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붕괴
연표
1985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
콘스탄틴 체르넨코 서기장 사망 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었습니다.
당시 54세로 정치국 위원 중 가장 젊었던 그는 경제 부흥과 개혁을 첫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싫어하는 브레즈네프 시기 관리들의 대규모 인사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예고르 리가초프와 니콜라이 리즈코프를 정치국원으로 임명하고, KGB 의장이었던 빅토르 체브리코프와 국방장관 세르게이 소콜로프를 승진시켜 '권력' 관료부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 개방 정책은 소련 내 민족주의 운동과 민족분규를 조장하게 됩니다. 특히 경제 부흥을 위해 추진한 금주 정책은 보드카, 와인, 맥주 가격 인상 및 주류 배급제 실시, 공공장소 음주 벌금형 재정, 옛 영화 음주 장면 검열 등을 포함했으나, 국가 예산에 심각한 타격을 주고 밀조주와 암시장을 성행시키며 건강에 해로운 알코올 대체제 중독 사례를 늘려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7월 1일에는 조지아 공산당 제1서기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정치국원이 되었고, 28년간 외무장관을 지낸 '거부 씨' 안드레이 그로미코를 해임하고 셰바르드나제를 소련 외무부 장관에 앉혔습니다. 경쟁자 그리고리 로마노프를 정치국원에서 축출하고, 보리스 옐친과 레브 자이코프를 사무국원으로 선출했습니다. 가을 내내 젊고 개혁적인 인물을 정부에 들여왔는데, 9월 27일에는 니콜라이 티호노프 대신 니콜라이 리즈코프가 각료평의회 주석(총리)에 취임했고, 10월 14일에는 니콜라이 바이바코프 대신 니콜라이 탈리신이 국가계획위원회장에 취임했습니다. 12월 23일에는 빅토르 그리신 대신 보리스 옐친을 모스크바 공산당 제1서기에 임명했습니다.
1986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발생]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당시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에서 '최고 등급'인 7등급을 부여받았으며, 사고 시설 주변 30km는 접근이 제한되고 누출된 방사능으로 인해 벨라루스-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 부근은 이용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 사고는 소련의 원자력 산업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복구 비용으로 3억 2,700만 달러가 추산되는 등 막대한 재정적 피해를 초래했습니다.
[소련 최초의 공개적 반공주의 단체 '헬싱키-86' 설립]
라트비아의 항구 도시 리예파야에서 리나르츠 그란틴슈, 라이몬츠 비테니엑스, 마르틴슈 바리스가 모여 '헬싱키-86'(인권수호연대)을 설립했습니다.
이 단체는 소련 내 '최초의 공개적 반공주의 단체'이자 소련에 반대하는 '최초의 소수민족 친독립파 운동 단체'였습니다.
[카자흐스탄, 민족적 불만에 '젤토크산 봉기' 발생]
카자흐스탄 공산당 제1서기가 카자흐인 딘무함마드 쿠나예프에서 러시아 SFSR 소속의 제나디 콜빈으로 교체된 것에 반발하여 카자흐 SSR 알마아타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7일 아침, 브레즈네프 광장 앞에서 학생 2~3백 명이 모여 항의했고, 시위는 1천~5천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다음 날인 18일에는 시위대와 보안군, 자원군, 민병대 간 충돌이 격화되어 대규모 대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내무군, 자원군, 사관후보생, 경찰관, KGB 병력들을 광장으로 모아 시위대를 압박하고 녹화 명령을 내렸으며, 오후 5시에는 군대가 시위대 해산 명령을 내리면서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소요사태는 셋째 날에야 잠잠해졌지만, 알마아타 사건 소식이 퍼지면서 심켄트, 파블로다르, 카라간다, 탈디코르간 등지에서도 소규모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카자흐 SSR 정부는 이 소요로 약 3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으며, 일부에서는 5천 명 이상의 수감자를 포함해 3만~4만 명이 체포되고 사상자는 추정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젤토크산 봉기 지도자는 6만 명의 카자흐인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체제 인사 안드레이 사하로프, 7년 망명 끝 모스크바 귀환]
소련 내 '가장 거물급 반체제 인사'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고르바초프와의 통화 대담 후 7년간의 국내 망명 생활을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왔습니다.
1987
[고르바초프, '데모크라티자치야' 정책 제안]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고르바초프가 '데모크라티자치야'(민주주의화)라는 새로운 정책 도입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향후 공산당 선거를 비밀투표로 비당원을 포함한 다수 후보 중 한 명을 뽑는 형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비록 초기에는 공산당 내에서 큰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 전술은 결국 당내 '보수주의자'의 개혁 반대를 막고 정치 개혁이 진행되는 계기가 됩니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의 확대에도 주안점을 두며 언론 매체에 제한 없는 공개 토론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개혁안은 결국 의도치 않게 개혁하려는 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르메니아, 환경 및 민족 문제로 대규모 시위 발생]
예레반에서 약 3천 명이 나이리트 화학플랜트와 메차모르 원자력 발전소의 환경 오염에 항의하며 거리 시위에 나섰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18일에는 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인 천여 명이 아르메니아인의 권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으며, 나히체반 및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 병합을 요구하는 플랜카드를 들었습니다.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다음 해부터 폭력적 충돌로 확대되었습니다.
[에스토니아 국기, 추모 시위에서 처음으로 공공장소에 게양]
버루에서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있었던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사망자 추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시위대와 민병대와 큰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날 '처음으로 청-흑-백으로 이루어진 에스토니아의 국기가 공공장소에 휘날렸습니다.'.
[보리스 옐친, 모스크바 공산당 제1서기 해임 및 반권위적 이미지 형성]
모스크바 공산당 제1서기였던 보리스 옐친이 해임되었습니다.
이는 옐친이 고르바초프에게 사임 서한을 보내고, 중앙위원회 본회의에서 개혁 속도와 서기장의 행동을 비판하며 강경파 정치국원 리가쇼프를 비판한 것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옐친의 이러한 행동은 '비밀스런 언변'으로 확산되어 지하 출판물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고, 그가 소련 반대파의 수장이자 대중에게 반권위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투쟁은 소련 붕괴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1988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격화, '숨가이트 포그롬' 유혈사태 발생]
아제르바이잔 SSR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수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아르메니아인 다수 거주 구역의 아르메니아 합병 요구 시위가 이어지자, 아스케란 충돌이 발생하여 카라바흐 경찰에게 아제르바이잔인 2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사망 소식은 국가 라디오를 통해 퍼져 '숨가이트 포그롬'(반아르메니아 폭력사태)으로 이어졌습니다.
2월 26일부터 3월 1일 사이 아제르바이잔 숨가이트에서는 반아르메니아 폭력사태가 격화되어 약 32명이 사망했습니다.
소련 정부는 이 지역 통제력을 완전히 잃어 공수부대와 전차를 동원해 도시를 점령했습니다.
숨가이트에 살던 아르메니아인 14,000명은 거의 다 아르메니아로 도망쳤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 변화를 불허하고, 5월 21일에는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를 캄란 바히로프에서 압둘라흐만 바지로프로 교체했습니다. 7월 23일부터 9월까지 아제르바이잔 지식인들은 에스토니아 인민 전선을 본따 '아제르바이잔 인민 전선'을 창설했습니다. 9월 17일 스테파나케르트 근처에서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져 군인 2명이 사망하고 2명 이상이 부상당했습니다. 이 충돌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대도시 2곳에서 대규모 민족 추방이 일어났습니다. 11월 17일에는 아르메니아에서 아제르바이잔인 수천 명이 추방당하자 그에 맞대응해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의 레닌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18일에는 50만 명까지 불어났습니다. 12월 5일, 소련 민병대가 개입하여 무력으로 광장을 비우고 10달간 통행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아르메니아, 인구 1/4 참여한 백만 명 대규모 평화 시위 발생]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시작된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 시위는 불과 일주일 만에 아르메니아 인구의 1/4에 달하는 '백만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평화 시위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프라하, 베를린, 모스크바 등 공산주의 붕괴의 시작점이 된 '거대한 평화 시위'의 서막이었습니다.
2월 18일 예레반에서 일일 시위가 시작되었으나 처음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매일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가 언급되자 시위대가 불어나기 시작하여 2월 20일에는 오페라 광장에 3만 명, 2월 22일에는 10만 명, 2월 23일에는 30만 명이 모이고 대중교통 파업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에는 이 시위에서 아르메니아 지식인과 민족주의자가 모여 '카라바흐 위원회'를 만들고 새로운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어떤 영토 변화도 허락하지 않았고, 5월 21일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카렌 데미르치얀에서 수렌 하루추냔으로 교체했습니다. 하지만 하루추냔은 민족주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5월 28일에는 70년 만에 처음으로 아르메니아 국기가 허용되었습니다. 6월 15일 아르메니아 최고 소비에트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공식적으로 아르메니아로 병합시키는 안을 발의, 승인했습니다. 7월 5일 예레반 츠바르트노츠 국제공항에서 군이 시위대를 물려내려다 발포하여 학생 1명이 사망했습니다. 9월에는 예레반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소련군이 장갑차를 투입했습니다. 1988년 가을 동안 아르메니아 내의 아제르바이잔인 20만 명이 추방당하고 1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아제르바이잔에서도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11월 25일 소련 정부는 더 이상의 민족 간 폭력을 막기 위해 소련군을 투입시켜 예레반을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12월 7일 아르메니아에서 규모 M6.8의 지진이 발생하여 2만5천~5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미국 방문 중 서둘러 아르메니아로 향했으나,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로 병합하라는 시위대에 마주쳤고, 결국 12월 11일 카라바흐 위원회 구성원 전원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고르바초프, '소련 인민대표대회' 창설 제안하며 개혁 가속화]
고르바초프는 제19차 당대회 마지막 날, 새로운 최고입법기관인 '소련 인민대표대회' 창설을 제안하여 대표단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당과 국가를 분리하는 헌법 개혁을 통해 당내 보수파를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1988년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최고 소비에트 총회에서 1977년 소련 헌법 개정안과 선거 개혁 관련 법률이 통과되어 1989년 3월 26일 총선거가 결정되었습니다.
[리투아니아 '발트의 길' 대규모 시위, 독립 열망 상징]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의 '빙기스 공원'에서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 50주년을 맞아 '발트의 길' 행진 시위가 열렸습니다.
사유디스가 주도한 이 시위에는 '25만 명의 시위대가 가담'하여 인민 전선 운동의 대규모 연대와 상징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에스토니아, 소련 내 공화국 중 '최초로 주권 선언']
에스토니아 SSR 최고 소비에트가 '에스토니아 법이 소련법보다 더 우선한다'는 '국가주권선언'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소련 내 공화국 중 '최초로 주권을 선언한 사례'로, 소련 해체의 중요한 전조가 되었습니다.
에스토니아 의회는 국토, 영해, 숲, 지하자원, 공업, 농업, 건설업, 국가 은행업, 교통업 등 에스토니아 국경 내 모든 산업과 서비스는 에스토니아가 가진다는 안건도 통과시켰습니다.
[소련, 외국 라디오 방송 전파방해 '최초' 중단]
소련 정부가 모든 외국어 라디오 방송에 대한 전파방해를 중단하여, 소련 국민은 '처음으로' 공산당의 통제를 받지 않고 '무제한적으로 해외 뉴스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을 수 없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989
[소련, 1917년 이후 '최초'의 민주적 선거 및 언론 자유 확대]
1917년 이후 '최초로'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을 선출하는 민주적인 투표가 실시되었습니다.
입법부 숙의 시간이 공개적으로 검열되지 않은 채 TV로 생중계되면서, 소련 국민들은 그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던 공산당 정부가 심문받고 책임을 묻게 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토론은 소련에서 전례 없던 일이었습니다.
이 해에 '최초로' 비소련계 방송사인 CNN이 모스크바에 TV 프로그램을 송신하기 시작하여, 소련 국민들은 해외가 소련 자국 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소련 정부는 방송 검열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1989년 여름, 러시아 민족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이 모여 소련 '최초의 야당'인 지역간 대의원 집단을 결성했습니다. 이는 소련 붕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마지막 입법부 의원들이 선출된 해이기도 합니다. 10월 25일, 최고 소비에트는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총선 및 지방선거의 공산당 전용 특별 의석 제도를 없애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결정으로 15개 공화국 각 대통령을 직접 선거로 뽑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공화국의 지방 선거를 1989년 12월에서 1990년 3월 사이에 치르기로 했습니다.
['트빌리시 학살' 발생, 조지아 독립 의지 확산]
그루지야 공산당 본부 앞에서 조지아 독립과 압하지야-조지아 통합 국가 건설을 요구하는 10만 명 시위가 벌어진 후, 소련군이 트빌리시로 파견되었습니다.
4월 9일, 소련군이 시위대를 공격하여 약 20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트빌리시 학살'로 불리며, 조지아 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켜 조지아가 소련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봉기 발생, 100여명 사망]
우즈베크인과 소수민족 메스케트인 간의 민족분규가 발생하여 대규모 봉기로 번지자, 소련군 수천 명이 타슈켄트 동남쪽 페르가나 분지로 파견되어 진압에 나섰습니다.
이 인종분규로 대략 1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카자흐스탄 노비우젠에서 대규모 유혈 소요사태 발생]
카자흐스탄 노비우젠에서 카자흐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총기, 소이탄, 쇠파이프, 돌 등을 동원한 소요사태가 일어나 여러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들은 경찰서와 취수원을 장악하려 했으며, 대중교통이 봉쇄되고 상점과 공장은 문을 닫았습니다.
6월 25일부터는 이 소요사태가 카스피해 연안 마을 5곳으로 퍼졌습니다.
['발트의 길' 인간 사슬 시위, 2백만 명 참여한 세계 최대 규모]
'발트의 길' 또는 '자유의 사슬'로 불리는 평화 시위가 발트 3국 지역에서 열렸습니다.
1944년 소련에 강제 병합된 날을 추모하며 '2백만 명'의 사람들이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잇는 '인간 사슬'을 만들었습니다.
이 시위는 1940년 독소 불가침 조약 50주년에 일어난 '세계 최대 규모'의 인간 사슬 시위였습니다.
[몰도바어 공식 언어 지정 및 표기법 변경]
몰도바 최고 소비에트가 몰도바어를 공화국의 공식 언어로 인정하고 정서법을 키릴 문자에서 알파벳으로 바꾸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는 인민전선이 키시너우 국가대의회 앞에서 열린 대규모 시위를 통해 얻어낸 중요한 성과였습니다.
8월 27일에는 30만 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베사라비아의 강제 합병 인정과 몰도바어의 공식 언어 인정 등을 요구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 합법화 요구 대규모 행진]
리비우에서 '15만~20만 명'이 참여한 가두 행진이 열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의 합법화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소련 정부에게 종교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 중 하나였습니다.
[고르바초프, '시나트라 독트린' 선언하며 브레즈네프 독트린 폐기]
고르바초프가 핀란드 방문 중 중앙유럽에 대한 의무적 개입을 강제하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억압적이며 소모가 크다고 폐기하고 중앙유럽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이를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에 빗대어 '시나트라 독트린'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는 소련의 위성국들이 공산당 정권을 붕괴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카톨릭교회, 합법적 종교조직으로 인정]
우크라이나 SSR 종교위원회가 우크라이나 카톨릭교회를 합법적 종교조직으로 인정하는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령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고르바초프의 바티칸 회동과 동시에 선포되었습니다.
[리투아니아 공산당, 소련 공산당과 '최초'로 결별 선언]
리투아니아 공산당 서기장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가 소련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하며 정치에서 헌법적 '지도자적' 역할을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소련 내 공화국 중 '처음으로' 일어난 공산당 분리 선언이었습니다.
이후 리투아니아 공산당은 '최초로' 열린 다당제 총선에서 권력을 잃고 비공산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90
[아제르바이잔, 이란 국경 파괴하며 '최초'로 소련 외부 국경 통제 상실]
아제르바이잔의 월경지 나히체반 자치 공화국에서 인민 전선 소속 군중이 이란 국경을 따라 철조망과 감시탑을 파괴하면서 수천 명의 소련 아제르바이잔인이 국경을 넘어 이란령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했습니다.
이는 '소련의 외부 국경이 통제에서 벗어난 첫 사례'였습니다.
['검은 1월' 발생, 소련군, 자국 도시 바쿠에 유혈 진압 감행]
아르메니아 의회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예산안에 포함시키면서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고, 인민 전선 급진주의자들이 아제르바이잔 남부 도시 렌케란에서 공산당 당사를 점거하는 등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아제르바이잔 통제를 되찾기로 하면서 '검은 1월' 사건이 터졌습니다.
1월 9일 저녁, 중앙 텔레비전 방송국이 폭파되고 통신망이 차단된 후 소련군 2만6천 명이 바쿠에 진입하여 시위대를 공격하고 발포했습니다.
이날 밤 이후 2월 초까지 계속된 충돌로 130~147명이 사망하고 8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는 '소련군이 소련 자국 내의 도시를 강제로 점령한 최초의 군사 행동'이었습니다.
소련의 국방부 장관 드미트리 야조프는 비공산계 야당이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탈취'하려는 시도를 막고 자유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저지하며 공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소련군이 바쿠를 장악했지만 1월 20일까지 아제르바이잔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고, 바쿠 시민 거의 대부분이 '순교자'들의 집단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공산당 당원 수천 명이 공개석상에서 공산당 당원증을 불태웠습니다. 8월 30일 바야초프 제1서기가 모스크바로 송환되었고, 아야즈 뮈탈리보프가 자유투표를 통해 새 제1서기로 등극했습니다. 1990년 9월 30일 열린 선거에서는 인민전선 후보들이 수감되고 살해당하는 등 부정 선거가 잇따랐으며, 350석 중 280석이 공산당 후보에게 돌아갔습니다. 1990년 3월에는 뮈탈리보프가 최고 소비에트 의장에 올랐습니다.
[우크라이나, 480km '인간 사슬' 시위로 독립 열망 표출]
키예프, 리비우, 이바노프란키우스크에서 1918년 우크라이나 독립과 1년 후 통일의 날을 기념하며 '480km에 달하는 인간 사슬'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 독립 열망을 상징하는 대규모 행사였습니다.
[소련 공산당, '일당제 포기' 선언 및 6개 공화국 선거 패배]
소련 공산당(CPSU) 중앙위원회가 고르바초프가 제안한 '일당제 정치체제 포기 권고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소련 정치의 '근본적인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1990년에는 소련 내 15개 공화국 모두 '최초로' 다당제 경쟁 선거를 열었으며, 많은 공화국에서 개혁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다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소련 공산당은 6개 공화국에서 '완전히 패배하여 권력을 잃었습니다.'.
주요 선거 결과: - 2월 24일: 리투아니아 총선에서 사유디스 승리. - 2월 25일: 몰도바 총선에서 몰도바 인민 전선 승리. - 3월 18일: 에스토니아 총선에서 에스토니아 인민 전선 승리. - 3월 18일: 라트비아 총선에서 라트비아 인민 전선 승리. - 5월 20일: 아르메니아 총선에서 범아르메니아 국가 운동 승리. - 10월 28일: 조지아 총선에서 조지아 자유원탁회의 승리. 각 공화국들은 국가 주권을 선언하고 모스크바 중앙정부와 '법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지역 공화국법에 어긋나는 연방법 준수를 거부하고 지역 경제 통제권을 주장하며 모스크바로 조세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 대통령은 리투아니아인의 소련군 징병도 면제시켰습니다. 공화국과 소련 중앙정부 간 갈등으로 돈의 흐름이 끊기면서 경제적 혼란이 찾아왔고 소련 경제는 급속히 쇠퇴했습니다.
[타지키스탄 두샨베 봉기 발생, 26명 사망 및 지도부 총사퇴]
타지크 SSR 수도 두샨베에서 타지크인과 강제이주된 아르메니아인 간의 민족 갈등이 터져 '두샨베 봉기'라 불리는 대규모 반아르메니아 민족분규가 일어났습니다.
봉기 도중 민족주의 단체 라스토흐즈를 중심으로 한 시위가 폭력적으로 변해 정부청사에 방화하고 상점을 약탈했습니다.
이 봉기는 14일 고르바초프가 군을 투입하면서 진압되었습니다.
이 봉기로 26명이 사망하고 56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타지크 공산당 제1서기, 최고회의 의장, 수상 등 수뇌부 전원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습니다.
[리투아니아, 소련 공화국 중 '최초'로 독립국 선언]
리투아니아 SSR에서 새로 꾸려진 최고회의 의장으로 '사유디스'의 지도자인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가 선출됨과 동시에, 그가 '리투아니아 국가 재건 법률'을 선포하며 '소련 내 소비에트 공화국 중에선 처음으로' 소련을 탈퇴하고 독립국임을 선언했습니다.
소련 중앙정부는 '러시아계 사람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리투아니아 내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고 경제를 봉쇄하는 방향으로 보복했습니다.
[에스토니아, 소련 점령 불법 선언하며 독립국 선포]
에스토니아 최고위원회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에스토니아 점령이 불법이었다고 선언하고 에스토니아가 독립국임을 선언했습니다.
앞서 3월 25일, 에스토니아 공산당은 6개월간의 과도기 후 소련 연방 공산당과 결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라트비아, 독립선언 통과하며 소련으로부터의 주권 회복 천명]
라트비아가 일정 기간의 과도기를 가진 후 완전 독립한다는 내용의 '라트비아 공화국 독립선언'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선언은 라트비아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실상 소련에게 점령당했지만 이 병합은 불법이며 라트비아 국민의 의지에 반한 것이었으므로 주권국으로 독립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1920년 라트비아-소련 리가 평화 조약에 기반하여 소련과의 관계를 맺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5월 4일은 라트비아 독립기념일이 되었습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 의장 선출되며 고르바초프의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
고르바초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민주적이고 급진적인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후 소련 중앙정부와 러시아 공화국 간의 새로운 정치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소련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옐친의 권력 강화를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키르기스스탄 오시 봉기, 민족분규로 300명 이상 사망]
키르기스스탄 오시에서 키르기스인 민족 단체 '오시 야마히'와 우즈베크인 민족 단체 '아돌라트' 사이에 과거 집단농장 토지 관할권 분쟁으로 '오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봉기는 키르기스 전역으로 퍼져 수도 프룬제에도 공산당 본부 점령 시도가 있는 등 키르기스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 사이의 내전으로 번졌습니다.
이 충돌로 300명이 사망하고 462명이 중상을 입는 등 1,300명 이상이 사상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독립정교회,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완전 독립' 선언]
미국에 있는 미국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므스티슬라우가 우크라이나 독립정교회 첫 시노드에서 '총대주교 자리로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필라레트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자치권을 얻은 데 이어, 6월에는 우크라이나 독립정교회가 러시아 정교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정신적 독립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러시아 주권 선언 및 옐친의 공산당 탈당 선언]
러시아 인민대표대회가 '러시아가 주권 국가임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소련 해체를 가속화하는 핵심적인 조치 중 하나였습니다.
한 달 후인 7월 12일, 옐친은 소련 공산당 제28차 대회 연설에서 '소련 공산당을 탈당하겠다'는 발표를 하며 소련 중앙 정부와의 결별 의지를 명확히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압도적 찬성'으로 주권 선언 통과]
우크라이나 주권 선언 안건이 찬성 355표, 반대 4표의 '압도적 찬성율'로 통과되었습니다.
인민대표대회는 7월 16일을 우크라이나 국경일로 선포하며, 소련으로부터의 '주권 회복' 의지를 명확히 했습니다.
[루흐 전선, '우크라이나 독립국가 건국' 공식 선포]
루흐 전선이 두 번째 총회를 개최하고 이 자리에서 전선의 주요 목적이 '우크라이나의 독립국가 건국'임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우크라이나 내 민족주의 운동이 독립을 최종 목표로 삼았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중대한 사건입니다.
1991
[소련군, 리투아니아 TV 타워 습격 '1월 사건' 발생]
소련군과 KGB 특수부대 알파 그룹이 리투아니아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빌뉴스 TV 방송타워를 습격했습니다.
이 충돌로 민간인 1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건은 '1월 사건'으로 불리며 국제 사회에서 소련의 입장을 악화시키고 리투아니아의 저항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습니다.
[소련 연방 유지 국민투표 실시, 일부 공화국 보이콧]
소련 연방 전체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76.4%가 '개혁된 소련 유지'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발트 공화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몰다비아 공화국과 체첸-인구시 자치공화국은 이 국민투표를 보이콧했습니다.
이는 소련 내에서도 연방 유지에 대한 균열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습니다.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최초' 민주 선거로 대통령 당선]
러시아에서 '최초로' 열린 대통령 민주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이 58.6%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옐친이 당선된 후, 러시아는 즉시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선거 운동에서 소련의 '중앙정부 독재'를 비판하며 개혁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8월 쿠데타' 발생, 소련 보수파의 최후의 발악과 실패]
소련 부통령 겐나디 야나예프, 총리 발렌틴 파블로프, 국방부 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KGB 국장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등 고위 관리들이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조직하여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크림반도 별장에 연금시키고 통신선을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기 위한 '보수파의 쿠데타 시도'였습니다.
쿠데타 지도자들은 모든 정치활동을 엄금하고 언론 운영을 중단하는 긴급 조치를 발령했지만,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대통령 옐친은 쿠데타 세력을 비판하며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모스크바 시민 수천 명이 옐친의 사무실이 있던 벨리 돔을 지켰습니다.
쿠데타 세력은 옐친 체포에 실패했고, 대원들은 건물 장악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또한 외국 방송 전파방해를 하지 않아 시민들이 CNN 등을 통해 소식을 접할 수 있었으며, 연금된 고르바초프도 BBC 라디오를 청취하며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3일 후인 8월 21일 쿠데타는 실패했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으며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직에 복귀했으나 사실상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에스토니아, 8월 쿠데타 중 독립 선포 및 TV탑 장악 시도]
에스토니아가 8월 쿠데타가 진행되는 도중인 오후 11시 3분(탈린 시각)에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많은 에스토니아인들이 탈린 텔레비전탑으로 몰려가 소련군이 포위 점령하기 전에 먼저 장악하여 통신을 끊으려 시도했습니다.
에드가르 사비사르가 소련군과 10분간 대치한 후, 소련군은 에스토니아인에 대한 저항에 실패하고 탈린에서 물러났습니다.
[라트비아 '바리케이드 사건' 발생, 소련군 유혈 진압]
리투아니아에서 유혈 충돌이 일어난 후, 라트비아군은 즉시 리가에서 주요 도로와 다리 곳곳을 바리케이드로 막아 방어하는 '바리케이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1월 20일 소련군이 라트비아 내무부 건물을 공격하여 유혈로 장악, 민간인 4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해산 및 사임,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해산시키고 당서기 직에서 사임했으며, 연방 정부 내 모든 공산당 조직을 해체시켰습니다.
같은 날, 우크라이나 의회가 찬성 321표, 반대 2표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을 통과했습니다.
이는 소련을 지배해온 공산주의 통치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소련 최고 소비에트, 공산당 활동 '무기한 중지' 결정]
소련 최고 소비에트가 소련 영토 내에서 공산당 활동을 '무기한 중지'시키면서, 70여 년간 소련을 지배해온 '공산주의 통치가 막을 내렸습니다.' 이는 소련의 정치 체제가 완전히 전환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조치였습니다.
[발트 3국, 유엔에 가입하며 국제적 독립 승인]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09호, 제710호, 제711호가 투표 없이 통과되고 유엔 총회 결의 46/4, 46/5, 46/6이 통과되면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유엔에 가입'했습니다.
이는 이들 발트 3국의 국제적인 독립국 승인을 의미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독립 투표 압도적 찬성, 소련 붕괴 최종장 돌입]
'우크라이나 독립 투표'에서 유권자의 '90%가 독립에 찬성'했습니다.
경제력과 정치력 면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2위 세력을 가지던 우크라이나가 탈퇴함으로써, 소련을 일부 제한된 규모로라도 유지하고자 했던 고르바초프의 노력은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는 소련 붕괴의 '최종장'을 알리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벨라베자 조약 서명, 소련 해체 공식 선언 및 CIS 창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개 공화국 정상이 벨라루스 서부 비아워비에자 숲에서 비밀리에 만나, '소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이를 '독립국가연합(CIS)이 이어받았다고 합의'한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이 조약은 소련 붕괴를 법적으로 공식화한 '최초의 문서'입니다.
조약 전문에는 "소련은 국제법 및 지정학적 현실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었습니다.
[러시아, 벨라베자 조약 비준 및 소련 연방 조약 폐기]
러시아 SFSR 최고 소비에트가 '벨라베자 조약을 공식적으로 비준'하고 '1922년 연방 조약을 폐기'했습니다.
또한 러시아 대표단이 소련 최고 소비에트에서 각 공화국으로 소환되어 떠났습니다.
이는 소련 해체를 기정사실화한 러시아의 '결정적인 법적 조치'였으며, 소련 연방정부는 더 이상 이를 반대할 영향력이 없었습니다.
이날 늦게 고르바초프는 처음으로 사임하겠다는 암시를 했습니다.
[알마아타 조약 서명, 소련 해체 최종 확인 및 CIS 창설]
소련의 12개 공화국 중 조지아를 제외한 11개 공화국 정상이 모여 '알마아타 조약'에 서명하며 '소련 해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조약에는 고르바초프의 사임을 '승인'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소련 해체를 최종적으로 확정 짓는 '쐐기'를 박았습니다.
[러시아, 유엔에 소련의 권한 승계 공식 통보]
러시아 연방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포함한 소련의 모든 유엔 회원국 권리를 러시아가 승계'한다는 결정을 독립국가연합의 기타 11개국이 지지한다고 통보했습니다.
이는 러시아가 소련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을 공식적으로 승계하는' 중요한 절차였습니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직 사임, 소련 국기 하강 및 러시아 국기 게양]
저녁 7시, 고르바초프가 전국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대통령직으로서의 활동을 중지한다'고 밝히며 '대통령직 사임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는 연방 내각을 해체하고 핵무기 권한을 포함한 권력을 옐친에게 양도했습니다.
오후 7시 32분, 모스크바 크렘린에 마지막으로 소련의 국기가 내려갔으며, 오후 11시 40분 그 자리에 러시아 삼색기가 게양되면서 '소련의 상징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소련 최고 소비에트 연방회의 해체 투표 가결, 카자흐스탄 독립 선언]
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원 격인 '연방회의'가 소련 및 연방회의 '자신에 대한 해체 투표'를 열어 이를 가결했습니다.
이는 소련을 구성하던 '최고 입법 기관의 공식적인 소멸'을 의미했습니다.
같은 날 카자흐스탄도 독립을 선언하며 소련의 마지막 구성 공화국으로서의 역할을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