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주 갱스부르
연표
1918
1896년 3월 27일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난 세르주 갱스부르의 아버지 조제프 갱스부르와 메조소프라노였던 어머니 브뤼샤 고다 베스망(올가)은 크리미아에서 만나 1918년 6월 17일 결혼했습니다.
1921
1919년 조제프와 올가 부부는 적백내전과 볼셰비키 독재를 피해 우크라이나 오데사를 떠나 조지아, 이스탄불을 거쳐 1921년 프랑스 마르세유를 통해 파리에 정착하게 됩니다.
1928
[세르주 갱스부르 탄생]
파리 4구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부모님 사이에서 뤼시앵 갱스부르라는 본명으로 태어납니다. 이란성 쌍둥이 릴리안의 형제였습니다.
1928년 4월 2일,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로 파리 4구 시테섬의 오텔듀 드 파리 산과 병원에서 이란성 쌍둥이 릴리안과 뤼시앵(세르주 갱스부르의 본명)이 태어납니다.
1932
쟁스부르 가족은 1932년 6월 9일 프랑스 국적을 획득했습니다.
1941
1941년 여름이 시작되자, 독일의 프랑스 점령 시절 뤼시앵은 '노란 별'을 차야만 했고, 부모와 함께 쿠르제나르의 '바스티에르'라 불리던 장소로 피난을 갔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술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아버지 조제프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습니다.
1942
유대인 예술 관련 직업 금지로 인해 갱스부르의 아버지는 직업을 얻고 곤궁에서 벗어나고자 1942년 자유 지역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1944
[게슈타포의 위협과 생존자의 의식]
게슈타포가 기숙학교에 유대인 아이가 있는지를 확인하러 들이닥쳐 숲에 숨어 밤을 지새우는 공포스러운 경험을 합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자신이 생존자임을 의식하며 살게 됩니다.
생레오나르드노블라의 예수회 콜레쥬에서 가짜 신분의 기숙생으로 지내던 어느 날 저녁, 게슈타포가 그곳에서 유대인 아이를 보호하고 있지는 않은가 확인하려고 들이닥쳤습니다. 기숙학교 주임들은 그를 숲에 홀로 숨겼고 그곳에서 그는 죽거나 잡히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내내 지새웠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그는 자신이 생존자라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게 됩니다.
[위조 여권으로 망명]
수도 파리에서 경찰의 검문이 많아지자, 위조 여권으로 가족 모두 리모쥬에서 아버지와 재회한 뒤 생시르로 망명합니다.
수도 파리에서 경찰의 검문이 점점 많아졌고, 갱스부르 가족 전체는 위조 여권과 함께 1944년 1월에 리모쥬 지방에서 그의 아버지와 마침내 재회했습니다. 그들은 김바르라는 가짜 성씨를 쓰면서 오트비엔의 생시르로 망명했고, 딸들은 종교 학교에, 뤼시앵은 예수회 콜레쥬에 가짜 신분의 기숙생으로 보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갱스부르 가족은 비시 정부가 설립한, 그들을 '국익과 무관한 이스라엘인'으로 간주한 특별위원회에 의해 프랑스 국적을 박탈당합니다. 이 위원회의 보고 문건은 2010년에야 밝혀졌으며, 세르주 갱스부르는 이 국적 박탈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1945
프랑스 해방 이후 파리로 돌아온 갱스부르 가족은 파리 16구 뷔조가 55번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뤼시앵은 리세 콩도르세에서 바칼로레아를 치루기 전까지는 성적이 부진했습니다.
1947
뤼시앵은 에콜 데 보자르(국립 고등 미술 학교)에 들어갔고, 그의 회화 교수 앙드레 로트와 페르디낭 레제가 있던 아카데미 드 몽마르트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는 1947년 3월 5일 초현실주의자들과 친분이 있던 러시아 귀족의 딸이자, 훗날 뤼시앵 자신의 아내가 될 엘리자베트 레비츠키와 아카데미 드 몽마르트르에서 만났습니다.
1948
1948년은 뤼시앵에게 중요한 해였습니다. 그는 쿠르브부아에 소재한, 이후 명령 불복종으로 영창을 자주 가게 될 93 보병연대에 징집되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알코올에 빠지게 됩니다. 허가 없이 군 동료들과 와인에 취했으며, 이 시기에 기타 치는 법을 배웠습니다.
1957
1957년부터 1991년까지 싱어송라이터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했습니다.
1958
1958년 첫 스튜디오 앨범인 'Du chant à la une !'를 발매했습니다.
1965
[유로비전 우승곡 작곡]
프랑스 갈이 갱스부르가 작곡한 '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으로 유로비전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쥘리에트 그레코와 페툴라 클라크 등을 위해 작곡한 곡들로 첫 성공을 거둔 갱스부르는 프랑수아즈 아르디, 특히 프랑스 갈에게 써준 곡들 덕분에 대중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합니다. 프랑스 갈은 갱스부르가 작곡한 열 곡 중 선택된 '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이라는 제목의 곡으로 1965년 3월 20일 유로비전 콩쿠르 대상을 타게 됩니다. 이 샹송은 프랑스 갈에게 일본에서까지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게 해주었습니다.
1966
[프랑스 갈과의 작업 및 <세기의 사진>]
프랑스 갈을 위해 'Baby Pop'과 'Les Sucettes'를 작곡하고, 프랑스 예예 스타들이 모인 <세기의 사진>에 모습을 보입니다.
갱스부르는 1966년 프랑스 갈에게 또 한 번 'Baby Pop'과 'Les Sucettes'라는 곡들을 써줍니다. 그는 1966년 4월 프랑스 예예 스타(프랑스 갈 포함)들이 모인 <세기의 사진>에서도 모습을 보였습니다.
1968
['Bonnie and Clyde' 빌보드 차트 진입]
브리짓 바르도와 함께 작업한 'Bonnie and Clyde' 앨범이 빌보드 200에서 12위를 기록하며 미국에서 수백만 장이 팔리는 국제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프랑스어권을 벗어나면 그의 명성은 음악 관련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한정되어 있으나, 그는 1968년에 빌보드 200에서 12위를 한 보니 앤 클라이드(브리짓 바르도와 함께) 앨범으로 미국에서 수백만 장을 팔며 성공을 거둡니다.
1970
['Je t'aime… moi non plus' 세계적 성공]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Je t'aime… moi non plus'가 라디오 송출 제한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핫 100에서 58위, 영국에서는 음반 판매량 1위를 기록하며 세계적인 히트를 칩니다.
그의 노래 'Je t'aime… moi non plus'는 라디오 곡 송출에 제한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핫 100에서 58위를 기록했으며, 영국에서는 음반 판매량 1위를 기록하며 더 큰 성공을 거둡니다. 그의 연주는 미국에서 프랑스어 노래로 벨기에 여가수 쇠르 수리르의 음반들과 비견될 정도입니다.
1991
세르주 갱스부르는 1991년 3월 2일 파리 7구에 위치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