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연표
1147
[가와치 겐지의 적자로 태어나다]
가와치 겐지의 도료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관직을 역임하며 빠르게 승진했습니다.
규안 3년 4월 8일(1147년 5월 9일)에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셋째 아들이자 적자로서 오와리국 아쓰타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귀무자 또는 오니타케마루이며, 어머니는 요시토모의 정실 유라 고젠이다. 1158년 고시라카와 천황의 준모 무네코 내친왕을 섬겨 황후궁권소진이 되었고, 1159년에는 조사이몬인 구로우도, 우효에노쇼칸, 니조 천황의 구로우도로 보임되며 다른 형제들보다 빠르게 승진했다.
1159
[헤이지의 난 참전과 패배]
아버지 요시토모와 함께 헤이지의 난에 가담했으나, 헤이시에게 패배하여 가와치 겐지 일문의 관직을 모두 잃었습니다.
헤이지 원년(1159년) 12월 9일, 아버지 요시토모는 후지와라노 노부요리가 주동이 된 헤이지의 난에 가세했으나 헤이시에게 패배했다. 이 싸움에서 요시토모파는 패했고, 요리토모를 비롯한 가와치 겐지 일문에게 내려졌던 관직도 모두 잃은 채 교토를 떠나야 했다.
1160
[이즈 유배 생활 시작]
헤이지의 난 패배 후, 기요모리의 계모 이케노젠니의 구명으로 목숨을 건져 이즈의 히루가코지마로 유배되었습니다.
에이랴쿠 원년(1160년) 2월 9일, 교토의 로쿠하라에 보내진 요리토모는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계모 이케노젠니의 구명으로 간신히 목숨만은 면하고 3월 11일, 이즈의 히루가코지마로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 중에도 유모 히키노아마나 외가의 원조를 받으며 사냥을 즐기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1178
[호조 마사코와의 혼인]
유배 생활 중 현지 호족인 호조 도키마사의 맏딸 마사코와 혼인하여 훗날 그의 정치적 동지가 될 인연을 맺었습니다.
유배지 이즈에서 현지의 호족인 호조 도키마사의 맏딸 마사코와 혼인해 맏딸 오히메를 얻었다. 혼인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맏딸 오히메의 생년인 1178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1180
[헤이시 추토를 위한 거병]
모치히토 왕의 헤이시 추토 영지를 받고 이즈에서 거병했으나, 이시바시산 전투에서 헤이시에게 패배하여 아와 국으로 피신했습니다.
지쇼 4년(1180년) 4월 27일, 고시라카와 법황의 서자 모치히토 왕의 헤이시 추토를 명하는 영지를 받았다. 헤이시의 추토 계획을 파악하고 거병을 결의, 8월 17일 이즈의 목대 야마키 가네타카의 저택을 습격해 그를 죽였다. 그러나 8월 23일 이시바시 산 전투에서 헤이시측에게 패하여, 8월 28일에 마나즈루 곶에서 배를 타고 아와 국으로 향했다.
[가마쿠라 입성 및 본거지 마련]
아와 국에 상륙 후 간토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무사시 국을 거쳐 가마쿠라에 무혈 입성하고, 이곳을 무사 정권의 본거지로 삼아 도시 정비를 시작했습니다.
8월 29일 아와에 상륙 후 보소 반도의 호족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와 치바 쓰네타네의 지지를 얻어 북상했다. 10월 초 무사시 국에 들어서 가사이 기요시게, 아다치 도모토 등 여러 호족들이 가세했다. 10월 6일, 일찍이 요시토모와 형 요시히라가 살았던 땅에 발을 들였다. 가마쿠라에 무혈입성한 요리토모는 오쿠라에 저택을 짓고 자신의 선조 요리요시가 지었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를 북쪽 산기슭으로 옮기는 등 도시 정비를 계속했다.
[후지 강 전투의 승리]
후지 강에서 헤이시 군과 대치했으나, 헤이시 군이 물새 소리에 놀라 패주하며 전투 없이 승리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10월 16일,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받은 다이라노 고레모리의 수만 기가 스루가 국에 이르자, 요리토모는 가마쿠라를 출발해 기세 강에서 다케다 노부요시 등 2만 기와 합류했다. 10월 20일, 후지 강에서 고레모리군과 대치했지만, 철퇴 도중에 물새가 날아오르는 소리에 놀란 고레모리군이 패주하면서 요리토모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승리를 얻었다.
[이복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의 상봉]
오슈에서 자신을 의지하고 있던 이복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찾아와 합류했습니다.
후지 강 전투 다음날, 오슈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를 의지하고 있던 이복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요리토모를 찾아와 합류했다.
[사무라이도코로 설립]
와다 요시모리를 사무라이도코로벳토에 임명하며, 훗날 가마쿠라 막부의 군사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할 사무라이도코로를 설립했습니다.
히타치 겐지의 사타케 히데요시를 토벌하고 돌아온 요리토모는 와다 요시모리를 사무라이도코로벳토에 임명했다. 사무라이도코로는 훗날 가마쿠라 바쿠후의 군사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1183
[군사·경찰권 공식 인정]
조정으로부터 '주에이 2년 10월의 선지'를 받아 도카이도와 도산도 지역의 군사 및 경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며 가마쿠라 정권의 기반을 강화했습니다.
주에이 2년(1183년) 10월 14일, 조정은 헤이지의 난 때 박탈당했던 요리토모의 위계를 돌려주고, 도카이도와 도산도의 영지를 본래의 혼조에 되돌려주고 그 지역의 연공과 관물을 요리토모가 도맡아서 거두어 바칠 것이며,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요리토모에게 그 처분을 맡긴다는 내용의 선지까지 내려졌다. 이 선지를 통해 당초 '반군'으로 인식되던 요리토모의 가마쿠라 정권은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세력이 되었다.
1184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토벌]
고시라카와 법황을 가두고 반감을 샀던 사촌형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를 이복동생 노리요리와 요시쓰네를 보내 토벌했습니다.
주에이 3년(1184년) 1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인노고쇼를 들이쳐 고시라카와인을 가두고,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받아 세이토다이쇼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월 20일,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와 요시쓰네 형제가 이끄는 군사에 의해 오미의 아와즈에서 토벌당해 죽었다.
[이치노타니 전투 승리]
노리요리와 요시쓰네가 헤이케 추토를 위해 셋쓰국 이치노타니 싸움에서 헤이케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겐랴쿠 원년(1184년) 2월 7일, 요시나카를 토벌한 노리요리와 요시쓰네는 헤이케 추토를 위해 교토를 떠나 셋쓰국 이치노타니 싸움에서 헤이케에 대승을 거두어, 다이라노 시게히라를 잡아 교토로 데리고 돌아왔다.
[구몬쇼(만도코로) 설립]
오에노 히로모토를 벳토로 삼아 구몬쇼(훗날 만도코로)를 열어 가마쿠라의 정무와 재정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10월 6일, 구몬쇼를 열어 오에노 히로모토를 벳토(장관)로 삼았다. 구몬쇼는 훗날 만도코로로 이름을 고쳐, 가마쿠라의 정무와 재정을 맡게 된다. 10월 20일에는 소송을 담당하는 몬주쇼를 열고 미요시 야스노부를 집사로 삼았다.
1185
분지 원년(1185년) 2월 19일, 요시쓰네는 야시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속공으로 헤이케를 해상으로 쫓아냈다. 3월 24일의 단노우라 전투로 안토쿠 천황 등 헤이케 일문이 바다에 투신함으로써 헤이케 일문은 멸망했다.
[요시쓰네와의 갈등 시작]
자신의 허락 없이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임명받은 간토 무사들을 비난하며 요시쓰네와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분지 원년(1185년) 4월 초, 헤이시 추토에서 요시쓰네의 보좌를 맡았던 가지와라노 가게토키로부터 요시쓰네를 탄핵하는 서신이 도착했다. 4월 15일, 요리토모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조정으로부터 무단으로 관직을 임명받은 간토 무사들을 일일이 비난하며 도고쿠 귀환을 금지해버렸다. 다만 같이 임관받은 요시쓰네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고 있다.
[요시쓰네의 요리토모 추토 선지 획득]
요시쓰네가 법황에게 요리토모 추토의 칙허를 요구하여 받아내면서, 형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10월 17일, 요리토모의 명을 받은 도사노보 등 60여 기가 교토의 호리카와 저택을 습격했으나, 응전하는 요시쓰네에 유키이에가 가세해 습격은 실패했다. 요시쓰네는 도사노보가 요리토모의 명을 받고 왔음을 확인하고, 다시 조정에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요구해 그것을 받아냈다.
[슈고·지토 전국 설치 승인]
오에노 히로모토의 진언을 받아 조정으로부터 슈고와 지토를 일본 전국에 설치할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가마쿠라의 권력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1월 상순에 교토에 들어온 도고쿠 무사들의 강경한 태도에 낭패한 조정은 결국 11월 11일, 요시쓰네와 유키이에를 잡아들이라는 선지를 여러 구니에 내린다. 다음 날인 12일에 오에노 히로모토는 요리토모에게 전국에 슈고와 지토를 설치할 것을 진언했고, 28일 호조 도키마사는 요시쓰네 추포를 명분으로 하는 '슈고 · 지토의 전국 설치'를 조정으로부터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가마쿠라의 권력이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갈 단초를 마련했다.
1189
[오슈 갓센으로 일본 통일]
요시쓰네를 살해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출진하여 오슈 갓센을 일으켰고,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키며 일본 전국을 평정했습니다.
요시쓰네의 목이 가마쿠라에 도착하자 요리토모는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조정에 요구했으나 칙허가 내려지지 않았다. 요리토모는 칙허도 기다리지 않고 7월 19일, 1천여 기를 인솔하고 가마쿠라를 출발해 야스히라 추토에 나섰다. 8월 7일부터 10일에 걸쳐 아쓰카치 산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후지와라노 구니히라를 죽이고 야스히라를 쫓아 북상했다. 9월 2일 구리야가와로 진을 옮긴 다음날, 야스히라는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음을 맞았다. 6일에 야스히라의 목을 받은 요리토모는 가와타노 지로를 '주인을 토벌한 불의'를 물어 처형하게 한다. 오슈 갓센을 끝으로 일본에서 지쇼 4년부터 시작된 내란은 막을 내렸다.
[이복동생 요시쓰네의 죽음]
오슈로 피신해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비호를 받던 이복동생 요시쓰네가 히데히라의 아들 야스히라의 습격으로 자살했습니다.
분지 2년(1186년) 4월 무렵, 요리토모는 히데히라에게 서신을 보내 속을 떠봤다. 분지 3년(1187년) 10월, 히데히라는 아들 야스히라 형제들에게 요시쓰네를 장군으로 하여 가마쿠라에 맞서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듬해(1188년) 4월 요리토모는 요시쓰네 추토 선지를 법황에게 요구했고, 야스히라에게 요시쓰네를 내놓으라는 선지가 내려졌다. 이에 굴복한 야스히라는 분지 5년(1189년) 윤4월, 고로모 강 저택에 있던 요시쓰네를 습격해 자살로 몰아갔다.
1192
[초대 세이이타이쇼군 취임 및 막부 개창]
고시라카와 법황 사후, 마침내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며 가마쿠라 막부를 정식으로 개창했습니다. 이는 일본 무사 정권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겐큐 3년(1192년) 3월에 고시라카와인이 세상을 떠나고, 그 해 7월 12일에 요리토모는 드디어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사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은 바로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된 이 해를 시작으로 보고 있다.
1193
[이복동생 노리요리 제거]
스루가 사냥 중 발생한 소가 형제의 복수 사건 관련 오해로 반역 혐의를 받아 이복동생 노리요리를 이즈로 유배 보냈다가 결국 주살했습니다.
겐큐 4년(1193년) 5월 28일, 요리토모는 고케닌들을 모아 스루가에서 사냥을 실시했는데, 그 날 밤 구도 스케쓰네가 소가 형제의 공격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터졌다. 요리토모가 토벌당했다는 오보로 번졌고, 이 오해로 노리요리가 요리토모에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8월 2일 노리요리의 서약문이 도착했지만, '미나모토' 성씨를 자칭한 것에 요리토모의 격노를 사 8월 10일 노리요리의 첩자가 붙들렸다. 결국 노리요리는 이즈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주살되었다.
1199
[세이이타이쇼군의 최후]
사가미 강 다리 공양식 참석 후 귀가 중 부상을 입고 1월 11일 출가하여 13일에 서거했습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겐큐 9년(1198년) 12월 27일, 사가미 강에서 열린 다리 낙성식을 겸한 공양식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크게 부상을 입는다. 원인은 낙마라고 말해지지만 확실하지 않다. 겐큐 10년(1199년) 1월 11일에 출가하여 1월 13일에 서거하였다. 향년 53세(만 51세)였다. 사망 원인은 낙마, 요붕증, 당뇨병, 익사, 망령설, 암살설 등 다양하나 확정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