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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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화가, 정치인, 교육자 + 카테고리

서동진은 대구 근대 미술의 개척자이자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정치가로, 예술과 정치를 넘나들며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인물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수채화의 불모지였던 대구에 서양 화풍을 보급하며 '대구 미술의 대부'로 불렸으며, 동시에 민족 교육과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정계에 투신하여 제3대와 제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신생 대한민국의 기틀을 잡는 데 기여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섬세한 감각과 정치인으로서의 강인한 신념을 동시에 지녔던 그의 삶은, 문화와 권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던 한 지식인의 숭고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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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00

[대구 공평동에서의 탄생]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에서 아버지 서기수와 어머니 윤매주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지역 유지였던 가문의 배경 아래서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성장했습니다. 훗날 대구 근대 예술의 상징적인 인물로 성장할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본관은 달성 서씨이며 호는 소허(小虛)로 알려져 있습니다.
외조부인 윤성항은 사헌부 감찰과 예안 현감 등을 지낸 관료 출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의 형인 서동성 또한 독립유공자로 활동하는 등 가풍 자체가 민족적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1916

[계성학교 진학과 미술 입문]

대구의 명문 사학인 계성학교에 진학하며 본격적인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당시 교사로 근무하던 이상정 선생을 만나 미술의 기초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소년 서동진이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될 예술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입니다.

이상정 선생은 단순한 기술 전수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태도를 강조하며 그를 가르쳤습니다.
이 시기 배운 서양화 기법은 당시 대구 지역에서는 매우 선구적인 시도였습니다.
그는 학교 내에서 재능 있는 학생으로 통하며 그림 그리기에 매진했습니다.

1921

[휘문고보 편입과 고희동 사사]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을 만났습니다. 고희동 문하에서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서양화 기법을 전수받았습니다. 서울의 최신 예술 조류를 접하며 화가로서의 안목을 세계적으로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고희동 선생은 그에게 서양화의 본질과 유화, 수채화의 차이를 깊이 있게 가르쳤습니다.
휘문 시절의 인맥은 훗날 그가 전국적인 문화단체에서 활동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그는 학업과 더불어 습작 활동에 전념하며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습니다.

[동맹휴학 주도와 퇴학 처분]

계성학교 재학 중 일제의 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주도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교 측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으며 시련을 겪었습니다.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그의 강직한 성품이 드러난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학생 지도자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퇴학 처분 이후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학업과 예술적 열정을 이어갈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이후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하며 활동 무대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4

[휘문고보 졸업과 모교 귀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고향인 대구로 돌아왔습니다. 퇴학의 아픔이 있었던 모교 계성학교에서 교사로 채용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배운 선진 미술을 후배들에게 나누어주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교로의 귀환은 그가 지역 사회에서 인정받는 인물로 성장했음을 상징하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6개월간의 짧은 재직이었으나 미술반을 지도하며 많은 예비 화가들을 발굴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교육자로서의 자부심과 예술가로서의 창작 욕구 사이에서 고민하며 미래를 계획했습니다.

[대구아동자유화전람회 심사]

대구소년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 대구지국이 후원한 아동 미술 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의 창의성을 장려하고 미술 교육의 중요성을 대중에 전파했습니다. 지역 사회의 문화적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상징적 사건입니다.

화가로서의 전문성을 대중적으로 인정받아 심사위원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맡았습니다.
그는 어린이들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천진난만함과 가능성에 주목하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 행사는 대구 지역에 근대 미술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1925

[광흥학교 이사 취임]

영일군 송라면에 위치한 광흥학교의 이사로 참여하며 교육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민족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교육 현장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보탰습니다.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적 실천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던 시기입니다.

학교의 운영 전반을 돌보며 민족적 자긍심을 가진 인재 양성에 힘썼습니다.
그의 이사직 수행은 당시 지식인들이 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 했던 시대정신과 궤를 같이합니다.
지역 사회의 원로들과 교류하며 교육 환경 개선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6

[교남학교 미술교사 부임]

대륜중학교의 전신인 교남학교에서 보수를 받지 않고 미술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운 학교 사정을 돕기 위해 자신의 재능을 온전히 기부하며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장기적인 헌신을 통해 대구 미술 교육의 암흑기를 지탱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1940년까지 약 14년 동안 대가 없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숭고한 교육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교남학교 학생들은 그의 열정적인 지도를 받으며 화가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이곳에서 배출된 많은 제자가 훗날 한국 화단의 중추적인 인물들로 성장했습니다.

1927

[첫 번째 수채화 개인전 개최]

동아일보 대구지국 주최로 자신의 전공 분야인 수채화 개인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 전년도에 완성한 특선 작품들을 포함하여 대구 시민들에게 서양화의 정수를 선보였습니다. 대구 지역에 수채화풍을 정착시킨 기념비적인 전시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수채화는 대중에게 생소한 장르였으나 그의 전시를 통해 아름다움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전시회는 연일 관람객으로 붐비며 지역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맑고 투명한 색채 감각을 극찬했습니다.

1928

[조선미술전람회 첫 입선]

제7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 부문에 작품 「역의 부근(驛の附近)」을 출품하여 입선했습니다. 전국 규모의 공모전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며 화가로서의 명성을 전국적으로 높였습니다. 대구 지역 작가로서 한국 화단에 존재감을 드러낸 중대한 사건입니다.

철도역 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서정적인 수채화 기법으로 담아낸 수작이었습니다.
입선 소식은 대구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지역 주민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겼습니다.
이후 그는 매년 작품을 출품하며 지속적인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동아일보 주최 개인 전람회]

동아일보 대구지국의 주관 하에 또 한 번의 대규모 개인 전람회를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3일간 진행된 전시를 통해 자신의 최신작들을 대거 공개하며 활발한 창작 에너지를 과시했습니다. 예술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그의 철학이 돋보인 자리였습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더욱 성숙해진 화풍과 깊이 있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시 기간 내내 현장에 머물며 관람객들에게 직접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이 전시를 통해 그는 대구 문화계를 이끄는 명실상부한 리더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29

[조선미전 2회 연속 입선]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역의 구내(驛の構內)」를 출품하여 다시 한번 입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전작의 주제 의식을 확장하여 기차역 내부의 역동적인 모습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안정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화단 내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다졌습니다.

근대화의 상징인 기차역을 예술적 시각으로 재구성한 독창적인 시도였습니다.
수채화 특유의 번짐과 겹침 기법을 활용해 공간의 깊이감을 완벽하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연속 입선은 대구 미술이 중앙 화단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결과였습니다.

1930

[대구미술사 창립과 경영]

예술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구미술사'를 직접 창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을 넘어 지역 미술품의 유통과 홍보를 위한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대구 미술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려 했던 선구적인 경영 행보였습니다.

대구미술사는 지역 화가들의 사랑방이자 작품이 대중과 만나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사장으로서 경영 전반을 책임지며 미술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조직은 훗날 대구 지역 미술 단체들이 결성되는 데 중요한 모태가 되었습니다.

[향토회 창립 및 전시 참여]

대구의 서양화가들과 뜻을 모아 동인 단체인 '향토회'를 조직하고 제1회 전시를 열었습니다. 지역색이 짙은 작품들을 선보이며 향토 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대구 미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체 중 하나인 향토회의 핵심 주역으로 활동했습니다.

향토회는 외래 화풍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대구의 풍경과 정서를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창립 위원으로서 단체의 철학을 정립하고 회원들 간의 화합을 이끌었습니다.
제1회 서양화전람회는 대구 미술가들이 단결하여 일궈낸 값진 승리였습니다.

1931

[오후의 풍경 입선]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오후의 풍경(午後の風景)」이라는 작품으로 입선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평화로운 오후의 빛과 그림자를 수채화 특유의 투명함으로 표현해냈습니다.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의 연작 활동이 빛을 발했습니다.

빛의 변화에 따른 사물의 질감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기록한 작품입니다.
그의 화풍은 점차 기교 중심에서 대상의 내면을 포착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지속적인 관급 전시 입선을 통해 그는 지역 미술계의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32

[뒷골목 풍경의 예술화]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뒷골목(裏通リ)」을 출품하여 입선의 기록을 추가했습니다. 화려한 대로가 아닌 소외된 뒷골목의 정서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습니다. 사회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의 작가 정신이 투영된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소박한 서민들의 삶의 터전을 화폭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파격적인 시도였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관객들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예술적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진실한 화가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했습니다.

1935

[교남학교 간친회 간사 역임]

교남학교 교사로서 학교의 대외 협력과 소통을 담당하는 간친회 간사직을 맡았습니다. 교육자와 지역 사회 사이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학교 발전에 이바지했습니다. 단순한 교실 지도를 넘어 학교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학부모 및 지역 유지들과의 긴밀한 협조 체제를 구축하여 학교 재정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사교성과 정직한 태도는 간친회 활동에서 큰 빛을 발했습니다.
무보수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행정적인 책임까지 기꺼이 맡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1945

[해방 이후 사회 단체 활동]

조국이 해방을 맞이하자 예술의 틀을 넘어 사회 건설을 위한 대외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경상북도청년회 회장과 원호회 회장 등 요직을 거치며 지역 사회 수습에 앞장섰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 자신의 사회적 역량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경상북도 후생회 회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빈민 구제 활동을 주도했습니다.
행정 경험이 부족한 시기에 그의 리더십은 지역 안정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가 장차 본격적인 정계 투신을 결심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46

[영남일보사 이사 취임]

대구 지역의 유력 언론사인 영남일보의 이사(취체역)로 선임되어 언론 창달에 기여했습니다. 예술가이자 사회 지도자로서 공정한 여론 형성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역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경영에 참여했습니다.

문화와 정치를 아우르는 그의 통찰력은 신문사의 편집 방향 설정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언론이 민중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업무에 임했습니다.
대구 금융조합 감사를 병행하며 지역 경제 상황 전반을 관리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1948

[문화예술계 대표 선출]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상북도지부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지역 예술계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흩어져 있던 예술가들을 하나로 묶고 문화 정책을 건의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습니다. 대구 미술의 대부를 넘어 경북 문화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전란의 상처를 문화로 치유하려는 다양한 예술 행사를 기획하고 집행했습니다.
예술가들의 창작 환경 개선을 위해 정부 부처와 끊임없이 소통했습니다.
그의 위원장 재임 시절 경북 지역의 문화 예술 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운영되었습니다.

1950

[제2대 총선 출마와 낙선]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경상북도 대구시 갑 선거구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습니다. 대구 지역의 발전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며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기성 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아쉽게 2위로 낙선하는 고배를 마셨습니다.

무소속임에도 불구하고 6,512표를 얻으며 강력한 정치적 잠재력을 증명했습니다.
낙선 이후에도 그는 지역 주민들과 호흡하며 민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이 도전은 그가 개인 예술가를 넘어 공익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거듭나는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1954

[제3대 국회의원 당선]

민주국민당 후보로 대구시 갑 선거구에 재출전하여 마침내 국회 입성에 성공했습니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되어 지역을 대표하는 중앙 정치인으로 부상했습니다. 예술가의 감수성을 정치에 접목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의정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민주국민당 경상북도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며 야당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얻은 승리여서 정치권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국회 내에서 교육과 문화 정책에 관한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1955

[민주당 창당 참여]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야권 대통합인 민주당 창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계보상으로는 신파에 속하여 장면 박사 등과 궤를 같이하며 정당 정치를 선도했습니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야당 체제가 정립되는 과정의 핵심 멤버였습니다.

정당의 강령 제정과 조직 구성 단계에서 화가 특유의 창의적인 기획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 정권에 맞서는 강인한 야당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대구시 갑구당 위원장을 맡아 지역 조직을 탄탄하게 관리하며 정당 기반을 다졌습니다.

1958

[제4대 총선의 시련]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무소속 신도환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습니다. 야당 탄압과 복잡한 선거 구도 속에서 정치적 시련을 맞이하게 된 사건입니다. 잠시 의정 활동을 멈추고 다시 야인으로서 민심을 살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낙선 이후에도 그는 민주당의 간부로서 당의 재건과 선거 전략 수립에 힘썼습니다.
지역구 사무실을 계속 유지하며 주민들의 고충을 청취하는 등 성실한 정치 행보를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의 인내는 훗날 4.19 혁명 이후 펼쳐질 새로운 정치 무대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60

[제5대 민의원 재선 성공]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73.79%라는 경이로운 득표율을 기록하며 지역 민심의 절대적인 신뢰를 확인했습니다. 혁명 이후 새롭게 탄생한 민주 정부의 핵심 인재로 복귀한 순간입니다.

이 득표율은 당시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높은 수치로 그의 대중적 인기를 입증했습니다.
그는 당선 직후 민주주의의 회복과 부패 청산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재선 의원으로서 국회 운영의 노련미를 갖추고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선출]

대한민국 국회 민의원의 외무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신생 민주 정부의 외교 정책을 총괄하며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입지를 다지는 데 기여했습니다. 화가 출신의 섬세한 외교 감각이 돋보였던 의정 활동의 정점이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우방국과의 외교 관계를 정비하고 실리적인 외교 노선을 구축했습니다.
전후 복구를 위한 국제 원조 확보와 문화 교류 확대에 위원장으로서의 역량을 집중했습니다.
그의 품격 있는 대화 기법은 해외 사절단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1963

[재건 민주당 참여와 정계 개편]

5.16 군사정변 이후 정치 활동이 재개되자 재건 민주당에 합류하여 정치 질서를 바로잡으려 했습니다. 군부 정권의 탄생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정당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제6대 총선을 앞두고 야권의 통합과 선거 승리를 위해 원로 정치인으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치가 단순히 권력을 쫓는 것이 아닌 국민의 삶을 보살피는 예술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험난한 정치 환경 속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선비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1965

[경북체육회 이사 선임]

예술과 정치를 넘어 지역 체육 발전에도 관심을 두고 경북체육회 이사로 선임되었습니다. 도민들의 건강과 단결을 위해 체육 인프라 확충과 선수 양성을 지원했습니다. 다방면에서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봉사한 그의 전인적인 삶의 단면입니다.

지역 체육 대회를 개최하고 낙후된 경기장 시설을 보수하는 데 예산을 확보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예술, 정치, 체육이 모두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핵심 요소라고 믿었습니다.
이사직 수행을 통해 젊은 체육인들과 소통하며 세대 간의 벽을 허무는 데 기여했습니다.

1969

[병세 악화와 투병 생활]

오랜 의정 활동과 사회 봉사로 인한 과로가 겹쳐 숙환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구의 자택에서 가족들의 간호를 받으며 평온하게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구의 문화와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병석에서도 찾아오는 제자들과 후배 정치인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그의 투병 소식에 지역 문화계와 정치계 인사들의 위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예술가다운 침착함과 기품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70

[거성의 서거와 마지막 길]

대구시 남구 대명동 청구주택 자택에서 향년 6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습니다. 저녁 6시 40분,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습니다. 대구 미술의 대부이자 민주 정치의 거장을 잃은 슬픔에 지역 사회는 깊은 애도에 잠겼습니다.

그의 장례는 지역장급으로 치러졌으며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사후 그의 작품들은 한국 근대 수채화의 정수로 인정받아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되었습니다.
그가 닦아놓은 대구 미술의 토양은 후대 작가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찬란하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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