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코건
연표
1967
[빌리 코건의 탄생]
일리노이주 엘크 그로브 빌리지에서 윌리엄 패트릭 코건 주니어로 태어납니다. 음악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소리에 대한 감각을 익히게 됩니다. 이 평범해 보이던 소년은 훗날 90년대 대중음악의 지형을 바꾸는 거장이 됩니다.
부모님은 빌리 코건 시니어와 마사 루이즈 코건이며, 아버지는 블루스 기타리스트였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복잡한 가정 환경은 훗날 그의 가사 작업에 깊은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동생인 리키 코건과 함께 자라며 시카고 인근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1985
[더 마크드 결성]
고등학교 졸업 후 자신의 첫 진지한 밴드인 '더 마크드'를 창단합니다. 멤버들이 몸에 가지고 있던 특징적인 반점들 때문에 밴드 이름을 이렇게 지었습니다. 시카고 로컬 씬에서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처음으로 실험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이 밴드는 초기 고딕 록과 포스트 펑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빌리 코건은 이 시기부터 작곡과 밴드 매니지먼트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시카고의 소규모 클럽들을 전전하며 라이브 경험을 쌓아나갔습니다.
[플로리다 이주 결정]
더 큰 기회를 찾기 위해 밴드 멤버들과 함께 플로리다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거처를 옮깁니다. 하지만 플로리다의 음악 환경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낯선 환경에서의 도전은 처절한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플로리다에서 약 9개월간 머물렀으나 상업적 성공이나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생활고와 멤버 간의 불화로 인해 결국 밴드는 와해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 실패는 코건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동시에 더 강력한 음악적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6
[시카고 복귀와 레코드샵]
플로리다에서의 실패를 뒤로하고 다시 고향 시카고로 돌아와 생활을 이어갑니다. 생계를 위해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며 틈틈이 새로운 음악적 동료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그는 방대한 양의 음반을 접하며 음악적 지평을 넓힙니다.
레코드 샵 점원으로 일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인디 록과 얼터너티브 사운드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자신의 데모 테이프를 제작하며 새로운 밴드의 청사진을 구체화했습니다. 이후 밴드의 핵심 멤버가 될 인물들을 만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1987
[제임스 이하와의 조우]
레코드 샵에서 일하던 중 기타리스트 제임스 이하를 만나 음악적 교감을 나눕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 취향이 일치함을 확인하고 함께 곡을 쓰기 시작합니다. 스매싱 펌킨스라는 거대한 함선의 첫 번째 엔진이 가동된 순간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드럼 머신을 사용하여 듀오 체제로 연습과 작곡을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사이키델릭 록과 헤비메탈, 팝적인 감성을 결합한 독특한 사운드를 지향했습니다. 제임스 이하의 차분한 성격은 코건의 열정적인 성격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1988
[스매싱 펌킨스 첫 공연]
시카고의 '폴리시 빌리지' 클럽에서 스매싱 펌킨스라는 이름으로 역사적인 데뷔 무대를 갖습니다. 당시에는 코건과 이하, 그리고 드럼 머신으로 구성된 단출한 라인업이었습니다. 90년대 록의 전설이 시작된 역사적인 밤이었습니다.
이날 공연은 소규모 관객 앞에서 진행되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무대 이후 시카고 로컬 씬에서 밴드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코건은 더 풍성한 사운드를 위해 베이시스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다르시 레츠키 영입]
시카고의 한 클럽 밖에서 다르시 레츠키와 음악 논쟁을 벌이다 그녀를 베이시스트로 영입합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와 음악에 대한 주관에 반한 코건의 파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이로써 밴드는 3인조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다르시는 밴드의 시각적인 이미지와 사운드 밸런스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녀의 합류로 밴드는 비로소 라이브 무대에서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코건은 그녀와 함께 곡을 다듬으며 밴드의 완성도를 높여갔습니다.
[지미 챔벌린 합류]
재즈 드러머 출신 지미 챔벌린이 마지막 멤버로 합류하며 전설의 4인조 라인업이 완성됩니다. 시카고 '메트로' 클럽에서의 공연은 밴드의 폭발적인 잠재력을 증명하는 자리였습니다. 강력한 드럼 사운드는 밴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지미 챔벌린의 합류로 드럼 머신을 사용하던 시절의 한계를 완벽히 극복했습니다. 그의 화려하고 파워풀한 타격은 스매싱 펌킨스 사운드의 핵심적인 특징이 되었습니다. 이 라인업은 훗날 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황금기를 이끄는 주역이 됩니다.
1989
[첫 싱글 I Am One 발매]
로컬 레이블을 통해 밴드의 첫 번째 공식 싱글 'I Am One'을 세상에 공개합니다. 시카고 인디 씬에서 이 싱글은 큰 화제를 모으며 밴드의 인지도를 급상승시킵니다. 코건의 독창적인 기타 리프가 대중에게 처음 각인된 순간입니다.
이 싱글은 한정판으로 제작되어 현재는 팬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희귀반이 되었습니다. 밴드는 이 곡을 통해 메이저 레이블들의 본격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곡의 에너지는 라이브 무대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팬덤을 형성했습니다.
1991
[데뷔 앨범 기쉬 발매]
프로듀서 부치 빅과 함께 작업한 첫 번째 정규 앨범 'Gish'를 발표합니다. 인디 레이블 발매작임에도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며 얼터너티브 붐의 전조를 알립니다. 코건의 정교한 프로듀싱 능력이 빛을 발한 작품입니다.
수록곡 'Rhinoceros' 등은 라디오 차트에서 선전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너바나의 'Nevermind'가 나오기 전, 얼터너티브 록의 가능성을 미리 보여준 앨범으로 평가받습니다. 부치 빅과의 협업은 이후 명반들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파트너십의 시작이었습니다.
1992
[롤라팔루자 투어 참여]
당대 최고의 록 페스티벌인 롤라팔루자 무대에 오르며 미 전역에 이름을 알립니다. 폭발적인 라이브 퍼포먼스는 밴드의 거대한 팬덤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빌리 코건은 이 투어를 통해 차세대 록 스타로서의 입지를 굳힙니다.
전국의 수많은 관객에게 밴드의 독창적인 사운드를 직접 체험하게 만든 기회였습니다. 투어 기간 동안 보여준 코건의 카리스마는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습니다. 이 투어의 성공은 차기작에 대한 엄청난 기대감으로 이어졌습니다.
1993
[크리스 페이비언과 결혼]
오랜 연인이자 미술 작가인 크리스 페이비언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립니다. 코건의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에 이루어진 개인적인 결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밴드의 엄청난 성공과 투어 일정은 결혼 생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시카고 시절부터 서로의 예술적 영감을 공유해 온 동반자였습니다. 코건은 결혼을 통해 정서적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록 스타로서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후 그의 곡들 중 일부는 크리스와의 관계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습니다.
[시아미즈 드림의 신화]
두 번째 정규 앨범 'Siamese Dream'이 발매되어 빌보드 차트 10위권에 진입합니다. 코건은 완벽한 사운드를 위해 거의 모든 악기 세션을 직접 재녹음하는 집념을 보였습니다. 90년대 록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앨범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앨범 제작 과정에서 코건은 극심한 우울증과 창작의 고통을 겪었다고 고백했습니다. 'Today', 'Disarm' 같은 히트곡들은 전 세계적인 얼터너티브 록 열풍을 주도했습니다. 미국 내에서만 4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밴드를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올렸습니다.
1994
[B-Side 앨범의 성공]
미발표곡과 B-Side 곡들을 모은 앨범 'Pisces Iscariot'를 발표합니다. 정식 정규 앨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앨범 차트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는 밴드의 창작력이 얼마나 방대하고 수준 높았는지를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수록곡 중 플리트우드 맥의 커버곡인 'Landslide'는 원곡 못지않은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코건은 버려지는 곡들조차 완벽하게 다듬어 앨범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팬들은 이 앨범을 통해 밴드의 숨겨진 음악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995
[역대급 2CD 앨범 발매]
28곡이 담긴 더블 앨범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를 발표합니다.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1위에 올랐으며 90년대를 상징하는 가장 위대한 결과물로 평가받습니다. 빌리 코건 음악 인생의 정점이자 록 역사의 이정표가 된 순간입니다.
단일 앨범으로는 이례적으로 미국에서 다이아몬드(1,000만 장 이상 판매) 인증을 받았습니다. '1979', 'Tonight, Tonight' 등 세대를 초월한 명곡들이 이 앨범에서 대거 탄생했습니다. 코건의 광범위한 음악적 스펙트럼이 집대성된 그의 경력 최고 정점으로 평가받습니다.
1996
[그래미 어워드 첫 수상]
제38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Bullet with Butterfly Wings'로 최우수 하드 록 상을 받습니다. 대중적인 인기뿐만 아니라 음악적 권위까지 인정받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비주류 음악이었던 얼터너티브 록이 주류의 정점에 섰음을 알린 사건입니다.
이날 시상식에서 밴드는 다수의 부문에 후보로 지명되며 위상을 높였습니다. 코건은 수상 소감을 통해 음악 동료들과 팬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 상은 코건이 그동안 쏟아부은 완벽주의적인 노력에 대한 보상과도 같았습니다.
[투어 중 발생한 비극]
순회공연 도중 키보디스트 조나단 멜보인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현장에 함께 있었던 드러머 지미 챔벌린은 이 사건의 여파로 밴드에서 즉각 해고됩니다. 팀의 정점에서 맞이한 가장 고통스럽고 어두운 변곡점이었습니다.
뉴욕 공연을 앞두고 발생한 이 사건은 전 세계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코건은 멤버를 잃은 슬픔과 팀의 앞날에 대한 막막함 속에서 큰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스매싱 펌킨스의 사운드는 이전의 에너지를 잃고 어두운 분위기로 급변하게 됩니다.
[어머니 마사 루이즈의 부고]
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 마사 루이즈 코건이 세상을 떠나며 빌리 코건은 큰 상실감을 겪습니다. 어머니는 그의 삶과 음악에서 가장 큰 정서적 지지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슬픔은 그의 다음 음악 작업에 직접적인 영감이 됩니다.
코건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아 차기작의 여러 가사를 썼습니다. 동료의 죽음에 이어 어머니의 부고까지 겹치며 코건은 심각한 정서적 침체기를 겪었습니다. 이 시기의 아픔은 훗날 앨범 'Adore'의 내성적이고 우울한 정서를 지배하게 됩니다.
1997
[크리스 페이비언과의 이혼]
아내 크리스 페이비언과 4년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공식적으로 이혼합니다. 바쁜 투어와 개인적인 비극들이 겹치며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코건은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홀로 견뎌내야 했습니다.
이혼 절차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가족과 동료를 모두 잃은 고독감이 코건의 예술적 내면에 깊게 침투했습니다. 그는 음악을 통해서만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려 노력하며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했습니다.
1998
[변신의 시작 아도르 발매]
강렬한 기타 대신 전자음악과 어쿠스틱 요소를 도입한 앨범 'Adore'를 발표합니다. 지미 챔벌린이 없는 상태에서 시도한 파격적인 장르 변화는 팬들 사이에서 큰 논란을 불렀습니다. 코건의 예술적 실험 정신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 차트 2위에 오르며 상업적으로는 선전했습니다. 전작들과 확연히 다른 차분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평단으로부터 높은 예술적 평가를 받았습니다. 코건은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이 단순한 록 스타가 아닌 아티스트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1999
[지미 챔벌린의 복귀]
약물 재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지미 챔벌린을 다시 밴드로 불러들입니다. 오리지널 드러머의 복귀로 밴드는 예전의 파워풀한 에너지를 회복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팬들은 환호하며 스매싱 펌킨스의 완전체 활동을 기대했습니다.
코건은 지미의 재능이 밴드에 필수적임을 인정하고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복귀와 동시에 베이시스트 다르시 레츠키가 팀을 떠나며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다르시의 빈자리는 멜리사 아우프 데어 마우어가 채우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2000
[마지막 정규 앨범 마키나]
밴드의 마지막을 예고하며 'Machina/The Machines of God'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다시 강렬한 기타 사운드로 회귀하며 밴드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대작을 기획했습니다. 코건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컨셉을 부여했습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 3위로 데뷔하며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코건은 레이블과의 갈등으로 인해 자신의 원래 의도가 온전히 담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수록곡 'Stand Inside Your Love'는 여전히 밴드의 명곡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온라인 무료 배포의 선구자]
레이블이 발매를 거부한 'Machina II'를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전격 공개합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파격적인 행보로 디지털 음악 시대의 도래를 예견했습니다. 팬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전하려는 코건의 진심이 담긴 결정이었습니다.
오직 25장의 LP만 제작하여 지인들에게 배포한 뒤, 이를 MP3 파일로 변환해 공유하게 했습니다. 공식적인 유통망을 거치지 않고도 전 세계 팬들에게 순식간에 전파되었습니다. 이는 향후 아티스트들이 권력에 맞서 음악을 배포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사건이었습니다.
[스매싱 펌킨스 공식 해체]
그들이 처음 시작했던 장소인 시카고 '메트로' 클럽에서 고별 공연을 갖고 해체합니다. 4시간이 넘는 열정적인 무대를 통해 12년간의 역사를 팬들과 함께 마무리했습니다. 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한 페이지가 공식적으로 닫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공연장은 눈물바다가 되었으며 수많은 팬이 밴드의 마지막을 배웅했습니다. 코건은 무대 위에서 밴드의 멤버들과 팬들에게 진심 어린 작별의 인사를 건넸습니다. 이후 각 멤버는 흩어져 각자의 길을 걷게 되며 코건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합니다.
2001
[즈완(Zwan) 결성]
지미 챔벌린을 포함한 화려한 라인업으로 새로운 밴드 '즈완'을 창단합니다. 스매싱 펌킨스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고 보다 밝고 낙천적인 사운드를 지향했습니다. 코건은 이 밴드를 통해 음악적 즐거움을 되찾으려 했습니다.
슈퍼 그룹이라 불릴 만큼 멤버 개개인의 역량이 뛰어난 밴드였습니다. 3인의 기타리스트를 기용하여 화려하고 풍성한 라이브 사운드를 구현했습니다. 초기 공연들은 평단과 팬들로부터 신선하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2003
[즈완의 처음이자 마지막 앨범]
앨범 'Mary Star of the Sea'를 발표하며 성공적으로 데뷔하지만 곧 팀이 해체됩니다. 빌보드 3위에 오르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내부 갈등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코건은 짧은 행복 뒤에 다시 한번 고독한 아티스트로 남게 되었습니다.
수록곡 'Honestly'는 라디오 등에서 큰 인기를 얻으며 차트 상위권에 올랐습니다. 코건은 훗날 이 팀의 멤버들이 밴드 활동에 진심이 아니었다고 비판하며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즈완의 활동 중단 이후 코건은 솔로 활동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2005
[첫 솔로 정규작 발표]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첫 솔로 앨범 'TheFutureEmbrace'를 공개합니다. 슈게이징과 일렉트로니카가 결합된 실험적인 사운드로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을 온전히 담았습니다. 밴드의 거대한 서사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도한 작품입니다.
앨범 발매와 함께 시카고 트리뷴에 밴드 재결성을 원하는 전면 광고를 실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더 큐어'의 로버트 스미스가 참여하여 앨범의 완성도를 높여주었습니다. 코건은 이 시기부터 자신의 음악 인생 2막을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2006
[재결성 선언과 공식 복귀]
신문 광고를 통해 스매싱 펌킨스의 부활을 공식적으로 선포합니다. 지미 챔벌린과 함께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갔음을 알려 팬들을 설레게 했습니다. 비록 초기 멤버 전원은 아니었지만 밴드의 이름이 다시 살아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제임스 이하와 다르시의 합류를 간절히 원했으나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코건은 밴드의 유산을 지키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단호하게 전진했습니다. 재결성 소식은 얼터너티브 록 씬에 다시 한번 거대한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2007
[7년 만의 신보 자이트가이스트]
부활한 밴드의 이름으로 첫 정규 앨범 'Zeitgeist'를 발표합니다. 빌보드 2위로 데뷔하며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고 강력한 하드 록 사운드로 귀환했습니다. 코건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롭고 매력적이었습니다.
대규모 투어를 병행하며 밴드의 건재함을 전 세계 팬들에게 증명했습니다. 이후 밴드는 고정된 멤버가 아닌 코건 중심의 유동적인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했습니다. 코건은 이 앨범을 통해 밴드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려 노력했습니다.
2009
[거대 프로젝트 티어가든 시작]
44곡을 순차적으로 무료 공개하는 장기 프로젝트 'Teargarden by Kaleidyscope'에 돌입합니다. 앨범이라는 전통적인 틀을 깨고 곡 단위로 팬들과 소통하려는 혁신적인 시도였습니다. 사이키델릭한 감성이 짙게 묻어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 도중 지미 챔벌린이 다시 탈퇴하며 밴드는 다시 한번 변화를 맞습니다. 코건은 10대 드러머 마이크 번을 영입하는 등 젊은 피를 수혈하며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팬들은 매달 공개되는 신곡을 통해 코건의 창작 과정을 실시간으로 공유받았습니다.
2011
[프로레슬링 단체 설립]
시카고를 기반으로 한 프로레슬링 단체 '레지스탕스 프로 레슬링'을 창단합니다. 오랜 레슬링 매니아였던 자신의 꿈을 비즈니스로 연결한 과감한 도전이었습니다. 음악가 코건이 아닌 엔터테인먼트 기획자로서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홍보 모델이 아닌 실제 경영과 서사 구조 기획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지역 사회와 소통하며 독립 레슬링 단체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후 그가 프로레슬링 업계의 거물로 성장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2012
[평단의 극찬을 받은 오세아니아]
독자적인 정규 앨범 형태인 'Oceania'를 발매하여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재결성 이후 가장 훌륭한 앨범이라는 찬사가 쏟아지며 음악적 자존심을 완벽히 회복했습니다. 멜로디의 화려함과 구성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빌보드 차트 4위에 오르며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새로운 멤버들과의 조화가 완벽에 가까워졌음을 보여준 앨범이었습니다. 코건은 이 앨범을 통해 스매싱 펌킨스의 이름이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했습니다.
[마담 주주의 티 하우스 오픈]
시카고 인근 하이랜드 파크에 자신의 문화 공간인 '마담 주주의 티 하우스'를 엽니다. 비건 디저트와 차를 즐길 수 있는 카페이자 소규모 예술가들의 공연장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아티스트로서 지역 사회와 직접 소통하는 장소입니다.
코건이 직접 주문을 받거나 손님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습니다. 전 세계 팬들이 방문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으며 예술적 커뮤니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부정기적인 어쿠스틱 라이브 공연을 선보이며 팬들과 밀착 소통했습니다.
2014
[신작 모뉴먼츠 발표]
9번째 정규 앨범 'Monuments to an Elegy'를 발표하며 음악 활동의 박차를 가합니다. '머틀리 크루'의 토미 리가 드럼 세션으로 참여하여 파워풀하고 현대적인 사운드를 완성했습니다. 코건은 록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계속했습니다.
보다 팝적이고 듣기 쉬운 멜로디 라인을 도입하여 대중성을 확보했습니다. 연작 프로젝트의 일부로 기획되었으며 밴드의 생산적인 창작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코건은 다양한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통해 음악적 외연을 계속 확장했습니다.
2015
[TNA 레슬링 경영진 합류]
메이저 프로레슬링 단체인 TNA의 크리에이티브 부문 책임자로 부임합니다. 레슬링 선수들의 캐릭터 구축과 스토리라인 전개에 자신의 스토리텔링 역량을 쏟아붓습니다. 본격적으로 프로레슬링 업계의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의 합류로 TNA의 각본은 더욱 치밀해지고 독창적으로 변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이후 단체의 회장 직위까지 오르며 경영 전반을 책임지게 됩니다. 음악과 레슬링이라는 두 가지 열정을 동시에 비즈니스로 성공시킨 드문 사례가 되었습니다.
[첫째 아들 아우구스투스 탄생]
파트너 클로이 멘델과의 사이에서 첫 아이인 아우구스투스 주피터 코건이 태어납니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 얻은 첫 아이는 그의 삶에 엄청난 평화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고독한 천재였던 그는 이제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코건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아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일상을 자주 공개했습니다. 아이의 탄생은 그의 음악적 정서에도 부드러운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가정을 통해 그동안 겪어온 상처들을 치유하는 법을 배워나갔습니다.
2017
[역사적 단체 NWA 인수]
전설적인 프로레슬링 연합체인 NWA(National Wrestling Alliance)를 전격 인수합니다. 7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브랜드를 직접 소유하고 운영하며 레슬링 역사 재건에 나섰습니다. 코건은 NWA의 전통적 가치를 현대적으로 부활시키고자 했습니다.
유튜브 기반의 독창적인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매니아들의 큰 지지를 얻었습니다. 전설적인 챔피언 벨트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며 홍보했습니다. 그의 탁월한 마케팅 능력 덕분에 NWA는 독립 단체 중 가장 눈에 띄는 성장을 거두었습니다.
[솔로 앨범 오길랄라 발표]
릭 루빈이 프로듀싱한 두 번째 솔로 앨범 'Ogilala'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화려한 편곡을 걷어내고 목소리와 피아노, 기타만으로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노래했습니다. 아티스트로서의 완숙미가 느껴지는 수작으로 꼽힙니다.
이 앨범 활동 기간 동안 'W.P.C'라는 본명 약자를 사용하여 활동했습니다. 북미와 유럽의 소규모 극장 투어를 통해 팬들과 아주 가깝게 호흡했습니다. 진정한 뮤지션으로서의 깊이를 보여준 활동으로 평가받습니다.
2018
[제임스 이하의 공식 복귀]
오랜 불화를 끝내고 기타리스트 제임스 이하가 마침내 밴드로 복귀합니다. 드러머 지미 챔벌린까지 포함된 이 라인업은 팬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90년대 황금 라인업의 재결합이었습니다. 밴드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 다시 투어에 나섭니다.
다르시 레츠키의 불참이 아쉬움으로 남았으나, 세 핵심 멤버의 만남만으로도 파급력은 엄청났습니다. 대규모 아레나 투어를 통해 90년대의 영광을 현재로 불러왔습니다. 코건과 이하의 트윈 기타 사운드는 여전히 완벽한 조화를 보여주었습니다.
[둘째 딸 필로메나 탄생]
딸 필로메나 클레멘타인 코건이 태어나며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됩니다. 가족 구성원이 늘어남에 따라 코건의 삶은 더욱 안정적이고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는 음악과 비즈니스, 그리고 가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성공한 아티스트로 우뚝 섰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창작의 에너지를 얻는다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가족의 존재는 그가 프로레슬링 단체를 운영하고 투어를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자상한 아빠가 된 코건의 모습은 과거의 날 선 이미지와 대비되어 팬들에게 긍정적으로 다가갔습니다.
2020
[신스팝 대작 시르 발매]
20곡이 수록된 방대한 분량의 더블 앨범 'Cyr'을 발표합니다. 다시 한번 파격적인 신스팝 사운드를 도입하여 밴드의 장르적 한계를 시험했습니다. 코건의 목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냈습니다.
앨범 발매에 맞춰 5부작 애니메이션 시리즈 'In Ashes'를 공개하여 시각적인 즐거움을 더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중에도 멈추지 않는 창작력을 과시한 앨범입니다. 전성기 멤버들이 모두 제작에 참여하여 음악적 완성도를 극대화했습니다.
2023
[록 오페라 3부작 아툼 완성]
총 33곡으로 구성된 대작 록 오페라 'Atum' 프로젝트를 마무리합니다. 과거 명반들의 서사를 잇는 거대한 컨셉 앨범으로 코건의 예술적 야망이 집대성된 결과물입니다. 그는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우주를 완성하려 했습니다.
매주 팟캐스트를 통해 곡들을 미리 공개하는 독특한 프로모션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33곡 각각에 담긴 방대한 스토리는 팬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거장의 위치에서도 끊임없이 대작을 만들어내는 그의 열정에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클로이 멘델과 공식 결혼]
오랜 파트너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인 클로이 멘델과 마침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립니다. 시카고 인근에서 가족과 친지들의 축복 속에 로맨틱한 웨딩 마치를 울렸습니다. 인생의 긴 방황을 끝내고 진정한 안식처를 찾은 코건의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결혼식에는 밴드 동료들과 레슬링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했습니다. 코건은 결혼을 통해 자신의 삶이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소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앞으로도 음악과 비즈니스에서 훌륭한 파트너로 남을 것을 약속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