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공국
연표
8
[카를 마르텔의 영토 편입]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인 카를 마르텔에 의해 부르군트 왕국 영토가 프랑크 오스트라시아의 일부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부르고뉴 지역은 프랑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8세기에 걸쳐 일어난 사건이며 정확한 연월일은 불확실합니다.
534
[부르군트 왕국 멸망]
게르만 일파인 부르군트족이 세운 부르군트 왕국이 프랑크족의 침입으로 멸망했습니다.
이는 이후 부르고뉴 공국의 기반이 되는 지역의 초기 역사에 중요한 사건입니다.
561
[프랑크 왕국 분할]
프랑크 왕 클로타르 1세 사망 후,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면서 그의 아들 군트람이 옛 부르군트 왕국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879
[보소, 부르고뉴 왕 선포]
비엔누아의 통치자 보소가 오툉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부르고뉴 전 지역을 복속시키고 자신을 부르고뉴의 왕으로 선포하며 지역 독립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888
[루돌프 1세, 상부 부르고뉴 왕]
독일 벨프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상부 부르고뉴의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이 왕국은 당시 현재의 스위스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923
[라울, 프랑스 왕으로 선출]
보소의 동생 리샤르의 아들 라울이 프랑스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지역의 인물이 프랑스 왕실의 중요한 자리에 오르게 된 사건입니다.
931
[루돌프 2세, 부르고뉴 지배]
루돌프 1세의 아들 루돌프 2세가 보소의 아들 맹인왕 루이와 조약을 맺어 손 강 서쪽 일부 지역을 제외한 부르고뉴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933
[프로방스 지배권 유지]
보소와 그의 후계자들이 프로방스 왕국(하부 부르고뉴)의 지배권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지역의 분할된 권력 구조를 보여줍니다.
936
[루이 4세, 부르고뉴 분할]
프랑스 왕 라울이 사망하자 카롤링거 계열의 루이 4세가 부르고뉴의 상스, 트루아, 랑그르 지역을 일시적으로 분할하여 통치했습니다.
1031
[카페 가문, 부르고뉴 지배]
프랑스 왕국의 일부가 된 부르고뉴 공국을 카페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 가문이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프랑스 왕실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되었습니다.
1032
[콘라트 2세, 부르고뉴 획득]
통일되었던 상부 부르고뉴와 하부 부르고뉴가 독일왕이자 황제인 콘라트 2세에게 넘어가며 부르고뉴의 지배권이 변경되었습니다.
1335
[두 부르고뉴 통일]
부르고뉴 공국과 시스쥐라 부르고뉴(프랑슈콩테)가 일시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이 통일은 훗날 다시 분리되지만, 잠시나마 부르고뉴의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됩니다.
1336
[잉글랜드 양모 수출입 금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와의 양모 수출입을 금지했습니다.
이는 플랑드르 경제에 큰 타격을 주어 반란의 원인이 되었고, 백년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1338
1345
[야코프 판 아르테벨더 사망]
플랑드르 반란의 주역이었던 야코프 판 아르테벨더가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가 플랑드르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1346
[크레시 전투, 루이 1세 전사]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왕의 봉신이자 플랑드르 백작인 루이 1세가 전사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왕실과 플랑드르 백국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356
[필리프 2세, 푸아티에 전투 활약]
백년 전쟁 중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 왕 장 2세의 막내아들 필리프 2세가 뛰어난 용맹을 보였습니다.
이 공로로 그는 훗날 부르고뉴 공국을 하사받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합니다.
1361
[카페 왕조 단절 및 공국 병합]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요절하면서 카페 왕조의 부르고뉴 가문이 단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국왕의 직할령으로 병합되었습니다.
1363
[필리프 2세, 부르고뉴 공국 하사]
프랑스 왕 장 2세가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공로를 치하하여 막내아들 필리프 2세에게 부르고뉴 공국을 왕자령으로 하사했습니다.
이는 훗날 왕실과 부르고뉴 간의 갈등을 낳는 중요한 실책이 되었습니다.
1369
[필리프 2세 결혼, 동군 연합 성립]
부르고뉴 공 필리프 2세가 시스쥐라 부르고뉴(프랑슈콩테)와 플랑드르의 상속녀 마르가레트 3세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광활한 동군 연합이 성립되어 부르고뉴 세력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1380
[샤를 6세 즉위와 숙부들의 통치]
11세의 광인왕 샤를 6세가 즉위하자, 호담공 필리프 2세를 비롯한 왕의 숙부들이 협동 통치 맹약을 맺고 프랑스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384
[필리프 2세의 영지 상속]
필리프 2세는 장인 사망 후 느베르, 르텔, 아르투아, 플랑드르, 프랑슈콩테 등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았습니다.
이로써 부르고뉴는 프랑스 동부에서 네덜란드까지 이르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1385
[캉브레 이중 결혼]
필리프 2세의 장남 장과 딸 마르그리트가 바이에른 공작의 자녀들과 혼인하는 '캉브레 이중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의 외교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1388
[샤를 6세 친정 시작]
샤를 6세가 친정을 시작하고 왕제 루이 등을 중용하면서, 호담공 필리프 2세와의 권력 대립이 심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392
[샤를 6세 정신장애 발작]
샤를 6세가 정신장애(유리 망상)로 발작을 일으키며 국왕의 통치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왕비 이자보와 왕제 오를레앙 공작 루이 등 오를레앙파가 세력을 키우게 됩니다.
1396
[백년 전쟁 일시 휴전]
파리에서 1426년까지의 전면 정전 협정이 맺어지면서 백년 전쟁이 일시적으로 휴전 상태에 들어섰습니다.
이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긴장 완화에 기여했습니다.
1404
[필리프 2세 사망, 부르고뉴파 형성]
호담공 필리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용맹공 장 1세가 부르고뉴를 계승하며 강력한 '부르고뉴파'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왕국 내의 새로운 권력 구도를 예고했습니다.
1407
[오를레앙 공작 루이 암살]
부르고뉴파가 정적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를 암살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왕국 내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파(아르마냐크파) 간의 내란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411
[오를레앙파, 아르마냐크파로 재편]
오를레앙파는 루이의 아들 샤를을 맹주로, 샤를의 장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를 중심으로 '아르마냐크파'로 이름을 바꾸고 무력 행사를 포함한 내란 양상으로 발전했습니다.
1413
[헨리 5세 즉위]
잉글랜드 왕 헨리 4세가 승하하고, 야심가 헨리 5세가 즉위했습니다.
헨리 5세는 이후 프랑스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백년 전쟁을 재점화합니다.
1415
[아쟁쿠르 전투, 프랑스 대패]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의 침공으로 아쟁쿠르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대패하며 오를레앙 공 샤를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프랑스 왕국 내 아르마냐크파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1418
[용맹공 장, 파리 입성]
용맹공 장이 파리에 입성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친잉글랜드 정책을 취했습니다.
이는 프랑스 왕실의 권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1419
[퐁투아즈 함락]
잉글랜드의 진격으로 부르고뉴파의 퐁투아즈가 함락되며 파리가 직접적인 위협에 놓였습니다.
이에 용맹공 장은 왕태자 및 아르마냐크파와의 화해를 모색하게 됩니다.
[용맹공 장 암살]
프랑스 왕태자 샤를과의 회담 자리에서 용맹공 장이 왕세자의 측근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와 부르고뉴 관계에 극심한 대립을 초래했습니다.
[앵글로-부르기뇽 동맹 체결]
용맹공 장의 뒤를 이은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잉글랜드와 '앵글로-부르기뇽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는 여동생 안과 베드퍼드 공작 존의 결혼을 포함한 강력한 동맹이었습니다.
1420
[트루아 조약 체결]
부르고뉴파의 주도로 프랑스 왕 샤를 6세와 잉글랜드 헨리 5세 간의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헨리 5세와 샤를 6세의 공주 캐서린이 혼인하고 샤를 왕태자가 폐적되었습니다.
이로써 잉글랜드-프랑스 이중 왕국이 수립될 것이었으나, 샤를 왕태자가 조약을 부정하면서 큰 혼란이 야기되었습니다.
1422
[샤를 6세 승하 및 헨리 6세 즉위]
프랑스 왕 샤를 6세가 승하했습니다.
이에 따라 생후 9개월의 헨리 6세가 잉글랜드-프랑스 이중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샤를 왕태자는 트루아 조약을 부정했습니다.
1424
[네덜란드 승계 전쟁 시작]
선량공 필리프 3세는 프랑스 왕국 내 싸움보다 네덜란드 승계 문제에 중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국의 후계자인 자클린과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1428
[델프트 화약 체결, 지배권 획득]
'델프트 화약'이 체결되어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백국의 지배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의 북부 영토 확장에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오를레앙 포위전]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아르마냐크파의 주요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했습니다.
이는 백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대규모 군사 작전이었습니다.
1430
[황금양모 기사단 창설]
선량공 필리프와 포르투갈 공주 이자벨의 혼례를 계기로 '황금양모 기사단'이 창설되었습니다.
이 기사단은 부르고뉴 귀족의 신분과 정체성을 상징하며 십자군 정신을 계승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잔 다르크 체포]
콩피에뉴 포위전에서 부르고뉴군이 잔 다르크를 사로잡아 동맹군인 잉글랜드에 넘겼습니다.
이는 프랑스군의 사기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잔 다르크의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1431
[잔 다르크 화형]
잉글랜드에 넘겨진 잔 다르크가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는 프랑스 민족주의와 국민 국가 열망이 고조되는 19세기 이후 재평가되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432
[네덜란드 영지 귀속]
에노, 홀란트, 제일란트 등 세 백국의 모든 영지가 선량공 필리프에게 완전히 귀속되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의 영토를 더욱 확장하고 안정화시키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1435
[아라스 조약 체결]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어 부르고뉴와 프랑스 왕가 간의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조약은 용맹공 장 암살에 대한 사과와 부르고뉴 측에 유리한 양보 내용이 담겨있어, 프랑코-부르기뇽 동맹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467
[샤를 1세, 공위 계승]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야심가인 용담공 샤를 1세가 부르고뉴 공위를 계승했습니다.
샤를 1세는 세력 확대를 꾀하며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1474
[부르고뉴 전쟁 발발]
용담공 샤를 1세가 로트링겐 지방과 스위스 북서부로의 확장을 노리며 '부르고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그의 왕국 승격 야심을 보여주는 행보였습니다.
1476
[막시밀리안-마리 약혼]
용담공 샤를 1세가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적자 막시밀리안과 자신의 외동딸 마리를 약혼시켰습니다.
이는 부르고뉴의 왕국 승격과 황제위 야심을 위한 외교적 포석이었습니다.
1477
[루이 11세, 부르고뉴 영토 점거]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용담공 샤를의 사망을 틈타 부르고뉴 공령(프랑슈콩테), 에노, 피카르디, 아르투아 등 주요 영토를 점거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분할의 시작이었습니다.
1477년 1월부터 6월 사이에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입니다.
[용담공 샤를 1세 전사]
용담공 샤를 1세가 낭시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그의 사망은 부르고뉴의 급작스러운 몰락과 프랑스, 합스부르크 가문의 개입을 불러왔습니다.
[마리 여공, 대특허장 용인]
용담공 샤를의 유일한 상속녀 마리 여공이 각 도시의 반발에 직면하여 '대특허장'을 용인했습니다.
이는 도시들의 특권을 인정하고 지지를 얻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마리 여공, 막시밀리안과 결혼]
마리 여공이 약혼자 막시밀리안과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으로 부르고뉴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동맹을 통해 프랑스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후원자를 얻었습니다.
1479
[긴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 격퇴]
막시밀리안이 '긴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며 부르고뉴의 통치를 안정화하려는 노력을 보였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침탈을 저지하는 중요한 승리였습니다.
1482
[마리 여공 급사]
마리 여공이 낙마 사고로 급사했습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부르고뉴 계승 전쟁을 재점화하고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간의 새로운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아라스 조약 체결]
마리 여공의 급사 후,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어 막시밀리안은 프랑스 측에 영토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영토의 상당 부분을 프랑스에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483
[막시밀리안, 반격 개시]
막시밀리안이 프랑스군과 반란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며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내에서 그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1485
[막시밀리안, 헨트 입성]
막시밀리안이 헨트에 입성하여 프랑스군과 반란군을 추방하고 '대특허장'에 의한 특권을 박탈했습니다.
이는 플랑드르 시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였습니다.
1491
[샤를 8세,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브르타뉴의 유일한 상속녀 안과 결혼하며 막시밀리안의 딸 마르가레트와의 약혼을 파혼했습니다.
이는 프랑스-합스부르크 관계에 새로운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1493
[상리스 조약 체결]
샤를 8세가 막시밀리안 1세와 '상리스 조약'을 맺고 프랑슈콩테를 오스트리아에 돌려주었습니다.
이는 부르고뉴 계승 전쟁의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는 결과였습니다.
1678
[프랑스의 부르고뉴 합병]
프랑스가 부르고뉴를 최종적으로 합병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의 역사가 종언을 고했습니다.
이로써 오랫동안 이어져 온 부르고뉴의 독립적인 지위는 막을 내렸습니다.
1789
[프랑스 혁명, 부르고뉴 지방 재편]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면서 부르고뉴 지방은 코트도르, 손에루아르, 욘 등 3개 주로 재편성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는 유럽의 근대 국가 형성 과정의 일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