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
제23대 조선 국왕이자 대한제국 추존 황제 11세 어린 나이에 즉위 초기 3년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시기 수렴청정 기간 중 신유박해 발생 및 공노비 6만 6천여 명 해방 (조선 역사상 세계최대 규모) 장인 김조순 중심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 시작 60여 년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음 삼정의 문란 홍경래의 난 잦은 자연재해와 역병 등 사회 혼란 심화 이양선의 출현으로 서양과의 접촉 시작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 세도정치 견제를 시도했으나 세자 요절로 좌절 자녀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큰 상심 속에서 승하 철종 때 서학 배척과 서란 평정의 공로를 기려 묘호가 순종에서 순조로 개칭됨
연표
1790
[순조 탄생]
정조의 둘째 아들 이공(李玜)이 창경궁 집복헌에서 수빈 박씨의 소생으로 탄생했습니다.
첫아들 문효세자를 잃은 정조가 크게 기뻐했으며, 탄생 당시 상서로운 길조가 나타나 백성들도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날 새벽 금림에는 붉은 광채가 땅에 내리비쳤고, 해가 한낮이 되자 무지개가 태묘 우물 속에서 일어나 오색 광채를 이루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를 특이한 상서라며 구경하고 기뻐했습니다.
1800
[순조 즉위 및 정순왕후 수렴청정 시작]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법적 증조모이자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3년간 수렴청정을 시작했습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 사도세자의 폐위를 주장했던 벽파와 뜻을 같이하며, 수렴청정 기간 동안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정조 때 집권 세력이었던 시파 숙청에 주력했습니다.
1801
[신유박해 시작 (천주교 엄금 하교)]
정순왕후와 벽파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간주하여 엄금하라는 하교를 내렸습니다.
천주교도들을 색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이 이용되었고, 많은 신자와 청나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습니다.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 인물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등이 처형되고 정약용 등이 유배되는 등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졌습니다.
정순왕후는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된다'고 비판하며 사교금압을 통해 천주교도들의 마음을 돌이키고, 불응시 역률로 종사한다고 하교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 또한 아내와 며느리가 세례를 받은 사실이 알려져 사사되었습니다. 같은 해 황사영이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 전말을 청나라 주교에게 전달하려던 '황사영 백서 사건'을 일으키다 적발되어 처형되면서 천주교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공노비 6만 6천여 명 해방]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윤음을 내려 내노비 36,974구와 시노비 29,093구 등 총 6만 6천여 명의 공노비를 양민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이는 조선 역사상 세계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노비 해방으로, 돈화문 밖에서 노비안을 불태워 신분제 사회의 큰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1802
[장용영 혁파]
정순왕후는 정조가 설치한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혁파했습니다.
이는 정조의 개혁정치를 부정하고 벽파의 권력 장악을 상징하는 조치였습니다.
1803
[정순왕후 수렴청정 종료 및 세도정치 시작]
순조의 장인이자 안동 김씨의 김조순과 그 일파에 의해 정순왕후 김씨가 실각하며 수렴청정이 거두어졌습니다.
이후 순조가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실제 권력은 김조순을 비롯한 신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하며 약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막이 올랐습니다.
안동 김씨는 비변사의 요직을 독점하고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습니다. 순조 중기에는 반남 박씨가 공존했으며, 순조는 안동 김씨 세력 견제를 위해 자신의 외가인 반남 박씨나 세자빈 가문인 풍양 조씨 등을 기용하며 권력 분산을 시도했습니다. 순조 재위 후반기에는 김조순 사후 그의 아들 김좌근이 군국 사무를 관장하는 등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
1804
[평양성 대형 화재]
평양성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여 5,000호가 연소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순조는 이에 대한 위휼(재해 시 구제) 조치를 취했습니다.
1809
[전라도와 충청도 대흉년]
전라도와 충청도에 큰 흉년이 들어 세금이 감면되었습니다.
순조 연간에는 잦은 가뭄과 홍수, 역병 등으로 백성들의 삶이 매우 궁핍했으며, 특히 1809년부터 1811년까지는 무려 33회에 걸쳐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가뭄이 극심했습니다.
순조는 '여러 도에 흉년이 들고 백가지 제도가 모두 병들었으며, 홍수와 가뭄, 충재가 극심한 재앙을 불렀다. 그 재앙의 근본은 나에게 있다'며 자책했습니다.
1811
[홍경래의 난 발발]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사회 불만이 극에 달한 시기, 평안도 일대에서 홍경래가 부농, 사상(私商), 그리고 봉건 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규합하여 대규모 농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군은 관서 지역에 대한 조정의 차별에 항거하며 가산, 박천, 곽산, 선천, 정주성 등을 점령하고 한때 청천강 이북을 장악했습니다.
홍경래는 격문을 통해 '조정에서는 서토(관서)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고 비판하며, '어린 임금 아래 권신들의 간악한 짓이 심해져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순조는 난이 발생하자 '관서의 백성들은 나를 저버린 적이 없는데 내가 임금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며 자책하는 유시를 내렸습니다.
1812
[홍경래의 난 진압]
청천강 이북을 점령했던 홍경래의 난은 관군과의 항전 끝에 진압되었습니다.
홍경래는 전사 후 참수되었고, 우군칙 등 반란 관계자들 역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습니다.
특히 정주성에서 생포된 백성 2,983명 중 여자와 10세 이하 남자아이를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처형된 후 효수되었습니다.
1814
[함경도 및 경상도 대홍수 발생]
함경도 갑산, 삼수, 후주, 경원, 경흥 지역에 대규모 홍수가 발생하여 평야가 물에 잠기고 산골짜기가 무너져 내리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경상도 역시 홍수 피해를 보았습니다.
특히 경원부는 읍사에서 조산에 이르는 4개 마을 땅이 거의 침몰하여 평지가 강이 되고 곡식이 잠겨 울부짖는 소리가 들판에 가득했습니다. 함경감사 김이양은 함흥의 환모 1천 석을 두 고을에 나누어 보내는 등 구휼 조치를 취했습니다.
1816
[영국 이양선 충청도 마량진 출몰]
충청도 마량진 갈곶 밑에 영길리국(영국) 이양선이 나타났습니다.
조선 측은 선원들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언어나 글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배 내부는 매우 컸고 무기를 제작 중이었으며, 빠른 속도로 바다를 빠져나갔습니다.
조선은 이양선을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고 청나라에 보고하는 것을 기본 대처 방안으로 삼았습니다.
이들이 영국인임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준 한 폭의 서전(書箋)에서 '영길리국'이라는 국명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1819
[풍양 조씨 세력 중용]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순조는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는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특정 가문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시키려는 순조의 시도였습니다.
1821
[대규모 역병 창궐]
조선 전역에 대규모 역병이 돌아 수많은 백성들이 사망했습니다.
잦은 자연재해와 더불어 역병은 백성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1827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작]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견제하고 권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겨 국정을 주도하게 했습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 만에 요절하며 세도정치 견제 노력은 좌절되었습니다.
1829
[경희궁 화재]
경희궁의 융복전, 회상전, 집경당 등 주요 전각들이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이는 순조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발생했던 궁궐 화재 중 하나였습니다.
1830
[효명세자 요절]
순조의 아들이자 대리청정을 맡아 세도정치를 견제하려던 효명세자가 요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순조는 큰 상심에 빠졌고, 그의 개혁 노력은 좌절되었습니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순조에게 깊은 슬픔을 안겼으며, 이후 순조의 건강 악화와 웃음을 잃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창경궁 전각 대규모 전소]
창경궁의 환경전, 통명전 등 400여 칸에 달하는 전각들이 대규모 화재로 전소되었습니다.
연이은 궁궐 화재는 국고에 막대한 부담을 주었습니다.
1832
[명온공주와 복온공주 요절]
효명세자에 이어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가 잇따라 요절하면서 순조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순조는 자녀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웃음을 잃을 정도로 상심했습니다.
[영국 로드 애머스트호 조선 해안 출몰 및 교역 요구]
영국의 '로드 애머스트(The Lord Amherst)' 호가 충청도 홍주 고대도 해안에 나타났습니다.
이 배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간첩 휴 해밀턴 린지가 승선하여 청나라 해안에서 무역 확장을 타진하며 지형 측량 및 정보 수집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선 측에 여러 차례 교역을 요청했으나, 조선은 이를 강력히 거부하고 필요한 물품을 제공한 후 돌려보냈습니다.
홍주 목사 이민회와 수군 우후 김형수는 선원들과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었습니다. 선원들은 영길리국이 청나라와 국력이 대등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고 언급했습니다.
1833
[한양 쌀 폭동 발생]
경강상인들이 쌀을 사재기하고 높은 가격을 책정하며 시장 경제를 교란시키자, 쌀값 폭등을 견디지 못한 한양의 난민들이 가게를 부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폭동 주모자와 상인 2명이 처형되었고, 조정은 난민과 상인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자구책 마련에 나섰습니다.
조정은 난민 선동 주모자는 강하게 처벌하되, 상인들의 곡식 무역을 죄로 삼지 않고 시장 혼란을 경계하며 되 속임이나 물 섞기 등의 행위를 강하게 처벌하는 조치를 마련했습니다.
[창덕궁 대조전 등 전각 대규모 전소]
창덕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옥화당, 양심합 등 400여 칸에 달하는 전각들이 전소되었습니다.
이는 순조 재위 기간 동안 발생한 궁궐 화재 중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1834
[순조 승하]
효명세자와 두 공주의 잇따른 죽음으로 깊은 상심에 빠졌던 순조는 소화불능 등의 병을 앓다가 경희궁 회상전에서 44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순조의 능은 순원왕후와 합장된 인릉입니다.
순원왕후는 순조의 묘지문에서 '자녀들의 참독한 화를 당하고 거듭 차마 못 할 지경을 겪게 함으로써 병환을 연유하여 지금의 춘추로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천리이며 무슨 인사인가'라며 깊은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1857
[묘호 '순종'에서 '순조'로 개칭]
철종 때 영중추부사 정원용 등의 건의에 따라 순조의 묘호가 기존 '순종(純宗)'에서 '순조(純祖)'로 개칭되었습니다.
이는 '이단을 배척하여 서학(천주교)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서란(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공'을 기리기 위함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