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어 04 레버쿠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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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1904년 제약회사 바이어(Bayer)의 노동자들이 설립한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공장 노동자 팀(Werkself)으로 시작해 독일 분데스리가의 신흥 강호로 성장한 굴지의 구단입니다. 1979년 1부 리그 승격 이후 단 한 번도 강등되지 않는 꾸준함을 보여주었으며, 1988년 한국의 전설적인 공격수 차범근의 맹활약으로 구단 사상 최초로 UEFA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이후 손흥민 등 뛰어난 아시아 선수들의 등용문이자 챔피언스리그 단골 손님으로 활약했고, 2023/24 시즌에는 사비 알론소 감독 아래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초의 무패 우승을 달성하며 오랜 '만년 2인자(비테쿠젠)'의 설움을 씻어내고 세계 최정상급 명문 구단으로 비상했습니다.
연표
1903
1903
[스포츠 클럽 설립 청원]
제약회사 바이어(Bayer) 그룹의 노동자 170명이 사내 체육 활동을 위해 자체적인 스포츠 클럽을 창단해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사측에 보냈습니다. 이는 훗날 거대한 프로 축구단이 탄생하게 되는 역사적인 첫걸음이 되었습니다.빌헬름 하우실트(Wilhelm Hauschild)의 주도하에 작성된 이 서명 편지는 공장 경영진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경영진이 노동자들의 체력 증진과 유대감 강화를 위한 이 요청을 전격 수용하면서 구단 태동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1904
1904
[TuS 04 공식 창립]
사측의 지원에 힘입어 레버쿠젠 지역에 'TuS 04(Turn- und Spielverein 1904)'라는 이름의 체조 및 스포츠 클럽이 공식적으로 창립되었습니다. 바이어 공장의 복지 이사가 초대 회장직을 맡으며 공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출발했습니다.구단의 초대 회장으로는 1903년부터 바이어 공장의 복지 책임자로 일하던 퇴역 소령 알베르트 만델(Albert Mandel)이 취임했습니다.
창립 초기에는 축구보다는 체조를 비롯한 일반적인 노동자 생활 체육이 중심이 된 종합 클럽의 형태였습니다.
1907
1907
[축구 부서의 공식 출범]
클럽 내에 공식적으로 축구 부서(Fußballabteilung)가 신설되며 본격적인 축구팀의 기나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구단의 상징인 검은색과 붉은색이 공식 팀 컬러로 지정되며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비스도르프(Wiesdorf) 지역의 당시 쿠르테코텐슈트라세(현 티탄슈트라세)에 위치한 '비스도르퍼 호프(Wiesdorfer Hof)'라는 술집에서 축구부 창단 모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정식 홈구장이 없어 여러 지역의 공터를 전전하며 경기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1914
1914
[뒨 플라츠 경기장 정착]
오랜 기간 정식 경기장 없이 떠돌던 축구팀이 마침내 자신들만의 첫 번째 홈구장을 확보하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기장은 선수들에게 훈련에 매진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했습니다.콜로니 2(Kolonie II) 지역의 서쪽에 위치한 이 경기장은 지역 명칭을 따 '뒨 플라츠(Dhünn-Platz)'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바이어 소속 축구 선수들의 소중한 요람이자 초창기 성장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1928
1928
[SV 바이어 04 결성]
독일 체조 연맹의 정책으로 인해 축구부가 체조 클럽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축구 구단을 새롭게 결성했습니다. 이로써 'SV 바이어 04 레버쿠젠(SVB)'이라는 역사적인 이름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당시 체조 연맹이 회원들에게 체조 연맹과 다른 스포츠 연맹 중 하나를 택일하도록 강요하자, 독일 축구 협회(DFB)에 남고자 했던 축구 선수들이 TuS 04를 탈퇴하여 'FV 04 레버쿠젠'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1928년 권투 등 다른 스포츠 클럽과 다시 병합하여 'SV 바이어 04 레버쿠젠'이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새 출발을 알렸습니다.
1936
1936
[베치르크스크라세 승격과 십자가 마크]
구단이 3, 4부 리그를 전전하다 마침내 당시 가울리가(Gauligen) 산하 2부 리그 격인 베치르크스크라세(Bezirksklasse)로 승격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특히 이 승격 경기에서 선수들은 사상 최초로 유니폼 가슴에 '바이어 십자가' 로고를 달고 뛰었습니다.졸링겐 95(Solingen 95)를 상대로 치러진 승격 결정전에서 기업을 상징하는 거대한 바이어 십자가(Bayer-Kreuz) 마크가 역사상 처음으로 유니폼에 새겨졌습니다.
이는 팀이 단순한 동호회를 넘어 기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공장 노동자 팀(Werkself)'이라는 정체성을 대중에게 널리 각인시킨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1949
1949
[라인 지역 리그 제패]
라인 지역 리그(Rheinbezirksstaffel 1)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전후 서독 축구계에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비록 최상위 리그 승격에는 실패했으나 구단의 훌륭한 잠재력을 만천하에 증명했습니다.승격을 놓고 벌어진 1. FC 쾰른과의 첫 번째 지역 더비 결승전에서 패배하며 아쉽게도 오베르리가(1부 리그) 직행 티켓을 놓쳤습니다.
이후 오베르리가 확장으로 얻은 두 번째 승격 플레이오프 기회에서도 강호 FC 샬케 04에게 패배하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습니다.
1951
1951
[최상위 리그 오베르리가 승격]
새로 창설된 2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당시 서독의 최상위 지역 리그 중 하나인 '오베르리가 베스트(Oberliga West)'로 마침내 승격했습니다. 이를 통해 본격적으로 서독의 굵직한 주요 클럽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무대에 올랐습니다.리하르트 요프(Richard Job), 테오 키르히베르크(Theo Kirchberg), 주장 한스 프뢰멜(Hans Frömmel) 등이 팀의 중추로 맹활약하며 승격을 일궈냈습니다.
승격 직후부터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지역 라이벌 1. FC 쾰른을 상대로 5승 5무 2패의 우위를 점하며 이른바 '쾰른의 천적'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습니다.
1956
1956
[주포의 부상과 2부 리그 강등]
모기업의 스포츠 클럽이 다른 종목에서는 연일 독일 정상에 오르며 겹경사를 맞았으나, 축구부는 뜻밖에도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치명적인 아픔을 겪었습니다. 핵심 공격수의 이른 부상 은퇴가 팀 전체의 치명적인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57경기에서 44골을 폭발시키던 핵심 골잡이 프리츠 티데(Fritz Tiede)가 심각한 부상으로 갑작스럽게 은퇴하면서 팀의 공격력에 심각한 구멍이 생겼습니다.
우도 라텍(Udo Lattek) 등의 공격수를 수혈했으나 공백을 메우지 못했고, 제프 크레치만(Sepp Kretschmann) 감독 체제에서 결국 15위로 추락하며 강등의 쓴맛을 보았습니다.
1962
1962
[오베르리가 재승격 달성]
2부 리그에서의 절치부심 끝에 다시 한번 압도적인 경기력을 뽐내며 최상위 리그인 오베르리가 베스트로 복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가올 전국구 프로 리그(분데스리가) 창설을 코앞에 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일궈낸 값진 성과였습니다.1961/62 시즌 2부 리그에서 폭발적인 득점력을 과시하며 리그 1위를 차지하여 1부 리그 직행 티켓을 거머쥐었습니다.
1962/63 시즌 오베르리가에 복귀한 후, 분데스리가 창립 멤버로 선택될 팀들을 상대로 10경기 중 단 1패만을 기록하는 끈적한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963
1963
[레기오날리가 베스트 편입]
독일 전역을 아우르는 단일 1부 리그인 '분데스리가'가 성대하게 창설되었으나, 레버쿠젠은 아쉽게도 창립 멤버로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새롭게 개편된 2부 리그 격인 레기오날리가 베스트(Regionalliga West)로 밀려나 험난한 새 출발을 해야 했습니다.오베르리가 베스트 소속팀 중 쾰른, 도르트문트, 샬케 04 등 흥행력과 성적을 갖춘 팀들이 분데스리가로 향했습니다.
2부 리그로 밀려난 여파로 국가대표급 골키퍼 만프레트 망글리츠(Manfred Manglitz)가 팀을 떠나는 등 심각한 전력 누수를 겪어야 했습니다.
1968
1968
[레기오날리가 첫 우승]
2부 리그인 레기오날리가 베스트에서 구단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리며 분데스리가 진출의 희망을 부풀렸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험난한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간발의 차이로 고배를 마시고 말았습니다.정규 시즌 동안 압도적인 공수 밸런스를 선보이며 1위에 올랐으나, 분데스리가 승격을 위한 진출 라운드에서 뒷심 부족으로 조 2위에 머물렀습니다.
결국 조 1위를 차지한 키커스 오펜바흐(Kickers Offenbach)에게 1부 리그 승격 티켓을 뼈아프게 내어주고 말았습니다.
1973
1973
[3부 리그로의 뼈아픈 추락]
승격 실패 이후 수년간 2부 리그 하위권을 맴돌며 경쟁력을 잃어가던 끝에, 결국 3부 리그(Verbandsliga Mittelrhein)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구단 역사상 가장 어둡고 험난했던 암흑기의 시작이었습니다.1960년대 후반의 폭발적인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매 시즌 수비 불안에 시달리다 결국 1972/73 시즌 리그 17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강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뼈아픈 강등은 훗날 클럽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정비하고 새롭게 도약하는 역설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5
1975
[분데스리가 2부 극적 승격]
3부 리그에서 두 시즌 연속 우승을 휩쓸며 마침내 '2. 분데스리가(2부 리그) 북부 그룹'으로 다시 승격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복잡한 규정과 치열한 플레이오프를 극복하고 일궈낸 매우 값진 성과였습니다.직전 시즌 우승을 하고도 대회 규정상 승격하지 못한 설움을 딛고, 이듬해 다시 우승하며 당당히 승격 플레이오프 자격을 쟁취했습니다.
아르미니아 하노버와 우니온 졸링겐을 상대로 한 플레이오프에서 홈경기 2승을 챙기며 5월에 마침내 승격의 감격을 누렸습니다.
1979
1979
[대망의 분데스리가 승격]
2. 분데스리가 북부 그룹에서 압도적인 우승을 거머쥐며 창단 이래 최초로 최상위 리그인 '1. 분데스리가' 무대를 밟게 되었습니다. 지역의 작은 공장 노동자 팀이 거대한 독일 프로 축구의 메인 스트림으로 진입하는 역사적인 변곡점이었습니다.빌리베르트 크레머(Willibert Kremer) 감독의 지휘 아래 시즌 초반인 3라운드부터 굳건하게 선두를 질주하며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위르겐 겔스도르프(Jürgen Gelsdorf)와 페터 헤르만(Peter Hermann) 등 승격의 1등 공신들은 훗날 지도자로서도 구단에 막대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1980
1980
[차범근 부상과 기묘한 팬 우정]
레버쿠젠 선수의 거친 파울로 인해 당대 최고의 공격수인 프랑크푸르트의 차범근 선수가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불미스러운 사건은 훗날 레버쿠젠과 다른 지역 팬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라는 기묘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레버쿠젠의 수비수 위르겐 겔스도르프의 거친 태클로 차범근이 병원에 입원하자, 격분한 프랑크푸르트 팬들이 레버쿠젠 팬들에게 거센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이에 프랑크푸르트의 앙숙 구단인 오펜바흐 팬들이 자신들의 구장을 찾은 레버쿠젠 팬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었고, 이를 계기로 두 구단 팬들 간의 역사적인 '팬 우정(Fanfreundschaft)'이 탄생했습니다.
1982
1982
[극적인 분데스리가 강등 위기 탈출]
1부 리그 승격 이후 험난한 하위권 경쟁 끝에 치러진 생존 플레이오프에서 간신히 승리하며 1부 리그 잔류에 극적으로 성공했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것은 이후 구단이 강력한 우승 후보로 성장할 수 있는 생명줄이 되었습니다.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강등 플레이오프 제도에서 2부 리그의 키커스 오펜바흐를 상대로 힘겨운 승부를 펼친 끝에 간신히 잔류를 확정 지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뜨거운 우정을 나눴던 오펜바흐 팬들의 팀을 직접 무너뜨려 2부 리그에 머물게 한 얄궂은 운명의 대결이었습니다.
1984
1984
[두 바이어 클럽의 완전한 통합]
과거 이념과 종목 갈등으로 인해 분리되었던 바이어 공장의 두 대형 스포츠 클럽이 무려 반세기 만에 하나로 완전히 통합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흩어졌던 자본과 응집력이 하나로 결집되며 거대한 메가 스포츠 클럽으로 도약했습니다.기존의 체조 중심 클럽인 TuS 04와 축구 중심의 SV 바이어 04가 합쳐져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e. V.'라는 공식 명칭으로 새롭게 출범했습니다.
통합 클럽의 공식 색상은 빨강과 하양으로 정해졌으나, 프로 축구 부서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을 존중하여 기존의 붉은색과 검은색 유니폼을 계속 고수했습니다.
1986
1986
[사상 첫 유럽 대항전 진출과 차범근]
에리히 리벡(Erich Ribbeck) 감독의 뛰어난 지도력 아래 리그 6위를 기록하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꿈의 무대인 UEFA컵(유럽 대항전) 진출 티켓을 따냈습니다. 특히 아시아 출신의 최고 스타 차범근의 폭발적인 맹활약이 이 놀라운 성과의 핵심 원동력이 되었습니다.만년 강등권 언저리를 맴돌던 팀이 드디어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오며 본격적으로 분데스리가 강팀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한국인 공격수 차범근(Cha Bum-kun)은 특유의 파괴력으로 팀의 상승세를 주도하며 역사적인 유럽 무대 진출의 가장 결정적인 공로자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1988
1988
[기적의 UEFA컵 제패]
구단 역사상 최초로 국제 메이저 대회인 UEFA컵 결승에 올라, 절망적인 점수 차를 뒤집는 기적 같은 대역전극으로 영광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습니다. 특히 차범근 선수가 결승전에서 터뜨린 천금 같은 동점골은 구단 역사의 가장 찬란한 명장면으로 남았습니다.스페인의 에스파뇰과의 결승 1차전 원정 경기에서 0-3으로 참패하며 패색이 짙었으나, 2차전 홈경기에서 무서운 집중력으로 3골을 몰아치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습니다.
승부차기 끝에 3-2로 승리하며 대역전극을 완성했고, 전 세계에 레버쿠젠이라는 이름과 핵심 선수였던 차범근의 위상을 강력하게 각인시켰습니다.
1989
1989
[분데스리가 최초 울트라스 결성]
국제 대회 우승으로 한껏 고무된 구단의 열성 서포터들이 독일 분데스리가 구단 중 최초로 '울트라스(Ultras)' 그룹을 조직하며 응원 문화의 새 장을 열었습니다. 성적 향상과 더불어 팬덤의 강력한 결속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비록 전통적인 대도시를 연고로 한 거대 구단들에 비해 전체 팬의 규모는 작았으나, 조직력과 팀에 대한 충성도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강력하고 주도적인 팬덤은 구단이 단순한 '공장 노동자 팀'이라는 인식을 벗어나 지역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93
1993
[창단 첫 DFB-포칼 우승]
독일 전역의 축구 클럽이 총출동하는 가장 권위 있는 FA컵 대회인 DFB-포칼에서 사상 처음으로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이로써 유럽 대항전에 이어 자국 내 메이저 컵대회 트로피까지 섭렵하며 명실상부한 강팀임을 입증했습니다.결승전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올라온 헤르타 BSC의 아마추어 팀을 상대로 1-0의 진땀 승부를 거두며 감격적인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습니다.
울프 키르스텐(Ulf Kirsten)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며 구단의 1990년대 초반 전성기를 화려하게 수놓았습니다.
1996
1996
[명장 다움 부임과 매력적인 돌풍]
크리스토프 다움(Christoph Daum) 감독이 지휘봉을 잡으며 매우 빠르고 공격적인 전술로 팀의 체질을 완벽하게 탈바꿈시켰습니다. 이때부터 레버쿠젠은 매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 경쟁을 펼치는 가장 위협적인 강호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다움 감독 체제에서 구단은 미하엘 발락 등 전도유망한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스타로 키워내며 스쿼드의 질을 대폭 향상시켰습니다.
그러나 1997년부터 2000년 사이에 연거푸 뼈아픈 리그 준우승에 머물며 축구 팬들 사이에서 '만년 2인자(Vizekusen)'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붙기 시작한 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1999
1999
[프로 축구 유한회사(GmbH) 독립]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구단의 상업적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종합 스포츠 클럽에서 축구 부문만을 완전히 분리하여 별도의 독립 법인(GmbH)을 설립했습니다. 거대 자본이 유입되는 현대 축구 산업에 발맞춘 필수적이고 선구적인 체질 개선 작업이었습니다.독립된 법인의 명칭은 'Bayer 04 Leverkusen Fußball GmbH'로, 모기업인 바이어 AG(Bayer AG)가 지분 100%를 인수하는 형태로 공식 출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독일 축구의 '50+1 규정' 예외 조항(Lex Leverkusen)을 인정받으며 모기업의 전폭적이고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합법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2000
2000
[크리스토프 다움 감독 사임]
팀을 분데스리가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리며 명장으로 칭송받던 크리스토프 다움 감독이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인해 전격 사임했습니다. 이로 인해 루디 푈러가 임시 감독을 맡는 등 벤치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분데스리가 준우승을 연달아 이끌며 국가대표팀 감독 부임까지 내정되어 있었으나, 사적인 논란이 불거지며 불명예스럽게 팀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후 클라우스 토프묄러(Klaus Toppmöller) 감독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으며 팀을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 준비를 하게 됩니다.
2002
2002
[비테쿠젠(Vizekusen)의 탄생]
미하엘 발락 등 황금세대를 앞세워 분데스리가, DFB-포칼, 챔피언스리그 모두 결승 혹은 우승 직전까지 갔으나 모두 준우승에 머무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이 잔혹한 결과로 인해 '만년 2등'을 뜻하는 '비테쿠젠'이라는 뼈아픈 별명이 생겼습니다.리그에서는 막판에 도르트문트에 역전 우승을 내주었고, 포칼 결승에서는 샬케 04에 패배했으며,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에 1-2로 패배하여 초유의 '트리플 러너업(Treble Runner-up)'을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결과는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레버쿠젠 구단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도 씁쓸한 시즌으로 남아있습니다.
2003
2003
[충격적인 강등 위기와 잔류]
트레블 준우승의 영광이 무색하게, 불과 1년 만에 극심한 부진에 빠지며 리그 15위까지 추락하여 강등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감독의 긴급 소방수 투입 끝에 간신히 1부 리그 생존을 확정 지었습니다.주축 선수들의 이탈과 후유증으로 인해 토프묄러 감독이 시즌 도중 경질되는 최악의 부진을 겪었습니다.
시즌 막판에 극적으로 잔류에 성공하며 간신히 1부 리그의 명맥을 이어나갔고, 이후 다시 팀을 재건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2009
2009
[DFB-포칼 준우승]
브루노 라바디아 감독의 지휘 아래 DFB-포칼 결승에 진출했으나 다시 한번 우승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이는 구단의 '준우승 징크스'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상기시킨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베르더 브레멘과의 결승전에서 0-1로 패배하며 통산 3번째 포칼 결승 패배(2002, 2009, 2020) 중 두 번째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유프 하인케스(Jupp Heynckes) 감독이 새롭게 부임하며 팀의 조직력을 다시 최상위권으로 정비하게 됩니다.
2011
2011
[다시 돌아온 리그 준우승]
유프 하인케스 감독과 아르투로 비달 등의 맹활약으로 또다시 분데스리가 2위(준우승)를 차지했습니다.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를 제외하고 가장 꾸준히 상위권에 오르는 팀임을 입증했습니다.1997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5번의 리그 준우승을 기록하며 '비테쿠젠' 이미지가 더욱 굳어졌으나,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 시즌 직후 하인케스 감독이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나고 로빈 두트(Robin Dutt) 감독이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2012
2012
[바르셀로나전 1-7 참패]
챔피언스리그 16강 원정 경기에서 FC 바르셀로나를 만나 리오넬 메시에게만 5골을 헌납하며 1-7이라는 기록적인 대패를 당했습니다. 구단 역사상 유럽 대항전 최다 점수 차 패배라는 치욕스러운 기록을 남겼습니다.이 경기로 인해 합산 스코어 2-10으로 8강 진출이 좌절되었으며, 당시 팀의 수비 라인이 완전히 붕괴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 충격적인 결과와 연이은 리그 4연패 부진으로 로빈 두트 감독은 경질되고, 사미 히피아(Sami Hyypiä)가 임시로 팀을 맡게 됩니다.
2013
2013
[한국의 에이스 손흥민 영입]
함부르크 SV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던 대한민국의 공격수 손흥민을 전격 영입했습니다. 차범근 이후 오랜만에 한국 선수가 팀의 핵심 공격수로 합류하며 아시아 마케팅과 전력 강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습니다.손흥민은 당시 구단 역대 최고 이적료(약 1000만 유로) 기록을 경신하며 등번호 7번을 부여받고 입단했습니다.
첫 시즌부터 슈테판 키슬링과 함께 팀의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폭발적인 득점력을 선보여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2013
[수뇌부 교체 및 미하엘 샤데 부임]
오랜 기간 구단의 경영을 책임졌던 볼프강 홀츠호이저(Wolfgang Holzhäuser)가 은퇴하고, 바이어 AG의 홍보 책임자 출신인 미하엘 샤데가 새로운 CEO로 부임했습니다. 모기업과의 소통과 구단의 글로벌 마케팅 역량이 한층 강화되었습니다.미하엘 샤데(Michael Schade)는 이미 2007년부터 구단 주주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레버쿠젠의 내부 사정에 밝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부임 이후 손흥민 등 스타 선수들을 활용한 아시아 투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브랜드 가치를 세계적으로 넓혔습니다.
2014
2014
[2군 팀(U-23) 전격 해체]
4부 리그에 소속되어 있던 구단의 2군 팀을 공식적으로 해체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린 유망주들이 하부 리그를 거치는 것보다, 타 구단 임대를 통해 1군 실전 경험을 쌓는 것이 유리하다는 전략적 판단이었습니다.독일 축구 연맹(DFB)의 라이선스 규정 변경으로 인해 2군 운영이 더 이상 의무가 아니게 되면서 구단 수뇌부가 발 빠르게 효율화를 단행한 것입니다.
대신 1군과 U-19 유소년팀 간의 연계를 강화하고 임대 시스템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유스 육성 정책을 전면 개편했습니다.
2014
[분데스리가 역대 최단 시간 골]
새로 부임한 로저 슈미트(Roger Schmidt) 감독의 데뷔전에서 윙어 카림 벨라라비가 경기 시작 단 9초 만에 득점하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는 레버쿠젠의 강력한 '게겐프레싱(전방 압박)' 전술이 낳은 짜릿한 결과물이었습니다.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원정 경기에서 터진 이 골은 분데스리가 역사상 가장 빨리 터진 최단 시간 득점 기록이었습니다.
훗날 2015년 호펜하임 소속의 케빈 폴란트가 이 9초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으나(폴란트 역시 훗날 레버쿠젠 입단), 여전히 리그 역사에 남은 압도적인 명장면입니다.
2015
2015
[에이스 손흥민의 잉글랜드 진출]
2년 동안 팀의 주축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전성기를 열었던 손흥민 선수가 막대한 이적료를 안겨주며 잉글랜드 토트넘 홋스퍼로 떠났습니다. 구단은 훌륭한 스카우팅과 선수 육성 능력을 증명함과 동시에 핵심 공격수를 잃는 아쉬움을 겪었습니다.손흥민은 레버쿠젠 소속으로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맹활약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단단히 다졌습니다.
당시 구단 역사상 최고 수준의 방출 수익을 기록하며, 레버쿠젠 특유의 성공적인 '셀링 클럽(육성 후 이적)' 모델의 대표적 성공 사례가 되었습니다.
2017
2017
[로저 슈미트 감독 경질]
공격적인 압박 축구로 팬들을 매료시켰던 로저 슈미트 감독이 수비 불안과 성적 부진의 책임을 안고 전격 경질되었습니다. 하위권으로 처지며 강등의 위협까지 느끼던 구단은 분위기 쇄신이 시급했습니다.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에서 수비가 붕괴하며 2-6으로 대패한 것이 직접적인 경질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후 타이푼 코르쿠트 임시 체제를 거쳐 시즌을 마무리했고, 간신히 강등을 면하는 아슬아슬한 시즌을 보냈습니다.
2019
2019
[전반 36분 만에 6골 대폭발]
페터 보츠(Peter Bosz) 감독 지휘 아래 치러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전에서 경기 시작 단 36분 만에 무려 6골을 폭발시키는 무시무시한 화력을 과시했습니다. 구단의 압도적인 공격 본능이 분데스리가 역사에 남긴 경이로운 기록입니다.6-1 대승으로 끝난 이 경기에서 세운 '전반전 최다 득점 기록'은 1978년 글라트바흐가 세웠던 기록을 시간상으로 2분이나 단축한 신기록이었습니다.
보츠 감독 특유의 극단적인 점유율 및 공격 전술이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간 시즌 최고의 명장면이었습니다.
2020
2020
[DFB-포칼 세 번째 준우승]
에이스 카이 하베르츠의 맹활약을 앞세워 또다시 DFB-포칼 결승전 무대를 밟았으나, 절대 강자 바이에른 뮌헨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패배했습니다. 구단 역사상 세 번째 포칼 준우승이라는 씁쓸한 기록이 추가되었습니다.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에게 2-4로 패배하며 또다시 목전에서 트로피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무관중으로 치러진 이 결승전 직후, 팀의 성골 유스이자 에이스였던 하베르츠는 첼시로 이적하며 팀에 막대한 이적료를 남겼습니다.
2022
2022
[사비 알론소 감독 파격 선임]
시즌 초반 강등권인 17위까지 추락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세계적인 스타 플레이어 출신 사비 알론소를 새 사령탑으로 파격 선임했습니다. 이 과감한 선택은 훗날 클럽의 역사를 통째로 뒤바꾸는 최고의 '신의 한 수'가 되었습니다.제라르도 세오아네(Gerardo Seoane) 감독 체제에서 최악의 부진을 겪자 이사회가 내린 파격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알론소 감독 부임 이후 팀은 극적으로 반등하여 유로파리그 4강과 리그 6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대반격의 서막을 올렸습니다.
2022
[시몬 롤페스 단장 취임]
레버쿠젠의 전설적인 미드필더 출신이자 스포팅 디렉터로 훌륭히 일해오던 시몬 롤페스가 루디 푈러의 뒤를 이어 구단의 최고 스포츠 경영자(단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데이터에 기반한 혁신적인 스카우팅 시스템이 더욱 고도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2018년부터 스포팅 디렉터로 활동하며 플로리안 비르츠 등 세계적인 유망주 영입을 주도해 온 그의 경영 능력을 구단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롤페스의 취임은 구단이 젊고 트렌디한 현대 축구의 리더십 체제로 완벽하게 전환했음을 상징합니다.
2024
2024
[120년 만의 분데스리가 첫 우승]
바이아레나 홈구장에서 베르더 브레멘을 상대로 5-0 대승을 거두며 창단 120년 만에 사상 첫 분데스리가 챔피언에 등극하는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바이에른 뮌헨의 12연패를 저지하고 지긋지긋했던 '비테쿠젠'의 오명을 완벽하게 산산조각 냈습니다.압도적인 조직력과 후반 추가시간의 마법 같은 득점력을 과시하며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초의 '무패 우승(Invincibles)'이라는 위대한 금자탑까지 세웠습니다.
플로리안 비르츠, 제레미 프림퐁 등 알론소 체제의 핵심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지배했으며, 우승이 확정되자 수만 명의 팬들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오는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2024
[유로파리그 준우승과 무패 마감]
전무후무한 시즌 무패 트레블을 노리며 UEFA 유로파리그 결승에 올랐으나 이탈리아의 아탈란타 BC에 일격을 당하며 아쉽게 패배했습니다. 무려 51경기 동안 이어지던 기적 같은 무패 행진이 마감되는 순간이었습니다.유럽 대항전 역사상 가장 긴 무패 기록을 쓰며 결승에 진출했으나 상대의 강력한 대인 마크 전술에 고전하며 0-3으로 패배했습니다.
비록 유로파리그 제패에는 실패했으나, 1988년 우승 이후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서며 유럽 전역에 레버쿠젠의 위상을 확고히 각인시켰습니다.
2024
[포칼 우승과 국내 더블 달성]
유로파리그 결승 패배의 충격을 빠르게 수습하고 DFB-포칼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31년 만에 포칼 트로피를 다시 들어 올렸습니다. 구단 역사상 최초로 정규 리그와 컵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영광스러운 '국내 더블(Double)'을 완성했습니다.카이저슬라우테른을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1-0으로 승리하며 1993년 우승 이후 길었던 포칼 준우승의 한을 완벽하게 풀어냈습니다.
사비 알론소 감독은 부임 단 2년 만에 팀을 독일 최강으로 완전히 변모시키며 레버쿠젠을 명실상부한 유럽 최고의 인기 구단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