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뒤샹)
연표
1915
[뉴욕 다다이즘 운동 창시]
미국으로 건너온 마르셀 뒤샹이 뉴욕에서 프랑시스 피카비아, 맨 레이 등 동료 작가들과 함께 반이성과 반미술을 표방하는 뉴욕 다다이즘 운동을 창시했습니다.
이는 선 페미니즘 문화 운동의 시작점이기도 했습니다.
1916
[코디, 크로티 작품 혹평]
로버트 J.
코디가 자신의 월간지 <토양>에서 장 크로티의 조각 '마르셀 뒤샹의 초상'을 '배관공이 만들 법한 표현력'이라며 혹평했습니다.
이는 훗날 뒤샹의 <샘> 제작 동기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로 이어졌습니다.
1917
[레디메이드 <샘> 탄생]
마르셀 뒤샹이 뉴욕 맨해튼 J.L.모트 철공소에서 스탠더드 베드퍼드셔 소변기를 구입, 이를 90도 돌려 세우고 'R.
Mutt 1917'이라고 서명하여 <샘>을 완성했습니다.
이는 평범한 일상용품에 미적 의미를 부여한 세계 최초의 '레디메이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샘>, 다다 잡지에도 거절]
전시회에서 내려진 <샘>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스튜디오로 옮겨 촬영을 진행한 뒤, 뒤샹은 다다 전문 잡지 <더 블라인드 맨> 2호에 <샘> 사진과 관련 글들을 보냈으나, 이 잡지마저 <샘> 게재를 거절했습니다.
[<리처드 머트 사건> 기사 게재]
뉴욕 다다이즘 운동가들이 <블라인드 맨> 2호에 '리처드 머트 사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하며 <샘>의 전시 거부 논란에 불을 지폈습니다.
이 기사는 '머트 씨가 그것을 '선택'했다.
삶의 일상적인 물건을 골라, 새로운 제목과 관점을 붙여 유용성을 제거했고, 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창조했다'며 예술의 본질에 대한 중대한 시사점을 남겼습니다.
[<샘> 원본 소실]
첫 전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샘>의 원본은 소실되었습니다.
유력한 설로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쓰레기로 내버렸다는 것이며, 뒤샹의 초창기 레디메이드 작품들이 이 같은 운명을 겪었다고 전해집니다.
[<샘> 전시회 출품]
마르셀 뒤샹이 평범한 소변기인 <샘>을 뉴욕 그랜드 센트럴 팰리스에서 열린 미국 독립작가협회 주최 전시회에 출품했습니다.
협회는 참가비를 낸 작품은 모두 접수하겠다고 밝혔으나, 이 '변기' 작품의 전시 여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샘> 대리 출품 시사]
마르셀 뒤샹이 여동생 쉬잔에게 '리처드 머트라는 남성적인 가명을 쓰는 내 여자친구 중 한 명이 세라믹 소변기를 조각품으로 보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샘>의 실제 제작자가 뒤샹이 아닐 수도 있다는 '대리 출품설'의 주요 근거가 됩니다.
뒤샹의 여자 분신인 로즈 셀라비, 다다이즘 작가 엘자 폰 프라이타크로링호펜, 시인 루이즈 노턴 등이 대리 출품설의 후보로 거론됩니다. 특히 프라이타크는 <샘>과 비슷한 철학을 지닌 작품 <신>을 제작한 바 있습니다.
[독립작가협회, <샘> 전시 거부]
미국 독립작가협회는 <샘>을 '원래 자리에서는 유용할지언정 미술 전시회에 전시할 수 없으며 미술 작품이라는 정의에도 따르지 않는다'며 전면 전시를 거부했습니다.
뒤샹은 이에 항의하며 협회에서 탈퇴했습니다.
[스티글리츠, <샘> 극찬]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샘>의 사진을 보고 '이 소변기 사진은 정말 경이롭다.
부처와 베일 쓴 여인이 교차된 것처럼 오리엔트적인 모습을 지녔다'며 극찬했습니다.
그는 이 사진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1918
[<샘> 원제 '화장실의 부처'설]
프랑스 평론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는 <샘>의 원제가 '화장실의 부처'였으며 부처의 좌상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주장을 실었습니다.
이는 <샘>에 담긴 동양적인 미학적 관점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1935
[<샘> 소형 복제품 제작 시작]
뒤샹은 잃어버린 <샘>의 원본을 대신해 자신의 유명 작품들을 미니어처로 복제하여 <여행가방 속의 상자> 작품에 넣을 용도로 소형 복제품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종이반죽으로, 나중에는 세라믹으로 제작했습니다.
1950
[<샘> 실물 크기 복원 착수]
뉴욕 전시회 준비를 앞두고 <샘>의 실물 크기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원본을 대체하기 위한 뒤샹 본인의 의뢰와 승인으로 이루어진 이 복원은 훗날 여러 기관에 소장될 복제품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1953
[<샘> 복제품 지속 제작]
1950년 실물 크기 복원을 시작한 뒤, 1953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쳐 <샘> 복제품 2점이 추가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로써 잃어버린 원본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메시지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1964
[<샘> 복제품 대량 제작]
1964년, <샘>의 복제품 8점이 추가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복제품들은 유약칠한 세라믹에 검은색 페인트로 서명을 재현하는 등 원본과 최대한 비슷하게 복원되어 오늘날 세계 유수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