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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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1597년, 칠천량 해전의 참패로 조선 수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제해권을 상실합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다시 사령관으로 복귀해 남은 13척의 전선을 수습합니다. 수백 척의 일본 대함대가 턱밑까지 밀려온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명량 해협의 거친 조류와 '필사즉생'의 결의를 무기 삼아 적을 맞이합니다. 적장 구루지마를 참수하고 31척을 격침시키며 일본의 서해 진출을 완벽히 봉쇄한 이 전투는, 가장 압도적인 열세를 극복해 낸 세계 해전사 초유의 극적인 반전이자 임진왜란의 향방을 바꾼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연표
1597
1597
[억울한 하옥과 고문]
조정의 오해와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파직당합니다. 이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조선 수군의 가장 큰 기둥이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음력 1월 11일에 파직교서가 내려졌고, 양력 2월 26일(음력 1월 말~2월 초경)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원균의 모함과 선조의 의심이 겹쳐 일어난 비극으로, 훗날 칠천량 해전의 참패를 불러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1597
[백의종군의 시작]
조정 대신들의 간곡한 구명 운동 덕분에 간신히 사형을 면하게 됩니다. 벼슬 없이 평복을 입고 군에 복무하라는 처분을 받고 옥문을 나섭니다. 참담한 심정 속에서도 다시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우의정 정탁이 '신구차'를 올려 목숨을 구했습니다. 양력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 출옥하였으며,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을 명받고 순천으로 향하며 묵묵히 전황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1597
[조선 수군의 궤멸]
새로운 지휘관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합니다. 거북선을 포함한 수백 척의 전선이 불타고 수만 명의 수군이 목숨을 잃습니다. 바다의 주도권이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가 버립니다.양력 8월 28일(음력 7월 16일)에 벌어진 칠천량 해전으로,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겪은 유일하고도 가장 뼈아픈 패배입니다. 판옥선 160여 척이 침몰했고 원균, 이억기, 최호 등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했습니다.
1597
[통제사로의 기적적 귀환]
수군의 참패 소식에 경악한 임금은 다급히 이전의 지휘관을 다시 수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패잔병 몇 명과 빈약한 무기뿐이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다시 한번 그의 어깨에 얹어집니다.양력 9월 13일(음력 8월 3일), 진주 손경례의 집에서 선조의 재임명 교서를 받습니다. 선조는 교서에서 "과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며 자신의 과오를 우회적으로 인정했습니다.
1597
[신에게는 12척이 있습니다]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임금의 밀지에 결연한 반대 상소를 올립니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적들이 감히 조선의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이라며 강한 의지를 천명합니다. 이 상소로 수군은 간신히 해체 위기를 모면합니다.양력 9월 25일(음력 8월 15일)에 작성되었습니다.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미신불사 초적불감(微臣不死 楚敵不敢)"이라는 역사에 남을 명문장이 등장한 상소로, 바다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가 돋보입니다.
1597
[남은 전선의 수습]
칠천량에서 간신히 도망쳐 온 소수의 전선들을 마침내 인수합니다. 군사들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무장 상태도 형편없었습니다. 하지만 반격의 불씨가 될 소중한 함대가 다시 꾸려졌습니다.양력 9월 28일(음력 8월 18일), 회령포(현재의 전남 장흥)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끌고 온 12척의 판옥선을 수습했습니다. 이후 백성들이 가져온 1척을 더해 총 13척의 함대를 구성하게 됩니다.
1597
[이진으로의 진영 이동]
적의 동태를 더욱 가까이서 살피고 유리한 전장을 찾기 위해 함대를 이동시킵니다. 수군의 규모가 작아 적의 대함대와 정면승부를 벌일 수 없었기에 지형지물을 활용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병사들은 다가오는 적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낍니다.해남 이진(현 해남군 북평면)으로 진을 옮겼으나, 당시 이순신은 극심한 토사곽란을 앓아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습니다. 일본군 선봉대가 인근까지 접근해 오면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입니다.
1597
[어란포에서의 소규모 교전]
적의 정찰선 여덟 척이 조선 수군 진영을 기습해 옵니다. 함대를 지휘하여 즉각 반격에 나서자 적선들은 재빨리 도망칩니다. 이 짧은 교전을 통해 적이 턱밑까지 다가왔음을 확인하게 됩니다.양력 10월 8일(음력 8월 28일), 일본군 선봉대가 조선 수군의 규모와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벌인 탐색전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적의 유인에 말려들지 않고 진영을 굳게 지켰습니다.
1597
[벽파진 해전의 승리]
열세 척의 적선이 야간을 틈타 진영을 기습합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조선 수군은 맹렬하게 함포를 쏘아 올리며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합니다. 병사들은 연이은 소규모 승리로 조금씩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양력 10월 17일(음력 9월 7일), 진도 벽파진에서 벌어진 야간 전투입니다. 일본군의 기습을 완벽하게 읽어내어 물리쳤고, 이는 대규모 회전을 앞두고 아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597
[결전의 전장, 우수영]
수백 척에 달하는 적의 대함대가 다가오자, 물살이 가장 거센 길목으로 함대를 옮깁니다. 좁은 해협의 빠른 조류만이 압도적인 숫자의 열세를 극복할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전투를 하루 앞두고 진영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릅니다.양력 10월 25일(음력 9월 15일), 진도 벽파진에서 해남 우수영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이곳 앞바다가 바로 '울돌목(명량)'으로, 폭이 좁고 물살이 험악하여 소수의 배로 다수의 배를 방어하기에 최적의 요새였습니다.
1597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모아 놓고 단호한 목소리로 마지막 훈시를 내립니다. 두려움에 떠는 부하들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만 살 수 있다는 결연한 투지를 심어줍니다. 이 연설로 부대의 정신 무장이 완성됩니다.그 유명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와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 한 사내가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의 사내도 두렵게 할 수 있다)"라는 명언을 남긴 순간입니다. 탈영을 막고 배수진의 결의를 다졌습니다.
1597
[명량 해전의 발발]
아침 안개가 걷히자 엄청난 규모의 적 함대가 해협으로 밀려듭니다. 조류마저 적에게 유리하게 밀려들고 있어 조선 수군은 최악의 불리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역사적인 대전투의 막이 오릅니다.양력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오전, 일본 수군은 순조로운 밀물을 타고 명량 해협으로 진입했습니다. 선두에 서서 전투에 참여한 적선은 133척이었으나, 뒤에서 대기하던 함선까지 합치면 330여 척에 달하는 거대한 함대였습니다.
1597
[대장선의 고군분투]
거대한 적의 위용에 겁을 먹은 아군 함선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납니다. 오직 총사령관이 탄 배 한 척만이 물살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빗발치는 포탄을 막아냅니다. 홀로 수십 척의 적선을 상대하며 고립무원의 사투를 벌입니다.후방으로 물러난 안위와 김응함 등의 배를 이순신이 직접 초요기(장수를 부르는 깃발)를 올려 불러들입니다. 대장선이 단독으로 적의 선봉에 맞서 화포를 쏟아부으며 시간을 버는 사이, 조류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치열한 버티기가 전개되었습니다.
1597
[돌아온 아군과 격전]
사령관의 호통에 제정신을 차린 부하 장수들이 마침내 대장선 곁으로 합류합니다. 적선들이 한 배를 겹겹이 포위하고 배 위로 올라타려 하자, 숨 막히는 백병전과 화포 공격이 동시에 벌어집니다. 목숨을 건 혈투 속에서 아군의 방어선이 기적적으로 버텨냅니다.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앞장서서 합류하자 일본군은 안위의 배를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개미떼처럼 적들이 배에 기어오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순신의 대장선과 다른 판옥선들이 화포를 쏘아 구출해 냅니다.
1597
[적장 구루지마의 죽음]
치열한 교전 중 바다에 빠진 붉은 갑옷을 입은 적의 최고 지휘관을 발견합니다. 아군이 그를 끌어올려 참수하고 돛대에 매달자, 적의 사기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칩니다. 팽팽했던 전투의 흐름이 마침내 뒤집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항복한 일본인 포로 준사가 바다에 뜬 시신을 보고 적의 수군 장수 '구루지마 미치후사'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순신의 명으로 그의 머리를 베어 대장선 돛대에 효수하자, 이를 본 일본 수군은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1597
[물살이 아군을 돕다]
정오를 넘기며 거칠게 밀려들던 해협의 조류가 마침내 방향을 바꿉니다. 이제 거센 물길은 조선 수군의 든든한 아군이 되어 적을 덮치기 시작합니다. 이 거대한 자연의 힘을 등에 업고 함대는 맹렬한 총공세로 전환합니다.울돌목의 썰물이 밀물로 바뀌는 역조(逆潮)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좁은 해협에서 물살이 반대로 바뀌자 빽빽하게 몰려 있던 일본 군선들은 서로 부딪히고 박살 나며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지형과 조류를 완벽하게 이용한 전술이 빛을 발했습니다.
1597
[31척 격침과 적의 패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적 함대를 향해 조선 수군의 화포가 불을 뿜습니다. 수십 척의 적선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고 바다는 핏빛으로 물듭니다. 살아남은 적들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앞다투어 외해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의 군선 31척이 완전히 격침되었고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반면 조선 수군은 전선 손실이 단 한 척도 없는 초유의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은 완전히 분쇄되었습니다.
1597
[당사도로의 후퇴와 휴식]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남은 적의 보복을 피하고 극도로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기 위해 함대를 신속히 물립니다. 전투의 짙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바다를 뒤로하고 새로운 거점을 향해 항해를 계속합니다.양력 10월 27일(음력 9월 17일), 명량 앞바다는 정박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적이 다시 야습을 감행할 우려가 있어 신안군 당사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 날의 극적인 전투를 "천행(天幸, 하늘이 내린 요행)이었다"라고 겸허히 기록했습니다.
1597
[서해안 북상과 전력 보존]
적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고 함대의 귀중한 전력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서해안을 따라 멀리 북상합니다. 이곳에서 흩어진 전열을 가다듬고 다가올 새로운 전투를 위한 긴 호흡을 준비합니다.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수군은 점차 안정을 되찾습니다.양력 11월 9일(음력 9월 30일), 군산 고군산도까지 북상하여 완전한 안전을 확보한 뒤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 기적적인 승리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면서 조선은 다시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1597
[고하도 통제영 건설]
매서운 겨울이 다가오자 목포 앞바다의 섬에 새로운 수군 본부를 건설합니다. 이곳에서 군량미를 비축하고 병선을 새로 건조하며 궤멸했던 수군을 다시 강군으로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절망의 바다에서 피어난 희망의 불꽃이 온 나라로 퍼져나갑니다.양력 12월 8일(음력 10월 29일)부터 목포 고하도에 106일 동안 머물면서 소금을 구워 팔고 군량미를 비축했습니다. 명량 해전 이후, 단 13척뿐이었던 전선은 이곳에서 40여 척으로 늘어나며 조선 수군 재건의 탄탄한 발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