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터 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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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영화 감독, 희극인, 스턴트 배우 영화/드라마 배우

버스터 키턴은 무성 영화 시대의 전설적인 미국 배우이자 감독입니다. 3살부터 보드빌 무대에서 신체 코미디를 선보였으며, '위대한 무표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독자적인 스튜디오에서 수많은 걸작 단편 및 장편 영화를 제작하며 전성기를 누렸으나, MGM 계약과 발성 영화의 도입으로 예술적 자유를 잃고 경력의 하락세를 겪었습니다. 그는 오늘날에도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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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5

[버스터 키턴 탄생]

미국 캔자스주 피쿠아에서 보드빌 배우 부부 조 키튼과 마이어나 키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마술사 해리 후디니가 그를 '버스터(Buster)'라 부르며 강인함을 칭찬한 것이 그의 예명이 되었다.

1895년 10월 4일, 조지프 프랭크 키턴은 미국 캔자스주 피쿠아에서 순회 보드빌 공연을 하는 부모인 조 키튼과 마이어나 키튼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셉'이라는 본명은 가문의 전통을 따랐으며, '버스터'라는 예명은 그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연기를 펼치자 마술사 해리 후디니가 그의 강인함을 칭찬하며 붙여준 것이라고 전해진다.

1898

[가족 보드빌 공연 '세명의 키튼' 시작]

3살의 나이에 부모님과 함께 '세명의 키튼'이라는 보드빌 공연을 시작하며 무대 위에서 아버지가 던지는 등의 스턴트 연기를 선보였다. 이는 그의 독특한 신체 코미디의 기반이 되었다.

버스터 키턴은 3살 때인 1898년부터 가족들과 함께 '세명의 키튼(The Three Keatons)'이라는 보드빌 공연을 시작했다. 그는 이 공연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무대에서 다른 곳으로 던지는 과격한 스턴트 연기를 선보였는데, 이는 당시 아동 학대 논란의 소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키턴은 다치지 않았기에 계속 연기를 이어갔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무표정 연기'와 뛰어난 신체 코미디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1917

[영화계 데뷔 및 로스코에 아버클과의 협업]

뉴욕에서 무성 영화계의 거장 로스코에 아버클을 만나 영화에 데뷔했으며, 첫 출연작 《정육점 소년》을 시작으로 아버클과 함께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배우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917년, 알코올 의존증으로 무대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아버지를 떠나 뉴욕으로 간 버스터 키턴은 조셉 M. 솅크 휘하의 유명 코미디언 로스코에 아버클을 만났다. 그는 아버클의 권유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첫 영화 《정육점 소년》을 비롯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잠시 활동을 중단한 시기를 제외하고 1920년까지 아버클과 함께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무성 영화 배우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1920

[장편 영화 주연 및 독립 제작 시작]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의 도움으로 장편 영화 《바보》에서 첫 주연을 맡아 인기를 얻었고, 로스코에 아버클에게서 독립하여 자신만의 2릴 단편 영화를 직접 연출하고 제작하기 시작했다.

1920년, 버스터 키턴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의 지원으로 장편 영화 《바보》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 성공을 발판 삼아 그는 로스코에 아버클로부터 독립했고, 조셉 M. 솅크의 후원 아래 직접 연출하고 제작하는 2릴 단편 코미디 영화 제작의 시대를 열었다. 이 시기에 《일주일》(1920), 《하이 사인》(1921), 《경찰》(1922) 등 그만의 독특한 유머와 스턴트가 돋보이는 여러 걸작 단편들을 선보였다.

1923

[장편 영화 감독으로 전환]

단편 영화 《사랑의 둥지》를 마지막으로 단편 영화 제작을 끝내고, 《세가지 시대》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장편 영화 제작 및 연출 활동에 집중하며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확장했다.

1923년, 버스터 키턴은 단편 영화 《사랑의 둥지》를 마지막으로 단편 영화 제작을 마무리했다. 이후 그는 장편 영화로 전환하여 《세가지 시대》(1923)를 첫 장편 연출작으로 선보였으며, 《우리의 환대》(1923), 《셜록 2세》(1924), 《네비게이터》(1924), 《일곱 번의 기회》(1925) 등 다수의 장편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주연으로 출연하며 감독 겸 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1926

[영화 《제너럴》 제작 및 흥행 실패]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기차 추격전 영화 《제너럴》을 제작했으나, 당시 평론가들에게 혹평받으며 흥행에 실패했다. 이 작품은 훗날 그의 최고 걸작으로 재평가받았다.

1926년, 버스터 키턴은 자신의 예술적 역량이 집대성된 남북 전쟁 배경의 기차 추격전 영화 《제너럴》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오늘날 그의 최고작이자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코미디 영화 중 하나로 칭송받지만, 개봉 당시에는 평론가들의 외면과 대규모 제작비 투입으로 인해 상업적으로 큰 실패를 맛보았다. 이 흥행 실패는 키턴의 경제적 상황을 악화시키고 독립적인 영화 제작 환경에 위기를 가져왔다.

1928

[MGM과의 계약과 독립 영화 시대의 종말]

《제너럴》의 흥행 실패와 연이은 독립 영화들의 부진으로 경제적 압박을 받다가, 대형 영화사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와 계약하며 독립적인 창작 환경을 포기하게 되었다.

1926년 《제너럴》의 흥행 실패 이후, 버스터 키턴은 《대학》(1927), 《스팀보트 빌 주니어》(1928) 등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제작한 독립 영화들 또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했다. 결국 그는 후원자였던 조셉 M. 솅크의 도움을 받아 독립 영화를 제작하던 방식을 포기하고, 거대 스튜디오인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와 계약을 맺었다. 키턴은 훗날 이 계약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고 회고할 만큼, 이는 그의 창작 활동에 치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1929

[발성 영화 시대 적응 실패 및 MGM 해고]

MGM 계약 이후 발성 영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무성 영화 시절의 독자적인 예술성을 잃고 MGM 기획 영화의 조연으로 전락했으며, 결국 《뭐라고! 맥주가 없다고?》를 끝으로 MGM에서 해고되었다.

1928년 MGM과 계약한 직후, 영화계에는 발성 영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버스터 키턴은 이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며 무성 영화 시절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기 어려워졌다. 그는 《할리우드 리뷰 오브 1929》와 같은 MGM의 기획 뮤지컬 영화에서 조연으로 출연했으나,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특히 지미 듀렌트와의 협업은 키턴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결국 《뭐라고! 맥주가 없다고?》를 마지막으로 MGM에서 해고되는 비운을 겪으며 그의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1940

[엘리노 노리스와 결혼]

세 번째 배우자인 엘리노 노리스와 결혼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해로했으며, 그녀의 지지 속에서 말년에 재조명받을 기반을 다졌다.

1940년, 버스터 키턴은 엘리노 노리스와 결혼했다. 그녀는 키턴의 말년까지 곁을 지키며 그의 재기를 돕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에듀케이셔널 픽처스에서 여러 코미디 단편을 만들고, MGM에서 각본가로 활동하며 재능을 이어갔으며, 루실 볼의 TV 및 영화계 진출을 돕는 등 후배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966

[버스터 키턴 사망]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70세를 일기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위대한 무표정'으로 기억되는 영화사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1966년 2월 1일, 버스터 키턴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향년 70세로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신체 코미디와 무표정 연기로 '위대한 무표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이자 혁신적인 감독 중 한 명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사후에도 계속 재평가되며 현대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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