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알리 진나
연표
1876
1876년 12월 25일, 당시 영국령 인도의 봄베이 관구에 속했던 인도 북서부 카라치의 비자르 맨션에서 무슬림이자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 마티발 진나바히 펀자와 어머니 미티바히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구자라트의 페넬리 마을 출신으로 시아파 이슬람 신자였다.
1892
[영국 유학길에 오르다]
봄베이 대학교 입학 후 16세에 영국으로 유학하여 런던 링컨 법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변호사의 꿈을 키웠다.
1892년, 미션고등학교 재학 중 16세의 나이로 봄베이 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법학과에 진학했다. 사업가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호사가 되어 독립운동에 종사하기로 결심하고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에서 링컨 법학원에 입학하여 영국법과 대륙법, 영국의 정치체제를 연구하며 입법 과정을 참관했다.
1896
[변호사 자격 취득 후 독립운동 합류]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귀국하여 봄베이 고등 법원 변호사로 활동하며 인도의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1896년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인도로 돌아와 봄베이 고등 법원의 변호사가 되었다. 귀국 직후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 자립해야 했으며, 봄베이 시내에서 변호사를 개업했지만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인도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인도의 주권과 독립을 요구하는 인도 국민회의에 본격 참여했다.
1907
1896년 귀국 후 봄베이 시내에서 변호사를 개업했지만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자립하기까지 10여 년이 걸린 후 1907년 무렵부터는 변호사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00년에는 봄베이주의 자문변호사로 고용되기도 했다.
1910
[인도 입법 자치의회 의원 당선]
영국 인도 입법 자치의회 의원에 당선되어 민족주의 정치가들과 교류하며 인도인의 지위 향상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10년 영국 인도 입법 자치의회 의원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봄베이의 인도 자치의회에서 마라타 지도자 고팔 크리슈나 고칼레를 만나는 등 민족주의 정치가들과 교류했다. 초기에는 이슬람교도로서 고칼레와 같은 지도자가 되기를 열망하며, 인도인의 국민성 향상과 국제사회에서의 지위 향상, 인도 국민들간의 민족의식 고취를 정치적 신념으로 삼았다.
1913
[전인도 이슬람 동맹 가입]
인도 국민회의의 이슬람 배척과 갈등에 실망하여 전인도 이슬람 동맹에 가입하며 무슬림의 권익 보호에 나섰다.
힌두교와 이슬람 갈등이 지속되고 이슬람인들에 대한 배척을 목격하면서 갈등하다가, 1912년 12월 이슬람 동맹 집회에 참석했다. 1913년 무렵 이슬람 동맹이 인도 국민회의처럼 인도의 정치적 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인도 이슬람 동맹에 가입했으며, 이후 무슬림 연맹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16
[힌두-이슬람 통합을 위한 러크나우 협정 주도]
인도 국민회의와 이슬람 동맹의 연대 활동을 중재하여 러크나우 협정을 체결, 두 조직이 합동으로 헌법개정계획안에 서명하며 인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진나는 단결이 독립을 촉진시키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정치적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중재 노력 덕택에 국민회의와 이슬람 동맹은 1915년 봄베이에서 회합을 열고 1916년 러크나우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러크나우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두 조직은 헌법개정계획안에 날인하고, 이슬람교측은 1909년 영국령 인도총독부로부터 승인받은 이슬람 독립 선거지역구 운영권을 획득했다.
1920
[간디 비판과 국민회의 철수]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과 힌두교 중심의 접근방식에 반대하여 인도 국민회의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이슬람 동맹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나는 마하트마 간디 등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비판하고 무장 독립운동을 주장했으며, 국민의회가 자치의회 건설에서 이슬람 회원에게 불이익을 주자 크게 반발했다. 1920년 국민회의로부터 완전히 철수한 후, 점차적으로 문제 해결 방안을 이슬람교의 교리에서 찾으려 했고, 이슬람 동맹을 이끌었다.
1929
진나는 이슬람과 힌두교를 화해시키려다가 궁지에 몰리면서도 결혼생활에 충실하려 했다. 그러나 아내 마리얌은 1927년 무렵 어떤 질병으로 다리에 통증을 느끼다가 심한 붓기로 고생했고, 그의 곁을 떠나 혼자 생활했다. 마리얌은 만년에 애완동물만 데리고 은둔생활을 하다 1929년 2월 18일에 사망했으며, 2월 22일 코자 샤리의 아시리 묘지에 매장되었다.
1932
[힌두-이슬람 통합 노력의 좌절]
런던 원탁회의에서 이슬람과 힌두간의 화해와 상호 존중을 위한 14개 요구안을 제시했으나 거부당하며, 결국 종교적 통합을 포기하고 별도 국가 건설을 주장하게 된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까지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해를 주선하고 인도 각 주에 이슬람인의 독자적 거주지를 만들어줄 것을 호소했다. 1930년~1932년 런던에서 열린 원탁회의에서 이슬람과 힌두간의 화해와 상호 존중을 주장하며 14개 요구안(종교적 차별 금지, 연립 정부 형성, 소수자 권리 존중, 중앙의회 이슬람교도 의석 1/3 배분, 이슬람인 독자적 거주지 조성 등)을 제시했으나 거부되었다. 결국 그는 이슬람-힌두교 통합을 포기하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는 서로 다른 국가를 세워야 함을 주장하게 되었다.
1940
[파키스탄 건국을 위한 라호르 결의 채택]
전인도 무슬림 연맹 대회에서 라호르 결의를 주관하며, 이슬람교도만의 독립 국가 건설이 이슬람교의 운명이라고 선언했다.
1940년 3월 22일~23일, 전인도 무슬림 연맹은 라호르에서 이슬람 독립국가(미래의 파키스탄) 건국을 요구하는 라호르 결의안을 상정, 채택했다. 진나는 이 회의에 참석하여 인도의 이슬람교 운명은 이슬람교도만의 국가 건설 성공에 달려 있다고 선언하며 파키스탄 분리 독립을 위한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1947
[영국령 파키스탄 초대 총독 취임]
영국 정부를 설득하여 파키스탄 지역 분할에 성공한 후, 영국령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으로 취임하며 파키스탄 독립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렸다.
1947년 7월, 영국의 인도 총독부로부터 파키스탄 지역 분할에 성공하고, 파키스탄을 별도의 총독부를 둠과 동시에 자치권을 허락받고, 나중에 인도와는 별도로 독립하는 것을 확약받았다. 같은 해 7월 12일 영국령 파키스탄 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취임했다.
[파키스탄, 인도와 분리 독립]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 수년간의 노력 끝에 파키스탄을 인도와는 별도로 분리 독립시키는 데 성공하며 파키스탄의 국부가 되었다.
1947년 8월 14일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할 때, 파키스탄은 인도와는 별도로 분리 독립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영국령 자치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에 취임하여 이슬람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고, 인도 각지에 흩어진 무슬림 파키스탄인들의 귀국과 정착에 힘썼다. 동시에 파키스탄 제헌의회 의원에 선출되었고 의장직을 겸했다.
1948
[파키스탄 국부, 병환으로 서거]
초대 총독으로서 국가 기반을 다지던 중 결핵과 폐렴, 과로가 악화되어 카라치에서 서거했다.
그는 결핵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아왔으며, 1940년대 어느 시점에 결핵에 걸린 뒤 그의 여동생과 가까운 관계자들만 그의 상태를 알았다. 1948년 병세가 악화되었고, 9월 1일 출혈로 쓰러져 혈압이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9월 11일 카라치에서 결핵과 폐암으로 사망했다. 파키스탄의 완전 독립을 보지는 못했지만, 파키스탄의 자치 독립을 이끌어낸 인물로 평가되어 파키스탄의 국부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