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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를 빛낸 고대 강국! 고구려·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이끌며 고유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특히 뛰어난 문화 예술은 일본 아스카 문화의 토대가 되었죠. 때로는 강성하고 때로는 시련을 겪었지만 찬란한 유산으로 남은 백제의 이야기를 지금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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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C

[백제, 온조왕에 의해 건국!]

고구려 주몽의 아들 온조왕이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했다.

백제는 원래 마한의 소국 중 하나였으나, 온조왕 이래 꾸준히 성장하며 한강 유역에서 세력을 다졌다.

초기 명칭은 십제, 백제국 등 다양하게 불렸다.

371

[평양성 전투, 고구려 왕 전사!]

4세기 근초고왕 시기 백제는 전성기를 맞았다.

가야를 복속하고 황해도까지 진출했으며, 평양성에서 고구려와 전투를 벌여 고구려 국왕 고국원왕을 죽이는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

중국의 동진과 활발한 교류를 맺고, 왜와의 관계를 통해 한반도와 일본 열도 간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기도 했다.

384

[불교, 백제에 최초 전래!]

서역의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백제로 건너와 불교를 전파했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며 1급 국빈으로 대접했고, 이듬해 사원을 짓고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는 등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장려하기 시작했다.

《주서》에 따르면 백제에는 '절과 탑이 매우 많다'고 기록되어 있어 불교 융성 시대를 엿볼 수 있다.

475

[수도 함락! 백제, 웅진 천도]

고구려 장수왕의 강력한 남진 정책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비극을 겪었다.

백제는 수도를 금강변의 웅진(현재 공주)으로 옮기며 크게 위축되었고,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간 내분이 발생하며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신라와 나제 동맹을 체결하기도 했다.

513

[무령왕, 왜국에 박사 파견!]

무령왕은 양직공도에 따라 지방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 통제권을 강화했다.

또한, 백제의 선진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오경박사 단양이를 왜국에 보내는 등 대외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이후 516년에는 고안무도 왜국에 파견되어 백제의 문화를 전해주었다.

538

[성왕, 중흥 선언! 사비 천도!]

성왕은 마한 전체를 제압한 뒤 수도를 부여의 사비성으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며 백제의 중흥을 꾀했다.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시키며 중국 남조와 교류했다.

특히, 왜국에 불교를 전파하여 일본 아스카 문화의 시작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성왕은 긴메이 천황에게 사신과 함께 불상 및 불경을 보내 일본 불교 도입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554

[비극적 패배, 성왕 전사!]

성왕은 고구려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잃었다.

이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하면서 백제는 다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성왕의 죽음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다시 동맹을 맺고 신라와 계속 전쟁을 벌였다.

577

[위덕왕, 일본에 전문가 파견!]

위덕왕은 일본 비다쓰 천황의 요청에 따라 경론, 승려 집단 (율사, 선사, 비구니, 주금사), 불상 제작 기술자, 사찰 건축 목수 등 대규모 전문가들을 왜국에 파견하여 일본 불교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는 백제의 뛰어난 기술력과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절과 부처 등을 만들기 시작했다.

588

[왜국, 백제 기술로 사찰 건설!]

백제는 불사리와 함께 승려 6명, 노반박사, 와박사 4명, 화공 1명 등 사찰 건설에 필요한 최정예 기술자들을 일본에 추가 파견했다.

이는 일본의 건축 및 공예미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백제 기술자들의 뛰어난 역량을 증명한다.

이러한 문화 전파는 소가노 이나메, 소가노 우마코 등 불교 수용에 적극적이던 왜국의 호족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602

[관륵 스님, 일본에 선진 학문 전파!]

백제 고승 관륵이 일본에 건너가 천문, 책력, 지리, 둔갑방술 등 다양한 학문 서적을 전수하고 불교를 전파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백제의 선진 지식을 흡수하며 문화 발전을 이루었다.

일본은 백제에서 온 관륵의 가르침을 통해 서기, 역본, 천문, 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639

[백제 최대 규모 미륵사 창건!]

무왕은 귀족 세력 재편을 꾀하며 익산에 백제 최대 규모의 미륵사를 창건했다.

2009년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는 '왕후께서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었다'는 내용이 있어, 창건 주체에 대한 흥미로운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삼국유사》에는 무왕이 신라 선화공주와 관련하여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사리함 명문 발견으로 새로운 논란이 불거졌다.

660

[백제, 나당연합군에 멸망!]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여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했다.

이는 돌궐-고구려-백제-왜 대 당-신라의 십자 외교 속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의자왕은 659년 4월 신라를 공격하는 등 대외 관계에서 적극적이었으나, 나당동맹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

663

[백강 전투, 부흥군 최후!]

백제 멸망 후 3년간 이어진 부흥 운동은 백강 전투에서 백제와 왜 연합군이 나당연합군에 참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왜는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전술 부족으로 패배했고, 이는 당시 왜의 후진적인 군사력을 보여주는 기록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복신과 부여풍의 내분으로 부흥군 지도부가 분열된 가운데, 신라와 당나라의 증원군이 수륙 협공을 펼쳐 부흥군을 진압했다.

1995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발견!]

1995년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 발견되면서, 성왕이 '남부여'로 국호를 개칭했지만 이후 위덕왕(창왕) 대에 '백제'라는 국호가 다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가 되었다.

이는 성왕의 의도가 위덕왕대에 부정되었음을 시사한다.

사리감에 새겨진 '백제창왕'이라는 표현은 국호 사용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2007

[왕흥사지 사리함 발견!]

왕흥사지 터에서 사리함 몸통이 발견되어, 실제 왕흥사 창건 연도가 기존 《삼국사기》 기록보다 23년 앞선 577년(위덕왕)이었음이 밝혀졌다.

이는 고대 기록의 재해석을 이끄는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다.

사리함 명문에는 '정유년(577년) 2월 15일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내용이 음각되어 있다.

2009

[미륵사지 사리함 명문 발견!]

미륵사지 서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은 '왕후(좌평 사택적덕의 딸)가 가람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어, 《삼국유사》의 선화공주 창건설에 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 발견은 백제사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 명문은 미륵사 창건의 실제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사택씨였음을 강하게 시사하며 역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5

[백제역사유적지구, 유네스코 등재!]

유네스코가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 시대 문화유적지를 묶어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지정했다.

이는 백제 문화유산의 우수성과 미학적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쾌거이다.

백제 문화유산은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백제 금동대향로 등 그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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