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시작된 박정희 정부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수출 주도형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급속한 산업화를 이끌며 한강의 기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1972년 유신헌법 제정으로 대통령의 영구 집권이 가능해지는 등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학생 및 시민들의 저항은 계엄령과 긴급조치로 탄압받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 베트남 파병 등 국제적 관계를 재정립하며 대한민국의 외연을 확장했다. 사회 전반에 국가주의를 강조하고 각종 정치규제법을 동원한 공안 탄압을 자행하며 인권 침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연표
1961
[부랑아 수용 및 강제노역]
5.16 군사정부 시기부터 사회적 정당성 확보를 명분으로 부랑아 대책이 추진되었다.민간 모집에서 서울시의 '수집' 방식으로 강제적인 단속이 이루어졌으며, 자활정착사업장에서 고강도 노동이 강요되었다.국제형사재판소 로마규정에 따르면 이는 불법적인 감금 또는 신체적 자유 박탈에 해당한다.
농지 조성을 목표로 한 자활정착사업장에서는 고강도 노동이 이루어졌으며, 보건사회부 관할 사업이었음에도 정부 지원이나 미국 원조 물자를 취급하며 비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미 50여년이 지났음에도 1960년대 자활정착사업장의 현황은 공식적으로 정리된 바가 없어 조사가 필요한 실정이다.
[과도한 형벌투입]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부터 정권 마지막까지 기형적 사법제도를 바탕으로 과도한 형벌을 투입하여 사회를 통제하고 체제를 강화하려는 일관된 흐름을 보였다.이는 무력 동원 방식이 아닌 사법 시스템을 이용한 정권 지탱 방식이었다.
[5.16 군사정변과 집권]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통해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세워 정권을 장악하며 시작된 정부이다.군사반란 직후 헌법 개정을 통해 양원제 국회가 단원제로, 의원내각제가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는 등 정치 체제의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다.
1962
[대통령 권한대행 시작]
윤보선 대통령의 사퇴로 박정희가 제2공화국의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기 시작했다.이 권한 대행은 다음 해 정식 대통령 취임 전까지 이어졌다.
1963
[대통령 정식 취임]
제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박정희가 정식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했다.이는 1961년 군사정변 이후 군정 통치에서 민정 이양의 형태로 전환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1964
[베트남 파병과 외교 위기]
5.16 군사 정부의 적극적인 중립국 외교 기조를 계승했으나,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기점으로 중립국 외교는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그럼에도 1964년부터 1968년까지 중립국 외교 정책이 포함된 다양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아우토반 시찰, 고속도로 구상]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 방문 중 독일 부흥의 상징인 아우토반을 시찰하고, 한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처음으로 했다.이 구상은 훗날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이어지는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1965
[한강개발 3개년계획]
한강의 종합적인 이용 계획에 따라 대규모 공유 수면 매립 사업이 추진되는 '한강개발 3개년 계획'이 시작되었다.이 계획은 서울의 도시 공간 확장을 목표로 하여, 훗날 강남 개발의 초석을 다지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일본 외무 장관 오히라와 비밀 회담을 통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시도했고, 일본의 경제적 요구 사항을 수락하며 무상 3억 달러, 정부 차관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를 제공받기로 합의했다.이 과정에서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발생했으나 계엄령 선포로 진압되었고, 결국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무효로 인정하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로 받은 일본 정부의 배상금을 활용하여 흥한화학섬유를 설립했으며, 이 공장에서 제조되는 화학섬유 레이온 생산과정에서 이황화탄소로 인한 직업병 문제가 심각했다. 당시 한국 전문가들과 관료들은 이황화탄소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했는데, 이는 서구와 일본에서 1930년대부터 밝혀진 사실과는 대조적이다.
[보훈단체 광복회 설립]
사단법인 광복회가 설립되었다.이 단체는 수훈 애국지사와 그 유족 중 연금을 받는 사람을 회원으로 하여 국가 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다지는 역할을 했다.
1973년 '원호대상자단체설립에관한법률' 개정에 의해 원호처 소관이 되었으며, 연금을 받는 수훈 애국지사와 그 유족이 광복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1967
[경부고속도로 건설 발표]
대통령 선거 유세가 진행 중이던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당시 전문가들과 야당, 여론은 경제 상황이나 차량 대수를 고려할 때 시급한 과제가 아니며 재정적으로도 현명하지 않다고 반대했으나, 박정희는 건설을 강행했다.
1967년 기준 한국의 차량 대수는 6만 대에 불과했고, 도로 포장률은 8%밖에 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국제 부흥 개발 은행(IBRD) 보고서도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의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국토건설단'을 투입하는 등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1971년 말까지는 자가용 승용차가 화물차보다 많아 '관광 도로'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미니스커트 유행과 단속]
가수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미국에서 귀국하면서부터 한국 사회에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그러나 1971년에는 무릎 위 17cm 이상 올라가는 미니스커트가 과도 노출로 단속 대상이 되면서 정부의 엄격한 풍속 규제가 시작되었다.
[소양강댐 건설 착공]
1967년 4월 소양강댐 건설이 착공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토건설단'이 투입되었다.국토건설단 노무자들은 군법을 적용받아 사실상 군대식으로 동원되었으며, 이는 근대화보다는 군대화에 가까운 산업화 과정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68
[국민교육헌장 제정 지시]
대통령이 문교부장관에게 교육장전 제정을 지시했다.여러 차례 수정 작업을 거치며 '자유, 평화, 정의'와 같은 보편적 덕목들이 삭제되고, 국가 그 자체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국가주의 의례 부활]
국민교육헌장 암송과 더불어 일제 말기 전시 총동원 체제기에 성행했던 여러 국가주의 의례가 부활했다.모든 국민은 오후 6시가 되면 부동자세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 했고, 극장에서는 영화 상영 전 기립하여 애국가를 부르는 등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는 통제적 문화가 확산되었다.
[국민교육헌장 선포]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국민교육헌장이 대통령에 의해 선포되었다.1969년부터는 각급 학교 교실, 교과서, 모든 서적, 영화, 음반의 첫 부분에 의무적으로 게재되었고, 학생들에게 암기를 강요하고 체벌까지 가하는 등 강력한 국가주의 교육의 상징이 되었다.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국민교육헌장이 일괄적인 교육을 강조하여 문화 다양성과 개인의 삶을 위축시킨다는 지적이 제기되었고, 1995년 공식 기능 중지, 2003년에는 선포 기념일이 폐지되었다.
1969
[중등교육 평준화 정책]
박정희 정부는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도를 마련하고 고교 평준화 제도를 시행하여 중등 교육기관의 평준화를 추진했다.이는 교육 기회의 균등을 목표로 한 중요한 교육 개혁으로, 이전의 경쟁 위주 입시 제도의 폐해를 줄이고자 했다.
1970
[컬러 TV 방송 계획 유보]
1970년대 초부터 컬러 텔레비전 방송 계획이 여러 차례 제출되었으나, 기자재 수입으로 인한 무역 역조 우려, 시기상조론, 박정희 대통령의 반대, 2차 유류 파동 등의 이유로 번번이 유보되었다.당시 세계 주요 방송사 중 한국만 흑백 방송을 하고 있었으며, 북한은 1974년에 이미 컬러 TV 방송을 시작한 상태였다.
[불국사 대규모 복원 사업]
지금의 통일신라 불국사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국가 주도 첫 대형 복원 사업으로 재건된 부분이 대부분이다.이 과정에서 고증되지 않은 건축물이 세워지고, 구품연지가 발굴되지 않은 채 회랑이 시야를 가리는 등 논란의 여지가 남았다.
1971
[사법파동 발생]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인한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 전태일 분신 등 사회적 저항이 거세지던 시기에 '사법파동'이 발생했다.이는 정부에 대한 각계각층의 저항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였다.
[광주대단지 사건]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인한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 전태일 분신 등 사회적 저항이 거세지던 시기에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했다.이는 정부에 대한 각계각층의 저항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였다.
[대학 시위 진압, 위수령]
야당에 대한 지지가 크게 증가하고 학생들의 정권 비판이 강력하게 전개되자, 정부는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위수령을 발동했다.각 대학에 무장군인을 진주시키고 무기한 휴교 조치와 더불어 대학생들에 대한 제적 처분을 내리며 학생 운동을 탄압했다.
YH 무역 사건에 항의하던 김영삼 의원이 국회 의원직에서 제명되자 부마 민주 항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1972
[유신체제와 중화학공업]
유신체제 수립 이후 대통령에게 무제한적인 권력과 자원이 집중되면서, 경제개발계획 특히 중화학공업화 추진이 강력하게 진행되었다.1981년까지 전체 공업에서 중화학공업 비중을 51%까지 늘린다는 청사진을 그렸으며, 1차 석유파동을 극복하고 급성장했으나 무리한 투자는 훗날 2차 석유파동과 함께 한국 경제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을 야기했다.
중화학공업 추진 과정에서 경제기획원 대신 상공부 관료와 테크노크라트가 주도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핵심 역할을 했다. 1979년 2차 석유파동 발생 시 중화학 제품 수요 급감으로 과잉투자 및 과당경쟁 문제가 불거져 한국 경제가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결과를 낳았다.
[새마을운동과 석면 보급]
1972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석면이 건축 자재 등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세계보건기구가 1급 발암물질로 지정한 석면의 대규모 사용은 2009년 사용 금지 조치 전까지 이어졌으며, 이는 선진국과는 반대되는 정책이었다.
[통일벼 냉해와 농민 책임 전가]
통일벼 재배 실패에 대한 국정 감사가 열렸다.정부는 통일벼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배 면적을 대폭 늘렸으나, 예년보다 낮은 기온으로 냉해를 입었다.농촌진흥청은 수확 감소 사태가 종자 문제가 아닌 농민의 특성 숙지 부족 탓이라며 농민들에게 각종 교육을 강요하여 책임을 전가했다.
냉해로 이삭이 제대로 패지 않아 추수가 늦어지면서 서리와 우박 피해까지 겹쳤다. 학계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높아지고 농학자들조차 확대 보급에 부정적 의견을 내자, 농림부는 '품종 선택은 농민의 자유 의사'라며 특정 품종 권장 시 문책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일본에서도 한국의 식량 사정 불안에 대한 우려 의견이 전달되기도 했다.
[유신헌법 확정]
10월 유신에 따라 국민투표를 거쳐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 국회 해산권, 국회의원 3분의 1 추천권 등을 부여하며 삼권분립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국회 해산, 비상계엄 선포]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선언을 통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를 명령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이는 헌법적 근거가 없는 초법적인 행위로, 이후 '한국 민주주의 최대 암흑기'로 평가받는 유신체제를 여는 서막이 되었다.
이 사건은 1972년 12월 국민투표를 거쳐 유신헌법이 확정되며 더욱 공고해졌다.
1973
[지상파 TV 중간광고 금지]
1973년부터 지상파 TV방송에서 중간광고가 금지되었다.이는 유료방송과 동일한 수준의 중간광고를 허용하지 않는 정책으로, 방송 규제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1975
[불교 호국승군단 발족]
베트남전 패전 선언 후, 조계종 총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고 지휘관의 검열을 받는 '호국승군단'을 발족했다.이는 베트남 지엠 정권의 불교 탄압으로 인한 종말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불교가 정권과의 협력적 관계를 통해 호국적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사건이다.
[가봉 봉고 대통령 방한]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가봉의 오마르 봉고 대통령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수십만 학생과 시민들이 동원된 대대적인 환영 행사와 함께 최고의 국빈 대우를 받았으며, 미니버스의 대명사가 된 '봉고'라는 이름도 이때 지어졌다.가봉은 비동맹 중립 노선을 취하던 아프리카 독립국가였다.
1976
[비밀 행정수도 이전 추진]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 문제를 염두에 두고 충남 공주 지역으로 임시 행정수도 건설 작업을 추진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했다.1978년 충남 장기면이 후보지로 잠정 선정되어 '백지계획' 최종보고서까지 완료되었으나, 박 대통령 서거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천주교 복지단체 꽃동네 설립]
충청북도 음성군에 천주교 사회복지단체 '꽃동네'가 설립되었다.현재는 국내에서 가장 방대한 시설과 규모로 극빈자와 장애인들에게 생활 환경을 제공하고 있으나, 장애인 인권 단체에서는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제19조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최덕신 천도교령 망명]
최덕신 전 천도교령이 반정부 대열에 가담할 것을 선언한 후 미국으로 망명했다.이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적인 국정 운영에 대한 종교계의 저항과 그에 따른 압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977
[부가가치세 최초 시행]
영업세와 물품세 등을 통합하여 일반 소비세인 부가가치세와 특별소비세 체제를 1977년 7월부터 최초로 시행하였습니다. 부가가치세 최초 시행에 따른 첫 예정신고는 1977년 9월에 이루어졌습니다.
[고구려 유적 파괴 논란]
서울 광진구 태봉이라고 불리는 구릉 정상부의 구의동 고구려 보루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으나, 화양지구 택지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현재는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다.태봉 구릉이 한양아파트로 바뀌면서 70년대 개발의 미명 아래 귀중한 역사 유적이 파괴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참고로, 잠실 대교 북단에 위치한 또 다른 구의동 유적은 1976년에 발굴되었는데, 발굴 조사 당시에도 군사 시설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백제 고분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던 유적이다.
1978
[세종문화회관 개관]
화재로 다시 건설 중이던 서울시 시민회관이 세종문화회관으로 개칭되고 4월에 개관했다.세종문화회관은 1988년 예술의 전당 건립 전까지 한국 문화예술의 독보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다.
1979
[공안탄압, 1만명 이상 검거]
박정희 정부는 집권 기간 동안 국가보안법, 반공법, 정치활동정화법, 사회안전법, 집시법, 긴급조치 등 각종 정치규제법을 활용하여 총 11,384명에 달하는 인원을 검거하는 등 대규모 공안탄압을 자행했다.특히 1962년 정치활동정화법으로 3038명, 1976년 긴급조치9호로 198명이 검거되는 등 정권 유지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강력히 탄압했다.
총 검거 인원: 국가보안법 1968명, 반공법 4167명, 정치활동정화법 3849명, 사회안전법 19명, 집시법 625명, 비상사태 특별조치법 15명, 국가보위 특별조치법 15명, 긴급조치9호 726명.
[한산대첩기념비 제작 지시]
박정희 대통령이 임진왜란 한산대첩을 기념하는 한산대첩기념비 제작을 지시했다.기념비는 완공되었으나, 박 대통령의 서거로 제막식은 치러지지 못했다.이 제막식은 34년 후인 2013년 박근혜 정부 시기에 한산도에서 열렸다.
[10.26 사건과 유신 붕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하며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정부와 유신체제가 붕괴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이는 대한민국의 정치사에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군사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