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고에 겐사쿠

num_of_likes 59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세고에 겐사쿠
바둑 기사, 프로 기사, 일본기원 이사장, 작가 + 카테고리
일본 다이쇼 및 쇼와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바둑 기사이자 일본기원의 설립과 재건을 주도한 '일본기원의 아버지'입니다. 뛰어난 기력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바둑 제도를 확립하고 수많은 바둑 서적을 집필하며 바둑의 대중화와 체계화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천재 기사 우칭위안과 조훈현, 하시모토 우타로 등을 발굴해 길러낸 안목은 세계 바둑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원폭 대국이라는 끔찍한 역사의 현장에서도 바둑을 지켜냈으며, 한평생 바둑 보급과 국제 교류에 헌신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889

[세고에 겐사쿠 출생]

일본 히로시마현 사에키군 노미무라(현 에타지마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도의회 의원을 지낸 유복한 집안의 차남으로 자랐습니다.
그가 자란 노미 섬은 예로부터 바둑이 매우 성행하던 지역이었습니다. 혼인보 슈겐에게 초단 인가를 받을 정도로 바둑 애호가였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깊이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1894

[바둑 첫 입문]

5세 무렵 눈과 귀의 병을 앓아 집에 머무는 동안 할아버지로부터 처음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를 계기로 바둑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됩니다.
신체적 아픔을 잊기 위해 시작한 바둑이었으나 타고난 기재를 발휘하며 빠르게 실력이 성장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이미 아마추어 2~3단 수준의 어른들과 호각으로 다툴 정도로 실력이 발전했습니다.

1905

[고베에서의 지도 대국]

중학교 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어머니의 고향인 고베에서 당대 이름난 실력자들에게 직접 바둑 지도를 받았습니다. 여러 전문가들과 대국하며 실전 감각을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나카네 호지로, 아베 카메지로, 고하라 요시타로, 하시모토 토자부로 등에게 3점 혹은 2점 접바둑으로 지도를 받았습니다. 이 경험은 우물 안 개구리였던 소년에게 더 큰 목표를 심어주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09

[도쿄 상경 및 호엔샤 입사]

중학교 졸업 후 아버지가 친분이 있던 현의원 모치즈키 케이스케의 권유로 20세의 나이에 도쿄로 상경하여 바둑 단체 호엔샤(방원사)에 정식으로 입사했습니다. 당시 권력의 중심이던 혼인보 가문을 타도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었습니다.
당시 호엔샤는 일본 최고 권위의 바둑 가문인 혼인보와 치열하게 대립하던 세력이었습니다. 호엔샤에 가입하여 제일인자 혼인보 슈사이를 꺾어보라는 모치즈키의 강력한 권유가 그를 본격적인 프로 바둑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다카베 4단과의 전격 쟁기]

도쿄 아사히 신문이 주최한 기전에 무단(단급 없음) 자격으로 출전하여 다카베 도헤이 4단을 상대로 선(先)으로 대국해 4집 승리를 거두는 엄청난 이변을 연출했습니다.
이 대국은 '4단과 무단의 쟁기'로 세상에 크게 선전되며 바둑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무명의 청년이었던 그의 이름이 일약 당대 최고 유망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비약적인 3단 특별 승단]

병역 의무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치른 스즈키 다메지로 3단과의 특별 시험기에서 선상선(先相先)으로 4승 2패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단숨에 프로 3단으로 뛰어오르는 파격적인 승단을 이뤄냈습니다.
정상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초단, 2단을 건너뛰어 곧바로 3단으로 인가받은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한 천재 청년의 파격적인 월반은 당시 일본 바둑계에 커다란 화제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911

[위기습격전법 집필 출간]

자신의 바둑 전술과 기보를 엮은 저서 '위기습격전법'을 시분칸을 통해 출판하며 이론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바둑 기술 서적의 보급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둑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그 성과를 대중과 공유하려는 학구적인 열정이 돋보이는 행보였습니다. 이후 평생에 걸쳐 수많은 바둑 명저를 집필하는 작가적 커리어의 뜻깊은 첫 결과물입니다.

1912

[프로 4단 승단]

꾸준히 좋은 성적을 누적하며 마침내 프로 4단으로 정식 승단했습니다. 신예를 넘어 안정적인 중견 강자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3단 특별 승단 이후에도 자만하지 않고 실력을 갈고닦으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기력을 더욱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이 시기를 거치며 호엔샤의 핵심 기사로 거듭났습니다.

1917

[프로 5단 승단]

바둑 기사로서 중요한 변곡점이라 할 수 있는 프로 5단으로 승단하며 정상급 기사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단위가 올라감에 따라 당대의 최고수들과 팽팽하게 겨룰 수 있는 자격과 실력을 모두 갖추게 되었습니다. 당대 일본 바둑계를 이끄는 핵심 인물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장고객결전록 출간]

젊은 기사들의 치열한 대국 기보와 해설을 엮은 저서 '소장고객결전록'을 하쿠분칸에서 출판했습니다. 바둑 출판 시장에서의 입지를 꾸준히 다졌습니다.
단순한 기술 해설을 넘어 당시 바둑계의 역동적인 분위기와 신예 기사들의 분투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이 엿보입니다. 바둑 팬들에게 수준 높은 해설을 제공하며 저변 확대에 기여했습니다.

1919

[만주 및 중국 방문]

국경을 넘어 만주와 중국 대륙을 널리 방문하며 해외 바둑 교류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각지의 바둑 애호가들과 소통하며 국제적인 안목을 키웠습니다.
이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 바둑을 보급하고 해외의 실력자들을 파악하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과 인맥은 훗날 천재 소년 우칭위안을 일본으로 초청하는 결정적인 바탕이 되었습니다.

1920

[신진고객쟁패전 출간]

신진 기사들의 대결을 심도 있게 분석한 책 '신진고객쟁패전'을 시분칸에서 연달아 펴내며 저술 활동을 왕성하게 이어나갔습니다.
바둑 이론의 정립과 기보 해설에 남다른 재능이 있음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당시 바둑 팬들에게 매우 귀중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혼인보 슈사이와의 대결 승리]

당대 절대 1인자였던 혼인보 슈사이 명인과의 두 차례 대국에서 선(先)으로 두어 177수 만에 통쾌한 흑 불계승을 거두었습니다.
1월 17일과 27일에 걸쳐 만초호 주최로 치러진 대국이었습니다. 서반부터 주도권을 쥐고 명인을 상대로 당당하게 밀어붙여 압승을 거둠으로써 명인의 철권통치에 강력한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1921

[프로 6단 승단 및 비성회 설립]

6단으로 전격 승단함과 동시에 가리가네 준이치, 스즈키 다메지로 등과 뜻을 모아 봉건적인 바둑계의 악습을 타파하고자 새로운 단체인 '비성회(裨聖会)'를 결성했습니다.
비성회는 총호선(맞바둑) 제도의 도입과 제한 시간제 채용 등 현대 바둑 대회의 근간이 되는 파격적인 시스템을 선제적으로 도입했습니다. 구태의연한 가문 중심의 바둑계에 신선하고 거대한 개혁의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1924

[일본기원 설립 주도]

관동대지진 이후 뿔뿔이 흩어지고 분열된 바둑계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막후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대재벌 오쿠라 기하치로를 후원자로 끌어들이고 마침내 '일본기원'을 창설했습니다.
오랜 원수 지간이었던 혼인보 파벌과 호엔샤 파벌을 극적으로 화해시키고 하나의 거대한 통일 기구를 만들어냈습니다. 일본 바둑이 근대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위대한 업적입니다.

1926

[프로 7단 승단 및 원사대항전]

일본기원의 추천을 받아 고단자인 7단으로 승단하는 명예를 안았습니다. 또한 기정사(棋正社)와의 원사대항전에 출전하여 팽팽한 명승부를 펼쳤습니다.
오노다 치요타로와의 대국에서는 아쉽게 패배했으나, 일본기원을 대표하는 최상위 간판 기사로서 파벌 간의 자존심을 건 승부의 전면에 나서는 막중한 역할을 흔들림 없이 수행했습니다.

1927

[동서대항전 동군 주장 및 갑조 우승]

승단 대회인 오테아이(대수합)에 도입된 흥미로운 기획인 동서대항전에서 동군을 대표하는 주장으로 선발되어 크게 맹활약했습니다. 하반기 대수합에서는 영광스러운 갑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당시 서군 주장 스즈키 다메지로와 함께 대회를 성황리에 이끄는 흥행 보증수표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선수로서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압도적인 성적으로 동료 기사들을 리드했습니다.

1928

[천재 소년 우칭위안 영입]

중국에서 천재 소년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접하고 백방으로 손을 써 우칭위안(오청원)을 일본으로 전격 초청하였으며, 그를 자신의 문하생으로 거두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칭위안의 재능을 첫눈에 꿰뚫어 보고 그가 일본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하며 바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경제적,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선택은 훗날 일본은 물론 세계 바둑사에 가장 빛나는 획을 긋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만년패 분규 사건]

가을 대수합에서 8단 승단을 눈앞에 두고 치른 다카하시 시게유키와의 대국 중 극히 희귀한 형태인 만년패 문제가 발생하여 승패 판정이 일시 보류되는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바둑 규칙의 빈틈이 드러난 이 사건으로 인해 심판위원회가 열리는 등 바둑계가 크게 들썩였습니다. 결국 멘탈이 흔들린 탓에 다음 대국인 미야사카 신지 전에서 패배하며 아쉽게 8단 승단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어야만 했습니다.

1939

[제1기 본인방전(혼인보전) 참전]

개인 가문 세습제에서 실력주의 토너먼트제로 완전히 탈바꿈한 일본 최초의 실력제 타이틀전인 제1기 본인방전에 당당히 참가했습니다.
치열한 예선과 본선을 뚫고 최종 토너먼트인 제4차전까지 진출하여 2위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기사들과 대등하게 맞서 싸우며 녹슬지 않은 막강한 기력을 과시했습니다.

1942

[8단 특별 추대 및 중국 위문 방문]

과거 대수합의 억울한 실패를 보상받듯, 그간의 눈부신 성적과 공로를 높이 인정받아 스즈키 다메지로, 가토 신과 함께 8단으로 공식 추대되었습니다. 이어 수제자 오청원 등과 함께 아오키 가즈오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험난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징용된 병사들을 위문하고 바둑 교류를 이어가기 위해 대륙을 순회했습니다. 이는 바둑을 통한 민간 외교의 중요한 사례로 꼽힙니다.

1944

[준명인전 출장]

태평양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워져 일본 본토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던 와중에도 최고 권위의 기전 중 하나인 준명인전에 출장하여 혼신의 대국을 펼쳤습니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극한의 전시 상황 속에서도 바둑의 명맥을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원로 기사의 처절한 사명감과 투혼이 고스란히 빛나는 행보였습니다.

1945

[일본기원 회관 전소의 아픔]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의 무자비한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자신의 피땀으로 세운 아카사카의 일본기원 회관 건물이 잿더미로 변하는 비극을 목도했습니다.
건물뿐만 아니라 진귀한 명반과 기구들, 그리고 수많은 귀중한 역사적 기록물들이 한순간에 소실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 바둑계로서는 모든 인프라를 잃어버린 캄캄한 절망의 순간이었습니다.

[히로시마 원폭 대국 주도]

공습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히로시마로 피난을 내려간 상태에서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제3기 본인방전 대국을 교외에서 극적으로 성사시켰습니다. 그러나 대국 도중 끔찍한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사상 초유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제자 하시모토 우타로와 이와모토 가오루의 대국 도중 강렬한 원폭의 폭풍이 들이닥쳐 대국장이 박살 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셋째 아들과 조카를 비롯해 수많은 지인들을 잃는 뼈아픈 슬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 대국은 바둑 역사에 길이 남을 '원폭 아래의 대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46

[일본기원 초대 이사장 취임 및 복구]

패전으로 잿더미가 된 바둑계를 재건하기 위해 이와모토 가오루 등과 힘을 합쳐 새롭게 출범한 일본기원의 초대 이사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기꺼이 짊어졌습니다.
취임 직후 중단되었던 승단 대회인 대수합(오테아이)을 즉각 재개하고, 폐간되었던 공식 기관지 '기도(棋道)'를 훌륭하게 복간시키는 등 파괴된 인프라와 제도를 신속하고 탁월하게 복구해 내며 일본기원의 아버지다운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1948

[신규 회관 개관 및 이사장 사임]

막대한 자금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도쿄 미나토구 시바타카나와에 새롭고 늠름한 일본기원 회관을 성대하게 개관하는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나 요미우리 신문 인터뷰에서의 작은 실언이 큰 문제가 되어 모든 직을 내려놓고 이사장직에서 불명예 사임했습니다.
폐허 속에서 완벽한 바둑의 전당을 재건해 낸 일등 공신이었으나, 언론 대처의 미숙함으로 인해 자신이 일군 기관의 수장 자리에서 허무하게 물러나는 씁쓸함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배후에서 바둑 보급을 돕는 일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0

[하와이 방문 및 기업 감사역 취임]

하와이 기원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아 태평양을 건너 바둑 보급과 교류의 물꼬를 텄습니다. 또한 기시 노부스케가 주도하여 세운 기업인 토요 펄프의 감사역으로 전격 취임하며 재계와도 밀접하게 교류했습니다.
바둑의 세계화에 앞장서는 글로벌 앰버서더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정재계 유력 인사들과의 탄탄한 인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바둑계의 재정적 후원자들을 든든하게 확보하는 데 큰 힘을 보탰습니다.

[방대한 '어성기보' 출판 주도]

에도 시대 쇼군 앞에서 두어졌던 어전 대국의 귀중한 기보들을 모두 모아 집대성한 초대형 프로젝트 '어성기보(御城碁譜)' 전 10권의 편집과 출간을 주도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영영 소실될 뻔했던 귀중한 고전 바둑의 역사적 유산들을 완벽하게 복원하고 후대에 전승하는 기념비적이고 막대한 문화적 공로를 세웠습니다. 바둑 역사가로서의 집념이 만들어낸 최고의 결과물입니다.

1955

[현역 공식 은퇴 및 명예 9단 추대]

오랜 세월 승부사로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프로 현역 무대에서 명예롭게 완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일본기원은 그가 일생 동안 이룩한 엄청난 공적을 기리며 스즈키 다메지로와 함께 그를 '명예 9단'으로 특별 추대했습니다.
비록 일선 대국 현장에서는 조용히 물러났으나, 은퇴 이후에도 날카로운 펜을 들어 방대한 기술서와 기보 해설집을 끊임없이 집필하며 바둑 교육자이자 정신적 지주로서의 삶을 한결같이 계속 이어갔습니다.

1957

[대만 바둑 사절단 단장 역임]

일본 바둑을 대표하여 대만을 순회 방문하는 거대한 친선 바둑 사절단의 총괄 단장직을 훌륭하게 수행했습니다.
전후 아시아 지역 국가들과의 다 끊어졌던 바둑 외교를 완벽하게 복원하고 민간 교류의 폭을 크게 넓히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를 통해 대만 바둑계의 든든한 성장에도 간접적인 밑거름을 제공했습니다.

1958

[기사 최초 자수포장 수훈]

바둑 문화의 보급과 일본기원의 재건에 바친 희생적인 헌신을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프로 바둑 기사 역사상 최초로 자수포장(紫綬褒章)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오락이나 잡기로 여겨지던 바둑이 일본의 훌륭한 전통문화이자 중요한 정신 수양의 도구로서 정부의 공식적이고 드높은 인정을 받게 된 기념비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60

[제1회 중일 바둑 교류 방중단 단장]

수십 년 만에 중국과 다시 손을 잡고 공식적으로 열린 제1회 중일 바둑 교류전의 일본 측 대표단 단장을 맡아 중국 대륙을 대대적으로 방문했습니다.
냉전 시대의 굳게 닫힌 이념의 장벽을 '수담(手談)'이라는 바둑의 언어로 부드럽게 뛰어넘으며, 경색되어 있던 양국 간의 관계 정상화와 민간 평화 교류에 거대한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1964

[제1회 오쿠라상 특별 수상]

일본기원의 설립과 엄청난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한 공로자에게 수여되는 최고 권위의 표창인 제1회 '오쿠라상'을 영광스럽게 수상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맨바닥에서부터 피땀으로 세운 조직으로부터 그동안의 눈물겨운 희생과 리더십을 완벽하고 공식적으로 보상받고 칭송받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1966

[훈2등 서보장 수훈 영예]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한 공로가 지대한 인물에게 수여되는 훈2등 서보장을 국가로부터 수훈 받으며 바둑계 원로로서의 명예를 가장 드높였습니다.
일본 사회 전반에서 그가 바둑 문화의 창달과 발전에 평생을 바친 위대한 업적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최고 수준으로 깊이 예우해 준 아주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1971

[명저 수근사전 출간]

자신의 애제자 우칭위안과 함께 바둑의 모든 수맥과 맥점을 꼼꼼히 집대성한 불후의 명저 '수근사전(手筋辞典)'을 완벽하게 완성하여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프로 기사들과 아마추어 고수들의 필독서로 널리 꼽히고 있습니다. 노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바둑 연구와 학문적 열정을 절대 불태웠음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1972

[안타까운 자살로 생애 마감]

83세의 고령으로 시력과 청력을 크게 잃고 쇠약해진 육체의 한계를 극심하게 비관하여,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깝고 비극적인 선택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유서에는 "몸 상태가 나빠 죽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평생을 바둑판 위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던 그가 시력 상실로 인해 더 이상 제대로 바둑을 둘 수 없게 되자 극심한 절망감과 우울증에 빠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1983

[고향 노미 섬에 동상 건립]

그가 남긴 위대하고 거대한 공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저명한 조각가 엔츠바 가쓰조가 제작한 기품 있는 흉상이 고향인 에타지마시 노미 섬에 장엄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를 배출한 고향 사람들의 한없는 자부심을 상징하는 조형물입니다.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일본기원의 아버지'를 향한 흠모와 추모의 열기는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여전히 뜨겁게 남아 있었습니다.

2009

[일본 바둑 전당 헌액]

현대 바둑의 기초를 굳건하게 다지고 수많은 전설적 명인들을 발굴해 낸 압도적인 공로를 만장일치로 인정받아 '일본 바둑 전당(圍碁殿堂)'에 대망의 헌액을 기록했습니다.
사후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우칭위안, 조훈현 등 걸출한 제자들의 활약을 통해 그의 선구안과 가르침이 재평가되었습니다. 일본을 넘어 전 세계 바둑의 발전에 이바지한 불세출의 거장으로서의 위상이 바둑사에 영원토록 굳건히 새겨졌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세고에 겐사쿠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