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맨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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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선수, 스포츠인, 명예의 전당 헌액자, 스위치 타자 + 카테고리

미키 맨틀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스위치타자'로 평가받는 전설적인 야구 선수입니다. 뉴욕 양키스의 강타자 계보를 이어가며 18년간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통산 536홈런, 1509타점을 기록하고 트리플 크라운과 3번의 MVP를 달성했으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등번호 7번은 영구 결번되었습니다.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능과 기록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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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31

[미키 맨틀 탄생]

오클라호마주 스파비노에서 석탄 광부 엘빈 찰스 맨틀과 로벨 맨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명포수 미키 코크레인의 광팬이어서 아들의 이름을 '미키'로 지었습니다.

미키 찰스 맨틀은 1931년 10월 20일 오클라호마주 스파비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엘빈 찰스 맨틀은 아마추어 야구 선수 출신으로,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명포수 미키 코크레인의 팬이었던 덕분에 맨틀은 '미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1935

[가족의 이사 및 어린 시절 부상]

4살 때 가족들과 함께 오클라호마주 커머스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커머스 고등학교에서 야구 외에도 농구와 풋볼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운동 재능을 보였습니다. 풋볼 부상으로 골수염을 앓아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렸지만, 당시 막 사용되기 시작한 페니실린 덕분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미키 맨틀이 4살 때, 그의 가족은 오클라호마주 커머스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커머스 고등학교에서 맨틀은 야구뿐만 아니라 농구와 풋볼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장학생 제의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풋볼 경기 중 정강이 부상으로 인해 박테리아성 골수염에 걸렸습니다. 다행히 당시 막 사용되던 페니실린으로 치료받았지만, 이 후유증은 선수 생활 내내 잦은 부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군 면제를 받기도 했으며, 이는 선수 생활 초기에 그가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1949

[뉴욕 양키스 산하 마이너리그 계약]

양키스의 스카우터 톰 그린웨이드의 눈에 띄어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 양키스 산하 Class-D 마이너리그팀과 1,100달러의 계약금과 400달러의 잔여 시즌 연봉으로 계약했습니다.

1948년, 양키스의 스카우터 톰 그린웨이드는 맨틀의 팀 동료를 관찰하러 왔다가 스위치 히터로 두 개의 장외 홈런을 날린 맨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린웨이드는 맨틀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당시 16세였던 맨틀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949년에 양키스 산하 Class-D 마이너리그팀과 계약금을 포함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맨틀은 빠른 주력 덕분에 '커머스 혜성(The Commerce Comet)'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951

[메이저리그 데뷔]

뉴욕 양키스의 등번호 6번 우익수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습니다. 감독 케이시 스텡걸은 그를 '좌우 타석 모두에서 최고의 파워를 가진 선수'라고 극찬했고, 은퇴를 앞둔 조 디마지오는 '내가 기억하는 한 최고의 유망주'라고 칭찬했습니다.

1951년 4월 17일, 미키 맨틀은 등번호 6번을 달고 우익수 포지션으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습니다. 당시 감독 케이시 스텡걸은 그를 '내가 여태까지 봐온 선수 중에 좌우 타석 모두에서 최고의 파워를 갖고 있다'고 평했으며,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있던 조 디마지오 역시 맨틀을 '내가 기억하는 한 최고의 유망주'라고 칭찬할 정도로 그의 재능은 탁월했습니다.

[월드시리즈 첫 출전]

메이저리그 데뷔 해에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 출전했습니다. 팀은 4승 2패로 챔피언에 올랐으나, 맨틀 개인의 성적은 평범했습니다.

1951년 10월 4일, 데뷔 첫해에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 출전했습니다. 이 월드시리즈에는 자이언츠의 윌리 메이스 역시 데뷔 시즌에 출전하며 두 신예 스타의 맞대결이 성사되었으나, 맨틀의 성적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팀은 최종적으로 4승 2패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52

[아버지 사망 및 중견수 포지션 이동]

아버지가 호지킨 림프종으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은퇴한 조 디마지오의 뒤를 이어 중견수로 포지션을 이동했고, 1965년까지 팀의 중견수로 활약했습니다.

1952년, 미키 맨틀의 아버지가 호지킨 림프종으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맨틀은 항상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 말하며 깊은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같은 해, 팀 동료이자 전임 중견수였던 조 디마지오가 은퇴하자 맨틀은 그의 자리인 중견수로 포지션을 옮겼습니다. 자신의 빠른 발과 넓은 수비 범위를 활용할 수 있는 중견수 포지션에서 맨틀은 1965년까지 활약하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1956

[트리플 크라운 및 첫 MVP 수상]

타율 0.353, 52홈런, 130타점을 기록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 생애 첫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습니다. 같은 해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하는 '히칵 벨트'를 수상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1956년, 미키 맨틀은 야구 선수로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는 타율 0.353, 52홈런, 130타점을 기록하며 타격 3관왕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그의 생애 첫 아메리칸리그 MVP 수상으로 이어졌으며, 그해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되는 '히칵 벨트'까지 거머쥐며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당시 뉴욕 언론은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60홈런) 도전에 대한 기대와 함께 맨틀의 홈런 레이스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습니다.

1957

[두 번째 MVP 수상]

전 해의 활약으로 투수들이 승부를 피하며 볼넷이 대폭 늘었지만, 타율 0.365를 기록하며 테드 윌리엄스를 제치고 생애 두 번째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습니다.

1957년, 미키 맨틀은 전년도의 압도적인 활약으로 인해 투수들이 승부를 회피하는 경우가 많아져 볼넷이 크게 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율 0.365를 기록하며 테드 윌리엄스의 0.388에 이어 리그 수위를 달렸고, 결국 MVP 투표에서 윌리엄스를 제치고 생애 두 번째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1960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장 비거리 홈런 기록]

디트로이트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좌측 타석에 들어서서 우측 지붕 너머로 공을 날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장 비거리 홈런 기록을 세웠습니다. 마크 갤러거는 이 홈런의 비거리를 약 196m로 추정했습니다.

1960년 9월 10일, 미키 맨틀은 디트로이트의 타이거 스타디움에서 좌측 타석에 들어서서 우측 지붕 너머로 공을 날리는 엄청난 파워를 선보였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가 마크 갤러거는 공이 발견된 위치를 기준으로 이 홈런의 비거리를 무려 196m로 추정하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장 비거리 홈런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그의 홈런은 종종 홈플레이트로부터 최소 152m의 비거리를 자랑하는 강력한 타격으로 평가받았습니다.

1961

[로저 메리스와 홈런 레이스]

팀 동료 로저 메리스와 함께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60개)에 도전하는 'M&M 타선'을 구축했습니다. 맨틀은 54홈런으로 시즌을 마쳤지만, 득점과 볼넷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습니다.

1961년 시즌, 미키 맨틀은 팀 동료 로저 메리스와 함께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인 60개에 도전하는 역사적인 'M&M 타선'을 구축했습니다. 시즌 후반 맨틀이 엉덩이 종기로 레이스에서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맨틀은 54홈런을 기록하며 득점과 볼넷에서 리그 수위를 차지했습니다. 비록 로저 메리스가 61홈런으로 기록을 깨트렸지만, 이들의 경쟁은 당시 뉴욕 언론과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현역 최고 연봉 계약]

뉴욕 양키스와 당시 현역 선수 중 최고 연봉인 7만 5천 달러(현재 가치 약 55만 달러)에 계약했습니다. 이는 베이브 루스, 조 디마지오 등이 은퇴한 상황에서 그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1961년 1월 16일, 미키 맨틀은 뉴욕 양키스와 7만 5천 달러에 연봉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는 당시 현역 메이저리그 선수 중 최고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이전의 베이브 루스, 조 디마지오, 테드 윌리엄스 등이 은퇴한 상황에서 맨틀이 리그 최고의 스타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62

[세 번째 MVP 및 골드글러브 수상]

생애 세 번째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으며, 골드글러브도 한 차례 수상하며 공수 겸장 선수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1962년, 미키 맨틀은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생애 세 번째 아메리칸리그 MVP를 수상했습니다. 또한, 수비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인정받아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며 공수 양면에서 최고의 선수임을 입증했습니다.

1964

[월드시리즈 끝내기 홈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9회말 1-1 동점 상황에서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팀은 아쉽게 4승 3패로 패배하며 우승을 놓쳤습니다.

1964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맞붙은 월드시리즈에서 미키 맨틀은 3차전 9회말, 1대1 동점 상황에서 상대 투수 바니 슐츠의 초구를 끝내기 홈런으로 연결시키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비록 팀은 이 월드시리즈에서 4승 3패로 패배했지만, 그의 클러치 능력은 다시 한번 빛을 발했습니다.

1968

[마지막 홈런 기록]

보스턴의 짐 론보그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때려내며 개인 커리어의 마지막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1968년 9월 20일, 미키 맨틀은 보스턴의 투수 짐 론보그를 상대로 솔로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이 홈런은 그의 길고 화려했던 선수 생활에 있어서 마지막 홈런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969

[선수 은퇴 및 등번호 7번 영구 결번]

프로 야구 선수로서 공식적인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그의 등번호 7번은 뉴욕 양키스에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69년 3월 1일, 미키 맨틀은 기자회견을 통해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은퇴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뉴욕 양키스는 그의 등번호 7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맨틀은 데뷔 초 6번을 잠시 달았으나, 마이너리그 강등 후 7번을 달게 되었고, 이 번호는 베이브 루스(3번), 루 게릭(4번), 조 디마지오(5번)의 뒤를 이어 양키스의 영구 결번으로 남아있습니다.

1974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자격 요건을 갖추자마자 명예의 전당 기자단 투표에서 88.2%의 득표율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

1974년, 미키 맨틀은 은퇴 후 자격 요건을 갖추자마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기자단 투표에서 88.2%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이는 그의 선수로서의 위대한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습니다.

1983

[카지노 취업 및 MLB 자격 정지]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 리조트의 카지노에서 고객 담당 대표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MLB 커미셔너 보위 쿤에 의해 도박 관련 조직에 있는 사람은 영구 자격 정지된다는 규정으로 인해 야구계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1983년, 미키 맨틀은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에 있는 리조트 카지노에서 고객 담당 대표직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주된 활동은 골프 토너먼트 및 봉사활동의 얼굴마담 격이었지만, MLB 커미셔너 보위 쿤은 도박 관련 조직에 종사하는 인물은 영구 자격 정지된다는 규정을 들어 맨틀의 야구계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맨틀은 이러한 규정을 '멍청하다'고 생각하여 경고를 무시하고 일을 맡았던 것이었습니다. 윌리 메이스 또한 유사한 이유로 자격 정지를 당한 바 있습니다.

1985

[MLB 자격 회복]

MLB 커미셔너 피터 위버로스에 의해 정지되었던 MLB 자격이 회복되었습니다.

1985년 3월 13일, 보위 쿤의 후임 커미셔너인 피터 위버로스에 의해 미키 맨틀의 MLB 자격 정지가 해제되었습니다. 이로써 맨틀은 다시 야구계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8

['미키 맨틀의 레스토랑 & 스포츠 바' 개업]

뉴욕 59번가에 '미키 맨틀의 레스토랑 & 스포츠 바'를 개업했습니다. 이 식당은 곧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 중 하나가 되었으며, 양키 스타디움의 오리지널 명판이 입구에 전시되었습니다.

1988년, 미키 맨틀은 뉴욕 59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미키 맨틀의 레스토랑 & 스포츠 바'를 개업했습니다. 1970년대에 컨트리 음식점 실패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레스토랑은 곧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점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양키 스타디움의 모뉴먼트 파크에 있던 오리지널 명판이 입구에 전시되어 맨틀의 위상을 보여주었습니다.

1995

[미키 맨틀 사망]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부상과 싸우면서도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선수로 기억됩니다.

1995년 8월 13일, 미키 맨틀은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잦은 부상과 싸우면서도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기록과 활약을 펼쳤으며, '미국 야구의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그의 사후에도 맨틀 관련 기념품은 베이브 루스를 제외하고 어떤 선수보다 높은 판매를 기록할 정도로 팬들의 사랑은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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