》의 산케이 신문 연재를 마쳤고, 막부 말기를 다룬 《세상을 사는 나날들》로 요시카와 에이지상을 수상했습니다.

1972년에는 메이지 일본의 인간군상들을 그린 《언덕 위의 구름》의 산케이 신문 연재를 마쳤습니다. 또한 막부 말기를 다룬 《세상을 사는 나날들》(世に棲む日日)로 요시카와 에이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초기 시절부터 시바 료타로가 보인 밀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구카이의 풍경》(空海の風景)으로 결실을 맺었으며(이 작품으로 시바 료타로는 일본예술원 은사상日本芸術院恩賜賞을 수상하였다) 일본에서 「국민적 작가」라는 타이틀이 정착하기 시작하고, 역사를 조망해 하나의 이야기로 보는 시바 료타로의 관점은 이른바 시바 사관(司馬史観)으로까지 불리며 독자적인 역사관을 쌓아올리고 인기를 얻었습니다.

1981

[일본예술원 회원]

일본예술원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1981년에는 일본예술원(日本芸術院)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1989

[노태우 대통령과의 대담]

한국 서울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대담을 가졌습니다.

1989년에는 한국 서울에서 노태우 대통령과의 대담도 가졌습니다(《문예춘추》文藝春秋 1989년 8월호).

1991

[문화공로자 인정]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자로 인정받았습니다.

1991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공로자로써 인정받았습니다.

1993

[문화훈장 수상]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수상했습니다.

1993년 문화훈장을 수상하였습니다. 이 무렵부터 시바 료타로는 허리 통증을 앓기 시작하였는데(시바 자신은 좌골 신경통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직접 사인이 되는 복부 대동맥 동맥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도를 가다 - 타이완 기행》 취재에 나서서, 타이베이시타이베이에서 당시 타이완(자유중국) 총통 리덩후이(李登輝)와의 회담 《장소의 비애》를 쓰거나 다시 《가도를 간다》 취재로써 아오모리의 산노우치마루야마 유적(三内丸山遺跡)을 방문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노몬한 사건(할힌골 전투)의 작품화를 구상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습니다.

[리덩후이 총통과 대담]

《가도를 가다 - 타이완 기행》 취재 중 타이베이에서 당시 타이완 총통 리덩후이와 회담하고 《장소의 비애》를 집필했습니다.

이 무렵부터 시바 료타로는 허리 통증을 앓기 시작하였는데(시바 자신은 좌골 신경통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직접 사인이 되는 복부 대동맥 동맥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도를 가다 - 타이완 기행》 취재에 나서서, 타이베이시타이베이에서 당시 타이완(자유중국) 총통 리덩후이(李登輝)와의 회담 《장소의 비애》를 쓰거나 다시 《가도를 간다》 취재로써 아오모리의 산노우치마루야마 유적(三内丸山遺跡)을 방문하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1996

[사망]

《가도를 가다 - 신비참주기》 취재를 마치고 연재 중이던 중, 복부 대동맥 동맥류 파열로 사망했습니다. 향년 72세.

1996년 1월, 《가도를 가다 - 신비참주기濃尾参州記》의 취재를 마치고, 연재 중이던 2월 10일 심야에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져서 국립 오사카 병원(현 국립병원기구 오사카 의료 센터)에 입원하였으나, 이틀 뒤인 2월 12일 오후 8시 50분, 복부 대동맥 동맥류 파열로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향년 72세. 시바 료타로가 사망한 날은 그가 생전 좋아하던 유채꽃에서 따온 '유채꽃 기일(菜の花忌)'이라고 불리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일본 국립 오사카 병원은 《꽃의 신》(花神)을 집필한 소설가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가 사망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집필 중이던 《신비참주기》는 끝내 완결을 보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끝났습니다. 그의 매장에는 친족들만이 참석했으며, 3월 10일에 오사카 시내의 호텔에서 열린 '시바 료타로 씨의 장송 모임'에는 약 3,0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법명은 요망원석정중(遼望院釋淨定)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시바 료타로에게 종3위를 추사(追賜)하였습니다.

1997

[기념 재단 발족 및 시바 료타로 상 제정]

시바 료타로 기념 재단이 발족하고, 시바 료타로 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시바 료타로가 사망하고 이듬해 시바 료타로 기념 재단(司馬遼太郎記念財団)이 발족, 시바 료타로 상이 제정되었습니다.

2001

[시바 료타로 기념관 설립]

히가시오사카 시의 시바 료타로 자택 인근에 시바 료타로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2001년 히가시오사카 시의 시바 료타로 자택 인근에 시바 료타로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시바 료타로 기념실(記念室)이 있는 히메지 문학관(姫路文学館)에서는 해마다 8월 7일(시바 료타로의 생일)에 연고가 있는 명사를 게스트로 초정해 「시바 료타로 메모리얼 데이」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시바 료타로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