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월 항쟁

num_of_likes 144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사회 운동, 인권 운동, 성소수자 운동, 시위, 미국 역사 + 카테고리

1969년 6월 28일 뉴욕 스톤월 인에서 경찰 단속에 맞선 성소수자들의 저항으로 현대 성소수자 인권 운동의 시작점이자 상징적 사건입니다. 매년 6월 전 세계 퀴어 퍼레이드의 기원이 되었으며 성소수자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2016년 미국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19년 뉴욕 경찰이 공식 사과하며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50

[20세기 미국 내 동성애 탄압 심화]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미국에서 동성애는 합법적으로 반대되었으며, 동성애자들은 국무부의 '위험 인물' 목록에 오르고 직장을 잃거나 군에서 해임되는 등 사회적 탄압을 받았습니다.

FBI와 주 경찰은 동성애자들의 목록을 보유하고, 우체국은 관련 자료 발송 주소를 기록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도시 '청소'의 대상이 되거나 대학에서 추방당했으며,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습니다.

1952년 미국 정신과 협회(APA)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등재했습니다.

이는 성소수자들이 이중적인 삶을 살거나 자신을 숨기게 만들었습니다.

1947년에서 1950년 사이 1,700개의 일자리 신청이 거부되었고, 4,380명이 군에서 해임되었으며, 420명이 정부 직업에서 해고당했습니다. 그러나 1956년 심리학자 에블린 후커의 연구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밝혀 의료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동성애는 1973년까지 DSM에 정신질환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1960

[그리니치 빌리지의 동성애 문화와 단속 강화]

제1차 세계 대전 후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는 많은 동성애자들이 정착하며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킨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1950년대 사회적 탄압 속에서도 비트 시인들이 동성애를 솔직하게 다루며 진보적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부터 뉴욕시는 게이바를 제거하려는 캠페인을 강화했고, 1964년 세계박람회 준비와 맞물려 위장 경찰의 함정 수사가 빈번해졌습니다.

존 린제이 시장 부임 후 함정 수사는 중단되었지만, 법원은 '혼란'을 야기하는 업체의 주류 판매권을 취소할 수 있어 동성애자들이 공개적으로 모일 장소가 극히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의 게이바는 조직 범죄단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경찰에 뇌물을 주어 단속을 예방했습니다. 1966년 매터신 소사이어티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바 '줄리어스'에서 동성애자 차별에 대한 술자리를 열었습니다.

1966

[스톤월 인: 성소수자들의 안식처이자 단속 표적]

마피아 소유의 스톤월 인은 1966년부터 주류 허가증 없이 운영되었으나, 춤을 출 수 있는 뉴욕 유일의 게이바로 가난하고 어린 성소수자, 드래그퀸,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고객층에게 사랑받았습니다.

경찰은 일주일에 한 번씩 뇌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잦은 단속을 실시했고, 1969년 6월 28일 항쟁 직전에는 그리니치 빌리지의 다른 네 곳의 클럽이 이미 문을 닫았습니다.

바 내부는 비위생적이었고, 화재 비상구도 없었으며, 매춘이나 약물 판매는 없었습니다. 고객의 98%가 남성이었으며,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다양한 인종 구성이었습니다. 경찰 급습 시 조명이 켜지고 신분증 확인이 이루어졌으며, 이성의 옷을 입은 여성은 체포되었습니다.

1969

[스톤월 인 급습, 성소수자 저항의 불씨를 지피다]

1969년 6월 28일 새벽 1시 20분, 사복 경찰과 형사, 검사들이 스톤월 인을 급습하여 약 200명의 손님들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경찰은 손님들을 줄 세워 신분증을 확인하고 '크로스 드레싱'한 이들을 분리하여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체포되던 마리아 리터가 자신의 두려움을 토로하며 저항했고, 술병을 깨부수는 등 통제 불능 상태가 되자 경찰은 순찰차를 불렀습니다.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은 밖에서 기다리며 안에 갇힌 이들을 옹호하기 시작했고, 첫 순찰차가 도착해 사람들이 체포되자 군중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두 번째 순찰차가 도착했을 때, 한 방관자가 "게이의 인권을 달라"고 외치며 "우리는 극복 하리라"는 노래를 시작했고, 이는 주위 군중을 고무시켰습니다.

경찰 급습 전 경찰 4명이 먼저 잠입하여 내부 유료 전화로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남자 손님들이 신분 확인을 거부하기 시작했으며, 여성 경찰관이 여성 화장실 앞에서 여자 후원자들을 맞이했습니다. 체포자 수는 처음보다 10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항쟁의 격화: 경찰과 시위대의 대치]

뉴욕 경찰 진상규명팀이 도착했으나, 시위대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졌습니다.

경찰은 전례 없는 굴욕을 당하며 분노했고, 무작위 체포를 시도했습니다.

군중들은 경찰을 조롱하며 노래를 부르고, 마피아 조직원들은 차량을 전복시켜 바리케이드를 만들며 경찰을 추격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들이 부상을 입고, 시위대 또한 병원으로 후송되었습니다.

새벽 4시경 거리는 정리되었지만, 스톤월 인 시설 대부분이 파손될 정도로 격렬한 충돌이 있었습니다.

경찰관 1명이 실명하고 몇 명이 파편으로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검사관 파인은 "싸움은 호송차에 들어가기 원치 않는 이성복을 원하는 성도착자들과 일어났다"고 기록했습니다. 시위대는 "우리는 스톤월의 여자들입니다" 같은 도발적인 노래를 불렀습니다. 앨런 긴즈버그는 "게이들은 매우 아름다웠어. 그들은 상처와 피로를 10년 전쯤에 이미 잃어버렸어"라고 언급했습니다.

[공공연한 반란, 언론 보도와 시위 확산]

항쟁 소식은 뉴욕 타임즈, 뉴욕 포스트, 뉴욕 데일리 뉴스 등 주요 언론에 보도되며 확산되었고, 뉴욕 데일리 뉴스는 1면을 장식했습니다.

다음날 저녁, 수천 명의 시위대가 크리스토퍼 거리에 다시 모여 더욱 폭력적인 양상을 띠었습니다.

시위대는 자동차와 버스를 에워싸고 운전자들에게 동성애자임을 인정하거나 시위에 참여하라고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실비아 리베라와 마샤 피 존슨 같은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상징적인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경찰은 100명 이상의 인원을 동원하여 재차 진압에 나섰지만, 거리의 마찰은 새벽까지 이어졌습니다.

스톤월 인 벽면에는 "약의 힘", "그들이 우리의 권리를 침해했다", "동성애자의 힘을 지원해달라" 등의 낙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앨런 긴즈버그는 "동성애자들의 힘! 그렇게 위대하지 않다. 우리 자신에게 무언가를 주장할 시간이었다"며 기쁨을 표했습니다. 항쟁 이후 크레이그 로드월과 프레드 설제엔트가 "동성애자 술집에서 마피아와 경찰들을 끌어내라"는 전단지를 5000장 배포하며 동성애자들의 불매운동과 공공압력을 촉구했습니다.

[성소수자 운동의 새 지평: 조직화 시작]

스톤월 항쟁의 긴박감은 목격자들을 조직 회의로 이끌었습니다.

1969년 7월 4일, 매터신 소사이어티는 필라델피아에서 '연간 상기' 피케팅을 열었는데,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손을 잡는 등 기존의 제한된 방식에서 벗어나 더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는 로드웰이 뉴욕에서 '크리스토퍼 길 해방의 날'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매터신은 '머리핀 떨어지는 소리가 전 세상에 울렸다'며 변화를 인식했고, 곧 '동성애자 해방 전선(GLF)'이 결성되어 처음으로 '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기존 단체와 달리 공격적인 언행을 보였습니다.

'연간 상기' 참가자인 릴리 빈센즈는 "세상이 변한 건 분명하다. 억압받았던 사람들은 힘을 얻었다"고 회상했습니다. GLF는 흑인 및 반전 시위자들의 전략을 차용하여 '미국사회를 재정비하자'는 사상을 가졌지만, 4개월 만에 운영 절차 불일치로 해산했습니다.

[게이 운동가 연합 결성 및 성소수자 매체 등장]

스톤월 항쟁 후 6개월 이내에 운동가들은 '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의 소리'가 '게이'라는 단어 사용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6주 이내에 '커밍아웃!', '게이파워' 등 두 개의 신문이 추가로 발간되어 독자 수가 2만~2만5천 명으로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1969년 12월 말, 기존 '동성애자 해방 전선'의 운영 방식에 실망한 일부 멤버들이 '게이 운동가 연합(GAA)'을 결성했습니다.

GAA는 게이 문제에 집중하고 '젭(ZAP)'이라는 대립 전략을 개발하여 정치가들을 압박하고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동성애자 해방 전선은 동성끼리 춤추는 활동을 기획했지만, 회의는 혼란스러웠고, 자본주의 비판 등 비실용적인 논의로 인해 내부 불화가 있었습니다. GAA의 헌법은 "우리는 자유로운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써 우리의 존엄성과 인간으로써의 가치를 표현할 자유를 요구한다"고 시작합니다.

1970

[성소수자 운동 내 인종, 계급, 성별 갈등 노출]

스톤월 항쟁 이후 성소수자 인권단체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인종, 계급, 이데올로기, 성별에 따른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었습니다.

1973년 스톤 집회에서는 드래그퀸들이 조롱당하며 이성의 옷을 입은 사람과 남자 동성애자에게서 혐오감을 느끼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남녀 평등주의 운동가 진 오리어리는 성전환자를 동성애자 권리 쟁점에서 제외하려 했으나, 실비아 리베라 같은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은 이에 반발하며 트랜스젠더 권리 문제 해결을 촉구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레즈비언 남녀 평등주의의 성장으로 게이 해방 운동과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습니다.

오리어리는 1973년 자신의 입장을 후회하며 "나는 더 이상 절대 복장 도착자에게 대해 뭐라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레즈비언들은 남성들의 가부장적 태도와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느꼈고, 게이 남성들의 주요 화제(함정수사 및 공공의 교사죄)가 레즈비언들과 공유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1977년 레즈비언 프라이드 랠리가 조직되었습니다.

[스톤월 이후에도 이어진 경찰 단속과 새로운 형태의 저항]

스톤월 항쟁 이후에도 게이바 습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70년 3월, 윤리감사심의관 세이모 파인은 여러 게이 클럽을 습격하여 167명을 체포했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 국적의 디에고 비네일은 추방될까 두려워 경찰서 창문을 뛰어내려 자해를 시도했고, 이 사건은 뉴욕 데일리 뉴스 1면에 실려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게이 운동가 연합(GAA) 멤버들은 크리스토퍼 공원에서 수백 명의 성소수자들과 함께 경찰서까지 평화 행진을 조직하고, 시장과 국회의원에게 게이바 습격을 멈춰달라는 편지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스톤월 인은 항쟁 후 몇 주 만에 문을 닫거나 임대가 고려되었습니다.

습격당한 클럽 중에는 '스네이크 핏'이라는 독한 술을 파는 무허가 게이 클럽도 있었습니다. 디에고 비네일은 14인치나 되는 송곳처럼 뾰족한 울타리에 스스로를 찔렀습니다.

[동성애, 정신질환 논쟁과 성소수자들의 반격]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동성애 활동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1970년 5월에는 미국 정신과 협회(APA) 협의회에서 로스앤젤레스 GLF 멤버들이 'ZAP' 활동을 벌였습니다.

동성 매력을 줄이기 위한 전기 충격 요법 영화 상영 중, 관객 모리스 카이트와 GLF 회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필름 상영을 중단시켰습니다.

이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반격이었습니다.

스톤월 항쟁 이후 2년 동안 동성애자 인권단체는 미국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캐나다, 호주, 서유럽에도 존재했습니다.

[최초의 퀴어 퍼레이드: 크리스토퍼 길 해방의 날 개최]

1970년 6월 28일, 스톤월 항쟁 1주년을 기념하여 '크리스토퍼 길 해방의 날'이 개최되었습니다.

이는 크리스토퍼 길 의회와 센트럴 파크를 뒤덮은 미국 역사 최초의 퀴어 퍼레이드였습니다.

행사 허가는 두 시간 전에야 내려졌지만, 행진 참가자들은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도시를 걸었고, 구경꾼들의 방해를 거의 받지 않으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뉴욕 타임즈는 1면에 행진 참가자들이 15개 블록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보도했으며, 빌리지 보이스는 이를 '진보적인 저항'으로 평가했습니다.

같은 날 로스앤젤레스와 시카고에서도 동성애자 자긍심 행진이 동시에 개최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971년에는 보스턴, 댈러스, 밀워키, 런던, 파리, 베를린, 스톡홀름 등 전 세계 여러 도시로 퍼졌고, 1972년에는 더 많은 도시에서 행진이 열렸습니다. 프랭크 카메니는 스톤월 항쟁 이후 1년 만에 미국 내 동성애자 그룹이 50~60개에서 1,500개로, 2년 후에는 2,500개로 급증했다고 언급하며 항쟁의 영향력을 강조했습니다. 케이 라후센은 스톤월 항쟁을 "동성애자 해방 운동의 탄생"이자 "엄청난 스케일의 동성애자 자긍심의 탄생"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데이빗 카터는 스톤월이 수천 명 참가, 6일 지속, 첫 주요 매스컴 보도, 단체 형성 자극으로 기억된다고 설명했습니다.

2016

[스톤월 인, 미국 국가 기념물로 지정]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스톤월 인과 인근의 크리스토퍼 공원을 미국 국립기념물로 지정했습니다.

백악관은 "'스톤월 인' 사태는 미국 전역의 성소수자(LGBT) 지역사회가 함께 모여 평등과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는 힘을 보여주게 된 분수령이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성소수자 관련 유적이 국가기념물로 지정된 첫 사례입니다.

2019

[뉴욕 경찰, 스톤월 항쟁 50년 만에 공식 사과]

제임스 오닐 뉴욕 경찰국장은 스톤월 인 사태에 대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다.

당시 뉴욕 경찰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언급하며 뉴욕 경찰 최초로 공식 사과했습니다.

뉴욕 게이 프라이드 주최 단체는 "당시 일어난 일에 대해 경찰이 책임을 지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며 이 사과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스톤월 항쟁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