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와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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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빌리 와일더(Billy Wilder)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유대계 미국인 영화 감독, 각본가, 제작자로, 고전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가장 다재다능하고 눈부신 활약을 펼친 거장 중 한 명입니다. 빈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베를린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한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파리를 거쳐 할리우드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50년에 걸친 할리우드 경력 동안 '이중 배상', '잃어버린 주말', '선셋 대로', '뜨거운 것이 좋아',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등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키며 아카데미상 21회 후보 지명 및 7회 수상,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등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날카로운 위트와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필름 느와르부터 스크루볼 코미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를 완벽하게 소화해냈으며, 그가 감독하고 각본을 쓴 7편의 영화가 미국 의회도서관 국립영화등기부에 영구 보존될 정도로 영화사에 지울 수 없는 위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연표
1906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 지방의 수하(Sucha)에서 사무엘 와일더(Samuel Wilder)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미국 뉴욕에서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고 감명을 받아 '빌리(Billie)'라는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훗날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이름을 '빌리(Billy)'로 정식 변경하게 됩니다.
1916
그는 빈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기자로서 활동하며 쌓은 다양한 경험은 훗날 그의 날카로운 글쓰기와 스토리텔링 능력의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26
베를린에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다양한 인맥을 쌓기 시작했으며, 작가로 성공하기 전에는 돈을 받고 춤 파트너가 되어주는 택시 댄서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정규직을 얻어 범죄와 스포츠 기사를 전담했습니다.
1929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총 12편의 독일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 당시의 치열한 창작 경험을 통해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흐름과 극작의 구조를 깊이 있게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1930
[영화 '일요일의 사람들(People on Sunday)' 각본 참여]
로버트 시오드맥, 프레드 진네만 등 초보 영화인들과 협력하여 무성 영화 '일요일의 사람들'의 시나리오를 작업했습니다.이 영화는 기존 독일 표현주의 양식을 탈피하고 '신즉물주의(New Objectivity)' 운동을 스크린에 구현한 획기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더 나아가 훗날 이탈리아 네오레알리즘과 프랑스 누벨바그의 탄생에 큰 영감을 준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습니다.
1934
[감독 데뷔 및 미국 할리우드 이주]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하여 반유대주의가 극심해지자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 할리우드로 이주했습니다.할리우드로 떠나기 직전 파리에서 머무는 동안 자신의 첫 감독 데뷔작인 프랑스 영화 '모베즈 그렌(Mauvaise Graine)'을 연출했습니다. 영화가 정식으로 개봉하기 전에 그는 할리우드에 도착하여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삶을 다시 이어갔습니다.
1936
할리우드에 정착하여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기반을 점차 다져가던 불안정하지만 희망찬 시기에 이루어진 결혼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약 10년간 유지되었으나 결국 1946년에 이혼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939
[미국 시민권 취득 및 영화 '니노치카(Ninotchka)' 성공]
미국으로 귀화하여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니노치카'의 각본을 공동 집필하여 할리우드에서 첫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찰스 브래킷, 발터 라이슈와 함께 작업한 이 작품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상 후보(각본상)에 올랐습니다. 비극적 연기로 유명했던 그레타 가르보가 주연을 맡아 "가르보가 웃는다!"라는 마케팅 카피와 함께 상업적, 비평적으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1941
[각본가로서 연이은 흥행작 발표]
1940년대 초 로맨틱 드라마 '홀드 백 더 돈(Hold Back the Dawn)'과 스크루볼 코미디 '볼 오브 파이어(Ball of Fire)'의 각본을 연이어 히트시켰습니다.이 두 영화를 통해 1941년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각색상과 최우수 원안상 후보에 동시에 오르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이는 그가 당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각광받는 최고 수준의 시나리오 작가임을 다시 한번 증명한 결과였습니다.
1942
[할리우드 정식 감독 데뷔]
진저 로저스와 레이 밀랜드 주연의 코미디 영화 '메이저와 마이너(The Major and the Minor)'를 연출하며 할리우드 감독으로 정식 데뷔했습니다.파리에서 연출했던 작품 이후 미국 무대에서 연출봉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성공적인 연출을 통해 스튜디오 관계자들에게 감독으로서의 확실한 역량을 각인시키며 위대한 커리어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1944
[영화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 연출]
프레드 맥머레이, 바바라 스탠윅 주연의 필름 느와르 명작 '이중 배상'을 연출하고 각본을 공동 집필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유명 추리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와 함께 제임스 M. 케인의 원작 소설을 각색했습니다. 블라인드 그림자 조명, 보이스오버 내레이션 등 느와르 장르의 상징적 관습을 확립했으며, 할리우드의 엄격한 제작 규약(Hays Code)에 맞서 불륜과 살인을 대담하게 다루어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올랐습니다.
1945
[영화 '잃어버린 주말(The Lost Weekend)'의 대성공]
알코올 중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 '잃어버린 주말'을 각색하고 감독하여 비평계의 극찬을 이끌어냈습니다.이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휩쓰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아울러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당시 그랑프리)까지 함께 수상하여 한 영화로 두 권위 있는 시상식을 동시에 석권하는 빛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1949
1946년 첫 번째 부인과 파경을 맞은 지 몇 년 뒤에 이루어진 새로운 인연으로, 두 사람은 영화계 활동을 함께 지지해주며 빌리 와일더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평생을 반려자로 함께했습니다.
1950
[영화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연출]
할리우드 이면의 어두운 실상을 그려낸 냉소적인 느와르 명작 '선셋 대로'를 공동 집필하고 감독했습니다.오랜 파트너였던 찰스 브래킷과 마지막으로 협력한 작품으로, 잊혀진 무성영화 스타와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파국을 섬뜩하면서도 비애롭게 담아냈습니다. 아카데미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우수 각본상을 비롯해 3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1951
[영화 '에이스 인 더 홀(Ace in the Hole)' 연출]
커크 더글러스 주연으로 언론의 비정한 선정주의를 날카롭게 꼬집은 영화 '에이스 인 더 홀'을 연출했습니다.동굴 붕괴 사고에 갇힌 희생자를 이용해 부수를 올리려는 악덕 기자의 이야기를 그려냈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너무나도 냉소적인 시각 탓에 상업적 실패를 겪었으나, 세월이 흐르며 미디어의 본질을 꿰뚫은 선구적인 걸작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1953
[영화 '제17 포로수용소(Stalag 17)' 연출]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브로드웨이 연극을 각색하여 전쟁 드라마 '제17 포로수용소'를 성공적으로 감독했습니다.수용소 내부에 숨어든 첩자를 찾는 팽팽한 긴장감과 포로들의 심리를 탁월한 리듬감으로 그려내어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또한 주연을 맡은 윌리엄 홀든은 이 작품을 통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1954
[영화 '사브리나(Sabrina)' 연출]
오드리 헵번,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매혹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 '사브리나'를 연출하고 각본을 공동 작업했습니다.전작들의 냉소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우아하고 세련된 할리우드식 낭만을 완벽하게 스크린에 구현해냈습니다. 이 작품으로 와일더는 아카데미 감독상 및 각본상 후보에 올랐으며, 영화사에 남을 클래식 로맨스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1955
[영화 '7년만의 외출(The Seven Year Itch)' 연출]
당대 최고의 섹스 심볼 마릴린 먼로가 주연을 맡은 히트 로맨틱 코미디 '7년만의 외출'을 감독했습니다.지하철 환풍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마릴린 먼로의 하얀 드레스가 휘날리며 미소 짓는 그 유명한 장면이 탄생한 영화입니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대중문화 역사에 영구히 지워지지 않을 시각적 아이콘을 확립했습니다.
1959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Some Like It Hot)' 연출]
잭 레먼, 토니 커티스, 마릴린 먼로 주연의 코미디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를 연출하여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갱단을 피해 여장을 하고 여성 악단에 숨어든 두 남자의 좌충우돌 스토리를 다루었습니다. 소재의 파격성으로 인해 당국으로부터 제작 규약 승인을 받지 못했으나 폭발적인 흥행을 거두었고, 이후 미국 영화 연구소(AFI) 선정 역대 최고의 미국 코미디 영화 1위에 등극했습니다.
1960
[영화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The Apartment)'의 오스카 석권]
잭 레먼과 셜리 맥클레인 주연의 코미디 로맨스 영화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를 기획, 각본, 감독하여 영화계 최고의 찬사를 받았습니다.인간의 고독과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코미디 형식에 절묘하게 녹여낸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습니다. 빌리 와일더 본인에게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원각본상 등 3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안겨주는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1986
[미국 영화 연구소(AFI) 평생공로상 수상]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가 수여하는 영화계 최고의 명예인 평생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고전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다재다능한 영화 제작자로서 50년에 걸쳐 눈부신 공헌을 한 그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수여되었습니다. 헐리우드의 살아있는 전설로서의 위치를 공식적으로 확고히 했습니다.
1990
[케네디 센터 공로상(Kennedy Center Honors) 수상]
미국 문화 예술계의 발전에 기여한 거장들에게 주어지는 영예인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이민자 출신으로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내에서 수많은 명작을 창조하며 미국 대중문화에 지대하고 풍요로운 영향을 미친 그의 헌신과 독보적인 예술성을 국가적으로 높이 평가받은 결과입니다.
1993
[국가 예술 훈장(National Medal of Arts) 수훈]
미국 연방 정부가 예술가 및 후원자에게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인 국가 예술 훈장을 받았습니다.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불멸의 명작들을 남기고 전 세계 영화 예술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 거장으로서의 탁월한 공로를 미국 국가 차원에서 극진하게 치하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2002
피어스 브라더스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되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 몽드'는 부고 기사 1면 헤드라인에 그의 최고 명작인 '뜨거운 것이 좋아'의 그 유명한 마지막 대사를 인용하여 "빌리 와일더가 죽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Nobody is perfect)"라며 영화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위대한 거장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