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브 루스
연표
1895
[베이브 루스 출생]
조지 허먼 루스 주니어, 통칭 '베이브 루스'가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독일계 이민자 부모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895년 2월 6일, 조지 허먼 루스 주니어는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선술집 주인인 조지 허먼 루스 시니어와 케이트 삼버거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활발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1902
[성모 마리아 직업학교 입학 및 야구 시작]
7살 때 성모 마리아 직업학교에 입학하여 수도사 마티어스 신부를 만나 야구를 배우며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7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사들이 운영하는 성모 마리아 직업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마티어스 신부를 만나 야구를 배우게 되었고, 또래보다 큰 덩치와 재능으로 지역 리틀 야구 스타로 성장했습니다.
1913
[보스턴 레드삭스 영입]
세인트 메어리 공업학교를 떠날 무렵 아마추어 및 세미프로팀으로부터 초청을 받기 시작했으며, 프로 팀들의 주목 끝에 보스턴 레드삭스에 영입되었습니다.
세인트 메어리 공업학교를 나설 무렵인 1913년, 루스는 아마추어팀이나 세미프로팀으로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정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뛰어난 야구 실력은 프로 팀들의 이목을 끌었고, 마침내 보스턴 레드삭스에 영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914
[볼티모어 오리올스 계약 및 '베이브' 별명 획득]
메이저리그 팀인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마이너리그와 계약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이때 세상 물정 모르고 감독을 따르는 모습 때문에 '베이브'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14년 초, 루스는 볼티모어 오리올스 마이너리그와 계약하며 프로 야구 선수로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당시 어린아이처럼 감독을 졸졸 따라다니는 순진한 모습으로 인해 '베이브'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프로 첫 공식 경기 출장]
프로 야구 선수로서 처음으로 인터 스쿼드 경기에 출전하여 투수로 2이닝을 던지고 타자로서 우전 적시타를 기록했습니다.
1914년 3월 7일, 베이브 루스는 인터 스쿼드 경기를 통해 프로 야구 선수로 첫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투수를 맡아 2이닝을 던졌으며, 타석에서는 두 번째 타석에서 우전 적시타를 기록하며 투타겸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
재정난을 겪던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어니 쇼어, 벤 이건과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1914년 7월 4일, 연방리그와의 경쟁으로 재정적 손실이 컸던 마이너리그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구단주는 자금 마련을 위해 루스를 어니 쇼어, 벤 이건과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했습니다.
1914년 7월 11일, 베이브 루스는 보스턴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 경기에 첫 출장했습니다. 이는 그의 전설적인 커리어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1915
[투타 겸업으로 월드시리즈 우승 기여]
레드삭스 소속으로 투수 18승 8패, 16완투를 기록하고 타자로서 타율 0.315와 4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메이저리그 데뷔 이듬해인 1915년, 루스는 투수로서 18승 8패와 16경기 완투를 기록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또한 타자로서는 타율 0.315, 4홈런을 기록하며 타격 재능도 선보였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리그 우승과 월드시리즈 우승에 이바지했습니다. 당시 레드삭스 투수진이 쟁쟁하여 월드시리즈 선발로 출전하지는 못했습니다.
1916
[리그 최고 투수로 맹활약 및 월드시리즈 우승]
투수로서 23승 12패, 평균자책점 1.75로 리그 최정상급 활약을 펼치고 9완봉승으로 왼손 투수 최다 완봉승 기록을 세우며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2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1916년 시즌, 루스는 23승(모두 선발) 12패, 평균자책점 1.75로 평균자책점 1위, 선발승 1위에 오르는 등 리그 최고 투수로 군림했습니다. 특히 9번의 완봉승은 1978년까지 왼손 투수 기록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레드삭스는 2년 연속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17
[아메리칸 리그 정상급 투수로 자리매김]
투수로서 24승 13패, 평균자책점 2.01, 38완투를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성장했습니다.
1917년, 베이브 루스는 24승(모두 선발) 13패와 평균자책점 2.01, 38번의 완투, 6번의 완봉승을 올리며 개막전 3년 연속 승리 투수를 기록하는 등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1918
[외야수 변신과 첫 홈런왕]
제1차 세계대전 징병으로 인한 외야수 공백으로 야수로 출전하기 시작하여 11홈런으로 첫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에 등극하고,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1918년 시즌, 제1차 세계대전 징병으로 인한 외야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루스는 야수로 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투수로서 13승 7패를 기록함과 동시에, 타자로서 단 95경기만을 뛰고도 타율 3할과 11개의 홈런을 쳐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에 등극했습니다. 레드삭스는 4년 만에 3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월드시리즈 무실점 기록 수립]
시카고 컵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29.2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팀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18년 9월 5일부터 시작된 시카고 컵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루스는 투수로서 29.2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이 기록은 1961년까지 40년 넘게 유지되었으며, 팀은 4승 2패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19
[MLB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 경신]
주로 타자로 뛰면서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29개의 홈런을 쳐내 MLB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고 두 번째 홈런왕을 차지했습니다.
1919년, 루스는 130경기 중 17경기에만 투수로 출전하고 주로 타자로 뛰면서 당시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이었던 네드 윌리엄슨의 27개를 넘어 29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새로운 역사를 썼습니다. 이는 2위와 거의 3배 차이가 나는 압도적인 기록으로, 역사상 최강의 타자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뉴욕 양키스 트레이드와 '밤비노의 저주' 시작]
시즌이 끝난 후, 보스턴 레드삭스의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에 의해 뉴욕 양키스로 현금 트레이드되면서, 이후 레드삭스의 86년 무관 시대를 상징하는 '밤비노의 저주'가 시작되었습니다.
1919년 시즌이 끝난 후, 연극 제작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레드삭스의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는 논란 속에 루스를 12만 5천 달러에 뉴욕 양키스로 현금 트레이드했습니다. 이 거래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는 2004년까지 86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고, 이는 야구계의 대표적인 저주인 '밤비노의 저주'로 불리게 됩니다.
1920
[양키스 이적 후 압도적인 활약과 '라이브볼 시대' 개막]
뉴욕 양키스 이적 첫 해, 54홈런, 158득점, 137타점으로 리그를 이끌며 양키스 최초로 120만 명의 관중을 동원, 야구의 '라이브볼 시대' 시작을 알리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1920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루스는 첫 해에 54홈런, 158득점, 137타점으로 리그를 압도했습니다. 그의 폭발적인 홈런 페이스는 팬들을 야구장으로 끌어모아 양키스가 처음으로 120만 명의 관중을 동원하게 했으며, 저득점 전략 중심의 야구에서 홈런이 주효한 '라이브볼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21
[또다시 단일 시즌 홈런 기록 경신]
59홈런을 기록하며 MLB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다시 경신했고, 로저 코너의 통산 홈런 기록도 깼으며, 177득점, 119장타, 457총루수 등 여러 타격 기록을 세웠습니다.
1921년 시즌, 루스는 타율 0.378, 홈런 59개, 장타율 0.846으로 정규시즌을 마쳤습니다. 이는 본인이 세웠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다시 경신한 것이며, 로저 코너의 통산 138홈런 기록도 깼습니다. 특히 177득점, 119개의 장타, 457개의 총루수는 2021년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대기록입니다. 팀은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에 패했습니다.
1923
[역대급 시즌과 양키스의 첫 월드시리즈 우승]
타율 0.393, 41홈런, 투수와 타자를 통틀어 단일 시즌 역대 WAR 1위(15.0) 기록을 세우며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고, 양키스의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1923년 시즌은 베이브 루스에게 역사적인 한 해였습니다. 그는 타율 0.393, 41홈런을 기록했으며, 투수와 타자를 통틀어 단일 시즌 역대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1위(15.0)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의 압도적인 활약으로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양키스는 3년 연속 뉴욕 자이언츠와 맞붙은 월드시리즈에서 4승 2패로 창단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24
1924년 시즌, 루스는 타율 0.378을 기록하며 자신의 첫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또한 46개의 홈런으로 통산 6번째 홈런왕을 수상하며 리그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양키스는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리그 우승을 아쉽게 놓쳤습니다.
1925
[최악의 시즌과 슬럼프]
몸 관리 실패로 120kg에 육박하는 몸무게와 컨디션 난조로 98경기 출전에 그치며 타율 0.290, 25홈런을 기록, 양키스 선수로서 최악의 시즌과 슬럼프를 겪었습니다.
1923년과 1924년에 몸 관리를 하며 최고의 성적을 냈던 루스는 1925년 초 120kg의 몸무게로 몸 관리에 실패했습니다. 시즌 도중 쓰러지는 등 컨디션이 최악이었고,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이 영국 신문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98경기밖에 뛰지 못하고 타율 0.290, 25홈런을 기록하며 양키스 선수로서 최악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양키스 역시 꼴찌에서 두 번째 순위로 경기를 마쳤습니다.
1926
[워크아웃 통한 부활]
오프시즌 동안 절치부심하며 몸을 만들어 47홈런, 146타점, 타율 0.372를 기록하며 명성을 되찾고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최악의 시즌을 보낸 루스는 오프시즌에 아티 맥거번 체육관에서 운동하며 몸을 만들어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47홈런과 146타점, 타율 0.372를 기록하며 자신의 명성을 되찾았고, 양키스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월드시리즈에서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했습니다. 이 시즌에는 11세 소년에게 홈런을 약속하고 실제로 3개의 홈런을 쳐낸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1927
[살인 타선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견인]
60홈런 기록을 포함해 타율 0.356, 164타점, 장타율 0.772를 기록하며 '살인 타선'으로 불린 뉴욕 양키스를 이끌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27년, 베이브 루스는 60홈런이라는 전설적인 기록과 함께 타율 0.356, 164타점, 장타율 0.772를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뉴욕 양키스는 '살인 타선'으로 불리며 아메리칸 리그 110승을 거두었고,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4경기 만에 스윕하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MLB 단일 시즌 60호 홈런 기록]
톰 자커리 투수를 상대로 8회에 2-2 동점을 만드는 역사적인 60호 홈런을 기록하며 자신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을 다시 경신했습니다.
1927년 9월 30일, 베이브 루스는 톰 자커리 투수를 상대로 8회에 극적인 60호 홈런을 기록하며 본인이 세웠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59개)을 다시 경신했습니다. 이는 야구 역사상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1928
1928년 시즌, 루스는 54개의 홈런과 142타점, 타율 0.323이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경기 만에 스윕하며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29
[양키스 유니폼 번호 도입과 3번]
양키스가 선수들에게 유니폼 번호를 도입하며 3번 타순이었던 루스는 3번을 배정받았고, 46홈런 154타점을 기록했습니다.
1929년 시즌은 뉴욕 양키스가 선수들에게 유니폼 번호를 만든 최초의 시즌이었습니다. 루스는 3번 타자였기 때문에 3번을 배정받았습니다. 그는 이 시즌에 타율 0.345에 46홈런 154타점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1930
1930년, 베이브 루스는 타율 0.359에 49홈런과 153타점을 기록하며 여전히 리그 최정상급 타자임을 증명했습니다. 특히 이 해에는 9년 만에 투수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는 이색적인 기록도 세웠습니다. 그러나 양키스는 3위로 마감하며 리그 우승에 실패했습니다.
[전례 없는 연봉 계약]
양키스와의 연봉 협상이 결렬되며 큰 이슈가 되었으나, 두 달 뒤 전례 없는 연간 8만 달러 계약에 합의했습니다.
1930년 1월 7일, 양키스와 루스의 연봉 협상이 순식간에 결렬되었습니다. 3년 계약을 연봉 7만 달러로 막 끝낸 루스는 양키스의 1년간 7만 달러 및 2년간 7만 5천 달러 최종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두 달 후, 루스는 2년 동안 연간 8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금액으로 계약에 합의했습니다.
1931
1931년 시즌, 양키스는 전 시즌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였으나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루스는 타율 0.373에 46홈런 163타점을 기록하며, 여전히 꾸준하고 뛰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1932
1932년 시즌, 루스는 41개의 홈런과 137타점, 타율 0.341을 기록했습니다. 양키스는 107승 47패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시카고 컵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4년 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전설적인 '예고 홈런']
시카고 컵스와의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홈런을 치기 전 타석에서 중앙 담장을 가리켰다는 '예고 홈런' 전설이 발생했습니다.
1932년 10월 1일, 뉴욕 양키스와 시카고 컵스의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치기 전 타석에서 손가락으로 중앙 담장을 가리켰고, 이후 그 방향으로 홈런을 날렸다는 '예고 홈런' 전설이 탄생했습니다. 이는 실제로 그날 경기를 지켜본 한 기자가 별생각 없이 끼워 넣은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루스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일화로 회자됩니다.
1933
1933년 시즌, 루스는 타율 0.301에 34홈런, 103타점을 기록하며 기량이 조금씩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히 꾸준한 활약을 유지했습니다. 이 해에 처음으로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에 참가하여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습니다.
1934
1934년 시즌, 루스는 타율 0.288에 22홈런을 기록하며 전 시즌보다 하락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선수 생활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제2회 올스타전에도 참가하며 여전히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해는 그가 뉴욕 양키스 선수로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습니다.
1935
1935년, 베이브 루스는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수로서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시즌을 보냈습니다.
[마지막 불꽃, 3홈런 맹타]
은퇴 전 마지막으로 3개의 홈런을 포함하여 4타수 4안타의 맹타를 휘두르며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습니다.
1935년 5월 25일, 은퇴를 앞둔 루스는 보스턴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홈런 3개를 포함한 4타수 4안타의 맹타를 휘두르며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비록 팀은 11대 7로 패했지만, 그의 투혼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1935년 5월 30일,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리그에서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에 출장했습니다. 이는 그의 22년간의 화려한 선수 생활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프로 야구 공식 은퇴]
현역 야구 선수에서 공식 은퇴를 선언하며, 통산 714홈런, 2213타점, 타율 0.342라는 대기록을 남겼습니다.
1935년 6월 2일, 베이브 루스는 현역 선수 생활에서 공식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는 1914년부터 1935년까지 22시즌 동안 12번의 홈런왕을 차지했으며, 통산 714홈런, 2213타점, 0.342의 타율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기며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웠습니다.
1936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최초 헌액]
처음 시행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타이 콥, 호너스 와그너 등과 함께 최초로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1936년, 처음으로 시행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에서 베이브 루스는 타이 콥, 호너스 와그너, 크리스 매튜슨, 월터 존슨과 함께 야구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수로 인정받아 최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는 그의 위대한 업적을 공식적으로 기리는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1946
선수 생활 은퇴 후 말년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제2차 세계대전을 지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루스는 1946년에 후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1948
1948년 8월 16일, 베이브 루스는 후두암 투병 끝에 미국 뉴욕주 뉴욕에서 53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 야구 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1998
1998년, '스포팅 뉴스'는 베이브 루스를 '야구 100대 선수' 리스트에서 1위로 선정하며 그의 위대한 유산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1999
['20세기 위대한 선수'로 평가]
야구 팬들이 선정한 메이저리그 야구 전세기 팀에 임명되었고, ESPN 투표에서 '20세기 위대한 미국 선수' 2위로 선정되었습니다.
1999년, 야구 팬들은 루스를 메이저리그 야구 전세기 팀에 임명했습니다. 또한 ESPN 투표에서는 마이클 조던에 이어 '20세기 위대한 미국 선수' 2위로 선정되며 스포츠를 넘어선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2018
[대통령 자유의 메달 수여 발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베이브 루스에게 미국 최고 시민 훈장인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수여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베이브 루스가 엘비스 프레슬리, 안토닌 스칼리아와 함께 미국 최고 시민 훈장인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루스가 사망한 지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