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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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플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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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양자 역학 창시자, 노벨상 수상자 + 카테고리

• 20세기 물리학의 혁명을 이끈 독일 이론 물리학자.

• 에너지 양자 개념을 도입한 양자론의 아버지이자 플랑크 상수의 발견자.

•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현대 물리학의 기반을 다짐.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독일 과학계에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

• 나치 정권 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독일 과학을 지키려 노력했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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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58

[양자론의 아버지, 막스 플랑크 탄생]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독일 홀슈타인 공국 킬에서 태어나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지식인 계층으로, 조부와 부친 모두 대학교수였다.

세례명은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마르크스'였으나, 10세부터 평생 '막스'라는 이름으로 서명하며 사용했다.

1864

[어린 시절의 전쟁 경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군대가 킬로 행진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전쟁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게 된다.

1867

[뮌헨 이사 및 학문적 관심 형성]

가족과 함께 뮌헨으로 이사하여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수학자 헤르만 뮐러에게 수학, 천문학, 역학을 배우며 에너지 보존 원리를 처음 접하게 된다.

1874

[물리학의 길을 걷다]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 연구를 시작한다.

당시 교수였던 필립 폰 욜리는 물리학 분야에 더 이상 발견할 것이 없다고 조언했으나, 플랑크는 기존 지식의 근본을 이해하겠다는 목표로 연구에 몰두한다.

1877

[베를린 유학 및 열역학과의 만남]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헤르만 폰 헬름홀츠,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등 저명한 물리학자들과 함께 1년간 수학한다.

이 시기 클라우지우스의 저작을 독학하며 열역학을 자신의 주요 연구 분야로 삼게 된다.

1879

[열역학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박사 학위 논문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하여(Über den zweiten Hauptsatz der mechanischen Wärmetheorie)'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 논문은 그의 열역학 연구의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1880

[교수 자격 획득]

'서로 다른 온도에서 등방성 물체의 평형 상태'라는 논문으로 하빌리타치온(교수 자격)을 획득하며 독일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

1885

[킬 대학교 부교수 임명]

킬 대학교의 이론 물리학 부교수로 임명되어 학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이 시기 엔트로피와 그 응용에 대한 심층 연구를 수행하며 열역학 분야에서의 입지를 다진다.

1887

[마리 머르크와의 결혼]

학교 친구의 여동생인 마리 머르크(1861-1909)와 결혼하여 킬에 신혼집을 꾸린다.

그들은 슬하에 카를, 엠마, 그레테, 에르빈 등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1889

[베를린 대학교 교수 임명]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스-대학교의 키르히호프 교수직을 승계하여 물리학 교수로 임명된다.

이는 그의 학문적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894

[흑체 복사 문제에 몰두]

흑체 복사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당시 기존 이론들은 실험 결과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한계를 보였고, 이는 플랑크의 혁명적인 발견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1897

[대표 저서 '열역학' 출판]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열역학에 관한 논문'을 출판한다.

이 책은 열역학 분야에서의 그의 깊은 이해와 기여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1898

[독일 물리학회(DPG) 통합 주도]

독일의 다양한 지역 물리 학회들을 통합하여 '독일 물리학회(DPG)'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1905년부터 1909년까지 DPG의 회장을 역임하며 독일 물리학계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한다.

1900

[혁명적 '흑체 복사 법칙' 발표]

독일 물리학회 회의에서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의 첫 버전을 발표한다.

이는 실험적으로 관찰된 흑체 스펙트럼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직 에너지 양자화 개념이 명확히 포함되지는 않았다.

[양자 물리학의 탄생, 플랑크 가설 발표 (세계 최고)]

독일 물리학회에 '플랑크 가설'을 공식 제출한다.

이 가설은 전자기 에너지가 'E = hν'와 같은 불연속적인 '양자' 형태로만 방출될 수 있다는 개념을 포함하며, 이는 세계 최초로 양자 물리학의 서막을 알리는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로 평가된다.

플랑크 상수가 이 때 도입되었으며, 이 발견으로 그는 플랑크 길이, 플랑크 질량과 같은 새로운 보편적인 물리적 단위 집합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1901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 공식 출판]

자신의 혁명적인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을 공식 출판한다.

이로써 빛과 물질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전 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1905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의 조력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획기적인 '특수 상대성이론' 논문들이 발표되자, 그 중요성을 즉시 인식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독일 과학계에 이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크게 기여한다.

1909

[컬럼비아 대학교 초빙 강사 활동]

베를린 대학교 교수 재직 중, 뉴욕시 컬럼비아 대학교의 어니스트 켐프턴 아담스 강사로 초빙되어 이론물리학 강의 시리즈를 진행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드높인다.

[첫 번째 부인 마리 플랑크 사망]

첫 번째 부인 마리 플랑크가 사망한다.

행복했던 결혼 생활에 찾아온 비극이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자녀들을 돌본다.

1911

[제1차 솔베이 회의 조직]

물리학계의 점증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발터 네른스트와 함께 제1차 솔베이 회의를 조직한다.

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플랑크를 양자론의 중요한 개념에 대해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마르가 폰 회슬린과 재혼]

두 번째 부인 마르가 폰 회슬린(1882–1948)과 재혼한다.

같은 해 12월, 다섯 번째 자녀인 헤르만이 태어나 가족에게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준다.

1914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초빙]

베를린 대학교 학장으로서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초빙하여 새로운 교수직을 개설한다.

두 위대한 과학자는 이때부터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되어 학문적 교류뿐 아니라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미국국립과학원 회원 선출]

미국국립과학원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며, 그의 국제적인 학문적 위상을 재확인한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및 '93인의 성명서' 서명]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중적인 애국적 흥분에 동조하며 논쟁적인 전쟁 선전 소책자인 '93인의 성명서'에 서명한다.

1916

[장남 카를,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

제1차 세계대전 중 장남 카를이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극을 겪는다.

둘째 아들 에르빈은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1917

[딸 그레테의 사망]

딸 그레테가 첫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또 다른 개인적인 비극을 맞는다.

그의 가족은 전쟁과 질병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

1918

[에너지 양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세계 최고)]

에너지 양자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는 그의 세계 최초 양자 이론 창시자로서의 업적을 전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순간으로, 현대 물리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실제 수상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 노벨상 위원회는 그의 양자론이 원자 및 아원자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1920

[독일 과학 비상기구 설립 주도]

전후 혼란 속에서 과학 연구를 위한 재정 지원을 위해 프리츠 하버와 함께 '독일 과학 비상기구(Notgemeinschaft der Deutschen Wissenschaft)'를 설립한다.

이 기구는 해외에서도 상당한 자금을 모아 독일 과학계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26

[주요 학술원 외국인 회원 선출]

미국 국립 과학원 및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며, 그의 국제적인 학문적 명성을 다시 한번 인정받는다.

[베를린 대학교 교수직 은퇴]

베를린 대학교 교수직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한다.

그의 후임으로는 에르빈 슈뢰딩거가 임명되었다.

플랑크는 은퇴 후에도 독일 물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서 활발히 활동한다.

1928

[최고 영예의 '막스 플랑크 메달' 설립 (세계 최고)]

독일 물리학회(DPG)는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최고 영예의 상인 '막스 플랑크 메달'을 설립한다.

이 메달은 이후 많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에게 수여되었다.

1929

[코플리 메달 및 막스 플랑크 메달 수상]

영국 왕립학회의 '코플리 메달'과 독일 물리학회의 '막스 플랑크 메달'을 동시에 수상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다시 한번 인정받는다.

1933

[나치 집권과 과학자 박해 목격]

나치 정권이 집권하자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 친구와 동료들이 직위에서 추방당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깊은 우려를 표한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독일에 남아달라고 요청한다.

[히틀러와의 직접 대면 (유대인 과학자 문제)]

아돌프 히틀러를 직접 만나 유대인 과학자 강제 이민 문제가 독일 과학을 죽일 것이라고 경고하며 유대인에 대한 탄압 중단을 호소했으나, 히틀러는 유대인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며 그의 요청을 거부한다.

1934

[프리츠 하버 사망과 간접 저항]

히틀러와의 면담에서 언급했던 유대인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망명 중 사망한다.

플랑크는 하버를 기리는 공식 기념 회의를 조직하며 간접적으로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을 보인다.

1936

[카이저 빌헬름 협회 회장 사임]

카이저 빌헬름 협회(KWG) 회장 임기가 만료되자 나치 정부의 압력으로 연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KWG 연구소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성공한다.

1938

[80세 생일과 프로이센 아카데미 회장직 사임]

80세 생일을 맞이하여 물리학회(DPG)의 축하 행사에 참여한다.

연말에는 프로이센 아카데미가 나치에 의해 장악되자 항의의 의미로 회장직을 사임하며 독립성을 지키려 노력한다.

1944

[자택 파괴와 기록 소실]

베를린에 있던 그의 자택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평생의 과학 기록과 서신이 모두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는다.

[아들 에르빈, 히틀러 암살 음모로 체포]

아들 에르빈 플랑크가 히틀러 암살 시도('7·20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게슈타포에 체포된다.

이는 노년의 플랑크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다.

1945

[괴테 상 수상]

독일의 권위 있는 '괴테 상'을 수상한다.

이는 그의 학문적, 윤리적 업적을 기리는 상이었다.

[아들 에르빈, 나치에 의해 처형 (가장 큰 비극)]

아들 에르빈이 히틀러 암살 시도 가담 혐의로 베를린 플뢰첸제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사랑하는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플랑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상당 부분 상실했다.

1947

[현대 물리학의 거장, 막스 플랑크 서거]

괴팅겐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무덤은 괴팅겐의 구 시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현대 물리학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1948

[카이저 빌헬름 협회, '막스 플랑크 협회'로 개칭 (최대)]

플랑크가 두 번 회장을 역임했던 독일의 과학 기관 '카이저 빌헬름 협회'는 그의 공로를 기려 '막스 플랑크 협회(MPG)'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협회는 현재 독일의 가장 크고 권위 있는 과학 연구 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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