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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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건축물, 교량, 문화재, 역사적 장소 + 카테고리
고려 시대 개성 송도 시가지 정비와 함께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적인 돌다리로, 본래 이름은 선지교였습니다. 1392년 고려의 충신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 세력에게 암살당한 핏빛 무대로 역사에 영원히 각인되었으며, 그의 충절을 기리는 참대나무 전설과 함께 '선죽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치며 돌난간과 비석, 숭양서원 등이 곁에 세워져 거대한 성역으로 변모하였고, 오늘날에는 북한의 국보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한반도의 굴곡진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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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선지교의 첫 축조 추정]

태조 왕건이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자남산 남쪽 개울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이 다리의 본래 이름은 '좋은 땅의 다리'라는 뜻의 선지교(善地橋)였습니다.
고려 건국 초기 개경의 도시 정비 과정에서 건설된 것으로 보이며, 건립 초기에는 난간이 없는 아주 단순한 형태의 돌다리였습니다. 명확한 건립 연대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는 드무나, 태조 왕건이 919년 수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할 때 축조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추정입니다.

1388

[위화도 회군과 이성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당시 개성에 진입하며 군사들과 함께 이 다리를 건넜다고 전해집니다. 관련 역사 기록에서 정몽주의 죽음 이전임에도 '선죽교'라는 명칭이 등장하여 명칭 유래에 대한 논쟁을 낳았습니다.
우왕 14년 위화도 회군 때 숭인문으로 들어온 이성계 일파가 선지교를 지나 황룡대기를 펄럭이며 자남산에 올랐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정몽주 암살 이전임에도 일부 문헌에 선죽교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훗날 피살 사건 이후에 이름이 바뀌었다는 전설에 대해 학자들의 반론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1392

[죽음을 직감한 문병 길]

정몽주가 이성계의 자택에 문병 차 방문하여 정황을 살핀 뒤 귀가하게 됩니다. 돌아가는 길에 그는 자객의 낌새를 눈치채고 비장한 결심 속에 말을 거꾸로 타고 이동합니다.
이방원은 사전에 심복 조영규에게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정몽주를 쳐서 죽이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정몽주는 제자 변중량을 통해 암살 모의를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며, 귀가 중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마신 뒤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다'며 녹사 김경조에게 말을 돌려 끌게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선죽교의 핏빛 참극]

선죽교에 다다른 정몽주를 향해 숨어있던 이방원의 자객들이 기습 공격을 감행합니다. 궁수의 저격에 의해 낙마한 정몽주는 끝내 철퇴와 몽둥이에 맞아 처참히 피살됩니다.
말을 끌고 다리를 넘으려 할 때 조영규 일파의 기습으로 말이 먼저 넘어졌고, 땅에 떨어져 피신하려던 정몽주와 그를 몸으로 감싸 보호하려던 녹사 김경조를 4~5명의 괴한이 쫓아가 잔혹하게 타살했습니다. 이 참극은 여말선초의 가장 극적인 정치적 암살 사건이자, 고려 왕조의 멸망을 확정 짓는 역사적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참대가 솟아난 전설]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그의 피가 스며든 다리 옆에서 충절을 상징하는 참대나무가 솟아났다는 굳건한 전설이 백성들 사이에 퍼집니다. 이로 인해 다리의 이름이 새롭게 바뀌게 됩니다.
본래 선지교(善地橋)라 불리던 다리가 정몽주의 붉은 피와 솟아난 참대나무 가지의 일화가 결합하여 '선죽교(善竹橋)'라는 이름으로 고쳐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리에 선명하게 남은 붉은 자국이 정몽주의 혈흔이라는 야사가 600년이 넘도록 신앙처럼 전해 내려오게 됩니다.

1400

[제2차 왕자의 난 전투지]

조선 개국 직후 왕위를 둘러싼 왕자들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이 다리 부근에서 참혹하게 벌어집니다. 또 다른 유혈 충돌의 무대로 역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이방원과 이방간 세력이 군사적으로 맞붙은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진 주요 장소 중 하나가 선죽교 일대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선죽교가 단순히 암살 장소일 뿐만 아니라 개성 시내의 핵심 교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1445

[용비어천가 속의 선죽교]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문헌인 용비어천가 협주에 선죽교의 한글 표기와 당시의 언어적 인식이 반영되어 수록됩니다. 한자의 뜻을 살려 우리말 '대'로 훈독한 점이 특징입니다.
용비어천가의 부록 및 협주 기록에는 선죽교가 한글로 ':션·ᄯᅢ'라고 명확히 적혀 있습니다. 선(善)은 한자음 그대로 음독하고 죽(竹)은 그 뜻인 '대(대나무)'로 훈독한 표기로, 조선 전기의 국어 표기법과 지명이 어떻게 불렸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습니다.

1580

[석봉 한호의 비석 건립]

조선 최고의 명필로 꼽히는 한석봉이 다리의 이름을 직접 힘차게 써 내려간 비석이 다리 곁에 세워집니다. 선죽교가 훗날에도 널리 기려졌음을 증명합니다.
다리 옆 공간에 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 한호가 직접 쓴 '선죽교'라는 묵직한 필체의 비석이 건립되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가 글씨를 남겼다는 사실 자체가 이 다리가 품고 있는 충절의 상징성이 조선 사회에서 얼마나 크게 대우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1600

[숭양서원과 표충비 건립]

다리 서쪽으로 정몽주의 높은 충절을 영원히 제향하기 위한 숭양서원과 기념비들이 잇따라 건립됩니다. 피살 현장 일대가 거대한 성역이자 추모 공간으로 완전히 변모합니다.
무려 정몽주 자신이 생전에 살던 집터라는 전승이 있는 곳에 숭양서원이 세워졌으며, 훗날 흥선대원군의 무자비한 서원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한 정몽주의 사적을 상세히 새긴 비석 2기와 표충비가 비각 안에 나란히 건립되어 다리를 장엄하게 호위하게 되었습니다.

1780

[돌난간 설치와 다리 보호]

선죽교를 영구히 보호하기 위해 그 위에 견고한 돌난간이 세워져 사람들의 통행이 전면 금지됩니다. 보행자들의 편의를 위한 새로운 돌다리가 그 바로 옆에 나란히 축조됩니다.
당시 개성유수로 재직 중이던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선조의 고결한 피가 서린 다리 위로 후대 사람들이 함부로 밟고 지나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선죽교 위에 튼튼한 돌난간을 영구 설치했습니다. 이 조치와 함께 사람과 말의 통행용 새 다리가 바로 옆에 가설되어 오늘날의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800

[백과사전 주영편의 의문 제기]

조선 후기 실학자가 당대 문헌들을 날카롭게 분석하며 선죽교 전설에 대한 합리적인 의문을 처음으로 활자화합니다. 피자국과 대나무 이야기가 과장된 낭설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동유는 자신이 편찬한 백과사전 성격의 저서 '주영편'을 통해, 정작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 문인들의 핵심 사료에는 선죽교의 혈흔이나 솟아난 대나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을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선죽교의 전설이 후대에 충절을 강조하기 위해 괴력난신적 낭설로 덧붙여졌을 가능성을 학술적으로 제기했습니다.

1921

[만해 한용운의 강연 언급]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이 대중 강연을 펼치며 선죽교의 씻기지 않는 피를 비유로 듭니다. 역사적 충절이 일제에 맞서는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상징으로 승화됩니다.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열린 '철장철학' 강연 말미에 한용운이 덧붙인 명언입니다.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의암에 서려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는다"는 강렬한 비유를 통해 정몽주의 굳건한 절개를 독립투사의 의로움과 동일시하며 칭송했습니다.

1947

[백범 김구의 다리 방문]

해방 직후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가 선죽교를 직접 찾아 과거의 숭고한 역사를 되짚어봅니다. 당시 방문 때까지도 다리에 뚜렷한 핏자국이 남아있었음이 기록을 통해 증언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가 남북의 분단이 고착화되기 전인 1947년에 이곳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훗날 백범일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까지도 개성 선죽교 교각 일부에 정몽주가 흘렸던 붉은 피얼룩 흔적이 여전히 가시적으로 남아있었다고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1960

[다리 밑 수로의 강제 복구]

오랜 세월 메말라 방치되어 있던 다리 밑의 수로가 북한 최고 권력자의 한마디 지시에 의해 다시 물이 흐르도록 인위적으로 복구공사를 거칩니다.
과거 선죽교 다리 밑으로는 지형의 변화로 한동안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현지 증언이 있었으나, 김일성이 시찰 중 "다리 밑인데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직접 지적한 이후 대대적인 수로 정비 공사를 거쳐 현재처럼 다리 밑으로 맑은 물이 정상적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북한 매체들을 통해 선전되었습니다.

1971

[북한 국보문화유물 지정]

선죽교가 지닌 엄청난 역사적, 건축적 중요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북한 체제 내에서 최상위 문화재 등급으로 등록 및 보호받게 됩니다.
초기에는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되어 특별 관리를 받아왔으나, 유물 관리 체계가 재정립된 이후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로 등급과 명칭이 변경되며 개성을 대표하는 핵심 보존 유적으로 확고한 법적 지위를 굳혔습니다.

1996

[사극 '용의 눈물' 무대 등장]

여말선초를 다룬 대하 사극 드라마에 가장 핵심적이고 처절한 사건의 배경으로 브라운관에 웅장하게 등장합니다. 암살의 순간이 현대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됩니다.
1996년 방영을 시작하여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한 KBS 사극 '용의 눈물' 7화에서 정몽주가 이방원 측 자객들에 의해 철퇴를 맞고 암살당하는 선죽교 참극이 극적으로 연출되었습니다. 이 방송을 기점으로 선죽교는 현대 미디어에서 충절과 배신을 묘사하는 단골 무대로 완전히 자리매김했습니다.

2002

[드라마 '야인시대' 대사 등장]

대중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시대극에서 과거 만해 한용운의 선죽교 관련 강연 내용이 비장한 명대사로 텔레비전을 통해 완벽하게 재현됩니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 극 중에서 독립운동가 한용운 역을 맡은 배우가 "송악산에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는다"는 1921년 당시의 실제 강연 대목을 폭발적인 연기력으로 소화하여 시청자들에게 뭉클한 감동과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2012

[영천 가설 선죽교 완공]

정몽주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에 그의 위패를 모신 서원 바로 곁으로 실제 개성의 선죽교와 똑같이 생긴 모형 다리가 대대적인 사업 끝에 새롭게 축조됩니다.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일대에서 진행된 '임고서원 1단계 성역화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서 가설 선죽교가 화려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정몽주가 영천 출신임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고, 분단으로 인해 실제 다리를 볼 수 없는 남한 사람들에게 그의 굳은 충절을 상징적으로 기념하기 위한 지자체 차원의 대형 프로젝트였습니다.

2013

[유네스코 세계유산 최종 등재]

선죽교를 포함한 개성 일대의 귀중한 고려 시대 유적들이 그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되는 영예를 안습니다.
제3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선죽교와 곁에 있는 표충비가 '개성의 역사 기념물과 유적(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이라는 포괄적인 명칭 아래 지정번호 1278-006을 부여받으며 인류의 문화유산 목록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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