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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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시험
국가시험, 법조인 선발 제도, 고시, 대한민국 법조사 + 카테고리
대한민국 건국 이래 2017년 폐지될 때까지 법조인을 선발하는 유일하고 권위 있는 등용문이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의 상징으로서 학력, 연령, 성별의 제한 없이 누구에게나 열린 기회의 사다리 역할을 수행했으나, '고시 낭인' 양산과 법학교육의 파행이라는 부작용도 낳았습니다. 54년의 역사 동안 2만여 명의 법조인을 배출하며 한국 사회의 엘리트 충원 경로로 기능했으나,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단계적인 축소 과정을 거쳐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공정성과 기회균등의 대명사로 회자되며 사법시험 부활론이 꾸준히 제기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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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47

[조선변호사시험 시행]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법조인 선발을 위해 '조선변호사시험'이 시행됩니다. 이는 대한민국 사법시험의 가장 초기 형태로, 일제강점기의 제도를 탈피하고 독자적인 법조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첫걸음이었습니다.
1949년까지 총 3회에 걸쳐 시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체계적인 법학 교육 기관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시험이 사실상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1950

[고등고시 사법과 도입]

정부 수립 후 '고등고시령'에 의거하여 행정과와 더불어 '고등고시 사법과'가 신설됩니다. 이후 16회에 걸쳐 시행되며 한국 전쟁기에도 법조 인력을 배출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 시기의 합격자들은 훗날 대한민국 사법부와 검찰의 초석을 다지는 1세대 법조 원로가 되었습니다. '고시'라는 명칭이 일반인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1963

[사법시험령 공포 및 제도 확립]

기존의 고등고시 사법과가 폐지되고 '사법시험령'이 제정되면서 현재 우리가 아는 '사법시험'이라는 명칭과 체제가 공식적으로 출범합니다. 제1회 사법시험이 이 해에 실시되었습니다.
국가 재건과 법치주의 확립을 목표로 보다 체계적인 선발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합격자들은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연수를 받는 시스템이었습니다.

1970

[정원제 선발 방식 도입]

기존의 절대평가 방식(평균 60점 이상 합격)에서 미리 정해진 인원을 선발하는 '정원제'로 변경됩니다. 절대평가 하에서 합격자가 지나치게 적게 배출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절대평가 시절에는 한 자릿수 합격자만 나오는 해도 있을 정도로 문턱이 높았습니다. 정원제 도입은 법조인 수급의 안정성을 꾀하려는 시도였으나, 여전히 선발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1971

[사법연수원 개원]

사법시험 합격자들의 실무 교육을 담당할 사법연수원이 대법원 산하에 설립됩니다. 이후 사법시험 합격 후 2년간의 연수원 과정은 법조인이 되기 위한 필수 코스로 자리 잡습니다.
초기에는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을 대체하는 성격이었으나, 점차 독자적인 법조인 양성 기관으로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연수원 성적에 따라 판·검사 임용이 결정되어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습니다.

1972

[제3차 시험(면접) 도입]

필기시험 합격자를 대상으로 인성과 국가관 등을 검증하기 위한 제3차 시험(면접)이 처음으로 도입됩니다. 단순한 법률 지식뿐만 아니라 법조인으로서의 소양을 평가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초기 면접은 형식적인 절차에 가까웠으나, 후기로 갈수록 심층 면접이 강화되어 실제 탈락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사법시험의 3단계 선발 구조(1차 객관식, 2차 논술, 3차 면접)를 완성했습니다.

1981

[선발 인원 300명으로 증원]

전두환 정부의 지시로 사법시험 합격 정원이 기존 100명 미만에서 300명으로 대폭 확대됩니다. 소수 엘리트 법조인들의 카르텔을 깨고 기회를 확대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인해 합격자가 급증하며 '개천에서 용 나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당시 합격한 23회 이후 기수들은 훗날 법조계와 정치계의 주류 세력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1995

[세계화추진위원회 로스쿨 논의]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추진위원회에서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미국식 로스쿨 제도 도입을 논의하기 시작합니다. 당장 도입되지는 않았으나, 사법시험 정원 확대의 도화선이 됩니다.
기존 사법시험 제도가 국제화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서 출발했습니다. 로스쿨 도입은 보류되었지만, 대신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늘려 법조인 공급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습니다.

1996

[선발 인원 500명으로 증원]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선발 인원이 300명에서 500명으로 늘어납니다. 법률 시장 개방에 대비하고 대국민 법률 서비스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후 매년 100명씩 단계적으로 증원하여 2000년대 초반에는 1,000명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시기부터 신림동 고시촌이 거대한 상권과 수험 문화를 형성하며 전성기를 누립니다.

2001

[사법시험법 제정]

대통령령이었던 사법시험령이 폐지되고, 법률인 '사법시험법'이 제정되어 공포됩니다. 시험의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고 주관 부서를 행정자치부에서 법무부로 이관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2002년부터 법무부가 시험을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법학 전공자의 진입 장벽을 높이는 법학 학점 이수제 등의 도입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2002

[선발 인원 1,000명 시대 개막]

사법시험 선발 인원이 1,000명에 도달하며 '사법시험의 황금기'가 열립니다. 대량 선발로 인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합격자들이 배출되었으나, 동시에 변호사 취업난 등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합니다.
이 기조는 로스쿨 도입이 확정되기 전인 2009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수많은 대학생과 직장인이 사법시험에 뛰어들면서 '고시 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2004

[영어 과목 대체시험 도입]

제1차 시험 과목 중 영어가 토익(TOEIC), 탭스(TEPS) 등 공인어학성적 제출로 대체됩니다. 법학 지식 측정에 집중하고 수험생들의 부담을 줄인다는 취지였으나, 진입 장벽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정 점수(예: 토익 700점)를 넘기지 못하면 아예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신림동 고시촌에 영어 학원 열풍이 불기도 했습니다.

2006

[법학 35학점 이수 의무화]

사법시험 응시 자격으로 법학 과목 35학점 이상 이수가 의무화됩니다. 법학 전공자가 아닌 경우 독학사나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점을 취득해야만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분별한 고시 낭인 발생을 막고 법학 교육의 정상화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비법대생들의 진입이 까다로워졌으며, 사이버대학이나 평생교육원의 수강생이 급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7

[로스쿨법 국회 통과]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합니다. 이에 따라 사법시험은 단계적으로 인원을 감축하여 2017년에 완전히 폐지되는 시한부 운명을 맞게 됩니다.
기존 사법시험 준비생들의 신뢰 보호를 위해 유예 기간을 두었으나, 폐지 자체는 확정되었습니다. 이로써 법조인 양성 시스템이 '시험을 통한 선발'에서 '교육을 통한 양성'으로 대전환을 맞이합니다.

2009

[법학전문대학원 개원]

전국 25개 대학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개원하며 사법시험과의 공존 기간이 시작됩니다. 로스쿨 입시가 본격화되면서 사법시험 준비생들이 로스쿨로 진로를 변경하는 사례가 늘어납니다.
로스쿨 인가 대학은 학부 법학과를 폐지해야 했으므로, 법과대학의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습니다. 사법시험 정원은 2009년까지 1,000명을 유지한 후 감축되기 시작했습니다.

2012

[제1회 변호사시험 및 사시 인원 감축]

로스쿨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제1회 변호사시험이 실시되어 새로운 경로의 변호사가 배출됩니다. 같은 해 사법시험 선발 인원은 500명으로 반토막 나며 폐지 수순이 가속화됩니다.
두 출신 간의 갈등과 경쟁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법시험 준비생들은 줄어드는 티켓을 두고 더욱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2013

[선발 인원 300명으로 축소]

사법시험 합격자 정원이 300명으로 줄어듭니다. 매년 큰 폭으로 줄어드는 정원은 수험가에 위기감을 고조시켰으며, 신림동 고시촌의 상권도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고시생이 시험을 포기하거나 공무원 시험, 전문직 자격증 시험 등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막차'를 타기 위한 장수생들의 절박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2014

[선발 인원 200명으로 축소]

합격자 정원이 200명으로 더욱 쪼그라듭니다. 사실상 최상위권 실력자가 아니면 합격을 장담할 수 없는 바늘구멍이 되었습니다.
사법시험 존치론이 정치권과 법조계 일각에서 제기되었으나, 로스쿨 측의 반발과 정부의 로드맵 고수로 인해 폐지 흐름을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2015

[법무부의 폐지 유예 발표 파동]

법무부가 사법시험 폐지를 2021년까지 4년간 유예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여 사회적 대혼란이 발생합니다. 사법시험 존치론자들은 환영했으나, 로스쿨 학생들의 집단 자퇴 결의 등 거센 반발에 직면합니다.
결국 법무부는 로스쿨 측과 여론의 역풍을 맞고 유예 입장을 사실상 번복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사법시험 폐지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임을 재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6

[마지막 제1차 시험 시행]

제58회 사법시험 제1차 시험이 실시됩니다. 이것이 역사상 마지막 사법시험 1차 시험이었으며, 이후에는 신규 진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습니다.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는 수천 명의 응시자가 몰려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1차 합격자는 이듬해 2차 시험까지 응시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

사법시험 폐지를 규정한 변호사시험법 부칙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5(합헌) 대 4(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립니다. 사법시험 폐지의 법적 정당성이 최종 확인된 순간입니다.
청구인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와 평등권 침해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헌재는 로스쿨 제도의 정착과 교육을 통한 법조인 양성이라는 입법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했습니다.

2017

[마지막 제2차 시험 시행]

제59회 사법시험 제2차 시험이 4일간의 일정으로 치러집니다. 54년간 이어져 온 사법시험의 실질적인 마지막 필기시험이었습니다.
전년도 1차 합격자 등 소수의 인원만이 응시했습니다. 시험장 앞에는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하는 시위대와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최종 합격자 55명 발표]

제59회 사법시험의 최종 합격자 55명의 명단이 발표됩니다. 이들은 '마지막 사법시험 합격자'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수석 합격자, 최연소 합격자 등의 인터뷰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합격자들은 사법연수원 49기로 입소하여 마지막 사법연수생이 되었습니다.

[사법시험법 폐지 및 완전 종료]

변호사시험법 부칙에 따라 사법시험법이 효력을 잃고 폐지됩니다. 이로써 1963년부터 이어져 온 사법시험 제도는 대한민국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집니다.
법조인 양성 일원화가 완성되었으나, 공정성 논란이나 로스쿨의 높은 학비 문제 등 사법시험이 남긴 과제와 향수는 여전히 사회적 이슈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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