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연표
751
통일신라 경덕왕 10년에 재상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현재의 석굴암)의 창건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석불암은 현재보다 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774
통일신라 혜공왕 10년에 재상 김대성에 의해 석불사(현재 석굴암)가 완공되었습니다.
1703
조선 숙종 29년, 승려 종열이 석굴암을 다시 고쳐 지었습니다.
1758
조선 영조 34년, 승려 대겸이 석굴암을 다시 고쳐 지었습니다.
1890
조선 말기에는 울산병사 조예상에 의해 석굴암이 크게 중수되었습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조선 말기로 추정됩니다.
1907
[일본인에 의한 석굴 '재발견' 및 훼손 시작]
일본인 우편배달부에 의해 석굴이 '재발견'되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인들의 석굴 훼손과 문화재 반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2년 지역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석굴암은 '조가절'이라 불리며 일반인들의 향화와 공양이 끊이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1907년경 우연히 석굴을 발견한 우편배달부가 일본인에게 알렸고, 일본은 이를 '처음 발굴한 것'처럼 과장하여 선전했습니다. 이는 일본인 무뢰한들이 수많은 탑상을 반출하고 석굴을 파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0
[석굴 주변 샘 발견, 자연 습기 조절 기능 확인]
석굴 주변에서 샘이 발견되었는데, 이 샘물이 석굴의 습기를 자연적으로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1910년대 석굴 보수 전 기초 조사에서 원형 주실 뒤쪽과 2시 방향 옆면에 샘이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 샘물은 10초에 1리터씩 일년 내내 쏟아져 나와 석굴보다 찬물로 아래쪽 습기를 자연스럽게 조절하고 있었으나, 일제는 이후 이를 무시했습니다.
1913
일제강점기인 1913년 10월부터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여 석굴 해체 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습니다.
1914
[일제, 석굴 완전 해체 및 본공사 시작]
일제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본격적인 보수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석굴의 원형이 크게 훼손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일제는 1914년에 본 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했습니다. 당시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은 기차 철로 부설 토목 기술 인력으로, 석굴을 기차 터널처럼 수리하려 했습니다.
1915
[일제 보수 공사 완료 및 시멘트 도포]
일제의 석굴 보수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며, 석벽을 보강한다는 명목으로 석벽 뒤에 시멘트를 두껍게 발랐습니다.
일제는 1915년 9월 본 공사를 끝마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석벽을 보강하기 위해 석벽 뒤에 약 30.3cm 두께의 시멘트를 도포했습니다.
1917
[시멘트 보강 후 누수 및 습기 현상 발생]
일제의 시멘트 보강 공사 이후, 석굴에 누수 현상과 심각한 습기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부적절한 보수 방식의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1915년 시멘트 보강 공사를 마쳤으나, 1917년부터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1921
1917년 누수 현상이 발생하자, 일본인들은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대대적으로 재보수공사를 실시했습니다.
1927
[습기로 인한 이끼 제거를 위한 증기 세척]
해결되지 않는 습기 문제로 인해 생긴 푸른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석굴에 증기 세척을 실시했습니다.
재보수공사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습니다.
1947
[고온 증기 불상 세척 시작]
해방 후,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돌가루가 떨어지는 등 불상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해방 후인 1947년, 1953년, 1957년에 걸쳐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습니다. 당시에는 불상을 주기적으로 닦아주는 것을 최상의 보존 방법으로 여겼으나, 돌의 미세한 입자가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중단되었습니다.
1953
1947년에 이어 1953년에도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으나, 불상의 훼손이 계속되었습니다.
1957
1957년 마지막으로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으나, 돌의 입자가 떨어지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결국 이 방식은 중단되었습니다.
1962
[대한민국 정부의 대대적 보수공사 착수]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콘크리트벽 바깥에 또 다른 콘크리트 돔을 씌우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방식이었습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기존 일본인들이 만든 콘크리트벽 배후에 약 1미터 공간을 두고 또다시 콘크리트 돔을 씌운 뒤 두터운 봉토를 덮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광창과 소감실 창구를 모두 없애고 목조 암자를 설치하여 습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문화재보호법 부칙 제3조의 규정에 따라, 경주 석굴암 석굴이 국보 제24호로 재지정되었습니다.
1966
[기계식 습기 및 온도 조절 시스템 도입 및 백호 복원]
서울대학교 김효경 교수가 석굴암 우측에 환풍기를 설치하여 기계적인 방법으로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유실되었던 본존불의 백호가 국내산 수정을 깎아 순금판을 대어 복원되었습니다.
당국은 1966년 서울대학교 김효경 교수의 주도로 석굴암 우측에 공기 냉각장치(환풍기)를 설치하여 기계적인 방법으로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해에 본존불의 백호(白毫)도 국내산 수정을 깎아 뒷면에 순금판을 대어 복원되었습니다.
1970
[앞지붕 재건 및 제습기 설치]
석굴암의 앞지붕을 다시 짓고 입구에 유리를 설치했으며, 제습기를 이용해 실내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석굴암은 1970년에 다시 앞지붕을 짓고 입구에 유리 칸막이를 설치했습니다. 또한 제습기를 사용하여 실내 습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기 시작했습니다.
1972
[석굴암 본존불 도안 10000원권 지폐 발행 안건 승인]
한국은행이 앞면에 석굴암 본존불, 뒷면에 불국사 전경을 담은 10000원권 지폐 발행 안건을 승인하고 공고했습니다.
한국은행은 1972년 4월 10일, 앞면에 석굴암 본존불, 뒷면에 불국사 전경을 그려넣은 10000원 지폐를 1972년 6월 1일부터 발행하기로 하고 발행 공고 절차를 마쳤습니다.
[10000원권 지폐 도안 관련 종교계 논란 발생]
석굴암 본존불 도안의 10000원권 지폐 발행 계획에 대해 기독교계와 불교계에서 각각 항의와 비판이 제기되며 논란이 일었습니다.
한국은행의 10000원 지폐 도안 계획에 대해 기독교계는 한국은행이 특정 종교를 두둔한다고 항의했으며, 불교계는 신성한 불상을 화폐에 새기는 것이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동이라고 지적하며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1973
[새 도안 10000원권 지폐 발행, 석굴암 은화 포함]
세종대왕 초상화와 경복궁 근정전이 그려진 새로운 도안의 10000원권 지폐가 발행되었으며, 지폐에는 석굴암 보현보살상 은화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1973년 6월 12일, 앞면에 세종대왕 초상화, 뒷면에 경복궁 근정전이 그려진 10000원 지폐가 발행되었습니다. 이 지폐를 밝은 빛에 비추면 숨겨진 석굴암 보현보살상 은화(워터마크)가 나타나, 한국은행이 원래 석굴암을 도안 소재로 하려 했던 계획의 흔적을 보여주었습니다.
1995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석굴암과 불국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함께 등록되었습니다. 이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임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쾌거입니다.
1995년, 석굴암과 불국사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공식 등재되었습니다.
2023
2023년 5월 4일부터 대한불교조계종 산하 사찰에 입장할 때 징수하던 문화재 관람료가 면제됨에 따라, 석굴암도 무료입장이 가능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