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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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메리 1세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로, 튜더 왕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잉글랜드의 첫 번째 여성 군주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다재다능하고 총명한 공주로 왕실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아버지의 결혼 무효화로 인해 하루아침에 사생아로 강등당하고 어머니와 강제로 생이별하는 지독한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 사후 자신을 배제하려던 정치 세력과 제인 그레이를 무너뜨리고 민중의 지지 속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아버지와 동생이 추진한 개신교 개혁을 무효화하고 가톨릭을 복원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며, 이 과정에서 280명이 넘는 개신교도를 화형에 처해 훗날 '블러디 메리(피의 메리)'라는 오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의 정략결혼, 거짓 임신 스캔들, 잉글랜드 내의 극심한 반발 등 숱한 정치적·개인적 비극을 감내하다 결국 병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녀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가톨릭 신앙은 후계자인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다시금 전면적으로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연표
1516
[메리 1세의 탄생]
잉글랜드 그리니치의 플라센티아 궁전에서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겪은 여러 번의 유산과 사산 끝에 유일하게 유아기를 넘기고 살아남은 귀한 자녀였습니다.그녀의 탄생은 튜더 왕가에 중요한 후계자가 생겼음을 의미했습니다. 비록 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던 아들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왕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가톨릭 유아 세례]
태어난 지 불과 며칠 만에 그리니치의 옵저번트 프라이어스 교회에서 가톨릭 신앙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권력자였던 대법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 대부모로 나섰습니다.이후 그녀의 견진성사는 세례 직후 곧바로 치러졌으며, 솔즈베리 백작부인 마거릿 폴이 대모로 나섰습니다. 이 철저한 가톨릭식 의식은 훗날 그녀가 평생토록 굳건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는 정신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1518
[프랑스 왕세자와의 약혼]
걸음마를 갓 뗀 아주 어린 나이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어린 아들인 프랑스 왕세자 프랑수아와 정략결혼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초기 외교적 약혼은 불과 3년 후에 파기되었습니다.헨리 8세는 딸을 이용해 유럽 강대국들과의 정치적 동맹을 끊임없이 꾀했습니다. 훗날 그녀의 어린 시절 내내 이어질 수많은 외교적 혼인 협상의 첫 번째 신호탄이었습니다.
1520
[프랑스 사절단 앞에서의 연주]
채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공주가 방문한 프랑스 사절단 앞에서 버지널(하프시코드의 일종)을 훌륭하게 연주하며 손님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매우 조숙하고 다재다능한 아이였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의 지극정성 어린 교육 덕분에 그녀는 아홉 살 무렵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았으며 프랑스어, 스페인어, 음악 등을 폭넓게 익혔습니다. 헨리 8세는 베네치아 대사에게 딸이 절대 울지 않는다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1522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약혼]
나이가 훌쩍 많은 사촌이자 당대 유럽 최고의 권력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혼인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 약혼 역시 헨리 8세의 동의하에 몇 년 지나지 않아 취소되었습니다.당시 그녀는 '황제(The Emperour)'라고 적힌 브로치를 달고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이 약혼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황제 카를 5세는 훗날 그녀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시아버지로서 그녀의 인생에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1525
[웨일스 마크 파견]
아버지 헨리 8세에 의해 웨일스 경계를 관할하는 평의회를 주재하기 위해 러들로 성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명목상일지라도 전통적으로 웨일스 공(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왕실 특권을 누리며 실질적인 후계자 대우를 받았습니다.비록 '웨일스 공녀'라는 공식 칭호를 받지는 못했지만, 인문학자 후안 루이스 비베스 등 많은 이들이 그녀를 사실상의 후계자로 대우했습니다. 그녀는 이곳에 자신의 궁정을 꾸리고 3년가량 머물며 왕족으로서의 위상을 과시했습니다.
1528
[런던 인근으로의 영구 귀환]
웨일스 경계 지역에서 지내며 아버지의 궁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생활을 마치고 런던 주변의 홈 카운티 지역으로 완전히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아름답고 비율이 좋은 매력적인 젊은 여성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베네치아 외교관 마리오 사보르냐노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곱고 훌륭한 안색을 지닌 예쁜 아가씨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시기 직후, 부모의 혼인 무효화라는 거대한 폭풍이 그녀의 삶을 덮치게 됩니다.
1531
[우울증과 원인 모를 투병]
이 시기부터 그녀는 불규칙한 월경과 깊은 우울증을 동반한 잦은 병치레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사춘기의 영향인지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헨리 8세가 새로운 결혼을 위해 아라곤의 캐서린을 궁정에서 내쫓으면서 그녀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만나는 것조차 금지당했습니다. 가족이 붕괴되는 끔찍한 과정 속에서 그녀가 겪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질병으로 발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1533
[부모의 혼인 무효 및 사생아 전락]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가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무효로 선언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합법적인 공주에서 하루아침에 사생아 신분으로 끔찍하게 전락하고 말았습니다.헨리 8세는 앤 불린과 재혼하며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녀의 왕위 계승권은 앤 불린이 낳은 갓난아기 엘리자베스(훗날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박탈당해 넘어갔고, 그녀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닌 '레이디 메리'로 격하되어 불리게 되었습니다.
[해트필드 궁전으로의 추방]
그녀를 모시던 개인 궁정이 완전히 해산되고 측근 하인들마저 모두 해고당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이복동생인 갓난아기 엘리자베스의 시중을 드는 하녀와 같은 신분으로 전락하여 하트퍼드셔의 해트필드 궁전으로 쫓겨났습니다.끝까지 앤 불린을 왕비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공주라 주장했던 그녀의 고집은 아버지 헨리 8세의 극심한 분노를 샀습니다. 제한된 움직임과 정신적 압박 속에서 그녀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왕실 의사조차 이를 '가혹한 대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1536
[어머니 캐서린의 죽음]
헨리 8세에 의해 철저히 격리되어 있던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이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의 순간까지도 어머니를 만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던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상실감에 빠졌습니다.캐서린은 피터버러 대성당에 묻혔고, 그녀는 하트퍼드셔의 헌스던에서 반쯤 격리된 채 홀로 슬픔을 삼켜야 했습니다. 일생을 의지했던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에게 가장 지독하고 비통한 시련 중 하나였습니다.
[아버지 헨리 8세에 대한 굴복]
앤 불린이 처형되고 새 왕비가 된 제인 시모어의 중재로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는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부모의 결혼이 불법이었으며 자신 스스로가 사생아임을 명문화한 각서에 서명할 것을 잔혹하게 강요했습니다.그녀는 양심과 신앙에 비추어 끝까지 저항하려 했으나, 끈질긴 협박과 괴롭힘에 지쳐 결국 아버지의 모든 굴욕적인 요구에 굴복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말았습니다. 이 뼈아픈 항복을 통해 그녀는 겨우 궁정으로 복귀하여 개인 생활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1537
[제인 시모어의 죽음과 에드워드의 대모]
왕비 제인 시모어가 마침내 헨리 8세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낳고 며칠 뒤 산욕열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이복동생 에드워드의 대모가 되었고, 왕비의 장례식에서는 수석 조객으로 슬픔을 나누었습니다.적법한 남성 후계자가 태어남에 따라 그녀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헨리 8세가 여전히 그녀의 적출 신분을 인정하지 않자 그녀는 자신을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여성'이라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1540
[토머스 크롬웰의 몰락과 처형]
클레페의 앤과의 불만족스러운 결혼을 주도했던 국왕의 수석 장관 토머스 크롬웰이 왕의 눈밖에 나면서 반역죄로 전격 체포되었습니다. 그에게 씌워진 여러 의심스러운 혐의 중에는 그가 그녀와 직접 결혼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결국 크롬웰은 참수당했고, 클레페의 앤과의 혼인도 무효화되었습니다. 튜더 왕궁의 잔혹한 권력 암투 속에서 그녀의 혼인 문제 역시 언제나 정치적 모략의 불씨로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541
[솔즈베리 백작부인의 처형]
유년 시절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살펴주었던 옛 가정교사이자 대모인 솔즈베리 백작부인 마거릿 폴이 헨리 8세의 명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녀의 아들인 레지널드 폴이 연루된 가톨릭 음모 사건 때문이었습니다.이 끔찍한 처형 과정에서 서투른 젊은 사형집행인이 백작부인의 머리와 어깨를 말 그대로 난도질하는 참극이 벌어졌습니다. 평생 자신을 아껴주었던 정신적 지주의 비참한 죽음은 그녀에게 또 한 번의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1542
[궁정 안주인 역할 수행]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가 처형된 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왕실의 크리스마스 축제에 참석했습니다. 왕비 자리가 비어 있던 이 시기에 그녀는 왕의 옆에서 사실상의 궁정 안주인(hostess)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한때 철저히 버려진 사생아였던 그녀가 다시 왕실의 중심에서 안주인 역할을 맡게 된 것은 튜더 왕가의 변덕스러운 정치 지형을 보여줍니다. 이듬해 헨리 8세는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와 결혼하게 됩니다.
1547
[에드워드 6세의 즉위]
아버지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홉 살의 어린 이복동생이 에드워드 6세로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에드워드 치하에서 강력한 개신교 개혁이 추진되면서 굳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의 입지는 다시 위태로워졌습니다.헨리 8세는 제3차 왕위 계승법을 통해 그녀를 왕위 계승 서열에 다시 복귀시켰으나, 신앙의 차이로 인해 에드워드 6세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어린 왕은 그녀가 훗날 가톨릭을 복원할 것을 정확히 예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1553
[제인 그레이 폐위 및 여왕 즉위]
에드워드 6세가 병으로 사망하기 전 그녀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개신교도인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스트앵글리아에서 신속하게 군사력을 결집하여 반격에 나섰고, 제인 그레이를 폐위시킨 뒤 잉글랜드 여왕으로 즉위했습니다.지배층 정치인들은 개신교 권력을 유지하고자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선포했으나,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는 헨리 8세의 정통 핏줄인 그녀에게 향했습니다. 지지 세력을 모아 성공적으로 권력을 탈환한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대관식 거행]
잉글랜드의 공식적인 국왕으로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하며 왕관을 썼습니다. 숱한 생명의 위협과 사생아 강등이라는 모욕을 견뎌내고 마침내 튜더 왕조의 합법적인 군주로 우뚝 서는 영광의 순간이었습니다.제인 그레이나 마틸다 황후 같은 논쟁적인 통치자들을 제외하면, 그녀는 잉글랜드 역사상 권력을 온전히 쟁취한 최초의 여성 군주(Queen regnant)였습니다. 대관식 이후 그녀는 아버지 헨리 8세가 망쳐놓은 가톨릭 신앙의 전면적인 복구 작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554
[펠리페 2세와의 결혼]
가톨릭 국가와의 결속을 다지고 후계자를 낳기 위해 스페인의 왕세자 펠리페(훗날 펠리페 2세)와 정략결혼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스페인 국왕과의 결혼은 잉글랜드 내에서 극심한 반발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잉글랜드인들은 강대국 스페인이 잉글랜드를 속국으로 만들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사촌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아들인 그와의 혼인을 강력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첫 번째 거짓 임신 징후]
월경이 멈추고 체중이 증가하며 아침 입덧을 느끼는 등 완벽한 임신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여왕의 주치의를 포함한 궁정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여왕이 마침내 후계자를 잉태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의회는 여왕이 출산 중 사망할 경우 펠리페가 섭정을 맡도록 하는 반역법까지 통과시켰으며, 태어날 왕자를 축하하기 위한 특별 미사곡이 작곡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복동생 엘리자베스마저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출산의 증인 자격으로 궁정에 소환되었습니다.
1555
[거짓 임신의 종결]
봄이 지나 여름이 되도록 출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마침내 여왕의 부풀었던 배가 꺼지면서 임신이 아니었음이 비참하게 밝혀졌습니다. 이는 간절히 아이를 원했던 여왕의 심리적 갈망이 만들어낸 상상 임신이었습니다.유럽 전역에 아들을 낳았다는 헛소문이 퍼져 감사 예배까지 열렸던 터라 그 수치심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베네치아 대사 미키엘리는 이 임신이 단지 배에 가스가 찬 것으로 끝났다며 조롱 섞인 보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남편 펠리페의 플랑드르 출국]
거짓 임신의 수모를 겪은 직후, 남편 펠리페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휘한다는 명분으로 잉글랜드를 떠나 플랑드르로 향했습니다. 사랑했던 남편의 차가운 외면에 여왕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깊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그녀는 펠리페를 깊이 사랑했으나, 남편에게 그녀는 그저 정략적인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남편이 떠난 텅 빈 궁전에서 그녀는 위로할 길 없는 슬픔에 잠겨 하염없이 상심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1556
[스페인 왕비 즉위]
남편 펠리페가 펠리페 2세로서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국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그녀 역시 잉글랜드의 여왕인 동시에 스페인의 왕비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형식상으로는 당대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공동 군주로 이름을 올린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남편 펠리페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잉글랜드에 거의 머물지 않았기에, 부부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고 껍데기뿐인 영광으로 남았습니다.
1558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의 서거]
재위 5년 만에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질병으로 인해 쓸쓸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결국 그녀가 그토록 막고자 했던 개신교도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었습니다.그녀는 치세 동안 수많은 개신교도를 이단으로 처형하며 가톨릭을 부활시키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후계자 부재로 인해 그 꿈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한 달여 뒤인 12월 14일, 그녀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며 파란만장했던 삶의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