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토리 에르제베트
연표
1560
[출생]
헝가리 왕국의 유력 귀족 가문인 바토리 가문의 에체드(Ecsed) 지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심각한 감정 기복과 발작(간질로 추정) 증세를 보였습니다.
외삼촌은 훗날 폴란드 왕이 되는 스테판 바토리였을 정도로 가문의 위세가 대단했음.
1575
[페렌츠 나다슈디와 결혼]
'검은 영주(Black Beg)'라 불리는 무장 페렌츠 나다슈디와 결혼했습니다. 바토리 가문의 위상이 더 높았기 때문에 그녀는 성을 바꾸지 않고 바토리 성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남편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지자, 바토리는 광활한 영지를 직접 관리하며 스트레스를 하인 학대로 풀기 시작함.
1585
[가학 행위의 시작 (추정)]
이 시기부터 체이테 성(Csejte Castle) 등에서 하녀들에 대한 고문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늘로 찌르기, 달궈진 인두로 지지기, 한겨울에 물을 뿌려 얼려 죽이기 등 잔혹한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초기에는 규율을 잡는다는 명목의 체벌이었으나 점차 사디즘적 유희로 변질됨.
1604
[남편 사망과 범죄의 에스컬레이션]
남편 페렌츠 나다슈디가 전쟁터에서 얻은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미망인이 되어 제어할 사람이 없어진 바토리는 범죄 대상을 평민 하녀에서 '몰락한 하급 귀족의 딸'들로 확대했습니다.
예절 교육을 시켜주겠다며 귀족 소녀들을 데려와 살해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 됨. 귀족을 건드린 것은 왕실이 개입할 명분을 줌.
1610
[소문의 확산과 수사 착수]
체이테 성 근처에서 시신이 자주 발견되고, 귀족 소녀들이 실종된다는 소문이 헝가리 조정에 퍼졌습니다. 마티아스 2세 황제는 헝가리 부왕(Palatine)인 기요르기 투르조(György Thurzó) 백작에게 수사를 명령했습니다.
투르조 백작은 바토리의 사촌이자 남편의 전우였으나, 왕명을 받고 조사에 착수함.
[체이테 성 급습 및 체포]
투르조 백작이 이끄는 군대가 예고 없이 체이테 성을 급습했습니다. 현장에서는 끔찍하게 고문당해 죽은 시신과 빈사 상태의 소녀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바토리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자신의 성에 구금됨.
1611
[감옥이 된 침실 (종신 유폐)]
바토리는 재판 없이 체이테 성 내부에 가택 연금 형태로 구금되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은 극히 제한되었으며, 이동과 사회적 활동이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약 3년 반 동안 빛이 들지 않는 독방에서 홀로 지냄.
[공범 재판과 처형]
바토리의 범죄를 도운 유모와 하인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들은 고문 끝에 '바토리가 600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하인 피츠코, 일로나 요, 도로티아 셴테스는 손가락이 뜯끼고 화형당하거나 참수됨. 그러나 정작 주범인 바토리는 '귀족은 재판받지 않는다'는 특권과 가문의 위세 덕분에 재판 없이 종신 연금형에 처해짐.
1614
초기에는 체이테 교회에 묻혔으나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에체드 가문의 묘지로 이장됨.
1729
['피의 목욕' 전설의 탄생]
예수회 신부 라슬로 투로치(László Turóczi)가 쓴 책에서 '바토리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처녀의 피로 목욕을 했다'는 내용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당대 기록에는 없는 내용이었으나, 이 자극적인 이야기가 와전되면서 오늘날의 '흡혈귀 백작부인' 이미지가 굳어짐.
2020
[현대 역사학계의 재평가 (정치적 음모론)]
현대 헝가리 사학계 일각에서는 그녀가 합스부르크 왕가와 투르조 백작의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바토리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노린 왕가가 빚을 갚지 않기 위해 그녀를 마녀로 몰아 숙청했다는 설입니다.
그녀가 종교적, 의학적 지식이 뛰어났던 것이 마녀로 오인받았을 가능성과, 실제 재판이 열리지 않아 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한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