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고 다카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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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정치인, 메이지 유신 주역 + 카테고리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쓰마 번의 하급 번사로 시작하여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메이지 유신의 핵심 주역으로 부상했습니다. 쇼군 정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신정부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정한론을 주장하다 정부와 갈등 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사무라이 반란인 세이난 전쟁의 주도자로 참여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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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28

[사이고 다카모리 탄생]

사쓰마 번의 하급 번사 사이고 기치베 다카모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8년 1월 23일 사쓰마 번의 하급 번사 사이고 기치베 다카모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고키치이며, 통칭은 기치노스케, 젠베에, 기치노스케 순으로 바뀌었습니다. 호는 난슈입니다.

1866

[삿쵸 동맹 협상 주도]

쇼군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연합을 성공적으로 협상하며 메이지 유신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교토에 주둔했던 사쓰마 번 봉건군의 사령관으로서 쇼군 정부를 무너뜨리기로 하고, 전국적으로 천황당원과 연락하며 1866년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연합을 협상하였습니다.

1867

[쇼군 무력 사임 주도]

천황 중심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쇼군을 무력으로 사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사이고는 1867년 11월 8일 쇼군을 무력으로 사임시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습니다.

1868

[메이지 유신 주도]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고, 왕궁의 문을 지키며 어린 메이지 천황에게 새 시대를 여는 포고령을 읽게 하였습니다.

사이고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습니다. 1868년 1월 3일 새벽이 다가오기 전 그가 지휘하는 부대는 왕궁의 문을 지켰습니다. 명사 회의는 어린 메이지 천황에게 일본의 새 시대를 여는 포고령을 읽게 하였습니다.

[에도 막부 항복 주도]

참모 총장으로서 에도 막부의 항복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며 막부군에 대항하는 전투를 이어갔습니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스폰을 받은 천황의 군대가 남은 막부군과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5월 사이고는 참모 총장으로서 에도의 항복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11월까지 막부군에 대항하였습니다.

1869

[정부 합류 거부 및 퇴직 생활]

메이지 유신 임무를 마친 후 새 행정 결성 참여 대신 사쓰마로 돌아가 퇴직 생활을 하였고, 천황이 명예를 수여했음에도 새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임무를 마친 사이고는 새 행정을 결성하는 데 어려운 문제에 참여하는 대신에 사쓰마로 들어가 퇴직 생활을 하게 됩니다. 1869년 천황이 천황의 복위에 힘쓴 이들에게 명예를 수여할 때에 사이고의 군대는 가장 높이 수여되었지만, 사이고는 새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아직도 거부하였습니다.

1871

[신정부 합류 및 요직 역임]

신 정부에 설득되어 1만 명의 군인을 포함한 신 정부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다조칸(국가 회의)에 임명되어 새로운 프로그램 수립 책임을 맡았습니다.

1871년 사이고는 결국 정부에 설득되어 1만 명의 군인을 포함한 신 정부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여러 번에서 봉건제를 폐지했습니다. 사이고는 다조칸(국가 회의)에 임명되어 키도 타카요시와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을 세우는 책임을 함께 맡았습니다.

1873

[정한론 주장과 정부 사임]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을 잃을 불안감을 느껴 정한론을 주장했으나 계획이 취소되자, 국가 의회원과 정부군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왔습니다.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을 잃을 불안감을 느껴 1873년 조선 정벌론, 즉 정한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이 일본을 모욕했으므로 징벌해야 한다고 갈파하였습니다. 이 주장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 회의와 싸우며, 자신이 조선에 특별 교섭으로 가 명시적으로 뛰어난 논쟁을 펼치겠다고 피력했습니다. 계속되는 간청 후, 정부 인사들이 서양을 여행하고 돌아오기 전인 8월 18일에 천황이 그의 계획을 수용하였으나, 외국 모험에 국내적 발전이 먼저임을 논의한 인사에 의하여 그의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사이고는 국가 의회원과 정부군의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가고시마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몇몇 다른 높은 계급의 공무원들과 100명 이상의 정부군 사관도 잇따라 사임을 하였습니다.

1876

[사무라이 반란의 중심에 서다]

가고시마로 돌아온 후 군사학 개인 학교를 운영하며 20,000명의 학생을 두었으며, 일본 다른 지역에서 사무라이 반란이 시작될 때 가고시마가 그 논란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가고시마로 돌아온 지 몇 달 후, 사이고는 군사학을 가르치는 개인 학교를 열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든 무사가 그의 아래에서 공부하였으며, 1877년에는 학생수가 20,000명으로 늘었습니다. 사이고는 이곳을 공직에서 일할 청년을 훈련하는 학교라고 여겼으나, 도쿄에 있는 정부에게는 근심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번의 행정이 지사의 통치로부터 사이고 세력의 손으로 들어갈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1876년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사무라이의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가고시마는 그 논란의 중심지였습니다.

1877

[세이난 전쟁 발발 및 지도자로 추대]

사이고의 제자들이 가고시마 군수 공장과 해군 기지를 공격하며 반란을 시작했고, 망설이던 사이고는 결국 반란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습니다.

1877년 1월 29일 사이고의 제자 중 한 계파가 가고시마의 군수 공장과 해군 기지를 공격하였습니다. 산에서 사냥을 즐기던 사이고는 망설이며 돌아왔습니다. 그가 가고시마에 도착했을 때, 그의 후원자들이 군수 공장에서 추가적 군사 행위를 위한 군수물자를 준비하기 위해 작전을 짜고 있었습니다. 사이고는 반란의 지도자로 추대 되었습니다.

[세이난 전쟁 본격 개시]

정부를 비판하며 도쿄로 행진하는 계획과 더불어 사이고 군이 전쟁을 시작하였고, 정부군과 구마모토 번에서 전면전이 일어났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며 도쿄로 행진하는 계획과 더불어 2월 15일에 사이고 군은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정부군은 구마모토 번에서 사이고 행진을 가로막았고, 그 후 6개월 간 전면전이 일어납니다. 사이고의 옛 친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당시 전쟁부 장관이자 사이고 군대에 맞서는 야전군 사령관이었습니다.

[세이난 전쟁 패배 및 자결]

세이난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한 후 가고시마로 돌아와 언덕에 진지를 구축했으나, 정부군의 최후 공격에 부상을 당하고 자결하여 생을 마감했습니다.

5월부터 수세였던 사이고는 여름에 패전을 거듭하였고, 9월에는 패색이 짙어졌습니다. 그는 몇 백의 부하를 이끌고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도시 전경이 보이는 언덕에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9월 24일에 정부군이 최후 공격을 가하였으며, 부상을 당한 사이고는 자결하였습니다. 일설에 그의 부하가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무사와 정부군 양쪽에서 12,000명 사상자와 20,000명 부상자를 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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