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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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술탄, 장군, 군주, 이슬람 지도자 + 카테고리

- 12세기 중동의 전설적인 지도자이자 이집트와 시리아의 술탄. - 십자군 원정에 맞서 이슬람 세력을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며 이슬람의 위상을 드높임. - 전쟁 중에도 기사도 정신과 자비로움으로 적에게도 존경받았으며 잉글랜드 리처드 1세와의 일화가 특히 유명함. - 정의와 신념이라는 이름처럼 청렴한 삶을 살며 어려운 이들을 도운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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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137

[위대한 이슬람 영웅의 탄생]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일하고 십자군에 맞서 이슬람을 이끌 위대한 영웅 살라딘이 현재 이라크 북부 지역인 티크리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명은 유수프이며,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을 의미하는 '살라흐 앗딘'이라는 칭호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살라딘은 약 1137년에서 1138년 사이에 이라크 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는 1139년 티크리트에서 쫓겨나 모술로 갔으며, 나중에 이마드 앗딘 장기의 부하가 되어 발베크 요새 수비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학업을 마치고 삼촌 시르쿠에게서 기초 군사 교육을 받았습니다.

1152

[이슬람의 미래를 위한 첫 발걸음]

살라딘이 시리아의 군주 누르 앗딘의 군대에 합류하며 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이슬람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가 될 그의 첫 중요한 발걸음이었습니다.

1164

[이집트 전선, 용맹함을 떨치다]

살라딘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분파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군사적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이집트를 둘러싼 십자군과의 첫 대면에서 용맹함을 떨치며 그의 삼촌 시르쿠가 이 지역 지배를 시작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1160년대에 살라딘은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분파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1169년에는 삼촌 시르쿠가 이 지역의 장관으로 임명되어 이집트에 대한 지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영향력을 점차 키워나갔습니다.

1170

[현명한 후퇴, 완충지대 유지]

살라딘은 누르 앗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에서 퇴각하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는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를 유지하려는 그의 전략적 선택으로, 향후 시리아 지배를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살라딘은 1170년과 1172년 누르 앗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으로부터 퇴각했습니다. 그는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입니다.

1171

[이집트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다]

이름뿐인 칼리프 알아디드가 사망하자, 살라딘은 마침내 이집트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는 이집트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며 세력을 다졌습니다.

살라딘은 1171년 9월,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 알아디드가 죽자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마찰을 피하면서도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또한, 이집트를 압바스 왕조에 통합시키고 수니파 교단을 회복시켰습니다.

1174

[아이유브 왕조의 탄생, 술탄 살라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딘은 기다렸다는 듯 이집트의 술탄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건국하며 수니파 교단을 회복시켰습니다.

누르 앗딘 사망 후, 살라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고,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는 파티마 왕조 지지세력을 소탕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홍해를 건너 예멘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또한 다마스쿠스로 행군하여 대중의 환영을 받았고,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로 누르 앗딘의 미망인과 결혼했습니다. 수니파 신도들은 그에게 '신의 친구'라는 호칭을 붙였습니다.

1176

[암살자들의 위협, 알레포 공성전]

살라딘이 알레포를 공성하던 중,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암살자 조직 '아사신'의 공격을 받아 공격을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생명을 노린 위협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살라딘은 1176년과 1186년 알레포와 모술에 대한 공성에 나섰지만, 1176년 5월 22일 알레포 공성 당시 '해시시를 먹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정예 암살자 조직 아사신의 공격을 받고 공격을 철수하기도 했습니다.

1177

[충격적인 대패, 몽기사르 전투]

살라딘은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 연합군과의 몽기사르 전투에서 유일한 대패를 기록했습니다.

병력 대부분을 잃고 이집트로 후퇴해야만 했던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살라딘은 시리아 지배력을 강화하고 십자군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했지만, 1177년 11월 25일의 몽기사르 전투에서 예루살렘의 보두앵 4세와 샤티용의 레날드, 성전 기사단 연합군에게 대패했습니다. 이 전투로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본국 이집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78

[전력 재건을 위한 휴전]

몽기사르 전투의 피해를 복구하고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살라딘은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는 다음 대규모 전투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1179

[십자군에 대한 설욕의 승리]

휴전 후 재건된 군대로 살라딘은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십자군의 거듭된 도발에 대한 응징이었습니다.

[첫 대규모 포로 처형]

살라딘은 바이트 알아존의 성을 함락시킨 후, 700명의 포로들을 처형했습니다.

이는 그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대규모 처형 사건으로, 그의 단호함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1183

[북부 거점 알레포 점령]

살라딘은 북부 시리아의 중요 도시 알레포를 점령하며 영향력을 더욱 확장했습니다.

이는 시리아 전체 지배를 위한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살라딘은 1176년과 1186년 알레포와 모술에 대한 공성에 나섰으며, 결국 1183년에 알레포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잔혹한 레날드에 대한 응징]

잔혹한 샤티용의 레날드가 무슬림의 교역로와 성지 순례길을 습격하고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자, 살라딘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레날드의 케라크 요새를 공격했습니다.

십자군의 거듭된 반격, 특히 사티용의 레날드는 홍해 함대를 동원하여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습격했습니다. 이어서 레날드는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까지 위협했고, 이에 살라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케라크의 레날드 요새를 공격했습니다.

[살라딘 성채 건설 완료]

살라딘은 카이로에 거대한 성채를 완성하며 그의 강력한 통치력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겼습니다.

이 외에도 시리아와 이집트 전역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살라딘에 의해 1175년부터 1183년까지 카이로에 쌓은 성채가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특히 그가 산 정상에 구축한 콸랏 알긴디(Qalaat Al-Gindi) 요새는 상단의 통행로를 잘 관측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며 석재로 만들어진 큰 방들과 상점, 수도시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186

[메소포타미아의 핵심, 모술 점령]

살라딘은 마침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모술을 점령하며 광대한 제국의 완성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이는 아이유브 왕조의 영토 확장에 큰 의미를 더했습니다.

살라딘은 알레포와 함께 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던 모술에 대해서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며, 1186년 마침내 모술을 점령했습니다.

1187

[성지 탈환의 서막, 하틴 전투 승리]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키며 예루살렘 왕국 함락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 전투는 십자군 역사에 재앙으로 기록되었으며, 샤티용의 레날드 같은 주요 인물들이 처형당했습니다.

살라딘은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뤼지냥의 기와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연합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습니다.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에 전환점이 되었으며, 살라딘은 사로잡은 샤티용의 레날드를 처형하고 뤼지냥의 기에게는 물을 대접하며 목숨을 보전해주었습니다. 이틀 후 살라딘은 모든 군인 포로들의 목을 베도록 명령했습니다.

[세계최초! 88년 만의 성지 예루살렘 탈환]

살라딘은 88년간 십자군의 손에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마침내 탈환했습니다.

그는 관대한 협상을 통해 도시 내 기독교도들에게 몸값을 받고 안전한 퇴거를 허용하며 자비로운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하틴 전투 승리 이후, 살라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했고,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을 접수했습니다.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과의 협상을 통해 살라딘은 프랑크족 남녀노소에게 몸값을 받고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게 허용했습니다.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약 7천에서 8천 가량의 남녀는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1188

[뤼지냥의 기 석방, 예상치 못한 자비]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사로잡았던 뤼지냥의 기를 석방하며 다시 한번 예측할 수 없는 자비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관대함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살라딘은 1188년 뤼지냥의 기를 석방하여 그의 아내 예루살렘의 시빌라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기와 시빌라는 티레로 입성하여 피난민들을 찾고자 했으나, 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이들을 돌려보냈고, 기는 아크레에 대한 공성을 단행했습니다.

1189

[3차 십자군과의 격전, 아크레 공방전]

예루살렘 함락 소식에 발발한 제3차 십자군 원정과 맞서 살라딘은 아크레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결국 아크레는 함락되었고, 영국 국왕 리처드 1세는 무슬림 포로들을 처형하며 잔혹함을 보여주었습니다.

하틴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단이 되었고, 영국이 재정을 부담한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점거했습니다. 영국의 국왕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무슬림들을 처형했으며, 살라딘은 8월 28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 포로로 잡은 모든 프랑크인들을 처형함으로써 이에 보복했습니다.

1191

[여인의 아기를 되찾아 준 자비]

프랑크족 여인의 유괴된 아기가 노예시장에 팔리자, 살라딘은 사재를 털어 아기를 사서 여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는 그의 인간적인 자비심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로, 적에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1191년 4월, 프랑크족 여인의 3개월 된 아기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리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프랑크인들의 권유로 여인이 살라딘에게 자비를 구했고, 사연을 들은 살라딘은 개인 재산을 모아 아기를 사서 여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사자심왕 리처드와의 격돌, 아르수프 전투]

살라딘의 군대는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 1세의 군대와 아르수프에서 맞붙었습니다.

비록 살라딘은 이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리처드 또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이 전투는 두 위대한 지도자 간의 존경심을 싹틔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191년 9월 7일, 살라딘의 군대는 사자왕 리처드 1세의 군대와 아르수프 전투에서 맞닥뜨렸습니다. 살라딘은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리처드 역시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두 왕은 서로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었고, 리처드가 부상을 당하자 살라딘은 공격을 중단하고 의사를 보내 치료하게 하거나 말을 보내는 등 기품 있는 일화들을 남겼습니다.

1192

[역사적인 평화, 리처드 1세와의 협정]

치열했던 전쟁 끝에 살라딘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두되, 기독교 순례자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허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1192년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평화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 협정으로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두되 기독교도 순례자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누이와 살라딘의 동생을 결혼시키고 예루살렘을 결혼 선물로 주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1193

[위대한 술탄의 영면]

십자군 원정에서 리처드 1세가 이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금고에는 매우 적은 재산만이 남아, 그가 대부분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사용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다마스쿠스에서 55~5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유언은 "이제야 유수프가 그 감옥에서 해방되는 구나"였습니다. 사망 후 그의 금고 안에는 한 조각의 금과 마흔 조각의 은 조각만이 있어, 장례식을 치르기에도 부족한 수준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의 영묘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야드 모스크 북서쪽 모퉁이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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