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샤 마이스키
미샤 마이스키는 구소련 출신의 이스라엘 첼리스트로, 현대 음악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감수성과 낭만적인 음색을 가진 거장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역사상 유일하게 당대의 전설적인 두 거장,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를 모두 사사한 첼리스트라는 진기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소련 시절 유대인이라는 배경과 형의 망명으로 인해 강제 노동 수용소에 투옥되는 등 모진 시련을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서방으로 이주하여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 반열에 올랐습니다. 화려한 무대 의상과 자유분방한 연주 스타일, 그리고 가슴을 울리는 시적인 해석은 그를 단순한 연주자를 넘어선 하나의 예술적 아이콘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도이치 그라모폰(DG)의 전속 아티스트로서 남긴 수많은 명반들은 오늘날 첼로 문헌의 중요한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연표
1948
[라트비아 리가에서 탄생]
소련 치하의 라트비아 리가에서 유대인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가족 환경 속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음악적 감수성은 남다른 면모를 보였습니다.
미샤 마이스키의 가족은 음악과 깊은 인연이 있었으며, 그의 형과 누나 역시 음악가로 활동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배경은 훗날 그의 소련 생활에서 큰 시련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나, 유대인 특유의 깊은 정서적 뿌리를 형성했습니다. 그는 리가의 풍부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세계적인 거장으로 성장할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56
[첼로 입문과 교육 시작]
8세의 나이에 첼로를 처음 배우기 시작하며 음악 교육을 본격화했습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배웠으나 곧 첼로의 깊은 음색에 매료되어 악기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리가 음악학교에서 기초를 다지며 천재성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첼로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놀라운 속도로 실력이 향상되어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첼로의 중저음이 주는 인간적인 울림이 자신의 성격과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느꼈습니다. 스승들은 그가 장차 소련을 대표할 연주자가 될 것임을 직감하고 집중적인 지도를 이어갔습니다.
1962
[레닌그라드 음악원 입학]
더 넓은 음악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소련 최고의 음악 교육 기관 중 하나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음악적 시야를 넓혔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가 리가를 떠나 중앙 무대로 진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레닌그라드 음악원 재학 시절 그는 이미 동기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러시아 첼로 학파의 전통적인 기법을 전수받으며 기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후 그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의 협연을 통해 데뷔하며 촉망받는 신예로 부상했습니다.
1965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협연 데뷔]
당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였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 협연하며 정식 데뷔했습니다. 전문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화려한 무대였습니다. 청중과 비평가들은 그의 열정적이고 시적인 연주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거장들이 서는 무대에서 당당히 자신의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이 데뷔 무대를 통해 그는 '로스트로포비치의 후계자'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소련 음악계는 마이스키라는 새로운 스타의 등장에 큰 기대감을 나타냈습니다.
1966
[제3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입상]
세계 최고 권위의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6위에 입상했습니다. 순위 이상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관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연주자로 꼽혔습니다. 이 입상을 통해 그는 전 소련과 동구권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습니다.
콩쿠르 당시 그는 뛰어난 테크닉보다는 가슴을 울리는 서정적인 해석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심사위원이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마이스키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제자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비록 6위라는 성적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대회 최고의 화제 인물은 미샤 마이스키였습니다.
[모스크바 음악원 진학 및 로스트로포비치 사사]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옮겨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그를 아들처럼 아끼며 자신의 모든 음악적 철학을 전수했습니다. 두 거장의 만남은 마이스키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마이스키에 대해 '가장 뛰어난 천재성을 지닌 첼리스트'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는 스승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음악적 담대함을 배우며 자신만의 연주 스타일을 정립해 나갔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수련 시절은 마이스키가 거장으로 도약하기 위한 최고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1970
[소련 당국에 의한 체포와 투옥]
형의 이스라엘 망명 사건으로 인해 연좌제에 휘말려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암시장에서 녹음기를 구입했다는 혐의를 씌워 그를 구속했습니다. 촉망받던 천재 음악가는 한순간에 범죄자로 몰려 모든 연주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소련 당국은 이스라엘로 망명한 그의 형 바레리에 대한 보복으로 미샤를 희생양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첼로를 뺏기고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훗날 그의 연주에 깃든 깊은 슬픔과 열정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1971
[강제 노동 수용소 생활과 정신병원 강제 입원]
고리키(현 니즈니노브고로드) 인근의 수용소에서 약 18개월간 강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첼리스트의 생명인 손을 다칠 위험이 큰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수용소 출소 후에는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2개월간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등 격한 노동을 하며 연주자로서의 미래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겪었습니다. 정신병원 수용은 당시 소련 당국이 반체제 인사나 의심스러운 인물을 통제하기 위해 흔히 쓰던 수단이었습니다. 이 2년간의 공백기는 그에게 음악이 단순한 직업이 아닌 생존과 자유의 의미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1973
[이스라엘 망명 및 자유 획득]
미국의 억만장자 아르망 해머의 도움으로 마침내 소련을 떠나 이스라엘로 망명했습니다. 2년 넘게 잡지 못했던 첼로를 다시 손에 쥐며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이주 직후 그는 이스라엘 시민권을 취득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소련 당국은 해머의 요청과 국제적인 압력에 못 이겨 그의 출국을 허용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도착한 그는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짧은 시간 안에 예전의 기량을 되찾았습니다. 이 사건은 마이스키가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나게 되는 진정한 서막이었습니다.
[미국 뉴욕 카네기홀 데뷔]
소련을 떠난 지 불과 몇 달 만에 뉴욕 카네기홀 무대에 서며 서방 데뷔를 마쳤습니다.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미국 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의 고난 어린 사연과 압도적인 실력은 뉴욕 타임스 등 주요 매체의 찬사를 이끌어냈습니다.
카사르스 이후 가장 기대되는 첼리스트라는 극찬을 받으며 세계 무대의 중심에 섰습니다. 전쟁과 수용소 생활을 견뎌낸 젊은 연주자의 드라마틱한 등장은 대중을 열광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세계 주요 도시의 공연장으로부터 수많은 초청을 받으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74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사사]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설적인 첼리스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를 만나 마지막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로스트로포비치와 피아티고르스키라는 두 거장을 모두 사사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러시아파와 서구파를 잇는 거대한 음악적 계보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피아티고르스키는 그의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스승은 마이스키에게 기술적인 측면보다 음악을 통한 이야기하기와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4개월간의 집중적인 배움은 그의 음악 인생을 지탱하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1975
[가스파르 카사도 국제 콩쿠르 우승]
피렌체에서 열린 가스파르 카사도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국제 콩쿠르 우승을 통해 서방 무대에서의 실력을 공식적으로 공인받았습니다. 콩쿠르 이후 유럽 전역에서 연주 요청이 쇄도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예고했습니다.
이미 완성된 거장의 기량을 선보이며 압도적인 점수 차로 우승을 거머쥐었습니다. 이 우승은 그가 콩쿠르 무대를 떠나 진정한 아티스트로서 독립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마이스키는 이 상을 계기로 이탈리아와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자주 공연을 갖게 되었습니다.
1982
[도이치 그라모폰(DG)과 전속 계약 체결]
세계 최고의 음반 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과 독점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30년 이상 이 레이블을 통해 수십 장의 명반을 남기며 음반사의 간판 아티스트가 되었습니다. 녹음 환경의 자유를 얻으며 자신의 예술적 이상을 음반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DG와의 파트너십은 그를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녹음 과정에서 완벽주의를 기하며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수많은 테이크를 반복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첫 번째 녹음인 브람스 더블 콘체르토부터 전 세계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985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첫 녹음]
첼리스트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처음으로 녹음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난 지극히 낭만적이고 시적인 접근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음반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그의 대표적인 필모그래피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흐를 종교적 엄숙함보다는 인간적인 감정과 춤곡의 활력으로 해석했습니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파격적인 해석이라는 찬반 논란이 있었으나 대중에게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15년 뒤인 1999년에 이 곡을 다시 녹음하며 변화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선보였습니다.
1987
[딸 릴리 마이스키 탄생]
첫째 딸인 피아니스트 릴리 마이스키가 태어났습니다. 딸은 훗날 아버지의 가장 든든한 음악적 파트너로 성장하게 됩니다. 자녀의 탄생은 마이스키에게 가정의 소중함과 음악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마이스키는 릴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음악을 즐기며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접하게 했습니다. 두 사람은 훗날 '마이스키 듀오'로 활동하며 전 세계를 돌며 수많은 리사이틀을 가졌습니다. 릴리 마이스키는 아버지의 연주 스타일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습니다.
1989
[아들 사샤 마이스키 탄생]
둘째 아이이자 아들인 바이올리니스트 사샤 마이스키가 태어났습니다. 아들 역시 음악가로 자라나 가족 앙상블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마이스키는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자신의 연주 활동에 새로운 활력을 얻었습니다.
사샤 마이스키는 런던에서 유학하며 실력을 쌓았고 아버지와 누나와 함께 '마이스키 트리오'를 결성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조언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바이올린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가족 구성원이 모두 음악가로 활동하는 것은 마이스키 인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 중 하나입니다.
1992
[마르타 아르헤리치와의 전설적인 협업]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을 녹음했습니다. 두 거장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즉흥적인 영감이 어우러진 연주는 20세기 실내악의 정점으로 불립니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의 음악적 동반자로서 수십 년간 호흡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아르헤리치와 마이스키는 무대 위에서 대화하듯 연주하며 청중에게 극한의 전율을 선사했습니다. 그들의 쇼스타코비치, 슈만, 라흐마니노프 음반 등은 모두 그 해의 클래식 음반상을 휩쓸었습니다. 이 협력 관계는 클래식 음악사에서 보기 드문 깊은 신뢰와 우정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1995
[일본 음악계의 거대한 성공과 투어]
일본에서의 대규모 전국 투어를 성공리에 마치며 아시아 시장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일본 관객들은 그의 시적인 연주와 개성 넘치는 외모에 열광했습니다. 이후 그는 매년 일본을 방문하여 가장 사랑받는 외국인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는 일본 투어 중 수많은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일본의 주요 홀들은 그의 독주회를 위해 수년 전부터 예약을 진행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마이스키의 음반은 일본 클래식 차트에서 이례적인 판매고를 기록하며 스테디셀러가 되었습니다.
1999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두 번째 녹음]
바흐 서거 250주년을 앞두고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다시 한번 녹음했습니다. 15년 전의 녹음보다 한층 더 자유롭고 관조적인 깊이가 더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 음반은 그가 도달한 음악적 성숙도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습니다.
마이스키는 동일한 곡을 다시 녹음하는 이유에 대해 '음악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두 번째 녹음은 더욱 과감한 루바토와 다채로운 음색의 변화가 특징입니다. 이 음반으로 그는 에코 클래식 어워드 등 다수의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습니다.
2000
[쇼스타코비치 협주곡 전곡 녹음]
스승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된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협주곡 1, 2번을 녹음했습니다. 러시아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개인적인 시련이 투영된 절절한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작곡가의 의도를 누구보다 잘 파악한 해석이라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음반을 통해 자신을 길러준 러시아 음악 전통에 대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연주 중 느껴지는 비장미와 날카로운 긴장감은 청중을 압도하는 힘을 지녔습니다. 마이스키는 이 녹음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소모가 컸던 작업 중 하나라고 회고했습니다.
2002
[벨기에 브뤼셀로 거처 이동]
활동의 편의와 가족의 교육을 위해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하여 정착했습니다. 유럽 중심부에 위치한 이곳을 거점으로 전 세계 투어 일정을 관리했습니다. 이후 그는 벨기에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조용한 가정을 꾸려 나갔습니다.
브뤼셀의 평화로운 환경은 그에게 음악적 사색과 휴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에블린 드페르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며 심리적 안정을 찾았습니다. 벨기에 이주 이후 그의 연주는 더욱 여유롭고 따뜻한 음색을 띠기 시작했습니다.
2005
[왕립 음악원(RAM) 명예 회원 추대]
영국 왕립 음악원으로부터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 회원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는 세계적인 거장들에게만 수여되는 영예로운 타이틀입니다. 그의 예술적 업적이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추대식에서 그는 음악 교육의 중요성과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왕립 음악원의 학생들을 정기적으로 지도하며 후배 연주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설적인 음악가들의 명단과 함께 나란히 기록되었습니다.
2006
[트리오 연주 활동 본격화]
자녀인 릴리(피아노), 사샤(바이올린)와 함께 '마이스키 트리오'를 결성해 정기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가족만이 보여줄 수 있는 완벽한 호흡과 음악적 유대감을 전 세계에 과시했습니다. 자녀들을 프로 연주자로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든든한 멘토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마이스키 트리오의 공연은 '음악적 사랑의 결정체'라는 평을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기보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앙상블을 이끌었습니다. 이들의 무대는 세대 간의 소통과 가족적 가치를 클래식 음악으로 승화시킨 모범 사례가 되었습니다.
2008
[60세 생일 기념 월드 투어]
60세 생일을 맞아 전 세계 주요 공연장에서 기념 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반세기 넘게 이어진 그의 음악 여정을 축하하는 수많은 동료 음악가들이 무대에 함께했습니다.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년 같은 열정과 체력으로 무대를 누볐습니다.
베를린, 런던, 도쿄 등지에서 열린 생일 공연은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팬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DG는 그의 60세를 기념하여 그동안의 녹음을 집대성한 특별 박스 세트를 출시했습니다.
2012
[이스라엘 건국 공로 훈장 수여]
이스라엘 문화 발전과 국가 위상을 높인 공로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망명객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성장한 그의 인생 역정을 기리는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그를 '평화와 문화의 대사'로 지칭하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음악은 정치와 국경을 초월한 유일한 언어'라고 강조했습니다. 마이스키는 이스라엘의 젊은 음악가들을 위한 장학금을 조성하고 지원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습니다. 그의 삶은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회복과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18
[70세 기념 음반 'Adagietto' 발매]
70세 생일을 기념하여 딸 릴리와 함께 녹음한 앨범 'Adagietto'를 발매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소품들과 서정적인 곡들을 담아 노년의 평온함을 노래했습니다. 여전히 쇠하지 않은 음색과 더욱 깊어진 시적 감동을 담아냈습니다.
앨범에는 말러의 아다지에토 등 명상적이고 아름다운 선율들이 가득 담겼습니다. 이 음반은 그가 평생 추구해온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탐구의 완결판과도 같습니다. 전 세계 비평가들은 그의 첼로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고 평가했습니다.
2020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의 비대면 활동]
팬데믹으로 공연이 중단된 시기에 온라인 스트리밍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했습니다.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연주하는 영상을 공유하며 전 세계 팬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음악의 치유력이 중요함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그는 사회적 거리두기 중에도 연습을 쉬지 않았으며, SNS를 통해 음악적 조언을 건네는 등 활발히 소통했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디지털 콘서트홀 등 주요 플랫폼에서 무관중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단절된 세상 속에서 그의 첼로 소리는 수많은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2021
[전설적인 동료들과의 실내악 녹음 재개]
기돈 크레머, 유리 바슈메트 등 오랜 동료들과 다시 뭉쳐 실내악 녹음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거장들의 완숙한 호흡이 돋보이는 음반들을 통해 실내악의 정수를 보여주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빛나는 예술가들의 우정을 음악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는 협주곡보다는 실내악을 통해 얻는 친밀한 음악적 교감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동료들은 마이스키를 향해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는 가장 자유로운 영혼의 연주자'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 시기의 녹음들은 과거의 열정과 현재의 지혜가 조화를 이룬 수작들로 평가받습니다.
2023
[75세 기념 갈라 콘서트]
75세 생일을 기념하여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갈라 콘서트 시리즈를 열었습니다. 가족 음악가들과 마르타 아르헤리치 등 평생의 친구들이 참여하여 무대를 빛냈습니다. 살아있는 전설로서 자신의 건재함을 전 세계 음악계에 다시 한번 과시했습니다.
공연은 그가 지나온 고통스러운 과거와 찬란한 성공을 회고하는 다큐멘터리적 구성을 가미했습니다. 객석은 전 세계에서 온 음악 애호가들로 가득 찼으며, 기립박수는 수십 분간 이어졌습니다. 마이스키는 무대에서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연주할 수 있는 감수성이 자신의 가장 큰 재산이라고 말했습니다.
2024
[최신작 음반 및 가족 투어 지속]
최신 디지털 음원을 발표하며 쉼 없는 음악적 탐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자녀들과 함께하는 아시아 및 북미 투어를 통해 전 세대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그의 음악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세대의 연주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 '은퇴라는 단어는 자신의 사전에 없다'며 영원한 현역임을 선언했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무대는 더욱 깊어진 유대감으로 청중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미샤 마이스키의 이름은 오늘날 첼로 연주의 표준이자 시대의 영혼을 울리는 선율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2025
[2026년 현재의 활동과 위상]
현재까지도 전 세계를 무대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며 거장의 위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독보적인 음악 철학을 바탕으로 평화와 인류애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교향곡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벨기에 브뤼셀에 거주하며 세계 각국의 마스터 클래스와 공연 초청에 응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 첼리스트들이 그의 조언을 듣기 위해 줄을 서며, 그는 기꺼이 자신의 지혜를 나눕니다. 미샤 마이스키는 21세기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첼리스트이자 위대한 인간 승리의 표상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