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워즈니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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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스티브 워즈니악은 스티브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 창립하여 개인용 컴퓨터 혁명을 이끈 미국의 천재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입니다. 애플 I과 애플 II를 홀로 설계하며 초기 마이크로컴퓨터 산업의 기반을 닦았으며, 비행기 사고 이후 잠시 회사를 떠났다가 교육과 기술 발전을 위한 다양한 벤처 사업 및 자선 활동에 헌신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유니버설 리모컨을 발명하는 등 혁신을 멈추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우주 쓰레기 문제 해결과 친환경 암호화폐 플랫폼 개발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연표
1950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출생]
록히드 코퍼레이션의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기술과 전자 기기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미래의 엔지니어로서의 자질을 키웠습니다.출생 증명서에는 'Stephan'으로 잘못 기재되었으나, 어머니의 의도에 따라 평생 'Stephen'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스타트렉과 공상과학 소설 톰 스위프트 주니어 시리즈를 읽으며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1968
[홈스테드 고등학교 졸업]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 위치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습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다양한 전자 기기 조립과 해킹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그의 동생들 역시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사회 문제에도 일찍 눈을 떴습니다. 졸업 후 그는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 캠퍼스에 진학하게 됩니다.
1969
[대학교 컴퓨터 시스템 해킹]
콜로라도 대학교 재학 중 학교의 컴퓨터 시스템을 해킹한 사실이 발각되어 1학년 때 퇴학 조치를 받았습니다. 이후 고향인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대학에서 쫓겨난 후 그는 쿠퍼티노의 디 안자 대학에 잠시 등록했다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C 버클리)로 편입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뛰어난 컴퓨터 조작 능력과 짓궂은 호기심을 동시에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1971
[스티브 잡스와의 만남]
고등학교 후배의 소개로 전자공학과 장난을 좋아하는 또 다른 청년을 만나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휴렛팩커드(HP)에서 함께 여름 아르바이트를 하며 이들의 끈끈한 동업 관계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공통의 지인인 빌 페르난데스가 두 사람의 관심사가 비슷하다며 소개해주었습니다. 당시 워즈니악은 대학생이었고 잡스는 고등학생이었으나, 기술에 대한 열정이라는 공통 분모로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첫 컴퓨터 '크림 소다' 제작]
독학으로 공학을 익힌 그는 지인과 함께 첫 번째 컴퓨터를 직접 설계하고 조립했습니다. 비록 기자가 전원 케이블을 밟아 기기가 폭발하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이는 훗날 애플 컴퓨터 설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친구 빌 페르난데스와 함께 지인에게 기증받은 20개의 칩을 이용해 만들었으며, 작업 중 즐겨 마시던 음료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습니다. 펀치 카드를 사용해야 했던 이 초기 기기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대중화되기 이전의 투박한 형태였습니다.
[장거리 전화 조작기 '블루 박스' 제작]
잡지에 실린 기사를 읽고 영감을 받아 무료로 장거리 전화를 걸 수 있는 불법 장치를 직접 설계하고 제작했습니다. 잡스가 이 장치의 판매를 맡아 수익을 나누며 두 사람의 첫 번째 비즈니스 파트너십이 성사되었습니다.에스콰이어 잡지의 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장치 덕분에 그는 해커들 사이에서 '버클리 블루'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훗날 잡스는 이 블루 박스가 없었다면 애플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1973
[아타리 '브레이크아웃' 회로 설계]
아케이드 게임 회사의 의뢰를 받은 친구의 부탁으로 비디오 게임의 회로 기판을 설계하는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천재적인 설계 능력으로 부품 수를 획기적으로 줄여 엄청난 보너스를 받게 해주었으나, 정작 본인은 수익의 극히 일부만 전달받았습니다.스티브 잡스는 칩을 줄인 대가로 받은 보너스의 실제 액수를 숨기고 워즈니악에게 매우 적은 금액만 나누어 주었습니다. 10년이 지나서야 진실을 알게 된 워즈니악은 씁쓸해하면서도, 만약 잡스가 돈이 필요하다고 솔직히 말했다면 흔쾌히 주었을 것이라고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1975
[애플 I 컴퓨터 설계 시작]
지역 전자공학 취미 모임의 회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마이크로컴퓨터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기기는 화면 출력 기능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 대중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에서 자신의 기술력을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당시 휴렛팩커드(HP)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회사에 이 설계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1976
[애플 I 기본 설계 완성]
하드웨어, 회로 기판, 운영체제에 이르는 컴퓨터의 핵심 설계를 홀로 완성해 냈습니다. 이후 이 설계도를 바탕으로 회로 기판을 만들어 판매하자는 잡스의 설득에 넘어가 본격적인 사업 준비에 돌입했습니다.초기에는 자신의 사업을 가진다는 것에 회의적이었으나, 실패하더라도 훗날 손주들에게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는 잡스의 말에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생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워즈니악은 아끼던 HP 공학용 계산기를 팔아야만 했습니다.
[애플 컴퓨터 공식 창립]
스티브 잡스, 로널드 웨인과 함께 전설적인 컴퓨터 회사를 공식적으로 설립했습니다. 사과라는 회사 이름은 잡스가 오리건주의 사과 과수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제안하여 결정되었습니다.창립 직후 홈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완성된 애플 I을 시연했고, 이를 본 바이트 숍의 폴 테럴이 완제품 50대를 주문하며 사업의 첫 물꼬를 텄습니다. 이후 잡스의 부모님 집 차고에서 밤낮으로 기판을 조립하며 회사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마이크 마쿨라의 투자와 전업]
인텔 출신의 투자자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으며 회사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투자자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안정적인 직장을 퇴사하고 애플의 연구개발 부사장으로 전임하게 되었습니다.마이크 마쿨라의 합류로 애플은 차고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기업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워즈니악은 온전히 새로운 후속 컴퓨터 모델 설계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었습니다.
1977
[대중용 마이크로컴퓨터 애플 II 출시]
이전 모델의 단점을 극복하고 컬러 그래픽을 지원하는 등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판도를 바꿀 혁신적인 신제품을 주도적으로 설계해 출시했습니다. 이 제품은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회사를 급성장시키는 핵심 원동력이 되었습니다.기판 설계부터 베이직(BASIC) 프로그래밍 언어 인터프리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잡스가 플라스틱 케이스 디자인을 맡고 로드 홀트가 전원 공급 장치를 개발하는 등 환상적인 팀워크가 빛을 발한 결과물이었습니다.
1981
[가명으로 대학 재입학]
비행기 사고에서 회복한 후, 과거에 다 마치지 못했던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대학교에 다시 등록했습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너무 유명해진 탓에 가명을 사용하여 학생 신분으로 조용히 돌아갔습니다.그는 '로키 라쿤 클라크(Rocky Raccoon Clark)'라는 가짜 이름으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 복학했습니다. 훗날 그가 발급받은 전기공학 및 컴퓨터 과학 학위 졸업장에도 이 가명이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경비행기 추락 사고]
자신이 직접 조종하던 소형 비행기가 이륙 직후 활주로를 벗어나 둔덕에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를 겪었습니다. 이 사고로 얼굴과 머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한동안 단기 기억 상실증에 시달렸습니다.당시 그는 기종 운항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였고, 미숙한 조종이 사고의 주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입원 기간 동안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으나, 자신이 만든 애플 II 컴퓨터 게임을 하며 서서히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1982
[대규모 록 페스티벌 개최]
진보하는 기술과 음악을 결합한 대규모 축제를 기획하고 후원하기 위해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자본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기록하게 되었습니다.유니슨(Unuson)이라는 회사를 세워 전문 공연 기획자의 도움을 받아 'US 페스티벌'을 열었습니다. 1982년과 1983년 두 번의 행사에서 수백만 달러의 적자를 본 후, 그는 음악 축제에서 손을 떼고 기술계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1983
[애플 엔지니어로 복귀]
경영이나 임원직 대신 순수한 제품 개발자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친정인 회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동료들에게 영감을 주는 엔지니어의 역할에만 충실하며 팀의 사기를 북돋았습니다.그는 비행기 사고 이후 경영과 기획에 흥미를 잃었으며 설계 자체의 즐거움을 원했습니다. 복귀 후 매킨토시 프로젝트 등 다양한 부서의 엔지니어들과 교류하며 기술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5
[애플 공식 퇴사와 벤처 창업]
거대한 기업으로 변해버린 조직에 싫증을 느끼고, 초기 스타트업 시절의 즐거움을 되찾고자 활성 직원 신분을 내려놓았습니다. 비록 현업에서는 물러났지만 서류상 직원 신분은 평생 유지하며 애플을 대표하는 인물로 남기로 했습니다.회사를 떠난 직후 'CL 9'이라는 기업을 세워 엔지니어링의 즐거움을 다시 추구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애플 내부의 갈등 때문이라고 오해했으나, 본인은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는 재미를 위해 떠난 것이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1987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 리모컨 출시]
자신이 설립한 벤처 회사를 통해 여러 가전제품을 하나로 제어할 수 있는 혁신적인 만능 리모컨을 발명하여 시장에 선보였습니다. 컴퓨터를 넘어 일상생활의 편의를 돕는 전자기기 영역으로 발명 범위를 넓혔습니다.이 제품의 이름은 '코어(CORE)'였으며, 복잡한 제어 기능을 사용자가 직접 입력할 수 있는 선구적인 기기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통합 스마트 홈 기기 제어의 개념을 일찍이 구현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1990
[전자프론티어재단(EFF) 공동 설립]
디지털 환경에서의 시민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비영리 단체를 창설하는 데 초기 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창립 이사회 멤버로 합류하여 기술 발전이 가져올 사회적 부작용을 막기 위해 노력했습니다.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통신망의 태동기에 디지털 권리 보호의 중요성을 미리 내다본 행보였습니다. 이후 이 단체는 전 세계 정보 인권 운동을 이끄는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 중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2000
[미국 국립 발명가 명예의 전당 헌액]
개인용 컴퓨터의 발전을 이끌고 수많은 기술적 혁신을 이룩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 최고 권위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기술 산업 발전에 기여한 그의 천재적인 발명품들이 공식적으로 역사적 가치를 입증받은 순간입니다.그는 비디오 디스플레이를 활용한 마이크로컴퓨터 특허 등을 비롯해 다수의 핵심 기술 특허를 단독으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자선 활동과 학생들을 위한 기술 교육에 힘쓴 공로 또한 헌액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2001
[무선 기술 기업 '휠스 오브 제우스' 창업]
평범한 사람들이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돕는 무선 위치 추적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새로운 기업을 세웠습니다. 무선 통신과 센서 기술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했습니다.회사의 영문 약자인 'WOZ'는 자신의 애칭과 동일하게 맞춘 재치 있는 작명이었습니다. 비록 2006년에 폐업하긴 했으나, 이는 현재 널리 쓰이는 스마트 태그 기술의 가능성을 일찍이 시도한 혁신적인 도전이었습니다.
2017
[온라인 교육 서비스 '워즈 유' 설립]
독립적인 학생들과 기업 직원들을 위한 혁신적인 온라인 기술 교육 플랫폼을 출범시켰습니다.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교육자의 비전을 실현하며 다음 세대의 IT 인재 육성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이듬해 이 기관은 애리조나 주 교육 위원회로부터 정식 라이선스를 취득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프로그래밍과 데이터 과학 등 실무에 즉시 투입 가능한 교육 과정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2020
[친환경 블록체인 플랫폼 '에포스' 출범]
전 세계의 에너지 효율성 개선 프로젝트를 블록체인 기술과 결합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새로운 마켓플레이스를 론칭했습니다. 환경 보호라는 전 지구적 과제에 암호화폐 생태계를 접목한 참신한 시도였습니다.투자자들은 자체 토큰을 통해 친환경 기업의 프로젝트에 펀딩하고, 절감된 에너지 비용을 수익으로 분배받는 구조를 갖추었습니다. 이는 그의 기술적 관심사가 생태계 보존으로까지 무한히 확장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021
[우주 쓰레기 해결 스타트업 창업]
지구 궤도를 위협하는 인공위성 잔해와 우주 파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옛 동료와 손잡고 새로운 우주 기술 기업을 공동 창립했습니다. 이후 우주 교통을 모니터링하는 전문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공개했습니다.알렉스 필딩과 함께 설립한 이 회사의 이름은 '프라이버티어 스페이스(Privateer Space)'입니다. 민간 우주 시대가 본격화됨에 따라 지속 가능한 우주 궤도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 인류의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한 결과였습니다.
2024
[초상권 도용 암호화폐 사기 소송 승소]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무단으로 도용한 사기 범죄가 방치되고 있다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항소심에서 승리했습니다. 대형 IT 기업의 플랫폼 관리 책임에 경종을 울린 의미 있는 판결이었습니다.새너제이 항소 법원은 해당 플랫폼이 유튜브 내의 사기성 콘텐츠를 방지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이 소송은 최신 기술을 악용한 유명인 사칭 범죄에 대한 강력한 법적 선례를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