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 료마
연표
1836
[사카모토 료마, 고치에서 태어나다]
도사 번(오늘날의 고치현 고치시) 하급 무사인 고시 계급의 사카모토 가문에서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와 어머니 사카모토 고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사카모토 가문은 유복한 상인 집안의 분가였지만, 하급 무사라는 신분적 차별을 겪었습니다.
료마는 덴포 6년 음력 11월 15일, 도사 번 고시(鄕士) 계급의 사카모토 가문에서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와 어머니 사카모토 고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사카모토 가문은 전당포, 주조업, 포목상을 영위하는 호상 사이다니야의 분가로, 재산은 많았지만 도사 번 내의 상급 무사 계급인 상사(上士)와는 차별을 받았습니다.
1846
[어머니 사카모토 고 사망]
열 살이 되던 해, 료마의 어머니 고가 4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료마는 새어머니 이요의 손에서 자라며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료마가 열 살이 되던 해, 어머니 고가 향년 49세에 병사했습니다. 당시 쉰 살이던 아버지 나오타리는 후처 이요를 맞이했고, 료마는 새어머니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새어머니 이요는 료마의 교육에 매우 엄격했지만, 료마와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집니다.
1850
[히네노 도장에서 검술 수련 시작]
료마는 14살 때부터 히네노 벤지가 가르치는 히네노 도장에 입문하여 오구리 류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료마의 검객으로서의 첫걸음이었습니다.
료마는 14살 때부터 히네노 벤지가 가르치는 히네노 도장에 입문해 오구리 류 검술을 배웠습니다. 1853년 3월에는 히네노에게서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사 목록'을 하사받았습니다.
1853
[에도 유학 및 검술 수련]
더 심도 있는 검술 연마를 위해 에도로 유학을 떠나 북진일도류 지바 도장에 입문했습니다. 이 시기 에도의 존왕양이론자들과 교류하며 정치적 시야를 넓혔습니다.
병법사 목록을 받은 료마는 더욱 심도있게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1853년 에도로 유학했습니다. 료마는 북진일도류 지바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에도의 존왕양이론자들과 사귀었으며, 그 해 말에는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서도 공부했습니다.
[페리 제독 흑선 내항과 해안 경비대 복무]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 당시, 료마는 도사 번의 임시 시나가와 해안 경비대로 복무하며 서양 세력의 위협을 직접 체감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53년 6월 3일, 매슈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우라가 해안에 내항했습니다. 료마는 6월부터 9월까지 도사 번의 임시 시나가와 해안 경비대로 복무하며 서양의 압도적인 힘을 목격했고, 이는 막부에 대한 반감과 개항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사쿠마 쇼잔 사숙 입문]
료마는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 입문하여 서양 문물과 세계 정세에 대한 견문을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료마가 이후 개화와 해운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됩니다.
1853년 12월, 료마는 사쿠마 쇼잔의 사숙에 입문하여 공부했습니다. 같은 해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내항하면서, 무사 계급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해 개항하려는 막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1854
[에도 유학 마치고 고향 도사로 귀향]
에도에서의 검술 수행을 마치고 고향 도사로 돌아왔습니다. 귀향 후, 히네노 벤지로부터 검술 면허 중전(中傳)을 받아 실력 향상을 인정받았습니다.
1854년 6월 23일, 료마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히네노 벤지는 료마에게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 12개조와 25개조'를 하사했습니다. 이는 료마가 에도에서 수련하여 솜씨가 늘었다고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해 겨울, 료마는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료로부터 서양에 대해 배웠습니다.
[가와다 쇼료에게 서양 문물과 해운의 길을 배우다]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료로부터 서양 문물과 세계 정세에 대해 깊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쇼료는 료마에게 외국 배를 구입해 운송업을 하라는 충고를 했고, 이는 료마가 훗날 해운업에 발을 들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854년 겨울, 료마는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료로부터 서양 문물과 세계 정세에 대해 배웠습니다. 쇼료는 료마에게 외국 배를 구입해 동지를 모아 운송업을 하며 배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고 항해 기술을 터득하라는 충고를 들었고, 이는 훗날 료마가 걷게 될 해운의 길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855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 사망]
료마의 아버지 사카모토 나오타리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형 곤페이가 이듬해 집안의 대를 이었습니다.
1855년 12월 4일, 아버지 나오타리가 사망했습니다. 세 달 뒤인 1856년 2월 2일, 형 곤페이가 집안의 대를 이었습니다. 그 후 료마는 그 해 다시 에도로 가 지바 도장에서 2년간 수련했습니다.
1856
1856년 료마는 다시 임시 해안 경비대로 에도에 오게 되었고, 지바 도장에서 2년간 수련을 이어갔습니다. 이 기간 동안 료마는 검술 실력을 더욱 향상시켰습니다.
1858
[북진일도류 장도 병법목록 하사]
지바 도장에서 스승 지바 사다키치에게 '북진일도류 장도 병법목록' 1권을 하사받았습니다. 이는 료마의 검술 실력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1858년 1월, 료마는 지바 도장에서 스승 지바 사다키치에게 '북진일도류 장도 병법목록' 1권을 받았습니다. 그 해 9월 검술 수행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검술 수행 마치고 고향 귀국]
에도에서의 검술 수행을 모두 마치고 고향 도사로 귀국했습니다. 이 시기는 미일 수호 통상조약 체결과 안세이 대옥 등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1858년 9월, 료마는 검술 수행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이 해 6월 28일 미일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었고, 9월 7일에는 안세이 대옥이 시작되는 등 일본 정세는 격동하고 있었습니다.
1861
[도사 근왕당 가입]
다케치 즈이잔이 주도한 '도사 근왕당'에 아홉 번째로 서명하며 가입했습니다. 료마는 다케치와 친분은 있었으나, 그의 일번근왕(一藩勤王) 주장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1861년 9월 경, 료마는 다케치 즈이잔이 주도한 도사 근왕당의 '도사 근왕당 혈맹자 성명 사본'에 아홉 번째로 서명함으로써 도사 근왕당에 가입했습니다. 료마는 평소 다케치와 친분이 있었지만 이런 정치적 결집은 몹시 기꺼워했으며, 다케치가 주장한 일번근왕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조슈 번으로 여행, 구사카 겐즈이와 면담]
다케치 즈이잔의 밀서를 가지고 조슈 번으로 향하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 여행 도중 존왕양이파의 구사카 겐즈이를 만나 번을 초월한 일본의 통합을 논의했습니다.
1861년 10월 11일, 료마는 다케치 즈이잔의 밀서를 가지고 조슈 번으로 향했습니다. 이 여행 도중 료마는 하기 번에서 존왕양이파를 대표했던 인물 중 하나인 구사카 겐즈이를 만나 번을 초월한 일본의 통합을 호소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1862
[도사 번 탈번]
도사 근왕당의 과격한 정세에 염증을 느끼고, 같은 당원 사와무라 소노조와 함께 도사 번을 탈번하여 낭인의 길을 택했습니다. 당시 탈번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습니다.
1862년 2월 말, 료마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도사 근왕당은 번의 중신 요시다 도요를 암살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료마는 암살에 가담하지 않고 3월 24일 같은 도사 근왕당 소속인 사와무라 소노조와 함께 탈번하여 낭인으로서 에도로 향했는데, 당시 탈번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습니다.
[가쓰 가이슈를 만나 개화 사상을 배우다]
개화파이자 막부 해군의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에 있던 가쓰 가이슈를 만나 그의 견식에 감복해 그 자리에서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쓰를 통해 서양 문물을 배우며 료마의 생각이 양이에서 개화로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료마가 탈번한 해인 1862년 10월 경, 료마는 개화파이자 군함 부교 나미 직책에 있던 가쓰 가이슈를 만나고 그의 견식에 감복해 그 자리에서 그의 제자가 됩니다. 가쓰로부터 서양 문물을 배운 료마는 양이에서 개화로 생각이 크게 바뀌며, 일본국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863
[탈번 죄 사면받다]
가쓰 가이슈의 중재로 도사 번주 야마우치 도요시게로부터 탈번의 죄를 사면받았습니다. 이는 료마가 다시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863년 2월 25일, 가쓰 가이슈는 도사 번 번주였던 야마우치 도요시게를 만나 료마의 탈번의 죄를 사면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는 료마가 가쓰의 지도를 받으며 공식적인 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오쿠보 이치오와 대정봉환론 논의]
오쿠보 이치오와 면담하며 대정봉환론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료마가 막부의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구상을 하는 데 영향을 주게 됩니다.
1863년 4월 2일, 료마는 오쿠보 이치오와 면담하며 대정봉환론을 배웠습니다. 이 구상은 료마가 이후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 천황 중심의 신정부를 수립하려는 노선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고베 해군 훈련소 설립 허가]
가쓰 가이슈의 도움으로 막부의 정식 기관인 고베 해군 훈련소 설립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료마는 이 훈련소 설립에 큰 힘을 보태며 해군 양성에 기여했습니다.
1863년 4월 23일, 료마는 가쓰를 도와 고베 해군 훈련소 설립에 힘썼습니다. 가쓰는 오사카에 도착한 쇼군 이에모치를 모시고 효고 방면을 안내한 뒤, 고베에 가서 그곳에 해군 훈련소를 설치하고 싶다고 직접 담판을 하여 허가를 받아내었습니다.
[고베 해군 훈련소 자금 조달]
고베 해군 훈련소 설립 자금 조달을 위해 가쓰의 사신으로서 에치젠국 후쿠이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슌가쿠를 찾아가 천냥을 빌렸습니다. 이는 해군 훈련소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막부의 지원만으로는 해군 훈련소 자금이 부족했기에 료마는 가쓰의 사신으로서 에치젠국 후쿠이번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슌가쿠를 찾아가 천냥을 빌렸습니다. 료마가 해군 훈련소 설립으로 바쁘던 1863년 4월, 도사 번의 정세가 변하고 다케치 즈이잔이 번의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것에 불만을 품은 도요시게는 다시 실권을 되찾기 위해 요시다 도요 암살의 하수인을 조사하도록 명령하고, 도사 근왕당 숙청에 나섰습니다.
[고베 해군 훈련소 책임자 취임]
고베 해군 훈련소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도사 번의 근왕당 탄압이 심해지며 료마에게 귀국 명령이 내려졌으나, 그는 훈련소 업무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1863년 10월 료마는 고베 해군 훈련소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 야마우치의 도사 근왕당 탄압이 심해지자 료마 등 도사 번 출신들에게 귀국 명령이 내려집니다. 하지만 당시 료마는 해군 훈련소 업무 수행에 힘쓰고 있어서 12월 경 가쓰는 손수 탄원서를 써 료마의 귀국 명령을 취소해 달라고 탄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탈번]
도사 번의 귀국 명령을 불응하고 다시 탈번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는 고베 해군 훈련소에 전념하려는 료마의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1863년 12월, 료마는 도사 번으로부터 돌아오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수행하지 않고 다시 탈번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쓰의 탄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료마는 다시 번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864
[조슈 번 공격 중재에 참여]
프랑스 군함의 조슈 번 공격 조짐에 따라 가쓰 가이슈가 중재자로 나가사키에 파견되었고, 료마도 문하생들과 함께 이에 참석했습니다.
1864년 1월 경, 천황과 조정을 개항 노선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산요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경, 프랑스의 군함이 작년 조슈 번의 양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슈의 시모노세키를 공격할 조짐을 보였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 산요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가쓰에게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공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가쓰는 2월 10일 료마를 비롯한 열네 명의 문하생을 이끌고 중재를 위해 출발했습니다.
[가쓰 가이슈의 사신으로 요코이 쇼난 방문]
가쓰 가이슈의 사신으로서 구마모토에 있는 요코이 쇼난을 방문했습니다. 료마는 해군 훈련소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고, 쇼난은 이에 해군 문답서를 작성해 가쓰에게 보냈습니다.
1864년 2월 14일, 구마모토에 도착하자 가쓰는 료마를 요코이 쇼난에게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료마에게 해군 훈련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쇼난은 해군 문답서를 적어 나가사키에 있던 가쓰에게 보냈고, 다음 해 1865년 가쓰는 다시 료마를 쇼난에게 보내, 쇼난의 조카 두 명을 해군 훈련소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데려오게 했습니다.
[나라사키 료와 만나다]
고베 해군 훈련소 발족 시기에 평생의 동반자가 될 나라사키 료를 만났습니다. 이 무렵 료마는 해군 훈련소 업무와 혼례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1864년 5월 4일, 오사카 수군이 폐지되어 고베 해군 훈련소에 들어가고 5월 14일 고베 해군 훈련소가 발족되었습니다. 료마가 평생의 동반자 나라사키 료를 만난 것도 이 무렵입니다. 발족과 동시에 가쓰는 군함 부교 나미에서 군함 부교로 승진하여 해군의 총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고베 해군 훈련소 발족]
오사카 수군이 고베 해군 훈련소에 통합되면서 고베 해군 훈련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습니다. 료마는 이 훈련소의 중요 구성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864년 5월 4일, 오사카 수군이 폐지되어 고베 해군 훈련소에 들어가고 5월 14일 고베 해군 훈련소가 발족되었습니다. 발족과 동시에 가쓰는 군함 부교 나미에서 군함 부교로 승진하여 해군의 총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의 만남]
가쓰 가이슈의 소개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만났습니다. 이는 훗날 사쓰마 번과 료마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1864년 8월 초순, 료마와 료는 곤조지 본당에서 소박하게 혼례를 올렸습니다. 또한 이 무렵 가쓰는 료마를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소개해주었습니다. 사이고와 료마가 대면한 날을 전후해 가쓰는 로주 아베 마사토를 여러 번 만났습니다.
[고베 해군 훈련소 폐쇄 및 사쓰마 번 보호]
가쓰 가이슈가 군함 부교직에서 파면당하며 고베 해군 훈련소가 사실상 폐쇄되었습니다. 료마 일행은 사쓰마 번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1864년 11월 10일, 가쓰는 군함 부교직을 파면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가쓰는 더 이상 해군 훈련소를 이끌어 나갈 수 없게 되어 얼마 뒤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료마 일행은 사쓰마 번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1865
[무역회사 '가메야마 조합' 설립]
가쓰 가이슈가 물러나고 고베 해군 훈련소가 폐쇄되자, 료마는 사쓰마 번의 원조를 받아 '가메야마 조합'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 조합은 상업 활동뿐 아니라 사쓰마와 조슈 번의 화해를 도모하는 정치적 목적도 있었습니다.
가쓰가 물러나고 훈련소가 문을 닫자, 료마는 사쓰마 번의 원조를 받고 '가메야마 조합'이라는 무역회사를 세웠습니다. 이 조합은 상업활동 등에 종사하는 현대의 기업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회사였습니다. 가메야마 조합의 목적은 상업 활동의 이익으로 이윤을 얻는 것 이외에, 당시 물과 불처럼 사이가 나빴던 사쓰마와 조슈 양 번의 화해 도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조슈 번 무기 구매 승인 얻다]
사쓰마의 다이묘 저택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견하여 사쓰마 번 명의로 조슈 번의 무기 구매에 대한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는 사쓰마와 조슈의 협력 관계 구축의 시작점이었습니다.
1865년 6월 24일, 료마는 사쓰마의 다이묘 저택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견하여 사쓰마 번의 명의로 조슈 번의 무기를 구매하는데 동의를 얻었습니다. 막부가 조슈 번에 무기 거래를 금지하자, 료마는 사쓰마 번 명의로 무기를 조달해 조슈 번에 되팔고, 그 대신 조슈로부터 사쓰마 번에 부족하던 쌀을 공급하는 방안을 제안하여 양 번의 협력을 이끌어냈습니다.
[글로버 상회로부터 조슈 번 무기 매입 알선]
나가사키의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가 운영하던 글로버 상회로부터 미니에 총 4,300정, 게벨 총 3,000정을 사쓰마 번의 명의로 조슈 번에 매입하는 알선에 성공했습니다. 이는 사쓰마와 조슈의 화해 계기가 되었습니다.
1865년 8월, 료마는 나가사키의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가 운영하던 '글로버 상회'로부터 미니에 총 4,300정, 게벨 총 3,000정을 사쓰마 번의 명의로 조슈 번에의 매입 알선에 성공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사쓰마와 조슈의 화해의 계기가 되었고, 가메야마 조합의 첫 실적이 되었습니다.
[오쿠보 도시미치 서간 조슈 번 전달 임무 수행]
조슈 재 정벌의 칙령에 대해 사쓰마 번이 따르지 않겠다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서간을 조슈 번 중신 히로사와 사네오미에게 전달하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865년 9월, 료마는 조슈 재 정벌의 칙령에 대해 사쓰마 번은 따르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긴 '의롭지 않은 칙령은 칙령이 아니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오쿠보 도시미치의 서간을 조슈 번 중신 히로사와 사네오미에게 전달하는 중대한 임무를 오쿠보와 사이고에게 위임받아 수행했습니다.
[유니온 호 구입 및 운항권 확보]
곤도 조지로의 활동으로 사쓰마 번 명의로 영국제 증기 군함 유니온 호를 구입하고, 소유권 분쟁 끝에 사쿠라지마 조약을 체결하여 가메야마 조합이 선박 운항을 맡게 되었습니다.
1865년 10월, 곤도 조지로의 활동으로 사쓰마 번의 명의로 영국제 증기 군함 유니온 호(사쓰마 명 '사쿠라지마 마루', 조슈 명 '잇쵸 마루')의 구입에 성공하였고,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은 있었지만 10월과 12월에 조슈 번과 사쿠라지마 조약을 체결, 선박의 운항은 가메야마 조합이 맡게 되었습니다.
1866
[삿초 동맹 체결에 공헌]
료마와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의 중재로, 물과 불처럼 사이가 나빴던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비밀리에 군사 동맹인 '삿초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이 동맹은 막부 타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도막의 중심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었지만, 두 번은 막부를 일으켜 세우려는 중도파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부활시키려는 급진파로서 대립하며 사이가 매우 나빴습니다. 료마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3월 7일 삿초 동맹(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결성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데라다야 사건 발생]
삿초 동맹 체결 직후, 료마를 포함한 지사들이 모여있던 교토의 데라다야 여관에서 암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료마는 이 공격에서 부상을 입었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삿초 동맹이 체결된 바로 다음날인 1866년 3월 9일, 료마를 포함한 지사들이 모여있던 데라다야 여관에서 료마 일행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암살범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삿초 동맹에 위협을 느낀 막부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삿초 동맹 맹약서에 서명]
데라다야 사건으로 인한 부상 치료를 위해 기도 다카요시의 요청을 받고 삿초 동맹 맹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1866년 3월 20일, 료마는 기도 다카요시에게 요청받고 삿초 동맹 맹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이는 사쓰마와 조슈 번 사이의 협력을 공식화하는 중요한 절차였습니다.
[아내 오료와 가고시마로 신혼여행]
데라다야 사건으로 인한 부상 치료를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의 권유로 아내 오료와 함께 가고시마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66년 4월 19일, 데라다야 사건으로 인한 부상 치료를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의 권유로, 아내 오료와 함께 가고시마를 여행했습니다. 이 여행은 한 달간 이어졌으며, 일본 역사상 최초의 신혼여행으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조슈 대 막부 전쟁 참여]
시모노세키에서 조슈 번 대 막부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 전투는 제2차 조슈 정벌의 일환으로, 삿초 동맹의 영향으로 조슈 번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866년 7월 28일, 료마는 시모노세키에서 조슈 번 대 막부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 전쟁은 제2차 조슈 정벌로, 조슈 번이 삿초 동맹의 지원을 받아 막부군을 격파하며 막부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습니다.
[가메야마 조합 해산 고려]
이 무렵 경영난으로 가메야마 조합의 해산을 고려했습니다. 이는 조합의 재정적 어려움과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1866년 8월, 료마는 경영난으로 가메야마 조합 해산을 고려했습니다. 조합은 사쓰마와 조슈 번 사이의 중개 무역을 통해 이윤을 창출했지만, 복잡한 정치 상황과 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운영에 난항을 겪었습니다.
1867
[고토 쇼지로와 만나다]
미조구치 히로노죠의 주선으로 도사 번 산세이 고토 쇼지로와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료마가 대정봉환 구상을 실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867년 2월 17일, 료마는 미조구치 히로노죠의 주선으로 도사 번 산세이 고토 쇼지로와 만났습니다. 이 만남은 료마의 정치적 구상이 도사 번의 공식적인 의견으로 채택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가메야마 조합을 '가이엔타이'로 개칭]
두 번째 탈번의 죄를 용서받고 가메야마 조합의 대장이 되어 도사 번 부속 외곽기관인 '가이엔타이'로 개칭했습니다. 가이엔타이는 해군력 강화와 무역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1867년 4월 초순, 료마는 2번째 탈번했던 죄를 용서받고 가메야마 조합의 대장이 되어 도사 번 부속 외곽기관으로써 가메야마 조합의 이름을 가이엔타이(海援隊)로 개칭했습니다. 가이엔타이는 해군력 증강과 서양식 무역을 통해 국가의 부강을 도모했습니다.
[이로하마루 호 침몰 사건 발생]
가이엔타이 창립 후, 료마는 전함 이로하마루 호를 직접 이끌고 항해에 나섰으나, 기슈 번의 메이코마루 호와 충돌하여 이로하마루 호가 침몰하는 사고를 겪었습니다. 이는 '이로하마루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67년 4월 23일, 가이엔타이 창립 후, 료마는 이로하마루 호라는 전함을 직접 이끌고 항해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운 나쁘게도 기슈 번의 메이코마루 호와 충돌하여 이로하마루 호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로하마루 사건'으로 불리며, 이후 거액의 배상금 교섭을 벌이게 됩니다.
[이로하마루 사건 배상금 약속 받아내다]
이로하마루 사건의 배상 교섭에서 료마와 고토 쇼지로는 기슈 번 대표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료마는 이 배상금을 이용해 새로운 사업 대신 대정봉환 성사에 힘쓰기로 결심했습니다.
1867년 5월 29일, 이로하마루 사건의 배상 교섭에 나선 료마와 고토 쇼지로는 기슈 번 대표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이것을 담보로 사용하면 당장이라도 거대한 함선을 구입하여 무역에 나설 수 있었지만, 료마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고토의 의견에 따라 도사 번의 배로 고토와 함께 상경하여 대정봉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메이지 정부 기본 이념 '선중팔책' 책정]
고토 쇼지로와 함께 메이지 정부의 기본 이념이 될 '선중팔책'을 책정했습니다. 이는 막부의 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하고, 민주적인 의회 제도를 도입하려는 혁신적인 구상이었습니다.
1867년 7월 10일, 교토로 가는 배에서 료마는 고토 쇼지로와 함께 대정봉환 등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을 입안했습니다. 이 선중팔책은 훗날 신정부강령팔책이라는 메이지 정부의 기본 이념이 됩니다.
[사쓰도 맹약 성립]
고토 쇼지로와 함께 '사쓰도 맹약'을 성립시켰습니다. 이 맹약은 사쓰마 번과 도사 번의 협력을 약속하며 대정봉환 실현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1867년 7월 23일, 료마는 고토 쇼지로와 함께 사쓰도 맹약(薩土盟約)을 성립시켰습니다. 이 맹약은 사쓰마와 도사 양 번이 정치적 협력을 통해 막부 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사쓰마 번이 맹약 파기를 통보하게 됩니다.
[이카루스 호 사건 혐의]
영국 이카루스 호 선원 살해 혐의가 가이엔타이에 회부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료마와 가이엔타이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1867년 7월 6일에 발생한 이카루스 호 사건의 선원 살해 혐의가 1867년 7월 29일, 가이엔타이에 회부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료마와 가이엔타이에 대한 외부의 압박을 가중시켰습니다.
[이카루스 호 사건 해결]
영국 이카루스 호 사건의 혐의가 해결되었습니다. 료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며 가이엔타이의 명예를 지켰습니다.
1867년 9월 10일, 가이엔타이에 회부되었던 영국 이카루스 호 선원 살해 혐의가 해결되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료마와 가이엔타이가 대정봉환 구상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신정부강령팔책' 초안 작성]
메이지 정부의 기본 이념이 될 '신정부강령팔책'의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이는 료마의 정치적 비전을 담은 중요한 문서였습니다.
1867년 11월 상순, 료마는 '신정부강령팔책'의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이 문서는 선중팔책을 더욱 구체화한 것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 국가 건설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막부에 대정봉환 건의 채용 요구]
막부의 와카도시요리 나가이 나오유키를 만나 대정봉환 건의의 채용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막부 체제를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료마의 노력이었습니다.
1867년 10월 10일, 료마는 막부의 와카도시요리 나가이 나오유키를 만나 대정봉환 건의의 채용을 요구했습니다. 같은 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상주(上奏)했고, 이로써 막부의 정권은 천황 중심의 조정으로 평화적으로 이양되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신관제의정서' 작성]
오자키 사부로와 함께 '신관제의정서'를 작성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정부 체제의 구체적인 방안을 담은 문서였습니다.
1867년 10월 16일, 료마는 오자키 사부로와 함께 '신관제의정서'를 작성했습니다. 이 문서는 대정봉환 이후 수립될 신정부의 관직 체계와 운영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료마의 개혁 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교토 오미야 여관에서 암살당하다]
대정봉환 한 달 후,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오미야 여관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암살당했습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막부측 미마와리구미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의 죽음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867년 음력 11월 15일, 대정봉환 한 달 후 료마는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의 오미야 여관에서 자객의 습격을 받고 피살당했습니다. 이를 '오미야 사건'이라고 부르며,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막부측 미마와리구미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한 가운데, 신센구미, 사쓰마 번 음모설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료마는 머리에 상처를 입었고 천천히 죽어갔습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당시 같이 습격당했던 나카오카가 중태인 가운데서도 3일간 생존했기 때문에 그에 의해 소상히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