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타 에이오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쇼와 바둑계의 '면도날'이라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카타 에이오 9단은 정교한 수읽기와 날카로운 타개로 현대 바둑의 예술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오청원 9단과 함께 20세기 바둑사를 양분한 최강의 승부사로, 본인방전 7연패를 비롯해 통산 64회의 우승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특히 1960년대 중반에는 연간 최고 승률과 29연승이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수립하며 절대 1인자의 위상을 떨쳤습니다. 선수로서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일본기원 이사장을 역임하며 행정가로서도 헌신하였으며, 사후 바둑 전당에 헌액되어 그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인정받고 있습니다.
연표
1920
[사카타 에이오 탄생]
도쿄부 에바라군 오모리정(현 도쿄도 오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둑 애호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바둑돌을 잡았습니다.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9살의 나이에 마스부치 타츠코 2단의 문하생으로 입문하며 본격적인 바둑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일본기원 원생으로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됩니다.
1933
[입단 대회와 시간제의 탄생]
프로 입단 대회에서 강력한 후보로 꼽혔으나, 선배 기사들의 고의적인 장고 작전에 체력이 바닥나며 입단에 실패했습니다.당시에는 제한 시간이 없어 대국이 밤샘으로 이어지는 등 폐단이 컸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부터 입단 대회에도 정식으로 제한 시간제가 도입되는 바둑 역사의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1935
[프로 바둑 기사 입단]
15세의 나이로 험난한 관문을 뚫고 마침내 프로 초단으로 정식 입단했습니다. 본격적인 승부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역사적인 해입니다.입단 이후 거침없는 실력을 과시하며 빠르게 승단했습니다. 당시 후지사와 쿠라노스케에 버금가는 초고속 승단 페이스를 보여주며 바둑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1943
자신의 목표였던 후지사와 쿠라노스케를 상대로 생애 첫 백번 승리를 거두며 실력을 입증했습니다. 이 시기 후지사와, 타카가와 카쿠와 함께 '일본기원 삼우조'로 불리며 차세대 1인자 후보로 부상했습니다.
1944
[전시 징집과 시련]
태평양 전쟁의 여파로 2개월간 교육 소집을 받는 등 군 복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바둑 인생에 예기치 못한 공백이 생긴 시기였습니다.전쟁 말기 공습으로 인해 바둑 대회인 대수합이 중단되자 군수 공장에서 근로하기도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공습에 집까지 전소되는 비극을 겪으며 우라와 지역으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1947
[위기신사 결성과 탈퇴]
일본기원의 행정에 불만을 품은 소속 기사들과 함께 '위기신사'를 결성하고 단체로 일본기원을 탈퇴하는 강수를 던졌습니다.마에다 진지, 카지와라 타케오 등 뜻을 같이한 8명의 기사와 함께 독립 노선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오청원 9단과의 대결에서 패배하며 한계를 느끼고, 1949년에 다시 일본기원으로 복귀했습니다.
1951
[생애 첫 공식 기전 우승]
제1기 일본기원 최고단자 토너먼트 결승에서 호소카와 센진을 2-0으로 완파하고 생애 첫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이 우승으로 무관의 한을 풀고 명실상부한 일류 기사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또한 같은 해 본인방전 도전권을 획득하며 일본 바둑계의 패권에 도전하는 강력한 대항마로 성장했습니다.
1952
[프로 8단 승단]
뛰어난 성적과 기력을 인정받아 프로 8단으로 승단했습니다. 최고 단위인 9단을 목전에 두고 전성기를 향해 달려갔습니다.이 해에 열린 '4강 리그전'에서 우승하고, 기타니 미노루와 타카가와 카쿠 등 쟁쟁한 강자들을 연달아 제압하며 사카타 시대의 개막을 예고했습니다.
1953
[오청원과의 6번기 승리]
세계 최고의 기사 오청원 9단과의 6번기 대결에서 4승 1패 1무승부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승리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비록 핸디캡이 있는 선상선 대국이었으나 당대 무적이던 오청원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사카타'라는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955
[9단 승단 및 일본기원 선수권 우승]
일본기원 역사상 후지사와 쿠라노스케에 이어 두 번째로 프로 9단에 올랐습니다. 또한 타카가와 카쿠로부터 일본기원 선수권 타이틀을 탈취했습니다.이 시기부터 일본기원 선수권 7연패라는 놀라운 기록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실상부한 일본 바둑계의 정점에 선 최고의 기사임을 단위와 성적으로 모두 증명해 보였습니다.
도쿄와 오사카에서 각각 전화와 전보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돌을 두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진 혈투 끝에 승리를 거두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59
[압도적인 4관왕 달성]
일본 최강 결정전, 최고위전, 일본기원 선수권전, NHK배 등 무려 4개의 주요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며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당시 일본 바둑계의 거의 모든 굵직한 대회를 휩쓸며 독보적인 1인자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어떤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는 강력한 수읽기로 경쟁자들을 압도했습니다.
1961
[본인방 등극 및 '에이쥬' 호 칭호]
본인방전 9연패라는 위업을 달성 중이던 타카가와 카쿠에게 도전하여 4승 1패로 승리하고 대망의 본인방 자리에 올랐습니다.우승 후 '본인방 에이쥬(榮壽)'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쥬(壽)'는 당시 일본기원 총재였던 츠시마 쥬이치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사카타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렸습니다.
[사상 첫 7관왕의 기염]
본인방, 왕좌, 일본기원 제일위 등 3대 타이틀을 비롯해 도합 7개의 우승컵을 동시에 보유하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습니다.바둑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압도적인 성취였습니다. 이 해를 기점으로 일본 바둑은 사카타의 손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지배력을 과시했습니다.
1963
[명인 본인방 동시 석권]
제2기 명인전 결승에서 후지사와 히데유키를 4-3으로 꺾고 명인 타이틀마저 획득했습니다. 이로써 명인과 본인방을 동시에 거머쥔 최고 권위자가 되었습니다.명인전 리그 최종전에서 라이벌 오청원을 물리치고 도전권을 얻어낸 끝에 일궈낸 값진 승리였습니다. 이때부터 사카타와 후지사와는 바둑계의 영원한 라이벌로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1964
[불멸의 연간 최고 승률 기록]
이 한 해 동안 무려 30승 2패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거두며 연간 최고 승률 93.75%라는 불멸의 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이 기록은 바둑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시즌으로 평가받으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기 29연승이라는 역대 최다 연승 기록까지 함께 세우며 무적의 위용을 뽐냈습니다.
1965
[린하이펑에게 명인위 상실]
23세의 젊은 천재 린하이펑의 도전을 받아 "20대 명인은 있을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예상을 뒤엎고 2-4로 패해 명인 자리를 내주었습니다.사카타의 절대 권력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2년간 다시 도전하며 명인위 탈환을 시도했으나 모두 린하이펑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패퇴했습니다.
1967
이 성과로 인해 사카타는 '명예 본인방'의 자격을 획득하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8년 다시 맞붙은 린하이펑에게 결국 패하며 1인자의 자리를 완전히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1972
[제2의 황금기와 4관왕 등극]
50대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십단, 왕좌 등 4개의 타이틀을 동시에 보유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습니다.젊은 기사들의 거센 도전 속에서 다시 한번 정상을 탈환하며 '제2의 황금기'라 불리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 공로로 바둑계 최고 권위의 슈사이상과 최고유능기사상을 휩쓸었습니다.
1978
[일본기원 이사장 취임]
선수 생활을 넘어 바둑계 행정을 총괄하는 일본기원 이사장에 취임하여 1986년까지 약 8년간 조직을 이끌었습니다.기원 운영의 현대화와 바둑 보급을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행정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일본 바둑의 내실을 다지고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젊은 강자 오오타케 히데오를 상대로 분전했으나 1-4로 패하며 우승컵을 들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환갑을 앞둔 나이에 최고 권위 기전의 결승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전설의 저력을 증명하기에 충분했습니다.
1982
[명예 NHK배 선수권자 등극]
방송 속기전인 NHK배에서 통산 11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며 명예 NHK배 선수권자 칭호를 받았습니다.속기 바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순발력과 수읽기를 자랑했습니다. 한 기전에서 11번이나 정상에 오른 것은 사카타의 꾸준함과 실력을 상징하는 가장 빛나는 지표 중 하나입니다.
1983
[통산 64회 우승 대기록 달성]
NEC배전 우승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통산 우승 횟수를 64회로 늘리며 당시 바둑계 역대 최다 우승 기록을 경신했습니다.이 기록은 2002년 조치훈 9단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수십 년간 부동의 역대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현대 바둑 기전 역사상 사카타가 얼마나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는지 보여주는 결정적 숫자입니다.
1988
[일본기원 고문 위촉]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바둑계의 원로로서 일본기원 고문으로 위촉되어 후배 양성과 바둑계 발전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승부사로서의 기백과 행정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바둑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일본 바둑계는 든든한 버팀목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1990
[제23회 오쿠라상 수상]
일본 바둑 보급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최고 권위의 표창인 오쿠라 키하치로상을 수상했습니다.일생을 바둑에 헌신한 그의 노고를 국가와 바둑계가 공식적으로 다시 한번 치하한 것입니다. 선수로서의 기록을 넘어 바둑 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로를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1998
[23세 본인방 공식 명명]
규정 개정에 따라 정식으로 '23세 본인방'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의 명예 본인방 칭호보다 격상된 영예로운 이름입니다.가문 세습 시절의 전통을 잇는 본인방가(家)의 계승자로서 그 권위를 완벽히 보장받았습니다. 이로써 사카타는 본인방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영원한 거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2000
[현역 은퇴]
80세 생일을 맞이하여 기력과 시력의 쇠퇴를 이유로 정든 바둑판을 뒤로하고 화려했던 현역 생활을 마감했습니다.65년간의 기나긴 프로 생활을 마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은퇴 이후에도 명예 고문으로서 바둑계에 머물며 원로 기사의 품격을 잃지 않고 조용한 여생을 보냈습니다.
2010
[사카타 에이오 타계]
흉부 대동맥류 파열로 인해 향년 90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쇼와 바둑의 거대한 별이 졌습니다.국가로부터 정4위에 서해지는 등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12월 23일 일본기원에서 열린 '사카타 에이쥬 고별식'에는 수많은 바둑인들이 모여 거장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2019
[바둑 전당 헌액]
제16회 바둑 전당(圍碁殿堂) 입성이 최종 결정되며 일본 바둑 역사에 그 이름을 영원히 새기게 되었습니다.사후에도 변치 않는 그의 영향력과 기록적인 업적이 재조명된 결과입니다. 면도날 같은 날카로움으로 바둑의 정수를 보여준 그의 기풍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후배 기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