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 웨스트

num_of_likes 111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배우, 극작가, 각본가, 가수, 코미디언, 출판업자, 섹스 심벌 영화/드라마 배우

메이 웨스트는 미국의 배우, 극작가, 각본가이자 시대를 앞서간 섹스 심벌입니다. 공연 대본을 직접 쓰고 영화 시나리오에 참여했으며, 유색인종을 출연시키기 위해 노력한 선구자입니다. 금기 소재를 과감히 다루고 검열에 저항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한때 세계 최고 출연료를 받는 여배우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893

[메이 웨스트 탄생]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메리 제인 웨스트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독일계 어머니와 아일랜드계 아버지를 두었으며, 아버지는 권투선수이자 갱단원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1893년 8월 17일 뉴욕 브루클린 부시윅과 그린포인트 사이의 윌러비 애버누에서 메리 제인 웨스트로 태어났다. 독일계 어머니는 과거 배우 지망생이었고, 아일랜드계 아버지는 권투선수이자 갱단원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1901

[8세에 공연계 데뷔]

8살 때 로열 시어터의 아마추어 대회에 '베이비 메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해 우승하며 공연계에 데뷔했다. 이후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일에 전념했다.

1901년 8살 때 로열 시어터(Royal Theater)의 아마추어 대회에서 베이비 메이(Baby Mae)라는 이름으로 출전해 우승하면서 공연계에 데뷔했다. 지역에서 일찍 성공을 거두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그만 두고 일에 전념했다. 체조, 아크로바틱 등을 배웠으며 사자 조련법을 습득하기도 했다.

1906

[13세에 레퍼토리 극단 입단]

13살에 지역 레퍼토리 극단에 입단하여 '톰 아저씨의 오두막' 등에서 아역으로 출연했으며, '리처드 3세'에서는 남장을 하고 왕자 역을 맡기도 했다.

13살에 지역 레퍼토리 극단(stock company)에 들어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 등에서 아역으로 출연했는데, '리처드 3세'에서 남장을 하고 왕자 역을 맡기도 했다.

1912

[브로드웨이 뮤지컬 코미디 'Winsome Widow' 출연]

플로렌즈 지그펠드가 제작한 뮤지컬 코미디 'Winsome Widow'에 출연하며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1912년 4월 플로렌즈 지그펠드가 만든 뮤지컬 코미디 'Winsome Widow'에 출연했다.

1913

[첫 단독 코미디 공연 'Original Brinkley Girl' 진행]

첫 단독 코미디 공연 'Original Brinkley Girl'을 무대에 올리며 성인 공연자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1913년엔 첫 단독 코미디 공연 'Original Brinkley Girl'을 올렸다.

1918

[흑인 춤 '쉬미'를 유행시키며 브로드웨이 스타 등극]

흑인 춤이었던 '쉬미(Shimmy)'를 레뷰 'Sometime'에서 선보이며 이를 빠르게 유행시켰고, 이를 계기로 브로드웨이 스타로 발돋움했다. 당시 쉬미는 외설적으로 여겨졌다.

웨스트는 재즈가 흑인음악이라고 천대 받던 시절부터 재즈밴드를 고용했던 첫 백인 보드빌 스타다. 또한 흑인음악과 춤을 본인의 공연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훗날 영화에서도 재즈, 스윙, 블루스에 기반한 노래들을 불렀다. 1918년 웨스트가 브로드웨이 스타가 되게 해준 쉬미(Shimmy)도 흑인 춤이었다. 웨스트는 레뷰 'Sometime'에서 쉬미를 선보이며 이를 빠르게 유행시켰다. 몸은 고정한 상태에서 어깨만 번갈아 앞뒤로 흔드는 이 춤은 당시 외설적으로 여겨졌다.

1921

[첫 저작권 작품 'The Ruby Ring' 발표]

자신이 처음 저작권을 타낸 작품인 단막극 'The Ruby Ring(루비 반지)'을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역량을 드러냈다.

웨스트가 처음 저작권을 타낸 작품은 1921년의 단막극 'The Ruby Ring(루비 반지)'다.

1922

['The Hussy' 공동 집필]

애들라인 라이츠바크와 함께 'The Hussy(제멋대로인 여자)'를 공동 집필하며 작가 활동을 이어갔다.

1922년엔 애들라인 라이츠바크(Adeline Leitzbach)와 'The Hussy(제멋대로인 여자)'를 썼다.

1926

[브로드웨이 연극 'Sex' 대본, 연출, 주연]

대본, 연출, 주연을 모두 맡은 첫 브로드웨이 연극 'Sex'를 무대에 올렸다. 매춘, 마약 등 당대 금기 소재들을 한꺼번에 다룬 파격적인 문제작으로 주목받았다.

1926년 웨스트는 대본, 연출을 맡은 첫 브로드웨이 연극 주연작 'Sex'를 올렸다. 매춘, 마약 등 금기 소재들을 한꺼번에 다룬 문제작이었다. 이어 1927년 1월 차기작 'The Drag'를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서 시연한 뒤 뉴욕에서 올리려 했으나 동성애를 소재로 삼았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허용 불가 판정을 받았다.

1927

[연극 'Sex' 공연으로 공공외설죄 체포]

연극 'Sex'가 뉴욕악덕근절협회로부터 공공외설죄로 고발당해 경찰에 체포되었다. 열흘 금고형에 처해지며 하루아침에 전미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1927년 뉴욕악덕근절협회(NYSSV; New York Society for the Suppression of Vice)가 'Sex'를 공공외설죄로 걸고 넘어졌다. 다른 출연 배우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돼 열흘 금고형에 처해지면서 하루 아침에 전미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웨스트는 선행 보상(good behaviour)으로 감형을 받아 이틀 일찍 출소했다.

1928

[브로드웨이 연극 '다이아몬드 릴' 성공으로 할리우드 주목]

직접 쓰고 주연한 브로드웨이 연극 '다이아몬드 릴(Diamond Lil)'의 로열 시어터 공연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할리우드가 메이 웨스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1928년 웨스트가 직접 쓰고 주연한 브로드웨이 연극 '다이아몬드 릴(Diamond Lil)'의 로열 시어터(Royale Theatre) 공연은 할리우드가 웨스트를 주목하게 만든 계기였다. 하지만 영화사 간부들은 웨스트의 작품들은 선정성 때문에 영화화가 불가능하며 특유의 무대 위 페르소나도 영화계에선 먹히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고 웨스트는 영화계에서 작가로서도 배우로서도 고용되지 못했다.

1932

[38세에 영화 <나이트 애프터 나이트>로 영화계 데뷔]

38세의 나이에 조지 래프트의 주선으로 영화 <나이트 애프터 나이트>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자신의 출연 장면 대사를 직접 다시 쓰는 조건으로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신 스틸러'로 크게 주목받았다.

그러나 1932년 조지 래프트의 주선으로 래프트의 첫 주연작 <나이트 애프터 나이트>에 나오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웨스트는 이미 38살이었다. 웨스트는 계약 조건으로 자신의 출연 장면 대사를 직접 다시 쓸 수 있게 허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적절한 때에 극의 분위기를 가볍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 대사들 덕분에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신 스틸러가 되면서 크게 주목 받았고 바로 주연으로 올라섰다.

1933

[두 편의 영화 흥행으로 파라마운트 구원 및 케리 그랜트 발굴]

영화 《다이아몬드 릴》과 《나는 천사가 아니다》가 기존 흥행 기록을 깨며 파산 직전이던 파라마운트 픽처스를 구했고, 신인이었던 케리 그랜트를 스타로 발굴하는 데 기여했다.

1933년의 《다이아몬드 릴》과 《나는 천사가 아니다》는 신인이었던 케리 그랜트의 첫 주연작들이기도 한데, 웨스트가 스튜디오 촬영장에서 우연히 그랜트를 발견하고 자신의 연인 역으로 꽂은 덕분이었다. 기존 흥행 기록들을 깨며 제작비의 열 배 이상을 벌어들인 이 두 작품 덕분에 파산 직전이었던 제작사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기사회생했으며 그랜트도 스타가 되었다. 웨스트는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얻어 패션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4

[영화 '벨 오브 더 나인티스'에 듀크 엘링턴 출연 주장]

영화 《벨 오브 더 나인티스》 개봉 시,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듀크 엘링턴과 그의 밴드를 영화에 출연시킬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1934년 개봉한 《벨 오브 더 나인티스》는 리오 매캐리가 연출한 1890년대 배경의 서부극이다.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흑인 음악가들을 영화에 출연시키는 걸 꺼리고 있었는데, 웨스트의 주장 덕에 듀크 엘링턴과 밴드가 웨스트와 함께 영화에 나올 수 있었다. 엘링턴은 그해 파라마운트의 다른 영화에도 참여했다.

1935

[세계 최고 출연료 여배우 등극]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여배우가 되었고, 더 나아가 미국 여성 중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사람으로 등극하며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다음으로 소득이 많은 인물이 되었다.

1935년 웨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여배우가 됐다. 더 나아가 미국 여성 중 가장 많이 버는 사람으로도 꼽혔다. 이제 미국에서 웨스트보다 더 많은 급료를 받는 사람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뿐이라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1937

[헤이스 코드 도입과 보이콧으로 영화계 활동 부진]

헤이스 코드의 본격적인 도입과 촬영 전 대본 검열, 그리고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신문을 통한 보이콧으로 영화계에서 큰 부진을 겪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스트는 1937년 헤이스 코드의 본격적 도입과 함께 부진을 겪기 시작한다. 촬영 전에 대본이 검열을 당했고,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신문을 통해 웨스트를 상대로 보이콧을 벌인 것도 치명적이었다. 영화계에서 표현의 자유가 원천 봉쇄되자 웨스트는 쇼에만 전념하면서 다양한 영상 출연 제안들을 전부 거절했다. 그 중엔 《선셋 대로》(1950), 《여심》(1957),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혼의 줄리에타》(1965), 콜 포터의 뮤지컬, 공중파 형사 드라마 등이 있었다.

1960

[1960년대 검열 해방 후 과거 출연작 재조명]

검열 해방이 시작되면서 과거 출연작들이 다시 활발히 유통되었고, 메이 웨스트는 새로운 세대에게 재조명받으며 다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검열 해방이 시작된 1960년대부터 출연작들이 다시 활발히 유통되면서 웨스트는 새롭게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1966

[로큰롤 커버 앨범 'Way Out West' 및 'Wild Christmas' 발매]

로큰롤 중심의 커버 앨범 'Way Out West'와 크리스마스 앨범 'Wild Christmas'를 발매하며 신세대적인 모습을 선보였다.

1966년에 로큰롤 중심의 커버 앨범 'Way Out West'를 내며 신세대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같은 해 발매한 크리스마스 앨범 'Wild Christmas'도 로큰롤 곡들로 채워져있었다.

1970

[27년 만의 영화 복귀작 '마이라 브레킨리지' 출연]

27년 만의 영화 복귀작인 '마이라 브레킨리지'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훗날 컬트 클래식으로 자리 잡았으나, 유작 '섹스테트'는 흥행에 실패하고 혹평을 받았다.

27년만의 영화 복귀작인 《마이라 브레킨리지》(1970)는 훗날 컬트 클래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유작 《섹스테트》(1978)는 흥행에 더 크게 실패하고 혹평만 받았다.

1972

[로큰롤 앨범 'Balls of Fire' 발매]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도어스 등의 로큰롤 곡들을 커버한 앨범 'Balls of Fire'를 발매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72년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 다시 한 번 도어스 등을 커버한 로큰롤 앨범 'Balls of Fire'를 냈다.

1980

[뇌졸중으로 병원 입원]

말년에 당뇨병, 백내장, 편집증으로 고통받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한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말년에 당뇨병, 백내장, 편집증에 시달렸다. 1980년 여름 뇌졸중으로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메이 웨스트 사망]

뇌졸중으로 입원 후 퇴원하여 로스앤젤레스 자택으로 돌아간 뒤,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80년 여름 뇌졸중으로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11월 22일 사망했다. 사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이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메이 웨스트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