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토쿠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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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 정치가, 불교인 + 카테고리

일본 아스카 시대의 왕족이자 정치가인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 천황의 섭정으로 활동하며 12계 관위와 17개조 헌법을 제정, 일본의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 불교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나, 그의 업적과 실존 여부에 대한 후대 허구설 등 다양한 학술적 논쟁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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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574

[쇼토쿠 태자 탄생]

일본 아스카 시대의 왕족이자 정치가인 쇼토쿠 태자(본명 우마야도노 미코)가 긴메이 천황의 후손인 요메이 천황과 아나호베노 하시히토 황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다쓰 천황 3년인 574년 2월 7일, 다치바나노도요히 황자(후일 요메이 천황)와 아나호베노 하시히토 황녀 사이에서 우마야도 왕자(쇼토쿠 태자)가 태어났다. 부모 모두 긴메이 천황을 아버지로 둔 이복 남매로, 소가씨와 깊은 혈연관계를 가졌다. 출생 전설로는 마구간 앞에서 태어났다는 설, 어머니가 구세관음보살을 통해 수태했다는 설 등이 있다.

587

[숭불파 vs 배불파 대립 및 모노노베씨 몰락]

불교 수용을 둘러싼 숭불파 소가노 우마코와 배불파 모노노베노 모리야 간의 격렬한 대립이 발생했다. 쇼토쿠 태자는 소가씨 편에 서서 모노노베씨와 싸웠으며, 승리 후 대호족 모노노베씨는 몰락했다.

585년 비다쓰 천황 사망, 이어 587년 요메이 천황 사망으로 황위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다. 소가노 우마코는 도요미케카시키야히메의 조를 얻어 아나호베 황자를 주살하고 호족과 황자들을 모아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토벌할 대규모 군대를 일으켰다. 우마야도 왕자(쇼토쿠 태자)는 소가 씨 편에 서서 가와치국 시부카와군의 모리야 저택을 공격했으나 고전했다. 왕자는 백교목으로 사천왕상을 만들고 승리 시 불탑을 지을 것을 맹세한 뒤, 모리야가 화살에 맞아 죽고 그의 군사들이 흩어지면서 모노노베 씨는 몰락했다.

593

[시텐노지 건립]

쇼토쿠 태자는 모노노베 씨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경우 불탑을 지을 것을 맹세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셋쓰의 나니와(현 오사카)에 사천왕을 모시는 시텐노지 사찰을 세우도록 했다.

쇼토쿠 태자는 모노노베 씨와의 전투에서 이긴 뒤 불탑을 짓겠다는 맹세에 따라 셋쓰국 나니와(오늘날의 오사카)에 시텐노지(四天王寺)라는 사찰을 세우게 했다. 《일본서기》에 창건 시기는 스이코 천황 원년인 593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절에는 쇼토쿠 태자가 차고 다녔다는 칠성검과 병자숙림검이 보관되어 있다.

[스이코 천황 섭정으로 취임]

소가노 우마코가 스슌 천황을 암살하고 일본 최초의 여제 스이코 천황을 옹립한 직후, 우마야도 왕자(쇼토쿠 태자)는 황태자 겸 섭정으로 임명되어 실질적인 정치 최고 책임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592년, 소가노 우마코는 스슌 천황과의 대립 끝에 스슌 천황을 암살하고 도요미케카시키야히메(豊御食炊屋姬)를 일본 최초의 여제인 스이코 천황으로 옹립했다. 스이코 천황은 자신의 아들 대신 우마야도 왕자(쇼토쿠 태자)를 황태자 겸 섭정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소가노 우마코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의견도 있다.

594

[불교 융성 조 발표]

쇼토쿠 태자는 섭정으로 취임한 스이코 천황 2년, 불교를 융성하게 하라는 조(詔)를 발표하여 일본 내 불교 전파에 박차를 가했다.

스이코 천황 2년, 쇼토쿠 태자는 불교 융성의 조를 발표하여 일본 내 불교의 확산과 발전을 공식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595

[고구려 혜자, 백제 혜총 스님 도래]

고구려 승려 혜자와 백제 승려 혜총이 일본에 건너와, 혜자는 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을 강독하고 불교에 입문시켜 스승이 되었으며, 태자는 불교를 널리 보급하는 데 힘썼다.

스이코 천황 3년, 고구려의 승려 혜자와 백제의 승려 혜총 등이 일본에 건너왔다. 혜자는 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을 진상하고 강독하여 태자를 불교에 입문시켰으며, 태자는 혜자를 스승으로 삼아 5계를 받고 웅응정사를 짓는 등 불교 보급에 힘썼다.

598

[호류지 건립 및 불교 중심 사찰 설립]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 기술자들을 초청해 호류사 건립을 시작했으며, 607년 스이코 천황과 함께 공식적으로 사찰과 약사여래상을 설립했다. 이는 일본 불교 융성의 상징이자 태자의 시호 '쇼토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이코 천황 6년(598년),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의 기술자들을 초청하여 호류사 건립을 시작했다. 호류지 금당의 약사여래상 광배 명문에 따르면, 요메이 천황이 건립을 발원했으나 사망하자,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스이코 천황과 쇼토쿠 태자가 스이코 천황 15년(607년)에 이 절과 약사상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찰은 쇼토쿠 태자에게 부여된 '쇼토쿠'라는 시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늘을 나는 말 전설]

쇼토쿠 태자가 가이국에서 바친 흰 흑구를 신의 말로 간파하여 길렀고, 이 말을 타고 하늘을 날아 동국과 시나노국을 방문한 뒤 사흘 만에 수도로 돌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쇼토쿠 태자 전력》이나 《부상략기》에 따르면, 스이코 천황 4년 4월, 쇼토쿠 태자는 여러 구니에서 바쳐진 준마 중 가이국에서 온 흰 흑구를 신의 말로 알아보고 기르게 했다. 그해 9월, 태자가 이 말에 오르자 말은 하늘로 솟아올라 태자와 도네리를 태우고 동국과 후지산을 넘어 시나노국까지 갔다가 사흘 만에 수도로 돌아왔다고 한다.

600

[신라 공격 시도]

쇼토쿠 태자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출병시켰으나, 동생인 구메 황자의 죽음과 후임 황자의 귀환으로 인해 공격은 중단되었다.

스이코 천황 8년, 쇼토쿠 태자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군사를 출병시켰다. 이듬해 스이코 천황 10년(602년), 친동생 구메 황자를 장군으로 하는 2만 5천의 군사를 지쿠시에 모았으나, 바다를 건널 준비 과정에서 구메 황자가 사망했다(신라 자객 암살설도 있음). 후임으로 임명된 이복동생 다이마 황자는 아내의 죽음을 이유로 수도로 돌아가 버려 결국 공격은 중단되었다.

601

[이카루가노미야 건설]

쇼토쿠 태자는 자신의 거처가 될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605년에 그가 실제로 거주하게 되는 장소이다.

스이코 천황 9년, 쇼토쿠 태자는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를 지었다. 이는 그가 605년에 옮겨 거주하게 되는 거처로, 후일 몽전을 중심으로 한 동원가람이 세워진 호류지 동원가람의 옛 터가 된다.

603

[관위 12계 제정]

유학에 영감을 받은 쇼토쿠 태자는 성씨제가 아닌 재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관위 12계'를 제정하여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정치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이는 일본 최초의 관위 제도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는 유학에 영감을 얻어 스이코 천황 11년 12월 5일, 이른바 '관위 12계(十二階)'라 불리는 관위제를 제정했다. 이는 성씨제(氏姓制)와 달리 재능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천황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604

[17개조 헌법 제정]

쇼토쿠 태자는 일본 최초의 법전인 17개조 헌법을 친히 제정했다. 이 헌법은 호족들에게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치고 천황을 받들어 불법을 공경할 것을 강조하며 국가의 윤리적 기틀을 마련했다.

스이코 천황 12년 4월 3일, 황태자가 직접 17개조 헌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일본 최초의 법으로, 호족들에게 신하로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치고 천황을 받들어 불법을 공경할 것을 강조하여 중앙집권화를 위한 윤리적 토대를 마련했다.

605

[이카루가노미야로 이전]

쇼토쿠 태자는 이전에 건설을 시작했던 이카루가노미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카루가노미야는 이후 호류지의 동원가람 부지가 된다.

스이코 천황 13년, 쇼토쿠 태자는 이카루가노미야로 옮겨 거주하였다.

607

[견수사 파견 및 국서 논란]

쇼토쿠 태자는 오노노 이모코 등을 수나라에 사자로 파견하여 국서를 보냈다. 이 국서의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라는 표현은 수나라 황제의 분노를 샀다고 전해진다.

스이코 천황 15년, 쇼토쿠 태자는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 구라쓰쿠리노 후쿠리(鞍作福利)를 사자로 하여 수나라에 국서를 보냈다. 이 국서에는 "동쪽의 천황은 삼가 서쪽의 황제에게 고한다(東天皇敬白西皇帝)"고 쓰여 있었으며, 《수서》에는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지는 곳의 천자에게 보내니 별일 없는가?"라는 표현이 답서에 실려 있어 수나라의 양견 황제가 분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615

[삼경의소 저술 완료]

독실한 불교 신자이자 깊은 조예를 가졌던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 천황에게 《승만경》을 강의하고, 615년까지 《법화경》, 《유마경》 등 불교 경전의 주석서인 《삼경의소》를 저술하여 불교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 천황에게 《승만경》을 강의하고, 스이코 천황 23년인 615년까지 《법화경》, 《유마경》 등의 주석서인 《삼경의소(三經義疏)》를 저술하였다. 이 중 『법화의소』는 그의 진필로 전해지는 것이 현존한다.

620

[국가 역사서 편찬 논의]

쇼토쿠 태자는 소가노 우마코와 함께 일본의 역사서인 《고쿠기》와 《천황기》 등을 편찬할 것을 의논하며 국가 정체성 확립과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이코 천황 28년, 우마야도 왕자(쇼토쿠 태자)는 소가노 우마코와 의논하여 《고쿠기(國記)》, 《천황기(天皇記)》 등의 사서를 편찬하였다.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622

[왕자비 가시하데노 오오이라쓰메 사망]

이카루가노미야에서 병으로 쓰러진 쇼토쿠 태자의 회복을 빌던 왕자비 가시하데노 오오이라쓰메가 태자보다 먼저 사망했다.

스이코 천황 30년, 이카루가노미야에서 쓰러진 우마야도 왕자의 회복을 빌던 왕자비 가시하데노 오오이라쓰메(膳大娘女)가 2월 21일에 죽었다.

[쇼토쿠 태자 사망]

쇼토쿠 태자가 이카루가노미야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생전에 그가 지었던 웅응정사에 큰 절이 세워져 그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스이코 천황 30년, 왕자비의 죽음 다음 날인 2월 22일, 우마야도 왕자(쇼토쿠 태자)도 이카루가노미야에서 사망했다. 《일본서기》는 이를 29년 2월 5일(서기 621년)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사망일에 대한 이견이 있다. 사후 생전에 태자가 짓게 한 웅응정사에 큰 절을 지어 그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묘소는 에이후쿠지 기타 고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어머니와 왕자비가 합장된 삼골일묘이다.

751

['쇼토쿠 태자' 호칭 공식 기록에 첫 등장]

생전에는 '우마야도' 등으로 불렸던 인물이, 사망 후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 751년에 편찬된 《회풍조》에서 처음으로 '쇼토쿠 태자'라는 호칭으로 기록되었다.

쇼토쿠 태자라는 호칭은 생전에는 쓰이지 않다가 사후 100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 덴표쇼호 3년(751년)에 편찬된 《회풍조(懐風藻)》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이안 시대 편찬된 여러 서적에서도 '쇼토쿠 태자'로 기재되어, 이 무렵부터 일반적인 호칭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1930

[지폐 초상화에 일본 최다 등장 인물]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가 1930년 일본은행권 100엔 지폐에 처음 등장한 이래, 1만 엔권 등 총 일곱 번에 걸쳐 지폐 도안으로 사용되며 일본에서 지폐 도안에 들어간 횟수가 가장 많은 인물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쇼토쿠 태자의 초상화는 1930년, 일본은행권 지폐의 도안으로서 100엔 지폐에 처음 등장했다. 이후 1,000엔, 5,000엔, 10,000엔 지폐 등 모두 일곱 번에 걸쳐 지폐 도안으로 사용되어 일본에서 지폐 도안에 들어간 횟수가 가장 많은 사례가 되었다. 장기간 사용된 덕분에 일본 국민들 사이에 '지폐의 얼굴'로 인식되었으며, 1958년부터 1984년까지 발행된 'C 一1만 엔권' 덕분에 '고액 지폐'의 대명사로 이름이 널리 쓰였다. 이 초상화는 태자를 그린 그림 중 가장 오래된 '당본어영'에서 따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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