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드 3세 체페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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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3세 체페슈
왈라키아 공작, 군주, 역사적 인물, 드라큘라 모티브 + 카테고리

15세기 왈라키아를 다스린 공작입니다. 잔혹한 공포정치로 꿰뚫는 자(체페슈)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의 이름 용의 아들(드러쿨레아)은 소설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강대국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사이에서 세 차례에 걸쳐 왈라키아를 통치하며 격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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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431

[용의 아들 탄생]

헝가리 왕국의 트란실바니아 시기쇼아라에서 블라드 2세 드러쿨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불명으로, 일설에는 평민 출신이거나 블라드 2세의 첫 부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당시 아버지 블라드 2세는 '용의 기사단'에 입단하여 '드라쿨'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블라드 3세는 그의 아들이라는 뜻의 '드러쿨레아'로 불리게 됩니다.

1442

[오스만 볼모 생활 시작]

아버지 블라드 2세의 충성 징표로 동생 라두와 함께 오스만 제국에 볼모로 보내져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오스만과 헝가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아버지의 외교적 상황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경험은 훗날 그의 통치 방식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447

[아버지와 형의 비극적 죽음]

헝가리 왕국의 후녀디 야노시 침공에 맞서 싸우던 아버지 블라드 2세와 큰형 미르체아가 살해당했습니다.

후녀디는 블라드 3세의 사촌인 블라디슬라프 2세를 꼭두각시 공작으로 세워 왈라키아를 지배하려 했습니다. 이 사건은 블라드 3세에게 복수심과 권좌 복귀의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1448

[짧았던 첫 통치, 오스만으로 퇴각]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가 블라디슬라프 2세를 앞세워 왈라키아를 침공하자, 집권 첫 해에 오스만으로 퇴각하며 첫 번째 통치를 마감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브라쇼브 시의회에 보낸 편지에서 '무라드 2세가 후녀니를 격파한 지금 알현을 했다간 당신들과 나, 우리 모두 오스만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밝히며 자신의 불안정한 처지를 설명했습니다.

[1차 왈라키아 공작 즉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자, 오스만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슬라프 2세를 실각시키고 왈라키아의 보이보드(공작)로 처음 즉위했습니다.

오스만은 블라드 3세를 앞세워 왈라키아를 침공했고, 후녀디는 블라드 3세가 오스만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트란실바니아로 알현을 요구하며 블라디슬라프 2세를 앞세워 왈라키아를 침공했습니다.

1449

[망명 생활의 시작]

왈라키아 권좌를 잃은 후 오스만 제국의 에디르네에 머물다가, 외삼촌으로 추정되는 몰다비아의 보그단 2세에게 의탁하며 망명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보그단 2세는 1449년 후녀디의 후원 아래 몰다비아의 권좌에 앉았습니다. 블라드 3세는 1451년 10월 보그단이 암살된 후에는 그의 아들 슈테판 3세와 함께 헝가리로 달아나 후녀디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1456

[2차 왈라키아 공작 즉위]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블라디슬라프 2세를 살해하고 다시 권좌에 복귀했습니다.이는 그의 두 번째 통치의 시작입니다.

이때 그는 '시민이든 공작이든 자신이 강할 때에는 원하는 대로 화평을 맺을 수 있으나 약할 때에는 강한 자가 와서 원하는 대로 할 것'이라고 편지에 썼는데, 이는 당시 발칸반도의 국제 정세와 함께 블라드 3세의 전제군주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1457

[악명 높은 '체페슈'의 등장]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보야르들을 가혹하게 숙청하고,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 마을을 약탈하며 수많은 포로를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공포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이 일로 그는 '체페슈(꿰뚫는 자)'라는 악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수천 명이 처형되었고, 특히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연루된 보야르들은 무자비하게 숙청되었습니다. 왈라키아의 지배층은 완전히 재편될 정도로 강력한 숙청이었습니다.

1461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기]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에 대한 조공을 거부하고 충성 서약을 중단하며 오스만과의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메흐메트 2세가 조공과 출두를 요구하는 사절을 보내자, 블라드 3세는 이들을 말뚝에 꿰어 죽이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맞섰습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1462

[불가리아 침공, 전쟁의 서막]

선제적으로 오스만 영토인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약탈과 학살을 자행하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면전을 시작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유창한 튀르키예어로 지우르쥬 요새를 점령하고 다뉴브강 오스만 영토를 약탈했습니다. 그는 1462년 2월 11일 마차시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행동이 '기독교의 수호'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헝가리 국왕에게 투옥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헝가리의 마차시 1세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트란실바니아에서 붙잡혀 투옥당했습니다.그의 두 번째 통치가 막을 내렸습니다.

마차시 1세는 교황과 베네치아 공화국에 자신이 블라드 3세를 투옥한 이유를 설명하며, 그가 오스만과 밀약을 맺고 헝가리를 배신하려 했다는 조작된 편지를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블라드 3세는 이후 14년간 비셰그라드에 수감되었습니다.

[공포의 야습, 그리고 세계를 놀라게 한 장면]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를 침공하자, 트르고비슈테에서 야습을 감행했으나 술탄 암살에는 실패했습니다.

수적 열세에 놓인 블라드 3세는 청야작전을 펼치며 후퇴했고, 밤에 기습을 시도했으나 술탄의 장막 위치를 오인했습니다. 이후 메흐메트 2세가 트르고비슈테에 입성했을 때, 성곽 밖에 늘어선 수천 명의 꼬챙이에 꿰어진 시신들을 보고 오스만군조차 공포에 질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블라드 3세의 잔혹한 통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공포스러운 광경 중 하나였습니다.

1475

[14년 만의 석방, 다시 전장으로]

몰다비아 슈테판 3세의 탄원으로 14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석방되어, 마차시 1세 휘하에서 보스니아에서 오스만군과 맞섰습니다.

석방된 그는 1476년 초 헝가리와 오스만 사이의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복귀하여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하고 즈보르니크를 파괴하는 등 예전과 같은 약탈과 학살, 처형을 재개했습니다.

1476

[영웅인가, 폭군인가? 최후를 맞이하다]

오스만의 주력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오스만 암살자에게 암살당했다는 설, 혹은 동맹군이 오인하여 죽였다는 설 등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정확치는 않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한 후 머리가 잘려 메흐메트 2세에게 보내졌다고 합니다. 왈라키아의 독립을 지키려 했던 그의 투쟁은 결국 비극적인 최후로 막을 내렸습니다.

[3차 왈라키아 공작 즉위]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을 받아 바사라프 라이오타를 쫓아내고 세 번째로 왈라키아의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브라쇼브에서 교역 특례를 약속하며 작센인의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몰다비아와 공식적인 동맹을 맺어 우위를 점했고, 바사라프 라이오타는 오스만으로 망명했습니다.

1897

[소설 '드라큘라' 출간]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가 블라드 3세의 별명과 잔혹성에서 영감을 받아 공포 소설 '드라큘라'를 출간했습니다.

이로 인해 역사 속의 '가시 공'은 대중문화 속의 '흡혈귀 백작'으로 영원히 각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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