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로마치 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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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역사, 일본사, 막부, 무로마치 시대, 무사 정권 + 카테고리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중심으로 건립하여 약 240년간 일본을 지배한 무사 정권입니다.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명나라와의 감합 무역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금각사와 은각사로 대표되는 독자적인 무로마치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비록 오닌의 난 이후 권위가 추락하며 전국 시대의 혼란을 겪었으나, 현대 일본 문화의 원형을 정립한 중대한 역사적 전환기였습니다.

주요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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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333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닛타 요시사다의 공격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무가 정권의 시대가 일단락되고 천황 중심의 정치가 부활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이 사건은 아시카가 가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막부의 유력한 고케인이었으나 고다이거 천황의 토막 운동에 가담하여 육파라 탐제 부대를 격파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공략하면서 호조씨 일족이 자결하며 가마쿠라 막부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로써 140여 년간 이어진 일본 최초의 막부 체제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건무의 신정 개시]

교토로 복귀한 고다이거 천황이 친정 체제를 선포하며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공가 중심의 정책은 막부를 무너뜨린 무사 계급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이는 새로운 무가 정권이 탄생하게 되는 정치적 불씨가 되었습니다.

천황은 가마쿠라 시대의 관습을 부정하고 절대적인 황권 강화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토지 보상 문제에서 무사들이 소외되면서 정권의 지지 기반이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무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천황 세력과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1335

[나카센다이의 난 발발]

호조씨의 잔당들이 가마쿠라를 점령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천황의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출병했습니다. 다카우지는 반란을 진압한 뒤 가마쿠라에 머물며 독자적인 논공행상을 실시했습니다. 사실상 천황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무가 세력을 구축한 사건입니다.

다카우지는 호조 도키유키의 군대를 격파하고 가마쿠라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진압 후 교토로 돌아오라는 천황의 명령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정동대장군이라 칭하며 세력을 과시했습니다.
이후 다카우지는 자신을 토벌하러 온 신정부군과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1336

[미나토가와 전투의 승리]

규슈에서 군세를 재정비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로 진격하여 신정부군을 대파했습니다.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전사하며 천황 세력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 승리로 다카우지는 교토를 점령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다카우지는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운용하는 대규모 공세를 펼쳐 신정부군을 압도했습니다.
승리 후 교토에 입성한 다카우지는 지묘인통의 광명천황을 새롭게 옹립했습니다.
반면 고다이거 천황은 요시노로 도망쳐 남조를 세우면서 일본의 남북조 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건무식목 제정]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새로운 정권의 통치 방침을 담은 건무식목 17조를 발표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선정을 계승하면서도 교토를 통치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습니다. 사실상 무로마치 막부의 헌법이자 건국 선언문 역할을 했습니다.

절제와 검소, 법질서 확립을 강조하며 무사들의 민심을 수습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막부의 위치를 가마쿠라가 아닌 교토로 확정한 것이 이전 정권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무로마치 막부 정치 체제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1338

[초대 쇼군 다카우지 취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북조 천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써 아시카가 가문에 의한 무가 정권인 무로마치 막부가 공식적으로 출범했습니다. 쇼군은 전국 무사들의 영수로서 실질적인 일본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다카우지는 동생 다다요시에게 정무를 맡기고 자신은 군사권을 장악하는 이원 통치 체제를 택했습니다.
교토 내 니조 타카쿠라에 막부 관저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행정 기구를 조직했습니다.
이는 향후 200여 년간 이어질 아시카가 쇼군 시대의 위대한 시작이었습니다.

1349

[막부 내부의 권력 갈등]

쇼군의 집사 고 모로나오와 동생 다다요시 사이의 대립이 극에 달하며 막부 내분이 발생했습니다. 보수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다다요시와 신흥 무사 세력을 대변하는 모로나오의 충돌이었습니다. 이는 막부의 안정을 저해하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로 발전했습니다.

다다요시는 모로나오의 전횡을 비판하며 그의 축출을 시도했으나 군사력에서 밀려 실각했습니다.
이후 다다요시는 남조에 투항하여 형인 다카우지에게 대항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막부 핵심 인물들의 분열은 전국의 무사들이 두 파벌로 나뉘어 싸우는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1350

[관오의 소란 발발]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형제의 갈등이 전면적인 내전으로 번졌습니다. 남북조의 전쟁과 막부 내부의 분열이 뒤섞이면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쇼권의 권위가 도전받으며 막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 시기였습니다.

이 내전은 단순한 파벌 싸움을 넘어 가문 내부의 생존을 건 치열한 투쟁이었습니다.
다카우지는 한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시적으로 남조에 항복하는 전략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약 2년간 이어진 이 혼란은 다다요시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1352

[무사시노 전투의 대결]

다카우지가 간토 지역의 남조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 직접 원정을 떠나 승리했습니다. 닛타씨와 호조씨의 잔당 세력을 물리치며 동쪽 지역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이로써 막부는 관동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다카우지는 직접 기마대를 이끌고 적의 본진을 타격하는 용맹함을 보였습니다.
승리 후 가마쿠라부에 가마쿠라 구보를 설치하여 관동 관리를 전담하게 했습니다.
중앙과 지방의 균형을 맞추려는 다카우지의 통치 전략이 돋보인 전투였습니다.

1358

[2대 쇼군 요시아키라 취임]

초대 쇼군 다카우지의 서거 후 아들 요시아키라가 막부를 계승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시대의 내란 상흔을 치유하고 막부 행정 조직을 정비하는 데 힘썼습니다. 남북조의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정권의 연속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요시아키라는 유력 수호 대명사들의 세력을 견제하며 쇼군의 독자적 권한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관령 제도를 정비하여 막부 집행부의 효율성을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록 재임 기간은 짧았지만 3대 쇼군 요시미쓰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발판을 닦았습니다.

1367

[호소카와 요리유키 관령 기용]

어린 요시미쓰를 보좌하기 위해 유력 영주인 호소카와 요리유키가 관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막부의 법질서를 엄격히 세우고 경제 정책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켰습니다. 쇼군 중심의 중앙 집권화를 위한 초석을 놓은 인물입니다.

요리유키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금지하고 무사들에게 유교적 도덕심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영토 분쟁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막부에 대한 하급 무사들의 신뢰를 회복했습니다.
이 시기의 안정은 훗날 요시미쓰가 전성기를 이끄는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1368

[3대 쇼군 요시미쓰 취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쇼군에 취임하며 무로마치 막부 최고의 황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감각으로 남북조 합일을 이뤄내고 쇼군의 권위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국내외적으로 막부의 위상을 가장 높인 지도자로 평가받습니다.

취임 초기에는 요리유키의 보좌를 받았으나 점차 친정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유력 수호 대명사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의 권한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는 단순한 무사 계급의 수장을 넘어 국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1378

[꽃의 고소 완성]

교토 무로마치 지역에 화려하고 웅장한 새로운 막부 관저인 '꽃의 고소'를 건립했습니다. 이후 이 지역의 이름을 따서 이 시기의 막부를 '무로마치 막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쇼군의 권력과 문화적 세련미를 동시에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이 관저는 천황의 어소와 인접하여 쇼군이 정국을 주도하기에 최적의 위치였습니다.
내부에는 계절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하나노고쇼(꽃의 고소)'라는 아름다운 별칭을 얻었습니다.
이곳에서 요시미쓰는 공가와 무가를 아우르는 화려한 사교 문화를 주도했습니다.

1391

[명덕의 난 진압]

막부의 권위에 도전하던 11개 국의 수호 대명사 야마나 우지키요를 토벌했습니다. 쇼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반란군을 제압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실천했습니다. 대형 영주들의 세력을 억제하여 막부의 안정성을 극대화한 사건입니다.

야마나씨는 당시 '육분일전(전국의 6분의 1을 차지함)'이라 불릴 만큼 막강한 세력이었습니다.
요시미쓰는 교묘한 이간책과 과감한 공격을 병행하여 그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승리 이후 막부에 대항할 만한 지방 세력은 당분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392

[남북조 시대의 종결]

요시미쓰의 중재로 남조의 천황이 북조에 신기를 전달하며 60여 년간의 분열을 끝냈습니다. 이로써 일본은 다시 하나의 천황 아래 통합되었고 막부의 정통성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전국적인 내란이 종료되며 일본 역사에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습니다.

요시미쓰는 남조 측에 양위와 교대 통치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여 합의를 끌어냈습니다.
비록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나 남조가 소멸하면서 막부의 가장 큰 정치적 불안 요소가 제거되었습니다.
통합된 일본은 이제 쇼군의 명령 한마디로 움직이는 거대한 조직체가 되었습니다.

1394

[요시미쓰 태정대신 취임]

요시미쓰가 무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조정 최고의 관직인 태정대신에 올랐습니다. 이는 무사 계급이 공가 사회의 정점에 섰음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쇼군은 이제 일본의 군사, 정치,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절대 군주가 되었습니다.

태정대신 취임 후 요시미쓰는 사실상 '일본 국왕'으로서 대외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정의 인사권과 제사권까지 장악하며 천황의 권위를 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의복과 의례를 도입하여 막부의 위엄을 세웠습니다.

1397

[금각사(로쿠온지) 건립]

요시미쓰가 자신의 은거지로 북산 산장을 짓고 찬란한 금색의 사리전인 금각을 완공했습니다. 이는 공가 문화와 무가 문화가 결합된 '북산 문화'의 결정체로 평가받습니다. 막부의 막강한 재력과 예술적 안목을 전 세계에 과시한 건축물이었습니다.

금각의 1층은 공가 양식, 2층은 무가 양식, 3층은 불교 양식으로 지어져 문화적 융합을 보여줍니다.
요시미쓰는 이곳에서 외교 사절을 맞이하며 일본의 번영을 홍보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무로마치 시대의 영광을 전하고 있습니다.

1401

[명나라와 공식 국교 수립]

요시미쓰가 명나라 성조 영락제에게 국서를 보내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습니다.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으며 대외적인 통치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습니다. 이는 막부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실리적인 외교의 시작이었습니다.

요시미쓰는 조공 형식을 취하면서도 실질적인 무역 이익을 얻는 데 집중했습니다.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대거 수용하여 일본의 학문과 예술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이 국교 수립은 아시아 평화 질서 속에서 일본이 핵심 주체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404

[감합 무역 공식 개시]

명나라와 공식적인 무역 증명서인 '감합'을 사용하여 합법적인 교역을 시작했습니다. 왜구의 활동을 억제하고 막부가 무역권을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 무역을 통해 들어온 구리와 서적 등은 일본 경제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감합은 가짜 무역선을 가려내기 위한 쪼개진 확인증으로, 양국 간의 신뢰를 상징했습니다.
막부는 이 무역으로 얻은 이익을 건축과 문화 사업에 투입하여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수호 대명사들도 이 무역에 참여하려 애쓰면서 막부에 대한 충성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408

[아시카가 요시모치 친정 개시]

요시미쓰의 사후 4대 쇼군 요시모치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정국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친명 정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했습니다. 막부의 내실을 다지며 대명사들과의 협치 체제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요시모치는 지나치게 공가화된 막부의 분위기를 다시 무사 중심의 질박함으로 돌리려 했습니다.
명나라와의 국교를 잠시 끊고 일본의 자존감을 세우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막부는 큰 전쟁 없이 비교적 안정된 평화기를 누렸습니다.

1419

[응영의 외침 발발]

조선 세종 대에 대마도의 왜구를 소탕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군이 파견되었습니다. 막부는 이를 일본 침공으로 간주하고 긴급 방어 체계를 가동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막부는 조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며 왜구 통제에 더욱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

막부는 규슈의 무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적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조선군의 목표가 단순한 왜구 소탕임을 확인한 후 평화적인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후 막부와 조선 사이에는 사절단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며 동아시아 안정을 꾀했습니다.

1428

[정장의 덕정 잇키 발생]

교토와 주변 지역의 농민들이 부채 탕감을 요구하며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막부 성립 이후 민중의 조직적인 저항이 표면화된 첫 번째 중대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지배 계급의 권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농민들은 고리대금업자의 창고를 습격하고 장부를 불태우는 등 과격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막부는 무력 진압을 시도했으나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일부 요구를 수용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은 하층민들의 자각과 연대가 향후 사회 변혁의 힘이 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

1429

[6대 쇼군 요시노리 취임]

쇼군 후계자가 없어 제비뽑기로 선출된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실추된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만인恐怖(만인공포)'라 불리는 공포 정치를 펼쳤습니다. 강력한 철권통치로 잠시나마 막부의 통제력을 되살린 지도자였습니다.

요시노리는 사소한 잘못도 가차 없이 처벌하며 대신들을 압박했습니다.
명나라와의 무역을 재개하여 경제력을 확보하고 군사력을 대폭 증강시켰습니다.
그의 엄격한 통치는 막부를 일시적으로 강하게 만들었으나 내부적인 원한을 깊게 쌓았습니다.

1441

[가키쓰의 난과 쇼군 암살]

유력 대명사인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연회 도중 쇼군 요시노리를 기습하여 살해했습니다. 쇼군의 목숨이 신하의 손에 의해 사라진 유례없는 참극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쇼군의 절대적인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막부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공포 정치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대명사들이 선제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결과였습니다.
암살 사건 이후 막부 군대는 반란군 진압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무능함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쇼군은 대명사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1449

[8대 쇼군 요시마사 취임]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쇼군에 오르며 장기 집권을 시작했습니다. 정치는 부인 히노 도미코와 측근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예술과 풍류에만 몰두했습니다. 그의 무관심과 후계 문제 방치는 장차 일본을 지옥으로 몰아넣을 내전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요시마사는 정사를 돌보기보다 차(茶)와 정원 꾸미기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습니다.
이 시기 일본은 극심한 기근과 재난에 시달렸으나 막부는 적절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쇼군의 권력 누수는 유력 가문들의 세력 다툼을 부추기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1467

[오닌의 난 발발]

쇼군의 후계 문제와 호소카와, 야마나 가문의 대립이 얽히며 교토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10만 명 이상의 무사들이 두 파벌로 나뉘어 수도를 불태우며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일본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었던 이 전쟁은 무로마치 시대를 끝내는 결정적 타격이 되었습니다.

교토의 주요 건축물과 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어 폐허로 변했습니다.
전쟁은 10년 넘게 이어지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완전히 마비시켰습니다.
이때부터 힘이 곧 법인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하며 전국 시대의 혼란기로 접어들었습니다.

1477

[오닌의 난 공식 종결]

승자도 패자도 없이 지친 영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며 11년의 내전이 끝났습니다. 교토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막부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이제 일본은 중앙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지방 할거 시대로 돌입했습니다.

쇼군은 더 이상 대명사들을 중재하거나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경제 기반이 붕괴된 농민들이 전국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중앙 정권의 몰락과 함께 지방의 신흥 세력들이 독자적인 성장을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1489

[은각사(지쇼지) 건립]

요시마사가 은퇴 후 거처로 동산 산장을 짓고 소박한 멋이 담긴 은각을 완공했습니다. 이는 화려함보다는 내면의 깊이를 중시하는 '동산 문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다도와 수묵화 등 오늘날 일본 전통 문화의 근간이 이때 완성되었습니다.

금각사와 대비되는 수수한 목조 양식은 와비-사비(부족함 속의 아름다움) 정신을 반영합니다.
요시마사는 정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문화적 도피를 하며 말년을 보냈습니다.
이 시기의 예술 양식은 현대 일본인의 미의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493

[명응의 정변 발생]

관령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쇼군 요시타네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쇼군을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신하가 쇼군을 갈아치우는 명백한 하극상의 전형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막부의 최고 지도자조차 신하의 뜻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쇼군은 특정 영주 가문의 도구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막부의 실권은 완전히 호소카와 가문 등 유력 가신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지방의 영주들은 이제 막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전쟁을 벌이는 '전국 시대'를 열었습니다.

1508

[요시타네 쇼군의 복권]

추방당했던 요시타네가 지방 영주인 오우치 요시오키의 지원을 받아 교토로 복귀하며 쇼군직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힘이 아닌 외부 세력의 힘에 의존한 일시적인 영광이었습니다. 막부 정치가 지방 세력의 이권 다툼에 휘둘리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오우치 가문은 쇼군을 옹립함으로써 중앙 정계의 패권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요시타네는 허울뿐인 쇼군직을 지키기 위해 오우치씨에게 무리한 보상을 약속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막부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키는 악순환을 가져왔습니다.

1521

[12대 쇼군 요시하루 취임]

혼란의 정점 속에서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12대 쇼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지방 대명사들의 영향력 아래서 보냈으며 수시로 교토를 탈출하여 피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쇼군이 정해진 처소조차 갖지 못할 정도로 막부는 쇠락해 있었습니다.

요시하루는 미요시 가문 등 신흥 세력들의 압박을 견디며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전국적으로는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켄신 등 강력한 다이묘들이 독자적인 영토 국가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막부는 더 이상 일본 전체를 다스리는 정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1546

[13대 쇼군 요시테루 취임]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쇼군직을 계승하며 막부 부흥을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습니다. 그는 검술의 달인이었으며 직접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중재안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정무를 펼쳤습니다. '검성 쇼군'이라 불리며 무로마치 막부의 자존심을 지키려 분투했습니다.

요시테루는 쇼군 가문의 전통적인 권위를 내세워 지방 전쟁을 멈추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경계한 실권자 미요시 가문과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음모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군분투는 기울어가는 막부의 마지막 불꽃과도 같았습니다.

1549

[사비에르의 내일과 천주교 전래]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하여 천주교를 처음으로 전파했습니다. 이는 무로마치 말기 일본 사회에 새로운 서구 문물과 가치관이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막부 정권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종교와 무역이 결합된 새로운 흐름이 생겨났습니다.

조총과 화약 등 서양의 무기 기술이 함께 유입되면서 전국 시대의 전쟁 양상이 바뀌었습니다.
남만 무역이라 불리는 서구와의 교역은 지방 다이묘들에게 강력한 부와 권력을 선사했습니다.
막부는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통제할 힘이 이미 소멸한 상태였습니다.

1565

[영록의 변과 쇼군 자결]

미요시 삼인중이 이끄는 군대가 쇼군 관저를 습격하여 요시테루 쇼군을 살해했습니다. 요시테루는 수많은 적군을 직접 검으로 베며 용감히 저항했으나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상징적 부활을 꿈꾸던 희망이 완전히 꺾인 사건입니다.

암살자들은 쇼군의 침소를 포위하고 다다미를 방패 삼아 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쇼군직은 한동안 공석으로 남으며 막부는 식물 인간 상태가 되었습니다.
요시테루의 동생 요시아키는 형의 복수와 막부 재건을 위해 전국의 강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1568

[요시아키의 입쿄와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교토를 점령했습니다. 요시아키는 15대 쇼군에 취임하며 막부의 권위를 일시적으로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노부나가의 강력한 무력에 기반한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불안한 동거가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의 대의를 위해 쇼군의 권위를 전략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요시아키는 자신이 실제 통치권을 가졌다고 믿었으나 노부나가는 그를 허수아비로 취급했습니다.
두 세력의 갈등은 일본 전체의 패권을 두고 벌어지는 새로운 전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573

[무로마치 막부의 공식 멸망]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해 군사를 일으킨 요시아키 쇼군이 패배하고 교토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로써 아시카가 가문에 의한 무로마치 막부 체제는 237년 만에 공식적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일본은 이제 중세 막부 시대를 넘어 근대적인 전국 통일의 시대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요시아키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노부나가 포위망을 만들 것을 호소했으나 실패했습니다.
노부나가는 마키시마 성을 점령하고 요시아키를 강제로 추방하여 막부 행정 조직을 해체했습니다.
비록 요시아키는 죽을 때까지 쇼군직을 유지했다고 주장했으나 실질적인 정권으로서의 기능은 이날로 멈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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