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천황
연표
1901
[미치노미야 히로히토의 탄생]
요시히토 황태자(훗날 다이쇼 천황)와 데이메이 황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궁호는 '미치노미야'로, 이름은 '히로히토'로 지어졌습니다.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도쿄시 아오야마 어소에서 요시히토 황태자와 데이메이 황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덕을 깨우치는 자'라는 의미의 '미치노미야'를 궁호로, 중국 고서 《상서》의 '유내이민녕(나라가 풍요로우면 백성은 평안하다)'에서 딴 '히로히토'를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1908
[가쿠슈인 초등과 입학]
러일 전쟁 영웅 노기 마레스케가 원장으로 있던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하여 엄격한 군대식 교육과 무사도 사상 등을 배웠습니다.
1908년 봄부터 도쿄 요쓰야에 있는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했습니다. 러일 전쟁에서 활약했던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가 제10대 가쿠슈인 원장으로 임명되어 히로히토를 비롯한 황손들의 교육을 책임졌습니다. 노기는 엄격한 군대식 교육과 무사도, 유학 사상, 선(禪)을 강조하며 황손들을 엄격하게 대했습니다.
1912
[황태자 책봉 및 군인 직위 하사]
메이지 천황이 서거하자 아버지 요시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하며 황태자로 책봉되고, 육군·해군 소위 직위를 하사받았습니다.
1912년 7월 29일,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를 이어 히로히토의 아버지 요시히토가 천황이 되면서 히로히토는 황태자로 책봉됐으며, 육군·해군 소위의 직위를 하사받았습니다. 이와 동시에 히로히토가 머무는 황손어전은 동궁어소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21
[유럽 순방 시작]
일본 황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불식시키고 국제 정세를 살피기 위해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등과 함께 유럽 순방길에 올랐습니다.
1921년 3월 3일에 히로히토와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진다 스테미 백작, 나라 다케지 육군중장과 수행원 34명이 도쿄역을 출발하여 해외 순방길에 올랐습니다. 이들은 요코하마에서 가토리 호를 타고 5월 7일에 영국에 도착했으며, 그 후로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를 방문했습니다. 공식 명목은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를 답방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병상에 있는 다이쇼 천황을 통해 국민들이 품은 황실에 대한 나쁜 여론을 히로히토의 해외여행을 통해 무마하고, 베르사유 조약 이후의 유럽 정세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유럽 순방 귀국 직후인 1921년 11월 25일부터 건강이 악화된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게 됐고 따라서 칭호도 셋쇼노미야(摂政宮)가 됐습니다. 전 내대신 히라타 도스케와 궁내대신이 된 마키노 노부아키는 대리청정을 맡은 히로히토를 고위급 궁내관 회의에 참여시켜 정치적인 수완을 가르치려 노력했습니다.
1923
[도라노몬 사건 발생]
의회 개회식장으로 취임 연설을 하러 가던 중 아나키스트 난바 다이스케에게 총격을 당하는 '도라노몬 사건'이 발생했으나 무사했습니다.
대리청정을 맡던 시기인 1923년 12월 27일, 의회 개회식장으로 취임 연설을 하러 가던 히로히토에게 아나키스트 난바 다이스케가 총격을 가하는 '도라노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동궁 시종장이 다쳤지만 히로히토는 무사했습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야마모토 내각이 총사직했습니다.
1926
[제124대 일본 천황 즉위 및 '쇼와' 연호 선포]
다이쇼 천황이 서거하자 제124대 천황으로 즉위했습니다. 다음날인 12월 26일, 연호를 '쇼와(昭和)'로 공식 발표했습니다.
1926년 12월 25일 새벽, 가나가와 현의 하야마 별장에서 다이쇼 천황이 사망했습니다. 히로히토는 부황 사망 후 제124대 천황이 되었으며, 메이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관례대로 열린 추밀원은 회의에서 새로운 천황을 위한 연호를 정하게 됐습니다. 추밀원은 천황의 새로운 연호를 '쇼와'(昭和)라고 12월 26일에 대외에 공식 발표했습니다. 쇼와(소화)란 '밝은 조화', '찬란한 평화', '세상이 태평하고 백성과 임금이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1931
[만주 사변 발발 묵인 및 진저우 폭격 재가]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관동군의 중국 공격을 묵인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0월 8일에는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최초의 도시 폭격인 진저우 공중 폭격을 재가했습니다.
1931년 9월 18일 밤, 만주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쇼와 천황은 이 만주 사변을 묵인했으며 때때로 관동군의 중국 공격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10월 8일에는 관동군의 진저우 공중 폭격을 재가했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도시 폭격이었습니다. 쇼와 천황은 10월 1일에 참모총장과 관동군 사령관에게 침략 행위에 대해 가벼운 징계만을 내렸습니다.
1932
[이봉창 의사의 천황 암살 미수 사건]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한국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의 폭탄 의거로 암살당할 뻔했으나 살아남았습니다.
1932년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가 던진 폭탄에 암살당할 뻔했으나 무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개각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던 이누카이 내각은 사직하려고 했으나 쇼와 천황은 이누카이 내각의 유임을 명령했습니다. 그는 정부 정책의 연속성과 황실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내각이 자주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누카이 총리 암살 '5·15 사건']
해군 청년 장교들이 총리 관저에서 이누카이 총리를 살해하는 '5·15 사건'이 발생하며 군부의 정치적 폭력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가 이누카이 총리를 총리 관저에서 살해했으며, 정우회 본부와 일본은행, 경시청, 내대신 마키노의 관저에 폭탄이 날아들었습니다. 비밀 결사단체인 혈맹단은 런던 해군 감축 조약을 완전히 폐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5·15 사건' 다음 날 이누카이 내각의 남은 각료들은 총사직했으며, 쇼와 천황은 5월 25일에 이누카이의 후임으로 해군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를 지명했습니다.
1933
[장남 아키히토 탄생]
훗날 제125대 천황이 되는 장남 아키히토가 태어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후궁 제도를 폐지하고 궁녀 수를 줄이기로 했습니다.
결혼한 지 8년이 흐른 쇼와 천황과 나가코 황후 사이에서는 네 명의 딸 중 세 명이 살아남았고, 나가코가 임신 중이던 다섯째는 1932년에 유산됐습니다. 그 후 다시 임신한 나가코는 1933년 12월 23일, 지금의 천황이 되는 첫째 아들 아키히토를 낳았습니다. 딸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쇼와 천황은 궁 안에서 항상 지내야 했던 궁녀들에게 통근을 허락했으며, 후궁 제도를 폐지하고 궁녀의 수를 줄이기로 했습니다.
1937
[루거우차오 사건과 중일 전쟁 시작]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발하자, 쇼와 천황은 고노에 내각의 허베이 파병 결정을 승인하며 중일 전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1937년 7월 8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쇼와 천황은 중화민국과의 갈등보다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기 한 주 전인 6월 30일에 아무르강의 건차자도(乾岔子島)에 요새를 건설하던 일본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포함 2척을 파괴한 사건으로 인해 소비에트를 자극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결국 쇼와 천황은 “중국과의 전쟁은 두석달 만에 끝낼 수 있다”고 말한 간인노미야와 스기야마 하지메 신임 육군대신의 말만을 믿고, 고노에 내각의 허베이 파병 결정을 승인했습니다.
[난징 대학살 묵인]
난징 점령 후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을 묵인했습니다. 비무장 중국군 약 17,000명 이상이 살해되는 등 잔혹한 범죄들이 벌어졌습니다.
1937년 12월 14일에 난징을 점령한 뒤, 일본군은 아사카노미야의 참모장 이누마 마모루의 주도로, 비무장 상태로 아직 난징과 그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군 패잔병들을 붙잡아 소년과 성인 남자 약 17,000명 이상을 살해했습니다. 일본군은 난징 성과 그 주변 지역에서 석 달이 넘도록 살인, 강간, 약탈, 방화를 자행했으며 '중국인 100명 목 베기 시합' 같은 만행도 벌였습니다. 쇼와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과 정부는 일본군이 난징에서 자행한 전쟁 범죄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그는 마쓰이에게 승전 치하 칙서를, 아사카노미야에게는 훈장을 내리는 식으로 전쟁 범죄를 묵인했습니다.
1941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 전쟁 발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이끄는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고, 루손섬 등을 공습하며 선전포고 없이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나구모 주이치가 이끄는 해군이 하와이주 진주만을 폭격했으며, 이어 일본군은 루손섬 클라크 항공 기지, 싱가포르, 괌, 다바오, 웨이크섬을 공습했습니다. 진주만 공격을 비롯한 일본군의 대규모 공습은 선전포고 없이 벌어졌고 쇼와 천황은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고 8시간 가까이 지난 일본 시간 오전 11시에야 선전 조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전인 11월 8일에는 진주만 공격 작전에 대한 보고를, 같은 달 15일에는 계획의 전모와 세부 사항에 대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1945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및 소련의 참전]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10만 명 이상의 즉사자를 냈으며, 8월 9일 나가사키에도 원폭을 투하하고 소련이 만주를 침공하며 제국의 몰락이 가속화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에놀라 게이'라는 애칭을 단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10만 명 이상의 즉사자를 냈으며,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을 투하해 4만 명 이상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같은 날 소비에트 연방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거부했다는 것을 구실로, 불가침 조약을 깨고 만주를 침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포츠담 선언 수락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옥음방송으로 일본의 항복 선언]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연합국에 대한 항복을 선언하는 '옥음방송'을 발표하며 기나긴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냈습니다.
항복을 반대하던 군대의 궁성 사건과 쿠데타 시도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 후, 스즈키 간타로 내각은 미국과 연합군 각 정부에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통지했습니다.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이 전날에 녹음한 일명 옥음방송(玉音放送)이 라디오를 통해 퍼졌습니다. 이로써 일본 제국은 패전국이 됐으며, 조선과 타이완 등 식민 지배를 끝냈습니다. 다만, 쇼와 천황이 사용한 언어가 궁정체였고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아나운서가 해설을 덧붙여 다시 읽어야 했습니다.
[맥아더와의 첫 만남]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첫 만남을 가지고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은 일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45년 8월 30일,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새로 임명된 더글러스 맥아더가 요코하마시에 임시 사령부를 차렸습니다. 9월 27일, 쇼와 천황은 서양식 예복 차림으로 미국 대사관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이 사진은 9월 29일자 일본의 주요 신문에 실리게 됐는데, 맥아더가 훈장을 단 예복을 입지 않았고 천황을 향한 예의있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며 논란을 빚었습니다. 이는 맥아더가 천황을 평범한 존재로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연출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46
[인간선언 발표]
'국운 진흥 조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신'이 아님을 선언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946년 1월 1일, 쇼와 천황은 '국운 진흥 조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신'(現人神)이 아님을 선언하는 인간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그가 인간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자 중 한 사람'이 됐다고 평했습니다. 이제 언론들은 그동안 공개가 금기시된 천황과 그 일가족들의 사생활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시작했습니다.
1947
[일본국 헌법 시행]
새로운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어 시행되었습니다. 쇼와 천황은 정치적 권력을 상실하고 상징적인 군주가 되었습니다.
1946년 3월 5일,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는 GHQ 초안과 '천황이 헌법의 전면적 개정을 바란다'는 내용을 담은 칙서 초안을 쇼와 천황에게 전달했고, 곧 쇼와 천황은 이를 승인했습니다. 이 초안은 4월부터 8월까지 중의원 제국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수정한 뒤 쇼와 천황이 승인한 지 8개월 후인 11월 3일에 '일본국 헌법'으로 공포돼 이듬해인 1947년 5월 3일부터 시행됐습니다. 새 헌법으로 쇼와 천황은 정치적인 권력을 빼앗겼으며, 같은 해에 새 헌법 기초에 따라 다시 만들어진 '황실전범'에도 따라야만 하게 됐습니다.
1952
[일본의 독립 및 강화조약 발효]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 등이 발효되며 GHQ의 점령이 끝나고 일본이 정식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쇼와 천황은 정치적인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 미일 안전 보장 조약, 주일 미군에게 특별 권한을 부여하는 행정 협정이 한꺼번에 발효됐습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폐지되고 점령은 끝났으며 일본은 정식으로 독립국이 됐습니다. 하지만 쇼와 천황은 새 헌법에 따라 정치적인 일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게 됐습니다.
1975
1975년 10월, 쇼와 천황 내외는 미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했습니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쇼와 천황은 뉴스위크의 기자 버나드 크리셔와 단독 회견을 연 자리에서 '전쟁 개시 때에는 내각의 결정이 있었고, 나는 헌법에 따라 내각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전쟁 책임에 대한 변명을 했습니다. 기자회견 후 몇 주일 뒤, 쇼와 내외는 국빈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게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깊은 슬픔'을 전했으며, 미국 관광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 등을 찾았습니다. 유럽 방문 때와 달리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1989
[쇼와 천황 서거]
88세의 나이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쇼와 시대'가 끝나고 '헤이세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장폐색 진단과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던 쇼와 천황은 1989년 1월 7일 오전 6시 33분, 가족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주치의는 '천황 폐하께서는 정신력으로 버텨오셨으며,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쇼와 천황이 죽은 뒤 방송사와 언론에는 보도 지침이 내려졌으며, 전국적으로 추모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쇼와 시대는 끝났으며, 다음날 황태자 아키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하며 새로운 연호 '헤이세이'가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