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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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대통령, 독재자 + 카테고리

- 1979년부터 2003년까지 이라크의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 이란-이라크 전쟁, 걸프 전쟁 등 여러 대외 전쟁을 일으켰으며, 국내 반대파를 숙청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정권이 전복되었고, 체포된 후 2006년 시아파 학살죄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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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37

[사담 후세인 출생]

이라크 티크리트 부근 알 아우자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1937년 살라주 티그리트 부근 알 아우자 마을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담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어머니는 재혼하여 이부 동생들을 낳았습니다.

1955

[바그다드로 이주 및 외숙부 영향]

18세 때 중앙정부 교육장관이 된 외숙부 하이랄라와 함께 바그다드로 이주하며 민족주의적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10세 때부터 외숙부 하이랄라 탈파 아래에서 살았으며, 18세 때 외숙부와 함께 바그다드로 올라왔습니다. 그의 적에 굴하지 않는 성격과 민족주의적 범아랍주의 사상은 외숙부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1957

[바트당 입당]

바그다드 이주 2년 뒤, 아랍 민족주의가 고조되던 시기에 바트당에 입당했습니다.

1955년 바그다드로 올라온 지 2년 뒤인 1957년, 아랍 민족주의 고조 속에서 바트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이집트의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1959

[카심 수상 암살미수 연루 및 망명]

바트당이 일으킨 카심 수상 암살미수 사건에 실행범으로 관여한 후 부상을 입고 시리아와 이집트로 망명했습니다.

1958년 7·14 군사 쿠데타로 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카심이 아랍 민족주의에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바트당은 1959년 카심 수상 암살미수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에 실행범으로 관여한 사담은 총격을 받아 다리를 다쳤으나, 체포를 피하기 위해 유목민으로 변장해 티그리스강을 헤엄쳐 시리아에 망명하고, 후에 이집트로 피했습니다.

1963

[귀국 및 바트당 요직, 결혼]

압둘 살람 아리프 장군의 쿠데타로 카심 정권이 붕괴하자 귀국하여 바트당 농민국장이 되었고, 외사촌인 사지다 하이랄라와 결혼했습니다.

시리아 체류 중 바트당 창시자 미첼 아플라크의 총애를 받았고,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면서 카이로 대학 법학부에 다녔습니다. 1963년에 압둘 살람 아리프 장군이 인솔한 쿠데타로 카심 정권이 붕괴하자, 사담은 귀국해 바트당의 농민국장이 되었습니다. 이 해에 사지다와 정식 결혼했습니다.

1964

[대통령 암살 계획 발각 및 투옥]

아리프 대통령 암살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 투옥되었습니다.

1964년에 사담은 아리프 대통령의 암살을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 투옥당했습니다.

1966

[탈옥 및 지하 활동]

투옥된 지 2년 뒤 간수를 속여 탈옥한 후 지하 활동을 벌였습니다.

투옥된 지 2년 뒤인 1966년 그는 간수를 속여 탈옥해 지하 활동을 벌였습니다.

1968

[7·17 바트당 무혈 쿠데타 주도]

아메드 하산 알 바크르 장군이 이끄는 바트당 주도의 무혈 쿠데타(7·17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당이 다시 정권을 잡는 데 기여했습니다.

1968년 7월 17일, 아메드 하산 알 바크르 장군이 인솔하는 바트당 주도의 무혈 쿠데타(7·17 혁명)로 당은 다시 정권을 잡았고 이 쿠데타에서 사담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69

[혁명 지도 평의회 부의장 임명]

바크르 정권에서 치안기관에 종사하며 권력 강화에 협력한 결과, 혁명 지도 평의회(RCC) 부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바크르 정권에서는 입각은 하지 않았지만, 치안기관에 종사해 바크르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협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1969년에 혁명 지도 평의회(RCC) 부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72

[이라크 석유사업 국유화]

이라크 석유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오랫동안 외국계 석유회사에 독점되었던 석유 이권을 국가 소유로 전환했습니다.

바트당 정권은 소련과 공동으로 남부 최대의 루메이라 유전을 개발시킨 후 1972년에 드디어 석유사업의 국유화를 단행했습니다. 오랜 세월 이라크는 석유의 이권이 국가가 아닌 외국계 석유회사에 독점되어 있었습니다.

1973

[내무치안장관의 암살 계획 실패]

시아파인 나짐 카자르 내무치안장관이 바크르와 사담의 암살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관련자 전원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1973년 6월에 시아파인 나짐 카자르 내무치안장관이 바크르와 사담의 암살을 계획하지만 사전에 비밀이 유출되어 실패하였고, 관련자 전원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1977

[이라크 부통령 취임]

이라크 부통령으로 취임하며 권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대규모 문맹 퇴치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1977년부터 이라크 부통령을 지냈고, 혁명지도평의회 멤버와 각료를 자신의 측근으로 교체한 이래 바크르의 권위는 저하되고 있었습니다. 1977년부터 대규모 문맹 퇴치 캠페인을 전개해, 전국 규모로 읽고 쓰기 교실을 개강했습니다.

1979

[이라크 대통령 취임 및 숙청]

바크르 대통령의 사임 발표 직후, 이라크공화국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집권 직후 바트당 내 반대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고 처형했습니다.

1979년 7월 17일, 바크르가 병을 이유로 대통령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하자, 사담은 이라크공화국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바크르가 사담에 의해 은퇴를 강요당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집권 직후 바트당 내 반대파를 숙청, 처형하고 민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이라크 변방의 떠돌이 소수민족인 쿠르드 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을 기획합니다.

1980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이란 혁명의 이라크 시아파 확산을 우려하여 이란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1979년의 이란 혁명이 이라크 국내의 시아파에게도 파급하는 것을 두려워해 1980년에 이란을 선제 공격,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원래 이란과는 팔레비 왕조 시대부터 국경을 흐르는 사트 알 아랍 수로의 영유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으며, 역사적인 이라크의 반(反) 이란 감정도 전쟁의 배경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82

[두자일 학살]

이라크 중부 두자일 마을 시찰 중 이란의 지원을 받은 반체제파의 암살 미수가 발생하자, 보복으로 두자일 주민 180명 이상을 화학무기로 학살했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1982년에 이라크 중부 두자일 마을을 사담이 시찰하던 중에 이란의 지원을 받은 반체제파 조직인 다와당의 공작원에 의해 암살 미수가 일어나자, 그 보복으로서 두자일의 주민 180명 이상을 화학무기로 학살했습니다.

1983

[미국 특사 럼즈펠드와 회담]

이란 이슬람 혁명의 파급을 우려한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특별 교섭인과 90분간 회담했습니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중동 전역에 파급하는 것을 무서워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이라크를 지원하기 위해 1983년 12월 19일에 도널드 럼즈펠드 당시 특별 교섭인을 특사로 이라크에 파견해 사담과 90분간 회담하였습니다.

1984

[미국과 국교 회복 및 군사 지원]

미국과 국교를 회복하여 1988년까지 거액의 무기 공급 및 CIA의 정보 제공 등 미국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984년에는 이라크와 국교를 회복해, 1988년까지 거액의 무기 공급 및 CIA에 의한 정보 제공을 실시했습니다. 이 시기 중동에 석유 이권을 가지는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카프카스 지방 등에 많은 이슬람교도를 안고 있던 소비에트 연방 역시 이란 이슬람 혁명의 파급을 우려해 이라크에 무기 원조를 시작으로 하는 지원을 실시하였습니다.

1988

[이란-이라크 전쟁 종결]

이란 측이 정전을 수락하면서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결국 1988년에 이란 측이 정전을 수락하여 이란-이라크 전쟁은 끝났습니다.

1990

[쿠웨이트 침공 및 병합 선언]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중동의 군사 대국으로 부상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및 병합을 선언했습니다.

1988년에 종결한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라크를 중동의 군사 대국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사담의 관심은 풍부한 석유 자원을 가진 국가이자 근대 이라크 성립 이후부터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이 이라크의 영토라고 주장한 이웃 나라 쿠웨이트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 정권은 쿠웨이트를 침공, 병합을 선언합니다.

1991

[걸프 전쟁 패배와 시아파 반란 진압]

쿠웨이트 침공으로 미국의 반발을 받아 걸프 전쟁에서 패퇴하고, 패전 직후 국내 시아파의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쿠웨이트 침공으로 미국을 시작으로 하는 국제사회의 반발을 받아 1991년의 걸프 전쟁으로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에 패퇴했습니다. 패전 직후의 혼란을 틈타 국내의 반체제 시아파가 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시아파가 기대한 미국의 지원은 없었고, 사담 후세인 정권은 진압에 성공했습니다.

1995

[첫 국민투표로 대통령 재선]

이라크 최초의 국민투표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99.96%의 지지율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1995년 10월 15일 이라크 최초의 국민투표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99.96%의 지지율로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10월 17일 7년 임기 대통령에 다시 취임했습니다.

2001

[9·11 테러 후 화해 시도 좌절]

서방 세계와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9·11 테러 발생으로 인해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2000년부터 후세인은 서방 세계와의 화해 제스처를 취했지만 2001년의 9·11 테러로 그의 시도는 실패하고 맙니다.

2002

['악의 축' 발언으로 미국과 대립 심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이란, 북한과 함께 '악의 축' 국가라고 비판하며 미국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2002년 1월,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이란, 북한과 함께 악의 축 국가라고 비판했습니다.

[100% 지지율로 논란의 재선]

대통령 선거에 단독 입후보하여 전체 유권자 100%의 지지율로 재선되었다고 공식 발표되었으나,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2002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에 단독 입후보하여 7년 임기 대통령 선거에서 100% 지지율로 다시 당선되었습니다. 이라크 국민투표관리위원회는 투표에서 전체 유권자 모두가 후세인 연임에 찬성표를 던졌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외국 참관단은 후세인의 단독 입후보, 관영방송의 선동 등을 거론하며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2003

[미국, 이라크 전쟁 개시]

미국이 유엔 안보리 결의 1441호를 근거로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며 그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1441호를 근거로서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여 40여일 만인 5월 1일 승전하였습니다.

[이라크 정부 전복 및 퇴임]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그의 정부가 전복되며 24년간 지속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순식간에 그의 정부가 전복되었습니다. 그는 도망다니다가 체포되었으며, 2003년 4월 9일에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미군에 의해 체포]

도망다니던 중 미군의 '레드 던 작전'에 의해 다우르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라크 전쟁 승전 후 은신하였으나 미군의 레드 던 작전에 의해 다우르에서 같은해 12월 13일 체포되었습니다.

2006

[시아파 학살로 사형 선고]

전범 재판 1심에서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교수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전범재판인 2006년 11월 5일 1심에서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사담은 "나는 사형당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다. 이란과 손잡으면 안되며,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교수형으로 처형]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후, 수도 바그다드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사망했습니다.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은 사형을 확정하여 2006년 12월 30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의 처형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처형으로 인해 저항세력 계파 중 하나인 후세인 지지파들의 반발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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