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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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비틀즈
록 밴드, 팝 음악가, 문화 아이콘 + 카테고리

- 1960년 영국 리버풀에서 결성된 전설적인 록 밴드. -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로 구성된 더 팹 포. -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이자 20세기 대중문화 전반을 혁신한 아이콘. - 음반 판매 차트 기록 그래미상 등 수많은 세계적 기록 보유.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56

[존 레논, 밴드 결성]

16세 존 레논이 리버풀 쿼리 뱅크 스쿨 학우들과 스키플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처음엔 '더 블랙잭스'였으나, 다른 현지 그룹과 이름이 겹쳐 '쿼리멘'으로 변경하며 비틀즈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57

[폴 매카트니 합류]

15세 폴 매카트니가 존 레논을 만나 쿼리멘의 리듬 기타 자리를 맡게 되며 밴드의 핵심 라인업이 구축되기 시작했습니다.

1958

[조지 해리슨 합류]

폴 매카트니의 소개로 15세 조지 해리슨이 쿼리멘 오디션을 보았습니다.

한 달간의 설득 끝에 해리슨은 리드 기타리스트로 영입되며 비틀즈의 주요 3인조가 완성되었습니다.

1959

[쿼리멘 멤버 재편]

존 레논의 쿼리 뱅크 친구들이 쿼리멘을 떠난 후, 세 명의 기타리스트(존, 폴, 조지)는 '조니 앤 더 문독스'라는 이름으로 로큰롤을 연주하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60

[피트 베스트 합류 및 함부르크]

비공식 매니저 앨런 윌리엄스의 주선으로 함부르크 공연을 위해 피트 베스트를 드러머로 고용하고, 5인조가 된 비틀즈는 브루노 코슈미더와 3개월 반 동안의 체류 계약을 맺고 함부르크로 이동했습니다.

[스튜어트 섯클리프 합류]

존 레논의 예술대학 친구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베이스 기타를 구입해 그룹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버디 홀리와 더 크리케츠를 기리며 밴드 이름을 '비탈스(Beatals)'로 바꿀 것을 제안했습니다.

[더 실버 비틀스 변경]

'비탈스'에서 팝 가수 조니 젠틀의 백킹 그룹으로 스코틀랜드 투어를 떠나며 '더 실버 비틀스(the Silver Beetles)'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더 실버 비틀스 재변경]

7월 초 다시금 '더 실버 비틀스(the Silver Beatles)'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비틀즈(The Beatles) 확정]

8월 중순, 밴드명이 '비틀즈(the Beatles)'로 최종 정착하며 전설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함부르크 첫 공연]

비틀즈가 함부르크에 도착하여 홍등가의 '인드라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마크 루이손은 당시 함부르크의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묘사하며, 이들의 초창기 클럽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렸습니다.

[카이저켈러로 이전]

인드라 클럽이 소음 문제로 문을 닫자, 비틀즈는 10월부터 '카이저켈러'로 옮겨 공연을 이어갔습니다.

[조지 해리슨 추방]

브루노 코슈미더가 비틀즈가 계약 위반으로 다른 클럽에서 공연한 사실을 알고 미성년자 조지 해리슨을 고발했습니다.

결국 11월 말 독일 당국은 해리슨의 국외 추방을 주선했습니다.

[멤버들 함부르크 추방]

코슈미더의 고발로 폴 매카트니와 피트 베스트가 방화 혐의로 추방되고, 존 레논도 리버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스튜어트 섯클리프만 함부르크에 남았습니다.

1961

[섯클리프 탈퇴 및 체제 확립]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비틀즈를 떠나 독일에서 예술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하면서, 폴 매카트니가 베이스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비틀즈의 핵심 4인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유명한 헤어스타일 탄생]

스튜어트의 독일인 약혼녀 아스트리드 커처가 섯클리프의 머리를 '엑시(existentialist)' 스타일로 잘라주었고, 이는 이후 다른 비틀즈 멤버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폴리도르 레코드 계약]

프로듀서 베르트 켐페르트와 계약을 맺고 폴리도르 레코드에서 토니 셰리던의 백킹 밴드로 녹음했습니다.

싱글 'My Bonnie'는 발표 4개월 뒤 무지크막트 차트에서 32위를 달성했습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 만남]

비틀즈가 자주 공연하던 캐번 클럽에서 음반점을 운영하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만났습니다.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음악을 듣고 '스타가 될 잠재력'을 직감했습니다.

1962

[엡스타인 매니저 임명]

몇 달간의 설득 끝에 비틀즈는 브라이언 엡스타인을 매니저로 임명하며 전문적인 활동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스튜어트 섯클리프 사망]

마지막 함부르크 녹음 세션을 위해 독일로 돌아갔을 때,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전날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이는 비틀즈 멤버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EMI 스튜디오 첫 녹음]

프로듀서 조지 마틴과의 첫 녹음 세션이 런던의 EMI 레코딩 스튜디오(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열렸습니다.

마틴은 당시 드러머 피트 베스트의 실력에 불만을 표했습니다.

[링고 스타 합류]

피트 베스트를 해고하고 로리 스톰 앤 더 허리케인스 소속의 링고 스타를 새로운 드러머로 영입했습니다.

이로써 비틀즈의 최종 멤버 구성이 완료되었습니다.

[Love Me Do 녹음]

링고 스타를 드럼 자리에 놓고 'Love Me Do'를 녹음했습니다.

마틴은 이에 언짢아하며 일주일 후 세 번째 세션에서 앤디 화이트를 데려와 재녹음시켰습니다.

[첫 싱글 'Love Me Do' 발매]

'Love Me Do'가 비틀즈의 첫 싱글로 발표되어 '레코드 리테일러' 차트에서 최고 17위를 달성하며 영국 대중에게 비틀즈를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비틀즈 TV 데뷔]

지방 방송 '피플 앤 플레이스즈'에서 라이브 공연을 펼치며 비틀즈의 첫 텔레비전 데뷔가 이루어졌습니다.

[Please Please Me 녹음]

조지 마틴이 'Please Please Me'를 보다 빠른 템포로 녹음하길 권했고, 스튜디오 세션에서 이 곡이 녹음되었습니다.

마틴은 "아무래도 자네들의 첫 1위 곡이 탄생한 듯하네."라고 정확히 예견했습니다.

[마지막 함부르크 체류]

비틀즈는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함부르크 체류를 마무리했습니다.

함부르크에서의 혹독한 경험은 이들의 음악적 기량과 무대 매너를 크게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63

['Please Please Me' 1위]

싱글 'Please Please Me'가 발매되어 '레코드 리테일러'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차트에서 1위를 달성하며 비틀즈의 본격적인 성공 가도를 열었습니다.

[데뷔 앨범 녹음]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에 수록될 10곡을 단 하루 만에 '애비 로드에서의 마라톤 세션'을 통해 라이브 앨범처럼 녹음했습니다.

이 앨범은 '수십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신선하고 고귀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데뷔 앨범 영국 1위]

데뷔 앨범 'Please Please Me'가 영국에서 1위를 달성하며, 이후 11장의 앨범이 모두 영국에서 1위에 오르는 전무후무한 기록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From Me to You' 1위]

세 번째 싱글 'From Me to You'가 발매되어 1위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다음 6년간 발표된 18장 싱글 중 17장이 1위에 오르는 비틀즈의 압도적인 차트 지배력의 서막이었습니다.

['She Loves You' 기록]

네 번째 싱글 'She Loves You'가 발표, 4주 만에 75만 장이 팔리며 영국 사상 가장 빠르게 음반을 팔아치우는 영국 사상 가장 빠른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습니다.

또한, 최초로 백만 장 이상 팔린 싱글이기도 합니다.

[스웨덴 투어]

1962년 함부르크 공연 이래 처음으로 5일간 스웨덴 투어를 떠났습니다.

[비틀마니아, 공항 습격]

스웨덴 투어 후 히스로 공항에 귀국했을 때, 폭우 속에서도 수백 명의 팬들과 수십 명의 저널리스트, BBC 관계자들이 열렬히 마중 나와 '비틀마니아' 현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With the Beatles' 발매]

'Please Please Me' 앨범의 정상을 대체하며 비틀즈의 두 번째 앨범 'With the Beatles'가 발매되었습니다.

이 앨범은 예약 주문만 27만 건을 받고 1주 만에 50만 장이 팔리며 영국 차트 21주간 1위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미국 라디오 첫 송출]

미국 워싱턴 DC의 AM 라디오 방송국 WWDC의 캐롤 제임스가 영국 싱글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입수하여 송출하며 미국 전역에 비틀즈 음악에 대한 뜨거운 수요를 촉발했습니다.

['I Want to Hold Your Hand' 1위]

비틀즈의 미국 방문을 몇 주 앞두고 'I Want to Hold Your Hand'가 백만 장 판매를 돌파하며 1월 중순에는 빌보드 차트 1위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비틀즈의 미국 진출에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1964

[미국 첫 방문]

비틀즈가 4,000여 명의 팬 환송을 받으며 히스로 공항을 출발,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3,000여 명의 팬들이 마중 나와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에드 설리번 쇼 역사적 출연]

미국에서 첫 텔레비전 라이브 방송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습니다.

7,300만 명이 시청하며 당시 미국 TV 프로그램 역사상 유례없는 최고 시청자 수를 기록했습니다.

[미국 투어 종료 및 귀국]

플로리다에서 두 번째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을 마친 후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비틀즈의 미국 방문은 케네디 암살 이후 잠시 사라졌던 흥분감을 재점화하고, 혁명적 사회 변화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첫 영화 '어 하드 데이즈 나이트']

6주간 리처드 레스터 감독의 뮤지컬 코미디 영화 '어 하드 데이즈 나이트'에 출연했습니다.

이 영화는 7월과 8월 런던과 뉴욕에서 초연되어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평론가들은 비틀즈를 '마르크스 형제'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빌보드 핫 100 대기록]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에 무려 12개 곡을 올려놓고, 톱 5 곡을 모두 독점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비틀즈의 미국 대중음악 시장 지배력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첫 세계 투어]

덴마크, 네덜란드, 홍콩, 호주, 뉴질랜드에서 27일간 36회 공연을 펼치는 세계 투어를 진행했습니다.

링고 스타가 편도선 절제술로 잠시 병원 신세를 져 지미 니콜이 첫 5일간 드럼을 대신 맡기도 했습니다.

[미국 투어 및 밥 딜런 만남]

미국으로 돌아가 23개 도시에서 30회 공연을 진행했습니다.

이 투어 중 저널리스트 알 아로노위츠의 주선으로 밥 딜런과 만나 대마초를 처음 경험했습니다.

이 만남은 포크와 록 음악의 경계를 허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Beatles for Sale' 녹음]

네 번째 앨범 'Beatles for Sale'을 녹음했습니다.

계속되는 세계 투어로 작곡에 어려움을 겪어, 앨범 완성을 위해 여섯 개의 커버곡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인종 분리 공연 거부 선언]

플로리다주 잭슨빌 공연에서 인종 분리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비틀즈는 인종 분리가 없어지지 않는 한 공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결국 시 공무원이 비틀즈의 손을 들어주어 인종 분리 없이 공연이 진행되었습니다.

['Beatles for Sale' 발매]

네 번째 앨범 'Beatles for Sale'이 발매되었습니다.

이 앨범 속 여덟 개의 오리지널 작곡은 레논-매카트니 작곡 파트너십의 원숙해짐을 보여주었습니다.

1965

[LSD 첫 경험]

존 레논, 조지 해리슨과 그들의 아내들이 치과의사 존 라일리에게 몰래 커피에 LSD를 넣어 대접받으며 LSD를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이 경험은 멤버들의 음악적 영감과 이후 사이키델릭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영제국훈장 수훈 논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비틀즈 4인 전원을 대영제국훈장(MBE) 수훈자로 지정했습니다.

당시 이 훈장은 참전용사나 사회 지도자에게 부여되는 것이어서 일부 보수적인 수훈자들이 훈장을 반환하는 등 논란이 일었습니다.

[영화 '헬프!' 개봉]

비틀즈의 두 번째 장편영화 '헬프!'가 개봉했습니다.

리처드 레스터가 다시 감독을 맡았으나, 비틀즈 본인들을 포함해 평론가들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았습니다.

[셰이 스타디움 역사적 공연]

뉴욕 셰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공연에서 55,600명이 운집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비틀즈 공연 중 가장 유명한 콘서트로 꼽히며, 사상 최초로 온스테이지 모니터 스피커(폴드백 시스템)를 사용한 공연이었습니다.

[최초 애니메이션 시리즈 초연]

실존인물에 대한 최초의 주간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미국의 토요 카툰 시리즈 '더 비틀스'가 초연되었습니다.

이 방송은 '어 하드 데이즈 나이트'에서 보여줬던 슬랩스틱을 2년간 선보였습니다.

['Rubber Soul' 녹음 시작]

앨범 'Rubber Soul' 녹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비틀즈는 처음으로 다른 큰 일정 없이 너른 기간 동안 앨범 제작에 집중할 수 있었고, 조지 마틴은 이를 '진정한 예술로서 앨범을 생각할 수 있게 된 시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Rubber Soul' 발매 및 호평]

앨범 'Rubber Soul'이 발매되어 비틀즈 음악의 성숙함과 복잡함에서의 진보를 보여주며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는 대중음악계 최초로 앨범에 작품성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철학적 주제와 인도 악기 시타르 도입 등 음악적 경계를 넓혔습니다.

1966

['Yesterday and Today' 재킷 논란]

캐피틀 레코드의 앨범 'Yesterday and Today' 재킷이 정육점 작업복을 입고 생고기와 훼손된 아기 인형과 함께 있는 비틀즈의 모습을 담아 거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수천 장의 앨범이 논란 끝에 새 커버로 교체되었습니다.

[필리핀 영부인 모욕 사건]

필리핀 투어 중 비틀즈는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의 점심 리셉션 초대를 거절하여 모욕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폭동이 발생하여 필리핀을 어렵사리 탈출해야 했습니다.

[존 레논의 '예수 발언' 논란]

존 레논이 "우리는 이제 예수보다도 유명합니다"라고 한 발언이 미국의 종교적, 사회적 보수 단체를 크게 자극하여 논란과 음반 보이콧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레논은 맥락을 벗어난 인용임을 주장하며 결국 사과했습니다.

['Revolver' 발매 및 진보]

마지막 투어 일주일 전 앨범 'Revolver'가 발표되었습니다.

이 앨범은 세련된 작곡작사, 스튜디오 실험, 혁신적인 클래식 현악 편곡에서 사이키델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음악 스타일을 도입하며 비틀즈의 또 다른 예술적 진보를 보여주었습니다.

[마지막 상업 콘서트]

샌프란시스코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린 콘서트가 비틀즈의 마지막 상업적 콘서트였습니다.

약 4년간의 논스톱 1,400회에 달하는 전 세계 투어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Sgt. Pepper's' 녹음 시작]

투어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난 비틀즈는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녹음을 시작하며 급속하게 실험적인 접근 방식을 채용했습니다.

이 앨범 제작에는 총 700시간이 소모되었습니다.

1967

[최초 뮤직비디오 발표]

'Sgt.

Pepper's' 앨범에 속하지 않는 더블 A사이드 싱글 'Strawberry Fields Forever' / 'Penny Lane'이 먼저 발표되었습니다.

두 곡 모두 문화역사학자에게 '최초의 진정한 뮤직 비디오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홍보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Sgt. Pepper's' 발매]

비틀즈의 앨범 중 '그 어느 앨범보다도 유명하며, 가장 많이 모방되었'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가 발표되었습니다.

비교적 원시적인 4트랙 녹음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복잡함에 당대 아티스트들은 경악했으며, 평론가들은 만장일치로 호평했습니다.

[세계 최초 글로벌 TV 중계]

최초의 글로벌 텔레비전 링크 '아워 월드'에서 3억 5천만 시청자가 보는 앞에서 곧 나올 싱글 'All You Need Is Love'를 공연했습니다.

이 곡은 '플라워 파워'의 앤섬으로 채용되며 시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마하리시 요기 첫 만남]

런던에서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를 처음 소개받았습니다.

이튿날 비틀즈는 뱅고어로 그의 초월명상법 수행을 받으러 떠나며 영적인 탐구를 시작했습니다.

[브라이언 엡스타인 사망]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비틀즈는 '무너졌고, 궁지에 처했으며, 미래를 우려했다'고 멤버들이 회고할 정도로 큰 충격과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 속행]

엡스타인의 죽음 이후 매카트니의 제안으로 텔레비전 영화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 프로젝트를 속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영화는 매카트니가 주로 감독했습니다.

['Magical Mystery Tour' 발매]

'Magical Mystery Tour'의 사운드트랙이 영국에서 최초의 더블 EP로 발표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다섯 트랙이 추가된 앨범 형태로 발표되어 캐피틀 앨범 사상 최고 초기판매량을 기록했습니다.

1968

[인도 리시케시 아슈람 방문]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의 아슈람을 방문하여 3개월간 명상 수행에 참여했습니다.

이 시기는 비틀즈가 가장 다작했던 순간으로 기록되며, 다수의 곡이 이곳에서 작곡되었습니다.

[애플 코어 설립 발표]

레논과 매카트니가 뉴욕에서 비틀즈의 새로운 사업 벤처인 애플 코어를 발표했습니다.

세금 절감 목적에서 시작되었으나 음반 배급, 평화 운동, 교육 등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화이트 앨범' 녹음]

일명 '화이트 앨범'이라 불리는 'The Beatles'의 녹음을 진행했습니다.

이 시기 비틀즈의 분열이 가속화되어 링고 스타가 2주간 녹음을 관두는 등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영화 '노란 잠수함' 초연]

애니메이션 장편영화 '노란 잠수함'이 초연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만화 버전의 비틀즈를 보여주며, 이들 곡의 11곡을 사운드트랙으로 사용했습니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음악, 유머, 혁신적인 비주얼 스타일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Hey Jude' 싱글 발매]

비틀즈의 가장 긴 곡인 'Hey Jude'가 앨범 미수록 싱글로서 'Revolution'과 함께 발표되었습니다.

['화이트 앨범' 발매]

'화이트 앨범'이 애플 레코드를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선주문 2백만 장, 미국에서 한 달 만에 4백만 장 판매를 기록하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 앨범은 비틀즈 멤버들의 개별적 특성이 부각된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1969

['Get Back' 세션 시작]

원래 '비틀즈 앳 워크'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Get Back' 앨범의 스튜디오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비틀즈 멤버들의 관계는 최악이었고, 존 레논은 이를 '지옥과 같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루프톱 콘서트]

런던 새빌 로 애플 코어 사옥 옥상에서 비틀즈의 마지막 실황 공연인 '루프톱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밴드의 상징적인 순간이자 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공연으로 남았습니다.

[폴 매카트니 결혼 및 갈등]

폴 매카트니가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했습니다.

이후 린다의 가족을 비틀즈의 재정 고문으로 고용하려 하면서 다른 멤버들이 추천한 앨런 클라인과의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앨런 클라인 단독 매니저]

앨런 클라인이 비틀즈의 단독 매니저로 임명되었으나, 폴 매카트니는 이 계약을 거부하며 다른 멤버들과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Abbey Road' 녹음 시작]

'Abbey Road'의 주된 녹음 세션이 시작되었습니다.

마틴은 'Get Back' 세션이 끔찍했지만, 이 앨범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앨범'으로 꼽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탄생했습니다.

[존 레논 첫 솔로 싱글]

비틀즈 멤버 중 첫 솔로 싱글로, 플라스틱 오노 밴드 크레디트된 존 레논의 'Give Peace a Chance'가 발표되었습니다.

[비틀즈 마지막 스튜디오 만남]

'I Want You (She's So Heavy)'의 완성과 믹싱을 위해 비틀즈 4인 모두가 마지막으로 스튜디오에서 함께 모인 날입니다.

이는 비틀즈의 음악적 협업의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새 앨범 구상 논의]

링고 스타가 병원에 입원한 동안 다른 비틀즈 멤버들이 모여 새로운 앨범 구상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이 각각 네 곡씩 쓰고 스타는 두 곡을 하는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존 레논 비공식 탈퇴 선언]

존 레논이 다른 멤버들에게 비틀즈 탈퇴를 선언했으나, 곧 나올 앨범 판매량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공식석상에서 발표하지는 않기로 동의했습니다.

사실상의 해체 선언이었습니다.

['Abbey Road' 발매]

'Abbey Road' 앨범이 발매되었습니다.

3달 만에 4백만 장을 팔아치웠고 영국 차트에서 17주간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해리슨의 유일한 A면 싱글 'Something'이 수록되었습니다.

언터베르거는 이 앨범을 '비틀즈의 스완 송에 걸맞다'고 평했습니다.

1970

[마지막 곡 'I Me Mine' 녹음]

비틀즈의 마지막 앨범에 수록될 조지 해리슨의 'I Me Mine'이 녹음되었습니다.

존 레논은 당시 덴마크에 있어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비틀즈 멤버들이 함께 녹음한 마지막 곡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필 스펙터 'Let It Be' 프로듀싱]

앨런 클라인은 'Get Back' 프로젝트의 세션 테이프를 필 스펙터에게 건네 'Let It Be'로 개명하고 프로듀싱을 맡겼습니다.

스펙터는 일부 곡들을 편집하고 오버더빙했으며, 매카트니는 특히 'The Long and Winding Road'의 오케스트레이션에 진저리를 쳤습니다.

[폴 매카트니 공식 탈퇴]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탈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일주일 후 자신의 셀프타이틀 솔로 앨범을 발표하며 비틀즈의 사실상 해체를 공식화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렛 잇 비' 공개]

'렛 잇 비' 다큐멘터리 영화가 발표되어 1970년 아카데미상 최우수 원곡상을 수상했습니다.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굉장히 나쁜 영화임과 동시에 감동적인 영화'라고 평했습니다.

['Let It Be' 앨범 발매]

'Let It Be' 앨범이 발표되며 비틀즈의 앨범 발표는 종언을 고했습니다.

함께 나온 싱글 'The Long and Winding Road'는 미국에서만 발표되었습니다.

[해체 소송 시작]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의 계약상 파트너십을 해소하기 위한 소송을 시작하며 그룹의 법적 해체 절차에 돌입했습니다.

1974

[비틀즈 공식 해산]

존 레논이 플로리다 월트 디즈니 월드 리조트에서 파트너십 해소 문서에 서명하며 비틀즈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습니다.

법적 분쟁은 1970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1980

[존 레논 암살]

존 레논이 뉴욕 자택 근처에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라는 정신병자에게 암살당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는 전 세계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1995

['Free As A Bird' 발표]

'비틀즈 앤솔로지' 기획에 맞춰 존 레논이 1977년 녹음한 미완성곡 'Free As A Bird' 데모 테이프에 남은 세 멤버가 연주와 코러스를 덧입혀 비틀즈의 신곡으로 발표했습니다.

이는 공식적으로 유일한 재결성 활동으로 기록됩니다.

1996

['Real Love' 신곡 발표]

존 레논의 솔로 곡인 'Real Love'도 'Free As A Bird'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되어 비틀즈 버전으로 발표되었습니다.

2000

[앨범 '1' 발매 및 기네스]

영국 및 미국 음악 차트 1위를 한 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1'을 발매했습니다.

1주일 만에 360만 장을 판매하여 세계에서 가장 빨리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3천만 장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2001

[조지 해리슨 사망]

조지 해리슨이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로써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이 모두 세상을 떠나 더 이상의 비틀즈 재결성은 불가능해졌습니다.

2003

['Let It Be... Naked' 발매]

'Let It Be' 음반을 리믹스하고 보너스 디스크 'Fly on the Wall'을 추가한 'Let It Be..

Naked'를 발매했습니다.

2006

[앨범 'LOVE' 발매 및 최초]

태양의 서커스 배경곡으로 사용된 악곡을 모은 앨범 'LOVE'를 발매했습니다.

이는 비틀즈 자신이 출연하지 않은 매체의 배경 음악으로 비틀즈 원곡이 사용된 최초의 사례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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