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플랑크

독일
독일독일
괴테 상5
괴테 상괴테 상 1945
코플리 메달코플리 메달 1929
막스 플랑크 메달막스 플랑크 메달 1929
미국 국립 과학원 외국인 회원미국 국립 과학원 외국인 회원 1926
노벨 물리학상노벨 물리학상 1918 물리학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 ~ 1879 졸업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1877 ~ 1878
뮌헨 대학교 18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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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막스 플랑크
연혁 피인용 수 9
물리학자, 양자 역학 창시자, 노벨상 수상자 ★ 물리학자

• 20세기 물리학의 혁명을 이끈 독일 이론 물리학자.

• 에너지 양자 개념을 도입한 양자론의 아버지이자 플랑크 상수의 발견자.

• 191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며 현대 물리학의 기반을 다짐.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독일 과학계에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

• 나치 정권 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독일 과학을 지키려 노력했던 인물.

주요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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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58

[양자론의 아버지, 막스 플랑크 탄생]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 독일 홀슈타인 공국 킬에서 태어나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지식인 계층으로, 조부와 부친 모두 대학교수였다.

세례명은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마르크스'였으나, 10세부터 평생 '막스'라는 이름으로 서명하며 사용했다.

1864

[어린 시절의 전쟁 경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중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군대가 킬로 행진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전쟁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게 된다.

1867

[뮌헨 이사 및 학문적 관심 형성]

가족과 함께 뮌헨으로 이사하여 막시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수학자 헤르만 뮐러에게 수학, 천문학, 역학을 배우며 에너지 보존 원리를 처음 접하게 된다.

1874

[물리학의 길을 걷다]

뮌헨 대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 연구를 시작한다.

당시 교수였던 필립 폰 욜리는 물리학 분야에 더 이상 발견할 것이 없다고 조언했으나, 플랑크는 기존 지식의 근본을 이해하겠다는 목표로 연구에 몰두한다.

1877

[베를린 유학 및 열역학과의 만남]

베를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헤르만 폰 헬름홀츠,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등 저명한 물리학자들과 함께 1년간 수학한다.

이 시기 클라우지우스의 저작을 독학하며 열역학을 자신의 주요 연구 분야로 삼게 된다.

1879

[열역학 연구로 박사 학위 취득]

박사 학위 논문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하여(Über den zweiten Hauptsatz der mechanischen Wärmetheorie)'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 논문은 그의 열역학 연구의 중요한 시작점이었다.

1880

[교수 자격 획득]

'서로 다른 온도에서 등방성 물체의 평형 상태'라는 논문으로 하빌리타치온(교수 자격)을 획득하며 독일 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

1885

[킬 대학교 부교수 임명]

킬 대학교의 이론 물리학 부교수로 임명되어 학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이 시기 엔트로피와 그 응용에 대한 심층 연구를 수행하며 열역학 분야에서의 입지를 다진다.

1887

[마리 머르크와의 결혼]

학교 친구의 여동생인 마리 머르크(1861-1909)와 결혼하여 킬에 신혼집을 꾸린다.

그들은 슬하에 카를, 엠마, 그레테, 에르빈 등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1889

[베를린 대학교 교수 임명]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스-대학교의 키르히호프 교수직을 승계하여 물리학 교수로 임명된다.

이는 그의 학문적 경력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894

[흑체 복사 문제에 몰두]

흑체 복사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당시 기존 이론들은 실험 결과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한계를 보였고, 이는 플랑크의 혁명적인 발견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1897

[대표 저서 '열역학' 출판]

그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열역학에 관한 논문'을 출판한다.

이 책은 열역학 분야에서의 그의 깊은 이해와 기여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1898

[독일 물리학회(DPG) 통합 주도]

독일의 다양한 지역 물리 학회들을 통합하여 '독일 물리학회(DPG)'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1905년부터 1909년까지 DPG의 회장을 역임하며 독일 물리학계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한다.

1900

[혁명적 '흑체 복사 법칙' 발표]

독일 물리학회 회의에서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의 첫 버전을 발표한다.

이는 실험적으로 관찰된 흑체 스펙트럼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직 에너지 양자화 개념이 명확히 포함되지는 않았다.

[양자 물리학의 탄생, 플랑크 가설 발표 (세계 최고)]

독일 물리학회에 '플랑크 가설'을 공식 제출한다.

이 가설은 전자기 에너지가 'E = hν'와 같은 불연속적인 '양자' 형태로만 방출될 수 있다는 개념을 포함하며, 이는 세계 최초로 양자 물리학의 서막을 알리는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로 평가된다.

플랑크 상수가 이 때 도입되었으며, 이 발견으로 그는 플랑크 길이, 플랑크 질량과 같은 새로운 보편적인 물리적 단위 집합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1901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 공식 출판]

자신의 혁명적인 '플랑크 흑체 복사 법칙'을 공식 출판한다.

이로써 빛과 물질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전 물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1905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의 조력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획기적인 '특수 상대성이론' 논문들이 발표되자, 그 중요성을 즉시 인식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독일 과학계에 이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크게 기여한다.

1909

[컬럼비아 대학교 초빙 강사 활동]

베를린 대학교 교수 재직 중, 뉴욕시 컬럼비아 대학교의 어니스트 켐프턴 아담스 강사로 초빙되어 이론물리학 강의 시리즈를 진행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드높인다.

[첫 번째 부인 마리 플랑크 사망]

첫 번째 부인 마리 플랑크가 사망한다.

행복했던 결혼 생활에 찾아온 비극이었지만, 그는 꿋꿋하게 자녀들을 돌본다.

1911

[제1차 솔베이 회의 조직]

물리학계의 점증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발터 네른스트와 함께 제1차 솔베이 회의를 조직한다.

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은 플랑크를 양자론의 중요한 개념에 대해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마르가 폰 회슬린과 재혼]

두 번째 부인 마르가 폰 회슬린(1882–1948)과 재혼한다.

같은 해 12월, 다섯 번째 자녀인 헤르만이 태어나 가족에게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준다.

1914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초빙]

베를린 대학교 학장으로서 아인슈타인을 베를린으로 초빙하여 새로운 교수직을 개설한다.

두 위대한 과학자는 이때부터 더욱 가까운 친구가 되어 학문적 교류뿐 아니라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미국국립과학원 회원 선출]

미국국립과학원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며, 그의 국제적인 학문적 위상을 재확인한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및 '93인의 성명서' 서명]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중적인 애국적 흥분에 동조하며 논쟁적인 전쟁 선전 소책자인 '93인의 성명서'에 서명한다.

1916

[장남 카를,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

제1차 세계대전 중 장남 카를이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극을 겪는다.

둘째 아들 에르빈은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1917

[딸 그레테의 사망]

딸 그레테가 첫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또 다른 개인적인 비극을 맞는다.

그의 가족은 전쟁과 질병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

1918

[에너지 양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 (세계 최고)]

에너지 양자의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는 그의 세계 최초 양자 이론 창시자로서의 업적을 전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순간으로, 현대 물리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이다.

실제 수상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 노벨상 위원회는 그의 양자론이 원자 및 아원자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1920

[독일 과학 비상기구 설립 주도]

전후 혼란 속에서 과학 연구를 위한 재정 지원을 위해 프리츠 하버와 함께 '독일 과학 비상기구(Notgemeinschaft der Deutschen Wissenschaft)'를 설립한다.

이 기구는 해외에서도 상당한 자금을 모아 독일 과학계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26

[주요 학술원 외국인 회원 선출]

미국 국립 과학원 및 네덜란드 왕립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선출되며, 그의 국제적인 학문적 명성을 다시 한번 인정받는다.

[베를린 대학교 교수직 은퇴]

베를린 대학교 교수직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한다.

그의 후임으로는 에르빈 슈뢰딩거가 임명되었다.

플랑크는 은퇴 후에도 독일 물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서 활발히 활동한다.

1928

[최고 영예의 '막스 플랑크 메달' 설립 (세계 최고)]

독일 물리학회(DPG)는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최고 영예의 상인 '막스 플랑크 메달'을 설립한다.

이 메달은 이후 많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에게 수여되었다.

1929

[코플리 메달 및 막스 플랑크 메달 수상]

영국 왕립학회의 '코플리 메달'과 독일 물리학회의 '막스 플랑크 메달'을 동시에 수상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다시 한번 인정받는다.

1933

[나치 집권과 과학자 박해 목격]

나치 정권이 집권하자 7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 친구와 동료들이 직위에서 추방당하는 현실을 목격하며 깊은 우려를 표한다.

그는 과학자들에게 독일에 남아달라고 요청한다.

[히틀러와의 직접 대면 (유대인 과학자 문제)]

아돌프 히틀러를 직접 만나 유대인 과학자 강제 이민 문제가 독일 과학을 죽일 것이라고 경고하며 유대인에 대한 탄압 중단을 호소했으나, 히틀러는 유대인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규정하며 그의 요청을 거부한다.

1934

[프리츠 하버 사망과 간접 저항]

히틀러와의 면담에서 언급했던 유대인 과학자 프리츠 하버가 망명 중 사망한다.

플랑크는 하버를 기리는 공식 기념 회의를 조직하며 간접적으로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을 보인다.

1936

[카이저 빌헬름 협회 회장 사임]

카이저 빌헬름 협회(KWG) 회장 임기가 만료되자 나치 정부의 압력으로 연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비밀리에 많은 유대인 과학자들이 KWG 연구소에서 계속 일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성공한다.

1938

[80세 생일과 프로이센 아카데미 회장직 사임]

80세 생일을 맞이하여 물리학회(DPG)의 축하 행사에 참여한다.

연말에는 프로이센 아카데미가 나치에 의해 장악되자 항의의 의미로 회장직을 사임하며 독립성을 지키려 노력한다.

1944

[자택 파괴와 기록 소실]

베를린에 있던 그의 자택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평생의 과학 기록과 서신이 모두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는다.

[아들 에르빈, 히틀러 암살 음모로 체포]

아들 에르빈 플랑크가 히틀러 암살 시도('7·20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게슈타포에 체포된다.

이는 노년의 플랑크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온다.

1945

[괴테 상 수상]

독일의 권위 있는 '괴테 상'을 수상한다.

이는 그의 학문적, 윤리적 업적을 기리는 상이었다.

[아들 에르빈, 나치에 의해 처형 (가장 큰 비극)]

아들 에르빈이 히틀러 암살 시도 가담 혐의로 베를린 플뢰첸제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사랑하는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플랑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상당 부분 상실했다.

1947

[현대 물리학의 거장, 막스 플랑크 서거]

괴팅겐에서 8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의 무덤은 괴팅겐의 구 시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죽음은 현대 물리학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1948

[카이저 빌헬름 협회, '막스 플랑크 협회'로 개칭 (최대)]

플랑크가 두 번 회장을 역임했던 독일의 과학 기관 '카이저 빌헬름 협회'는 그의 공로를 기려 '막스 플랑크 협회(MPG)'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이 협회는 현재 독일의 가장 크고 권위 있는 과학 연구 기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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