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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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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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영국의 해외 영토, 화산섬, 유배지 + 카테고리
남대서양에 위치한 고립된 화산섬으로, 포르투갈 항해사들에 의해 발견된 이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의 중요한 기항지로 기능했습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거쳐 영국 왕실 직할 식민지가 되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 곳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보어 전쟁 포로 수용소 등 영국의 다목적 거점으로 활용되다가, 현재는 '세인트헬레나 어센션 트리스탄다쿠냐'라는 동등한 권리의 영국 해외 영토로 통합되어 독자적인 헌법과 자치 내각을 갖춘 지역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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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502

[포르투갈 항해사에 의한 첫 발견]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향하던 함대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무인도였던 이 섬은 풍부한 나무와 맑은 물을 갖추고 있어 훗날 긴 항해를 하는 배들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오랜 전통에 따르면 갈리시아 출신의 포르투갈 항해사 주앙 다 노바(João da Nova)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헬레나를 기리기 위해 이 섬을 명명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영구적인 정착지를 세우지는 않았으나, 훗날 방문할 선원들의 식량 공급 및 건강 회복을 위해 섬에 가축을 풀어놓고 과일나무를 심었습니다.

1633

[네덜란드의 공식 영유권 주장]

동아시아 무역을 확장하던 새로운 해상 강국이 섬에 대한 공식적인 영유권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점유나 정착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후 다른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섬에 대한 관심이 식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섬의 전략적 가치를 눈여겨보고 공식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실제로 섬을 무력 점령했다는 증거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가 남아프리카 희망봉에 더 큰 식민지를 세우는 데 집중하면서 세인트헬레나에 대한 지배 시도는 무산되었습니다.

1657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권 획득]

영국의 호국경이 동인도 회사에게 섬을 통치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허장을 부여했습니다. 이로써 섬은 상업 회사의 통제 아래 놓이며 요새화 및 본격적인 이주민 정착 계획의 첫 발을 떼게 됩니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이 영국 동인도 회사(EIC)에 통치 헌장을 하사했으며, 회사는 다음 해에 섬을 요새화하고 농장주들을 정착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세인트헬레나가 영국의 공식적인 식민지 거점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결정적인 행정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1659

[첫 총독 파견과 제임스타운 건설]

초대 총독이 섬에 도착하면서 유럽, 북미, 카리브해 이외의 지역에서 영국의 가장 오래된 식민지 중 하나가 탄생했습니다. 좁은 계곡 사이로 요새와 가옥들이 들어서며 훗날 수도가 될 최초의 정착촌이 건설되었습니다.
존 더턴(John Dutton) 대령이 첫 총독으로 부임하여 가파른 절벽 사이의 좁은 계곡에 정착지를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정 복고 이후 영국의 국왕 제임스 2세(요크 공작)의 이름을 따서 이 요새는 제임스 요새(James Fort), 마을은 제임스타운(Jamestown)으로 공식 명명되었습니다.

1673

[네덜란드의 침공과 영국의 탈환]

경쟁 국가의 무장 회사가 섬을 기습적으로 침공하여 잠시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통제권을 되찾았고, 이후 섬의 방어가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1673년 1월부터 5월 사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일시적으로 섬을 점령했지만, 5월에 도착한 영국 증원군에 의해 지배권을 곧바로 빼앗겼습니다. 이 침공 사건을 뼈저리게 겪은 영국은 이후 외세의 공격에 대비하여 섬 곳곳에 약 230개의 포탑을 설치하는 등 방어 시설을 대대적으로 보강했습니다.

1775

[제임스 쿡 선장의 방문]

세계를 일주하던 영국의 전설적인 탐험가가 두 번째 항해의 막바지에 이 섬을 방문했습니다. 이 시기 섬은 생태적 어려움과 인구 불만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점진적인 번영의 시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역사적인 2차 세계 일주 항해의 귀환길에 기항하며 섬의 상태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당시 18세기 총독들이 병원 건립, 부패 근절, 조림 사업 등을 통해 적극적인 행정 개혁을 펼친 덕분에 1770년경부터 섬은 상당한 안정과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181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영구 유배]

유럽을 뒤흔들었던 몰락한 프랑스의 황제가 이 외딴섬으로 영구 유배 조치되었습니다. 그의 탈출을 막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병력과 군함이 섬 안팎에 배치되면서 고요했던 섬은 세계의 이목을 끄는 철통같은 감옥으로 변모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최종 패배한 나폴레옹은 1815년 섬으로 이송되어 롱우드 하우스(Longwood House)라는 저택에 구금되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그의 도주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막대한 수의 육군 병력과 해군 함정을 배치했으며, 이로 인해 일시적으로 섬의 인구와 경제 활동이 크게 팽창했습니다.

1821

[나폴레옹의 죽음과 군대 철수]

수년간 섬에 유배되어 있던 전직 황제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감시 대상이 사라지자 섬에 주둔하던 대규모 군대와 임시 거주자들이 일제히 본국으로 철수했으며, 통치권은 다시 상업 회사로 온전히 반환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이 5년 반 동안의 유배 생활을 끝으로 사망하자, 그를 감시할 목적으로 배치되었던 수비대와 관련 인원들이 대거 섬을 떠났습니다. 이후 동인도 회사는 1815년부터 1831년까지 희망봉과 섬 사이를 오가는 전용 정기선 '세인트헬레나호'를 운영하는 등 섬의 단독 관리를 재개했습니다.

1827

[선도적인 노예 해방 단행]

영국 본국에서 노예제 폐지 법안이 통과되기 수년 전, 섬 내부에서 선도적인 조치가 이루어졌습니다. 수백 명에 달하는 섬의 거주 노예들에 대해 단계적인 해방이 실시되어 인권 측면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미 1792년부터 새로운 노예 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1818년에 노예의 자녀들을 해방시켰던 총독부는 자체적인 개혁을 이어갔습니다. 영국 의회의 공식적인 노예제 폐지 법안 제정보다 무려 6년 앞선 1827년에, 섬에 거주하던 800명 이상의 노예를 단계적으로 완전히 해방시키는 성과를 냈습니다.

1834

[영국 왕실 직할 식민지로의 전환]

제정된 법률의 조항에 따라 상업 회사의 지배가 끝나고 영국 왕실이 직접 섬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대대적인 행정 비용 삭감이 이루어지면서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떠나는 주민들이 늘어나 장기적인 인구 감소 사태가 촉발되었습니다.
1833년에 제정되어 이듬해 발효된 인도법(India Act)에 따라 섬의 지배권이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영국 왕실로 공식 이전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증기선의 발달과 수에즈 운하 개통 등으로 기존 무역 항로가 우회되면서 섬의 경제적 위상은 크게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840

[노예 무역 억제용 해군 기지 설립]

대서양을 횡단하는 불법적인 노예 무역을 소탕하기 위해 영국 해군의 군사 기지가 섬에 세워졌습니다. 노예선에서 구출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어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이 해군 기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840년부터 1849년 사이, 불법 노예선에서 풀려난 15,000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섬에 무사히 하선했습니다. 이는 영국의 대서양 노예제 근절 노력에 있어서 세인트헬레나가 인도적,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기지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1900

[보어 전쟁 포로 수용소 운영]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의 여파로 수천 명의 적군 포로들이 이 섬으로 호송되어 집중 수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때 인구가 급격히 폭증하여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6,000명이 넘는 보어인 포로들이 이 섬에 수용되었으며, 패르데베르크 전투에서 패한 피에트 크론제 장군 부부 등 거물급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포로와 호송 인원들의 유입으로 1901년 무렵 섬의 전체 인구는 사상 최대치인 9,850명에 달했습니다.

1906

[영국 수비대 철수와 경제 침체]

영국 정부가 비용 절감을 이유로 섬에 오랫동안 머물던 군대 수비대를 완전히 철수시켰습니다. 군인들이 창출하던 현지 소비가 일순간에 끊기면서 지역 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수비대 철수 후 파탄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1907년경부터 뉴질랜드 아마(flax)를 이용한 섬유 제조 산업이 육성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중 상당한 수입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 산업마저 1951년 이후 합성 섬유와의 경쟁에 밀리고 높은 운송비에 부딪혀 결국 완전히 폐쇄되는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1922

[어센션섬의 속령 편입]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던 인근의 화산섬이 공식적으로 이 지역의 행정 관할 하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영국의 남대서양 해외 영토들을 하나로 묶어 관리하는 거시적 통합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어센션섬(Ascension Island)이 세인트헬레나의 속령으로 지정된 것에 이어, 1938년에는 트리스탄다쿠냐(Tristan da Cunha) 제도 역시 이곳의 속령으로 편입되었습니다. 훗날 이 세 지역은 상하관계가 아닌 동등한 지위를 가진 연합 형태의 해외 영토로 민주적인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1981

[영국 속령으로의 지위 재분류]

영국 본국의 국적법 개정에 따라 기존의 직할 식민지에서 영국 속령으로 지위가 새롭게 재분류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본국 내 거주권 등의 핵심 권리가 제한되는 큰 불편을 겪어야 했습니다.
1981년 영국 국적법(British Nationality Act 1981) 시행 이후 섬 주민들은 일자리 부족과 저임금 문제에 시달렸으며, 돈을 벌기 위해 포클랜드 제도나 어센션섬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잦아졌습니다. 주민들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리고 침체된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1988년에 경제기획부를 신설하여 지원에 나섰습니다.

1989

[신규 헌법 발효 및 여객선 진수]

선출직 의원들로 구성된 행정 및 입법 위원회를 명시한 새로운 자체 헌법이 효력을 발생했습니다. 같은 해 섬의 고립을 막기 위해 본국과 아프리카를 잇는 최신식 혼합 화물여객선이 성공적으로 진수되었습니다.
영국의 앤드루 왕자(요크 공작)가 새롭게 건조된 'RMS 세인트헬레나(RMS St Helena)' 호를 직접 진수시켰으며, 이 배는 카디프와 케이프타운을 잇는 필수 해상 항로에 투입되었습니다. 더불어 총독 산하에 선출직 의회를 도입하여 주민 자치를 보장하는 새로운 1989년 헌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2002

[완전한 영국 시민권의 회복]

영국 의회에서 통과된 새로운 영토 법안에 따라 섬 주민들은 과거 박탈당했던 완전한 영국 시민권을 다시 부여받았습니다. 또한 영토의 공식 행정 명칭 역시 해외 영토로 승격되며 새로운 시대의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2002년 영국 해외 영토법(British Overseas Territories Act 2002) 시행을 통해 오랫동안 소외받던 주민들의 권리가 완전히 복원되었습니다. 이는 1992년 설립된 시민권 위원회를 비롯한 현지인들의 지속적인 권리 회복 운동이 마침내 맺은 소중한 결실이었습니다.

2009

[3개 섬 동등 지위의 헌법 제정]

헌법 개정을 통해 기존에 속령으로 취급받던 다른 두 개의 인근 섬들과 완전히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영토의 공식 명칭 또한 세 개의 섬 이름이 나란히 병기되는 평등한 형태로 새롭게 개편되었습니다.
새로운 2009년 헌법 명령(Constitution Order 2009)을 통해 세인트헬레나, 어센션, 트리스탄다쿠냐가 각각 평등한 법적 권한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영토의 명칭도 '세인트헬레나 어센션 트리스탄다쿠냐(Saint Helena, Ascension and Tristan da Cunha)'로 변경되며 연대 의식을 강화했습니다.

2021

[자치 내각 장관제 도입]

영국 본국의 헌법 개정 승인을 거쳐 섬 내부에 내각 책임제 형태의 장관 시스템이 최초로 도입되었습니다. 이로써 지역 정치의 자주권과 실질적인 행정적 전문성이 한층 더 굳건하게 확립되었습니다.
행정 위원회 체제를 개편하여 수석 장관(Chief Minister)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적인 내각제가 채택되었습니다. 초대 수석 장관 및 후임자들이 섬의 내부 정치와 경제 정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며 자치 역량이 한 단계 크게 도약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2024

[에드워드 왕자의 공식 방문]

영국의 주요 왕실 인사가 수십 년 만에 섬을 공식 방문하여 주민들과 소통하고 섬의 주요 시설들을 직접 시찰했습니다. 그는 수도에서 격려 연설을 하고 새로 건립된 현대식 공항의 공식 개항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2002년 앤 공주 방문 이후 이루어진 첫 주요 왕실 방문으로, 에든버러 공작 에드워드 왕자가 주민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방문 기간 동안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령 육상 동물로 등재된 191세의 코끼리거북 '조나단(Jonathan)'을 만나는 등 섬의 고유한 생태 및 문화유산들을 두루 둘러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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