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일
연표
1909
1909년 6월 22일,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겸 목사 손정도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유아기에는 잠시 평양에서 보낸 적이 있다.
1930
평양 광성고보를 졸업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1930년 6월에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중국 해군부에서 해군보관을 양성하기 위해 시험을 통해 수재 5명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해군보관 선발 및 독일 유학]
중국 해군보관으로 선발되어 상하이를 떠나 세계를 일주한 후 독일에서 약 3년간 항해학술을 연구하며 해군 건설의 꿈을 키웠다.
1930년 7월 21일, 상하이를 떠나 세계를 일주한 후 독일에서 약 3년간 항해학술을 연구하였다. 이 시기 그는 상하이에 들어와 있던 각국 열강들의 군함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해방된 조국에도 바다를 수호하는 해군을 건설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1935
젊은 시절 일제치하 조선에서 일제에 고문을 받은 후, 1935년 출옥하여 매부인 윤치창과 합작으로 '남계양행'이라는 상점을 5년간 공동 운영하며 사업가로 활동했다.
1940
1940년 동화양행 사장의 부탁으로 동화양행에 입사, 상하이 지점장으로 파견나가 엄청난 돈을 벌었다.
1945
[해사대 결성]
광복 후 '우리의 바다는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해사대를 결성하여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1945년 8월 21일, 광복이 되자 '우리의 바다는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해사대를 결성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되는 조직 창설의 시작이었다.
1945년 11월 11일, '우리의 바다는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하며 해군 조직을 구체화하였다.
1946
1946년 1월 15일, 해방병단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여 해군의 모체 조직을 이끌게 되었다.
1946년 1월 17일, 해군병학교(現 해군사관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3월 15일까지 재직하며 해군 장교 양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관 취임]
해방병단이 미군정에 의해 해안경비대로 승격되자 총사령관을 맡아 해군으로의 격상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 6월 15일, 미군정에 의해 해방병단이 해군이 아닌 해안경비대로 승격되자 이에 크게 반발했으나, 차후 해군으로 격상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또한 미국에 직접 편지를 하여 도움을 요청하여 해군 양성을 위한 미 해군 교관 15명을 한국에 모시기도 했다.
1948
[초대 해군총사령관 역임]
초대 해군총사령관(이후 해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해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기 시작했다.
1948년 9월 5일, 초대 해군총사령관(이후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어 1953년 6월 30일까지 재임하며 대한민국 해군의 기틀을 다지고 발전을 이끌었다.
[해군 최초 제독 승진]
대한민국 해군 역사상 최초로 제독으로 승진하며 해군 창설의 아버지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했다.
1948년 12월 10일,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제독으로 승진하며 해군 창설과 발전에 대한 그의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았다.
1949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대한민국 해병대를 창설하여 해군과 더불어 강력한 해양 방위 역량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해군참모총장 재임 중 대한민국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해병대 창설식에 해병대 사령관을 빛내기 위해 해군참모총장이던 본인이 참가하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창설한 해병대는 이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최선봉으로 참가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50
1950년 10월, 한국 전쟁에서 보여준 뛰어난 리더십과 공헌을 인정받아 미국 은성훈장을 수훈하였다.
[한국 최초 전투함 '백두산함' 도입]
푼푼히 모은 성금과 아낀 돈으로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미국에서 도입하여 해군력 강화에 기여했다.
해군참모총장 재임기간 중 푼푼히 모은 성금과 아낀 돈으로 미국에서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을 구입해 마련하였다. 백두산함은 도입 3개월 만에 6.25 전쟁 발발 시 부산으로 침투하던 북한 특수부대 600명을 실은 북한함을 격침시키는 등 부산이 최후까지 점령되지 않는 데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인천 상륙 작전 참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인천 상륙 작전에 해군 참모총장으로서 참전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 전쟁 시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인천 상륙 작전과 9·28 서울 수복 작전에 참전하였다. 그가 창설한 해병대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최선봉으로 참가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부대이기도 하다.
1951
[한국 최초 항공기 '해취호' 제작]
해군참모총장 재직 중 한국 최초의 항공기 '해취호' 제작을 주도하며 국방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해군참모총장 재직 중 한국 최초의 항공기인 해취호(海鷲號) 제작을 주도하였다. 한국 해군 최초의 항공기인 '해취호(海鷲號)'는 미 공군 소속의 불시착한 T-6F 텍산(Texan) 항공기를 해군 기술 장교 조경연 중위와 항공반이 개조하여 수상 비행기 형태로 제작을 완성하고 시험 비행에 성공한 날은 1951년 8월 15일입니다.개조 작업 시작: 1951년 4월 1일수상 비행기로 완성 및 시험 비행 성공: 1951년 8월 15일이후 해군은 열흘 뒤인 8월 25일에 공식적으로 이 항공기를 해군에 소속시키고 '해취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1953
[영국 해군 관함식전 참석]
1953년 6월 14일부터 17일까지 거행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기념 관함식전에 해군 총참모장 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해군 예비역 중장 예편]
해군참모총장으로서 해군 대장 진급을 고사하고 예비역 중장으로 예편하며 청렴한 군인 정신을 보였다.
1953년 6월 28일, 해군 예비역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해군참모총장 취임 시 대장 진급이 확정되었으나 "전투함정이 1척도 없는 대한민국 해군에서 대장급 해군 군인이 나오면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해군에 전투함정이 갖춰지거든 그때 대장 계급을 달겠다."라며 본인 스스로 진급을 고사한 일화가 있다.
1953년 6월 30일, 대한민국 제5대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1956년 5월 26일까지 재직하며 대한민국의 국방을 책임졌다.
1956
[호놀룰루 방문, 사직 배경 설명]
국방부 장관 사임 후 호놀룰루에 방문하여 자신의 사직이 이승만 대통령과의 충돌이 아닌 새로운 기회를 주기 위함임을 밝혔다.
1956년 8월 1일, 팬아메리칸 비행기로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기자들에게 국방부 장관 사직이 이승만 박사와의 의향 충돌이 아닌 다른 유자격한 분들께 기회를 주려함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공산당들은 오늘 형세로 보아 내부의 결렬이 되어 위미부진하고 있으니 자유국들은 이런 기회를 잃지 말고 강경한 태도를 취하여 공산당을 제어함이 온당하다 하며, 자기는 언제나 이승만 박사를 후원하겠다고 덧붙였다.
1958
1958년 8월 1일, 주서독 대한민국 대사로 취임하여 1960년 8월 30일까지 재직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60
[아프리카 6개국 친선 방문 및 외교 합의]
서독 대사 임무 중 콩고 독립식전 참석 후 아프리카 6개국을 친선 방문하여 외교 관계 수립에 대한 원칙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서독 대사로서 임무가 막바지이던 1960년 7월, 콩고 공화국 독립식전에 참석 후 카메룬, 토고, 기니, 말리, 나이지리아, 모로코 6개국을 친선 방문하고, 상호 간의 이해 증진과 외교 관계 수립에 관하여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해외공관장 소환 명령에 포함]
해임되었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타국에 거주하여 국가 위신을 추락시킨다는 이유로 외무부 장관의 해외공관장 소환 명령 대상에 포함되었다.
1960년 12월 24일 상오, 정일형 외무부장관은 "해임되었음에도 귀국하지 않고 타국에서 직장을 구하여 거주함으로써 국가위신을 추락시키고 있는 해외공관장들에게 강력한 소환명령을 발하였다"고 언명하였으며, 소환 해당자에는 손원일도 포함되었다.
1963
1963년 9월 5일, 국민의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이어갔다.
1966
1966년 한국 재향군인회 자문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66년 11월 3일, 제12차 아시아반공연맹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반공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67
1967년 마산대학교(현재의 경남대학교) 석좌교수로 부임하여 교육계에서도 활동하였다.
1972
1972년 홍보협회장(弘報協會長)을 역임하였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한국반공연맹(현재의 한국자유총연맹) 이사장 겸 고문을 역임하며 반공 활동을 지속했다.
1976
1976년 4월 30일, 제9차 세계반공연맹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가하여 국제 사회에서 반공주의자로서의 입장을 대변했다.
1980
[서울 자택에서 서거]
서울 공덕동 자택에서 서거하여 대한민국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영원한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1980년 2월 15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자택에서 서거하여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