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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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중 세르비아 민족주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역사적 대사건입니다. 세르비아의 군사 정보국과 비밀결사 '검은 손(Black Hand)'의 지원을 받은 '청년 보스니아' 단원들이 연합하여 치밀하게 기획한 이 테러는 성공 직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경한 군사적 보복 조치를 촉발했습니다. 이른바 '7월 위기'로 번진 이 한 발의 총성은 얽히고설킨 유럽 열강들의 군사 동맹을 연쇄적으로 자극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 지구적 비극인 제1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킨 가장 결정적인 도화선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연표
1878
1878
[보스니아 통치권의 억압적 이양]
베를린 조약이 체결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 지역의 점령 및 행정 권한을 위임받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공식적인 주권은 남았으나 실질적인 지배권이 외세로 넘어가며 민족적 불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 조약은 훗날 발칸 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로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지정학적 배경이 됩니다.같은 조약에 의해 세르비아 공국은 완전한 주권 국가로 인정받았고, 4년 뒤 국왕 밀란 1세 치하의 세르비아 왕국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당시 세르비아를 통치하던 오브레노비치 왕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조약이 정한 국경 내에서의 통치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03
1903.5
[세르비아 궁성 쿠데타의 유혈극]
세르비아 육군 장교들이 베오그라드 왕궁을 야간에 급습하여 알렉산다르 1세 국왕과 왕비를 잔혹하게 살해합니다. 오스트리아에 우호적이던 기존 왕조가 무너지고, 강력한 민족주의와 친러시아 성향을 띠는 카라조르제비치 왕조가 새롭게 들어섭니다. 이 유혈 사태를 기점으로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적대적 갈등이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훗날의 '아피스')가 이끈 이 쿠데타 세력은 왕과 왕비의 시신을 훼손하여 궁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는 잔혹함을 보였습니다. 새 정권은 점진적으로 과거 14세기 세르비아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군사력을 증강하며 주변국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1906
1906
[돼지 전쟁으로 악화된 경제 갈등]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치열한 관세 분쟁이 발생하며 양국 간의 갈등이 경제 전반으로 확대됩니다. 주요 수출품이었던 가축의 이름을 딴 이른바 '돼지 전쟁'이 벌어지며 세르비아 내의 반오스트리아 정서가 극에 달합니다. 정치적 적대감이 경제적 압박으로 이어지며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이 경제 제재 조치는 오히려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줄이고 프랑스 등 다른 강대국들과 교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르비아의 자주성을 자극하여 민족주의가 더욱 단단하게 결집하는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1908
1908
[보스니아의 굴욕적인 일방적 병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행정권만 쥐고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자국 영토로 공식적이고 일방적으로 완전 병합해버립니다. 이 소식에 범슬라브주의를 부르짖던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충격에 휩싸입니다. 외교적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세르비아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암살 테러의 심리적 토대가 완성됩니다.이 '1908-1909 보스니아 위기'는 세르비아가 아무런 보상 없이 병합을 묵인하는 굴욕적인 결과로 끝났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타도하고 남슬라브족의 통일 국가(유고슬라비아)를 세우려는 적개심을 불태우게 되었습니다.
1908.10.8
[비밀결사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의 출범]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병합에 분노한 세르비아의 지식인과 관료들이 베오그라드에서 민족주의 단체를 전격 결성합니다. 겉으로는 문화 활동을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의 충성심을 약화시키고 혁명을 선동하는 은밀한 조직으로 활동합니다. 이들은 훗날 암살자들을 지원하는 핵심적인 지하 네트워크로 성장합니다.밀로반 밀로바노비치의 주도로 설립된 이 단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역에 침투하여 합스부르크 정권에 대항하는 반정부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들의 선동에 고무된 보스니아 지역의 급진적 청년들은 점차 자생적인 혁명 조직인 '청년 보스니아'로 모여들게 됩니다.
1910
1910.6.3
[후배들을 일깨운 첫 번째 총성]
스물두 살의 세르비아계 청년 보그단 제라이치가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총독을 향해 다섯 발의 총알을 쏜 뒤, 마지막 총알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비록 암살 자체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극단적인 영웅적 희생은 식민 지배에 신음하던 현지 청년들의 피를 끓게 만듭니다. 특히 어린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마음속에 폭력적 투쟁의 롤모델로 깊이 각인됩니다.제라이치의 표적이 되었던 마리얀 바레샤닌 장군은 이 암살 위기를 모면한 뒤 그해 하반기에 보스니아 농민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훗날 프린치프는 "열일곱 살 때 그의 무덤에서 밤을 새우며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고뇌했고, 언젠가 반드시 거사를 치르겠다고 다짐했다"고 진술하며 그가 자신의 첫 번째 모델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1911
1911.5
[어둠의 제왕 '검은 손'의 등장]
세르비아 군부의 강경파들이 대세르비아주의 실현과 무장 테러를 목적으로 하는 극비 군사조직 '검은 손'을 창설합니다. 1903년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와 보이슬라브 탄코시치 소령이 조직의 중추를 장악하며 무자비한 게릴라 전술을 지휘합니다. 이들은 곧 보스니아 내부의 학생 혁명 단체들과 선을 닿으며 테러의 스케일을 키워나갑니다.이들은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의 네트워크를 흡수하여 지하에서 활동 반경을 넓혔습니다. 청년 보스니아 단원들이 민족 해방과 사회 혁명을 동시에 갈망했던 순수한 학생 중심의 조직이었다면, '검은 손'은 실질적인 자금과 훈련, 무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배후의 군사적 실세였습니다.
1912
1912
[크로아티아 총독 암살 미수 사건]
청년 보스니아와 연계된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인 학생 루카 유키치가 크로아티아 총독 슬라브코 추바이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벌어집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반오스트리아 테러가 세르비아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등 보스니아 내 타 민족 청년들에게까지 널리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 위험한 징후였습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고위 관료들을 향한 공포의 그림자가 점차 짙어집니다.청년 보스니아 조직은 다수의 세르비아계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이처럼 소수의 크로아티아계 및 무슬림 청년들도 끌어들여 남슬라브족 전체의 연대와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1914년 직전 5년 동안 이처럼 단독범들에 의한 오스트리아 관료 암살 시도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와 보스니아 일대에서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1913
1913
[치명적인 사라예보 방문의 기획]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이듬해 보스니아에서 열릴 대규모 군사 훈련을 직접 참관할 것을 명합니다. 대공은 훈련 시찰 직후 새 주립 박물관 개관식 참석을 위해 아내 소피와 함께 사라예보를 방문하기로 결심합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이 공식 행차는 결과적으로 암살자들에게 완벽한 먹잇감을 던져준 셈이 되었습니다.귀족 출신이었으나 왕실 혈통이 아니었던 아내 소피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엄격한 규율 탓에 평소 남편과 동등한 공식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대공이 군사적 자격으로 군대를 사열할 때만큼은 아내와 나란히 마차에 탈 수 있는 예외가 적용되었습니다. 역사가 A.J.P. 테일러는 '대공은 사랑을 위해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직접 행동을 촉구하는 밀담]
보스니아의 교사 출신 청년 혁명가 다닐로 일리치가 세르비아로 건너가 '검은 손' 소속 군부 인사들과 비밀스러운 접선을 가집니다. 단순한 조직 규합을 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향한 직접적인 테러 행동에 나설 때가 왔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세르비아 군사 정보국장인 '아피스'의 시선이 사라예보의 젊은 피들을 향하게 됩니다.다닐로 일리치는 1913년 후반 우지체에 위치한 세르비아 초소를 찾아가 정보 장교인 C.A. 포포비치 대위에게 직접 행동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포포비치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일리치를 베오그라드에 있는 정보국장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아피스)에게 보내 이 심각한 사안을 직접 논의하도록 조치했습니다.
1914
1914.1
[프랑스 툴루즈의 음모]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요원들이 모여 제국의 고위급 인사들을 겨냥한 구체적인 암살 목표를 논의합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이름도 후보에 올랐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 보스니아 총독 오스카르 포티오레크를 처단하기로 의견을 모읍니다. 행동 대장으로 무슬림 목수인 무하메드 메흐메드바시치가 낙점되어 무기를 품고 보스니아로 잠입합니다.당시 회합은 '검은 손'의 핵심이자 게릴라 훈련을 담당하던 보이슬라브 탄코시치 소령의 지시로 소집되었습니다. 보스니아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테러에 목말라 있던 메흐메드바시치는 경찰의 검문을 우려하여 이동 중 기차 화장실에 무기와 독약을 버리는 바람에 결국 총독 암살 거사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숨기게 됩니다.
1914.3.26
[목표 변경, 황태자를 노려라]
잠적해 있던 암살 요원에게 다닐로 일리치의 다급한 전갈이 도착하며 테러의 목표가 전격적으로 수정됩니다. 총독 따위가 아닌, 오스트리아의 차기 황제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직접 처단하는 것이 훨씬 중대하고 파급력이 크다는 베오그라드 수뇌부의 냉혹한 판단이 내려진 것입니다. 역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비틀어버릴 거대한 과녁이 확정되는 순간입니다.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제국 내 슬라브족 영토를 합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체제를 3원주의 연방 국가로 개편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개혁이 성공할 경우 슬라브족이 제국에 순응하게 되어 대세르비아주의 실현이 불가능해질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여 대공을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1914.5.26
[살상 무기와 자살용 독약의 인도]
황제의 건강 문제로 지연되던 작전이 최종 승인되자, 세르비아 군부가 청년 암살단에게 거사에 쓰일 치명적인 무기들을 마침내 전달합니다. 최신형 반자동 권총과 수류탄, 그리고 임무 완수 후 입을 막기 위한 자살용 청산가리 캡슐이 세 청년의 손에 쥐어집니다. 돌이킬 수 없는 핏빛 작전의 하드웨어가 완벽하게 갖추어집니다.탄코시치 소령은 대리인 밀란 치가노비치를 통해 6개의 수류탄과 4정의 신형 벨기에제 브라우닝 FN 모델 1910 반자동 권총, 충분한 탄약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거사 자금과 함께 비밀 국경 통과 루트가 표시된 지도, 그리고 현지 비밀 요원들과 접선할 수 있는 권한 카드까지 세밀하게 챙겨주었습니다.
1914.5.28
[베오그라드를 떠나는 세 명의 자객]
권총 사격 훈련까지 마친 프린치프, 그라베주, 차브리노비치 세 청년이 무기를 몸에 숨긴 채 배를 타고 베오그라드를 조용히 빠져나갑니다. 사바 강을 따라 이동하며 세르비아 국경 수비대의 묵인 아래 비밀스러운 경로에 몸을 싣습니다. 젊은 암살자들의 가슴속에는 죽음의 공포보다 영웅적인 희생을 향한 맹목적인 열망이 들끓고 있었습니다.이들은 국경 경비대 대위에게 권한 카드를 보여주고 가짜 세관원 신분증을 발급받아 할인된 기차표를 끊어 국경 마을인 로즈니차로 향했습니다. 이동 중 차브리노비치가 반복적으로 보안 수칙을 어기며 경솔하게 행동하자, 화가 난 프린치프 일행은 그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다른 경로로 각자 이동하여 훗날 다시 합류하기로 결정합니다.
1914.5.31
[삼엄한 감시를 뚫고 국경을 넘다]
세르비아 세관원들의 은밀한 안내를 받은 프린치프 일행이 무거운 무기 보따리를 짊어지고 험난한 도보 이동 끝에 드리나 강 한가운데 위치한 외딴섬에 도착합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를 가르는 천연의 경계선에서 지하 조직원들에게 무사히 신병을 인계받습니다. 마침내 무장한 암살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엄격한 국경을 뚫고 제국 영토 내부로 침투하는 데 성공합니다.5월 30일 아침부터 도보로 이동한 이들은 31일 이사코비치 섬에 닿았습니다. 그곳에서 세르비아 나로드나 오드브라나 소속 요원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 가옥을 전전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측 영토로 무사히 넘어갔고, 무기는 요원들의 손을 거쳐 철저한 비밀 속에 릴레이로 운반되었습니다.
1914.6.3
[투즐라 도착과 무기 은닉]
며칠간의 긴장된 이동 끝에 일행이 중간 기착지인 투즐라에 무사히 당도하여 다른 경로로 온 차브리노비치와 무사히 재회합니다. 발각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지 지하 요원에게 위험한 무기 상자를 맡기고 맨몸으로 각자의 고향으로 향합니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치밀하고 점조직적인 점선망 작전이 빛을 발했습니다.이때 무기를 보관해 준 인물은 나로드나 오드브라나의 현지 요원인 미슈코 요바노비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암살범들의 이동을 지원한 민족주의 단체 요원들의 활동 내역은 세르비아 임시 총리였던 니콜라 파시치에게까지 비밀리에 보고서 형태로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1914.6.15
[설탕 상자에 담겨 온 죽음]
투즐라에 숨겨두었던 무기들이 커다란 설탕 상자에 감쪽같이 담겨 기차를 통해 도보이 지역으로 몰래 운반됩니다. 그곳에서 작전의 총괄 책임자인 다닐로 일리치가 이 치명적인 상자를 직접 건네받아 사라예보로 잠입합니다. 경찰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여러 번 전차와 기차를 갈아타는 철두철미함을 보이며 무사히 은신처에 무기를 숨깁니다.사라예보로 돌아온 다닐로 일리치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하숙집으로 들어가 소파 밑에 둔 커다란 여행용 가방 안에 수류탄과 권총들을 안전하게 감췄습니다. 암살에 사용될 모든 도구가 마침내 범행이 벌어질 도시의 심장부에 성공적으로 배치된 것입니다.
1914.6.27
[운명 전야, 결전의 무기 분배]
황태자 부부의 도착을 하루 앞둔 운명의 전날 밤, 다닐로 일리치가 감춰두었던 권총과 폭탄을 꺼내어 여섯 명의 암살 요원들에게 드디어 배분합니다. 보안을 위해 철저히 서로의 존재를 모르게 통제해 왔던 베오그라드 출신 요원들과 현지 모집 요원들이 카페에서 처음으로 수인사를 나눕니다. 결연한 의지를 다진 청년들이 각자의 품에 차가운 금속 무기를 품고 밤을 지새웁니다.거사 전날 밤 메흐메드바시치는 "내일 우리와 함께할 동지"라는 소개와 함께 프린치프와 처음 대면했습니다. 이 세 명의 핵심 요원들은 그날 밤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보스니아의 비밀결사 지부장에게 암호가 담긴 엽서를 보내며 결행이 임박했음을 알렸습니다.
1914.6.28
[환영 인파 속으로 숨어든 여섯 명의 자객]
일요일 아침의 맑은 햇살 아래,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를 태운 행렬이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사라예보 시내로 진입합니다. 환영 인파로 북적이는 강변 도로 곳곳에 다닐로 일리치가 지시한 대로 여섯 명의 어린 자객들이 등 간격을 두고 일렬로 자리를 잡습니다. 치명적인 올가미가 서서히 화려한 개방형 스포츠카의 목을 조여가기 시작합니다.이날은 1389년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 코소보 전투를 기리는 세르비아의 성 비투스 축일(비도브단)이기도 하여 민족주의자들의 종교적, 역사적 감수성이 최고조에 달한 날이었습니다. 암살단은 이 영웅적인 신화를 재현하겠다는 망상적 의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황태자 부부는 지붕을 젖힌 그라프 앤 슈티프트(Gräf & Stift) 스포츠카에 탑승해 있었습니다.
1914.6.28
[빗나간 폭탄과 첫 번째 암살 실패]
오전 10시 10분, 대공의 차가 다가오자 첫 번째, 두 번째 암살자가 겁을 먹고 주저하는 사이 세 번째 암살자인 차브리노비치가 용감하게 수류탄의 신관을 작동시켜 차량을 향해 던집니다. 그러나 폭탄은 자동차의 접힌 지붕을 맞고 튕겨 나가 뒤따르던 수행원 차량 아래에서 굉음과 함께 터집니다. 표적을 놓친 폭탄에 16명에서 20명가량의 부상자만 속출하며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합니다.폭탄이 터지면서 지름 약 30cm, 깊이 17cm의 구덩이가 패일 정도로 위력이 강했습니다. 대공의 운전기사는 폭탄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반사적으로 속도를 높여 피할 수 있었습니다. 차량 행렬은 부상자를 남겨둔 채 서둘러 시청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고, 나머지 위치에 서 있던 암살자들은 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바람에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1914.6.28
[강물로 뛰어든 자객의 허망한 체포]
수류탄을 투척한 차브리노비치가 임무 완수를 직감하고 미리 준비한 청산가리 캡슐을 삼킨 채 밀랴츠카 강으로 뛰어듭니다. 영웅적인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었으나, 오래된 독약은 지독한 구토만을 유발했을 뿐 치사량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여름 가뭄으로 강물 깊이가 고작 13cm에 불과해 발목밖에 차지 않았고, 결국 그는 분노한 군중과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으며 끌려나옵니다.이 우스꽝스럽고도 처참한 실패는 남은 암살자들을 극도의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자살 시도마저 실패한 차브리노비치는 즉시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암살 작전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1914.6.28
[시청에서의 분노와 진정]
구사일생으로 시청에 도착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격렬한 스트레스와 분노를 표출하며 시장의 판에 박힌 환영사를 거칠게 끊어버립니다. "환영을 받으러 왔는데 나를 폭탄으로 맞이하다니, 참으로 경악스럽소!"라며 호통을 치지만, 곁에 있던 아내 소피의 부드러운 만류에 이내 평정심을 되찾습니다. 피가 묻은 환영사 연설문을 돌려받은 대공은 애써 침착하게 공식 행사를 마무리 짓습니다.분노가 가라앉은 대공은 미리 준비된 연설문에 더하여, 암살 시도가 실패한 것에 대해 기쁨을 표현해 준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즉흥적인 코멘트를 덧붙이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1914.6.28
[치명적인 소통 부재와 경로 변경]
시청에서의 일정을 마친 황태자 부부가 폭탄 테러로 다친 수행원들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기로 일정을 전격 수정합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포티오레크 총독은 좁고 혼잡한 구도심을 피하기 위해 강변 직선 도로로만 주행하라는 안전 지침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생명줄과도 같은 가장 중요한 경로 변경 지시가 정작 자동차 운전기사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치명적인 실책이 발생합니다.오전 10시 45분경 황태자 부부는 다시 마차에 올랐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하라흐 백작이 자동차 왼쪽 발판에 올라타 방패막이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선두 차량의 운전사는 변경된 경로를 모른 채 기존 예정되어 있던 혼잡한 도심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914.6.28
[라틴 교 앞에서의 치명적인 엔진 정지]
앞차를 따라 우회전을 하여 구도심으로 진입하던 대공의 차량을 보고, 동승했던 총독이 경로가 잘못되었다며 크게 소리쳐 차를 멈춰 세웁니다. 놀란 운전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후진 기어를 넣으려던 찰나, 차량의 엔진이 털컥거리며 완전히 시동이 꺼져버립니다. 그리고 이 자동차가 멈춰 선 바로 그 골목 모퉁이에는, 암살을 포기하고 배회하던 열아홉 살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프린치프는 동료의 암살 실패 이후 낙담하여 인근 식품점(Schiller's delicatessen) 앞에 서 있었는데, 기적처럼 표적인 황태자의 자동차가 자신의 코앞인 1.5미터 거리에서 멈춰서는 믿기 힘든 우연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1914.6.28
[제국을 무너뜨린 두 발의 총성]
엔진이 꺼진 자동차를 확인한 프린치프가 즉각 차의 발판 위로 뛰어올라 FN 브라우닝 반자동 권총을 빼들고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깁니다. 영거리 사격으로 발사된 첫 번째 총알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경정맥을 관통했고, 두 번째 총알은 아내 소피의 복부를 깊숙이 찢어발겼습니다. 이 두 발의 짧은 총성은 한 세기를 지배했던 제국을 파멸로 이끌고 전 세계를 피로 물들인 서막이 되었습니다.사건 당시 현장에서 프린치프가 권총 사격 직전에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떠돌지만, 이는 당시의 1차 사료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2001년에 출간된 소설 '열두 손가락'의 허구적 설정이 와전된 역사적 신화일 뿐입니다.
1914.6.28
[프린치프의 체포와 실패한 자살]
두 발의 총알을 명중시킨 프린치프가 곧바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돌려 자살을 시도하지만, 경악한 군중과 경찰들이 덮치며 찰나의 차이로 저지당합니다. 그는 격렬한 구타를 당하며 권총을 압수당했고, 즉시 체포되어 형무소로 끌려갑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원래 목표는 아내 소피가 아니라 포티오레크 총독이었다고 진술하기도 했습니다.자살에 실패한 프린치프가 소지하고 있던 청산가리 역시 다른 동료의 것과 마찬가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체포된 그는 조금의 반성도 없이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거사를 치렀다며 맹목적인 애국심을 당당하게 설파했습니다.
1914.6.28
[황태자 부부의 비극적인 최후]
총격 직후 아내 소피가 먼저 의식을 잃고 남편의 무릎 위로 쓰러집니다.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대공은 아내를 향해 "소피, 제발 죽지 마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해!"라고 절규하지만, 그 역시 이내 치명적인 출혈로 의식을 잃고 맙니다. 총독 관저로 급히 호송되었으나 결국 오전 11시 30분경 두 부부 모두 세상을 떠나며 거대한 비극의 완성을 알립니다.동승했던 하라흐 백작이 대공의 상처를 물으며 걱정하자, 대공은 피를 토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니야(It is nothing)"라는 말을 예닐곱 번 반복하며 끝까지 황태자로서의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부부의 유해는 전함과 특별 열차를 통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운구되었습니다.
1914.7
[7월 위기와 세계 대전의 서막]
황태자 부부의 암살 소식은 삽시간에 전 유럽에 엄청난 외교적 파장을 몰고 오며 이른바 '7월 위기'를 촉발합니다. 격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배후로 지목된 세르비아에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극단적인 최후통첩을 날리고, 결국 한 달 뒤 선전포고를 감행합니다. 이 선전포고를 기점으로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군사 동맹국들이 연쇄적으로 참전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거대한 파국이 시작됩니다.이 암살 사건은 남슬라브족 통일이라는 지역적 민족주의 운동이 어떻게 유럽 열강들의 거대한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계적인 참극으로 비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상 가장 극적인 나비효과의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1914.10
[사라예보 재판과 어린 암살자들]
암살에 가담한 자들과 배후에서 무기를 운반했던 조력자 총 25명이 사라예보 법정에 서게 됩니다. 놀랍게도 여섯 명의 직접 암살범 중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20세 미만의 미성년자였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법률상 사형을 면하게 된 주범 프린치프는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 요새 감옥에 수감되며, 나이 든 다른 공모자들에게는 가차 없이 교수형이 내려집니다.이 재판에 기소된 이들 중 다수는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이었으나, 일부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엄격한 보안 감옥에 수감된 프린치프는 열악한 수감 생활과 결핵으로 인해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18년에 감옥에서 쓸쓸히 병사하게 됩니다.
1917
[살로니카 재판과 '검은 손'의 최후]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 봄, 암살을 사주했던 세르비아 군부의 비밀결사 '검은 손'의 핵심 멤버들이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됩니다. 정치적 견제 세력을 숙청하려던 세르비아 정부의 치밀한 조작 재판에 의해 조직의 수장인 '아피스' 등 세 명의 지도자가 처형당하며 조직은 공중분해 됩니다. 역사를 뒤흔든 거대한 그림자 세력의 쓸쓸하고 허망한 최후였습니다.이 재판은 망명 정부 상태였던 세르비아 내부의 권력 투쟁 성격이 강했으며, 훗날 1953년 유고슬라비아 공산 정부 시절 재심을 통해 당시 사형수들이 무죄로 복권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암살에 관한 많은 진실들은 이 살로니카 재판의 기록과 증언들을 통해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