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희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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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관료, 파서태수, 유장의 신하, 촉한의 장군, 삼국시대 인물 + 카테고리
방희(龐羲)는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의 인물로, 하남군(河南郡) 출신이다. 초기에는 한나라 조정의 의랑(議郎)으로 재직하다가, 익주목 유언(劉焉)의 손자들을 장안(長安)의 혼란 속에서 구출하여 익주로 데려오는 큰 공을 세웠다. 이 인연으로 유언의 사위가 되어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유언 사후, 유장(劉璋)의 명을 받아 파서태수(巴西太守)로서 낭중(閬中)에 주둔하며 장로(張魯)의 침입을 막는 중책을 수행했다. 한때 권세가 커지며 유장과의 불화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정기(程畿)의 중재로 화해하였다. 214년 유비(劉備)가 익주를 평정하자 투항하여 좌사마(左司馬) 등 요직에 임명되었고, 이후 유비의 한중왕 추대에 동참하는 등 촉한 정권의 초기 안정에 기여했다. 또한 명재상 등지(鄧芝)의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천거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4

[유언의 손자 구출]

장안의 혼란 속에서 유언의 손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람을 모집하여 익주로 데려왔다.
당시 유언의 아들들이 장안에서 이각과 곽사의 난 등에 휘말려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방희가 이들을 무사히 탈출시켰다. 이 공로로 유언과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유언 가문과의 혼인]

손자들을 구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언의 딸과 혼인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유언은 방희의 충성심과 능력을 높이 샀으며, 혈연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를 최측근으로 대우했다. 이는 훗날 그가 유장 정권에서 중책을 맡는 배경이 되었다.

195

[파서태수 임명과 국경 방어]

유장의 명을 받아 파서태수(巴西太守)에 임명되어 낭중(閬中)에 주둔하며 장로의 침입을 막았다.
유장과 장로의 관계가 악화되자, 북쪽 국경의 요충지인 파서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사병을 모집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며 장로의 남하를 저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00

[유장과의 불화와 모함]

세력이 커지자 조위(趙韙) 등의 참소를 받아 유장의 의심을 샀고, 이에 두려움을 느껴 자구책을 도모하려 했다.
사병을 모집하고 한실을 받드는 선비들을 초빙하자 유장은 방희가 딴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했다. 방희 또한 유장의 의심을 감지하고 경계 태세를 강화하며 긴장이 고조되었다.

[정기의 중재와 화해]

방희가 자신의 아들(정기)에게 사병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정기의 충언을 받아들여 유장에게 사죄했다.
정기는 '사병을 모은 것은 반란이 아니라 방어를 위함이었다'며 방희를 변호했고, 방희에게는 진심으로 유장에게 사죄할 것을 권했다. 이를 통해 유장과의 불화가 해소되었다.

214

[유비에게 투항]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성도(成都)를 포위하자, 유장과 함께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입촉 과정에서 성도가 포위되자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문을 열었다. 이는 익주가 유비의 세력권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였다.

[좌사마(左司馬) 임명]

익주를 평정한 유비에 의해 좌사마로 임명되어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다.
유비는 방희가 과거 유언, 유장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음을 고려하여 그를 예우하고 요직에 등용했다. 이는 구 세력을 포섭하기 위한 유비의 인사 정책이었다.

[등지(鄧芝)의 천거]

자신이 발탁했던 등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유비에게 천거하여 중용되게 했다.
방희는 일찍이 등지를 비호하고 그의 능력을 인정했었다. 유비가 익주를 차지한 후, 등지를 유비에게 소개하여 훗날 촉한의 명신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219

[한중왕 추대 상소]

마초, 허정, 제갈량 등과 함께 유비를 한중왕(漢中王)으로 추대하는 상소문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영사마(營司馬)라는 직함으로 상소문에 서명했다. 이는 그가 유비 정권 내에서 여전히 일정한 지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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