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에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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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독일 출신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20세기 다다이즘 및 초현실주의 미술의 거장인 막스 에른스트의 삶과 예술적 궤적을 담은 연혁입니다. 대학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수학하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쾰른에서 다다 그룹을 창립하며 기성 예술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후 파리로 이주해 앙드레 브르통 등과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며, 프로타주, 그라타주, 진동을 이용한 드립 페인팅 등 혁신적인 미술 기법을 발명하여 현대 미술의 언어를 완전히 새롭게 개척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망명해 잭슨 폴록 등 미국 추상 표현주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전후 유럽으로 돌아와 베네치아 비엔날레 회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등 미술사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연표
1896
[그림과의 첫 만남]
막스 에른스트가 농아 학교 교사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 필리프 에른스트를 통해 처음으로 회화를 접하게 되었습니다.그의 아버지는 당시 다섯 살이었던 아들 막스 에른스트를 모델로 삼아 그를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는 훗날 위대한 예술가로 성장할 에른스트가 미술과 맺은 최초의 의미 있는 교감이었습니다.
1906
[새의 죽음과 탄생의 심리적 교차]
자신이 아끼던 애완 앵무새 '호르네봄'의 죽음과 여동생 아폴로니아(로니)의 탄생을 거의 동시에 경험하며 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습니다.이 두 사건의 강렬한 교차는 그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훗날 그의 작품 세계에 새와 인간이 결합된 형태의 '로플롭(Loplop)'이나 '새의 우두머리 호르네봄'과 같은 자아의 분신(알터 에고)을 창조해 내는 결정적이고 마술적인 영감이 되었습니다.
1910
[본 대학교 입학 및 학업 시작]
독일 본 대학교에 입학하여 고전문헌학, 철학, 심리학, 미술사 등 다양한 학문을 폭넓게 수학하기 시작했습니다.특히 심리학을 공부하며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저서들을 접하게 되었고, 정신질환자들의 예술 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훗날 그의 초현실주의적 시각을 형성하는 탄탄한 지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1912
[전업 화가의 길 결심 및 첫 전시회]
독학으로 화가가 되기로 굳게 결심하고 쾰른의 펠트만 갤러리(Galerie Feldmann)에서 예술가로서의 첫 전시회를 가졌습니다.같은 해 쾰른에서 열린 존더분트(Sonderbund) 국제 미술 전시회를 방문하여 세잔, 피카소, 마티스, 뭉크 등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목격하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우구스트 마케를 비롯한 예술가 친구들의 적극적인 격려와 인정에 힘입어 본격적인 예술의 길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1913
[베를린 가을 살롱 전시 및 파리 방문]
베를린의 '데어 슈투름(Der Sturm)' 갤러리에서 열린 제1회 독일 가을 살롱에 '폭풍', '산책' 등 두 점의 작품을 출품하며 예술계에 입지를 다졌습니다.이 시기 그는 신문 '본너 폴크스문트'에 미술 및 연극 비평을 기고하는 비평가로도 활동했습니다. 또한 프랑스 파리를 처음 방문하여 기욤 아폴리네르, 로베르 들로네 등 당대의 핵심적인 전위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기 시작했습니다.
1914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으며 인간의 이성에 대한 극심한 혐오와 환멸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는 훗날 기성 가치를 부정하는 다다이즘 운동에 뛰어드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평생의 예술적 동지가 될 한스 아르프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1918
[전쟁 중 루이제 슈트라우스와의 결혼]
전쟁이 채 끝나기 직전인 시점에 미술사학 박사이자 대학 시절의 친구였던 루이제 슈트라우스와 쾰른에서 전시(戰時) 결혼식을 올렸습니다.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소위로 진급한 상태였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종전을 맞이했습니다. 에른스트는 훗날 전쟁터에서 돌아온 1918년 11월 11일의 종전일을 가리켜 '자신이 새로운 신화를 찾기 위해 마법사가 되기를 희망하는 젊은이로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묘사했습니다.
1919
[쾰른 다다 그룹 창립]
요하네스 바르겔트, 한스 아르프 등과 함께 기성 체제와 예술을 조롱하는 급진적인 '쾰른 다다(Dada)' 그룹을 공식 결성했습니다.어리석은 전쟁에 대한 환멸과 구역질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미니막스 다다막스(minimax dadamax)'라는 별명을 붙이고 전위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바르겔트와 함께 주간지 '벤틸라토르(Der Ventilator)'를 발행했으나 내용의 과격함으로 인해 곧 당국에 의해 금지당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1920
[제2회 쾰른 다다 전시회 스캔들]
쾰른의 브라우하우스 빈터(Brauhaus Winter)에서 '다다의 초봄(Dada-Vorfrühling)'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두 번째 다다 전시회를 개최했습니다.이 전시회는 한스 아르프와 함께 작업한 이른바 '파타가가(Fatagaga)' 연작을 선보였으며, 대중의 엄청난 불쾌감과 공분을 사 결국 경찰에 의해 강제로 폐쇄 조치되었습니다. 이 스캔들로 인해 에른스트는 자신의 아버지와 심각한 불화를 겪고 연을 끊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해에 그의 아들이자 훗날 초현실주의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될 지미 에른스트가 태어났습니다.
1921
[엘뤼아르 부부와의 만남 및 파리 전시]
앙드레 브르통의 초청을 받아 파리 '오 상 파레유(Au Sans Pareil)'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가을에는 시인 폴 엘뤼아르와 그의 아내 갈라가 쾰른의 에른스트를 방문했습니다.파리 전시회에는 본인이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콜라주 작품 '모자가 사람을 만든다' 등을 출품하여 파리 전위 예술가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쾰른을 방문한 엘뤼아르는 에른스트의 초기 초현실주의 걸작인 '셀레베스(Celebes)'와 '오이디푸스 렉스(Oedipus Rex)'를 즉석에서 구매하며 에른스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1922
[파리 이주 및 앙드레 브르통 합류]
독일의 가족을 뒤로하고 미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로 영구적으로 이주하여 엘뤼아르 부부의 집에 머물기 시작했습니다.당시 공식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폴 엘뤼아르가 자신의 여권을 빌려주는 모험을 감행하여 파리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약 2년 동안 그림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각종 임시직을 전전해야 했으나, 이 시기에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한 파리 초현실주의 서클에 깊숙이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1923
[오본느 주택의 벽화 연작 제작]
파리 근교 오본느(Eaubonne)로 이사한 엘뤼아르 부부의 새 집 내부 문과 벽에 기괴하고 환상적인 동식물을 주제로 한 15점의 벽화 연작을 그렸습니다.그가 그린 환상적인 에덴동산과 기괴한 우화적 형상들은 집을 매입한 후대 거주자들에 의해 벽지 아래로 덮여버리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 벽화들은 다행히 1969년에 다시 발견되었으며, 에른스트 본인이 직접 복원 작업에 참여하여 캔버스로 무사히 이관되었습니다.
1924
[초현실주의 그룹의 핵심 인물로 부상]
앙드레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할 무렵, 에른스트는 이미 이 그룹의 미술 부문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회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이 해에 창간된 초현실주의 그룹의 공식 기관지 '초현실주의 혁명(La Révolution surréaliste)'에 그의 기묘한 작품들이 대거 소개되었습니다. 또한 에른스트와 사랑에 빠진 갈라를 견디지 못하고 베트남 사이공으로 도피한 엘뤼아르를 갈라와 함께 추적하며 동남아시아까지 쫓아가는 등 사생활에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1925
[프로타주 기법 발명 및 첫 아틀리에 입주]
나뭇잎이나 나무판의 질감을 종이 위로 긁어내는 '프로타주(Frottage)' 기법을 최초로 발명해 내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작품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파리의 예술가 거주지인 뤼 투를라크(rue Tourlaque)의 '레 퓌쟁(Les Fusains)'에 생애 첫 개인 아틀리에를 마련했습니다. 미술품 수집가 자크 비오(Jacques Viot)와의 계약을 통해 안정적인 소득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 무렵 긁어내기 기법인 '그라타주(Grattage)'로까지 기법을 확장했습니다.
1926
[작품 스캔들 및 루이제와의 이혼]
종교계를 강력히 도발하는 회화 작품 '세 명의 증인 앞에서 아기 예수를 매질하는 성모'를 전시하여 거대한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이 불경한 작품은 앙데팡당 전과 쾰른 미술관에 전시되어 가톨릭계의 엄청난 항의와 분노를 샀고, 급기야 전시 철거 지시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이 해에 그는 오랫동안 별거 상태였던 첫 번째 아내 루이제 슈트라우스와 공식적으로 이혼 절차를 마무리했습니다.
1927
[마리베르트 오랑슈와의 두 번째 결혼]
프랑스의 유명 시나리오 작가 장 오랑슈의 여동생이자 본인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던 마리베르트 오랑슈와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사생활의 변화와 더불어 예술적으로도 왕성한 창작열을 이어갔으며, 파리 화단 내에서 점차 확고한 명성과 상업적인 입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각종 콜라주 소설과 기법 실험에 더욱 몰두하게 됩니다.
1939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프랑스 억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국적자라는 이유로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되어 프랑스 수용소에 여러 차례 억류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과거 나치 독일에서 그의 예술을 '퇴폐 미술'로 규정하여 핍박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당국은 그를 외국인 수용소에 강제로 구금했습니다. 전쟁의 혼란과 불안 속에서 그의 일상과 예술 활동은 심각한 위협과 제약을 받게 되었습니다.
1941
[미국 망명 및 페기 구겐하임과의 동행]
나치의 위협이 좁혀오는 유럽을 탈출하여, 당대 최고의 예술 후원자이자 훗날 세 번째 아내가 될 페기 구겐하임과 함께 무사히 미국 뉴욕으로 망명했습니다.이 망명을 통해 수많은 유럽 전위 예술가들과 함께 뉴욕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습니다. 에른스트가 고안한 물감을 떨어뜨려 진동을 활용하는 '드립 페인팅' 기법은 훗날 잭슨 폴록에게 전수되어 미국 추상 표현주의라는 거대한 예술 사조를 낳는 핵심적인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1946
[벨 아미 공모전 우승]
모파상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제작을 위해 기획된 '벨 아미(Bel-Ami)' 미술 공모전에 참여하여 대상을 거머쥐었습니다.그가 출품한 걸작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Die Versuchung des Heiligen Antonius)'은 살바도르 달리 등 쟁쟁한 초현실주의 경쟁자들의 작품을 모두 제치고 우승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우승을 통해 미국 내에서 그의 예술적 위상과 대중적 인지도는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1948
[미국 시민권 취득]
망명자 신분으로 긴 세월을 보내던 중, 미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부여받아 안정을 찾았습니다.이 시기 그는 애리조나주 세도나(Sedona)의 황량하고 기하학적인 자연경관 속에서 거주하며, 그곳의 신비로운 지형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조각과 회화 작업에 전념하며 창작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1953
[프랑스로의 영구 귀환]
미국에서의 긴 망명 및 체류 생활을 청산하고, 네 번째 아내인 초현실주의 화가 도로테아 타닝(Dorothea Tanning)과 함께 유럽(프랑스)으로 돌아왔습니다.파리에 다시 정착한 그는 전후 새로운 유럽 미술계의 분위기 속에서 만년의 독창적이고 원숙한 작업을 이어갔으며, 유럽 각지에서 열렬한 환대와 대규모 회고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954
[베네치아 비엔날레 대상 수상]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 미술 전람회인 제27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참가하여 영예로운 회화 부문 대상(Grand Prize)을 차지했습니다.이 빛나는 수상은 그가 현대 미술계의 가장 중요한 거장 중 한 명임을 전 세계적으로 공식 인정받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완고한 초현실주의 동료들은 그가 기득권적인 상을 수락했다며 강력히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1958
[프랑스 국적 취득 및 아카데미 회원 위촉]
마침내 프랑스 시민권을 공식적으로 취득하여 오랜 기간 활동 무대였던 프랑스 사회에 온전히 동화되었으며,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의 회원으로도 선출되었습니다.독일 출신으로 프랑스를 거쳐 미국 시민권을 가졌던 그가 프랑스 국적을 최종 취득함으로써 복잡했던 그의 국적 문제가 종결되었습니다. 더불어 모국인 독일 베를린의 주요 예술 단체에서도 그를 거장으로 대우하기 시작했습니다.
1961
[뉴욕 현대미술관 회고전 및 훈장 수훈]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막스 에른스트의 전 생애 작품을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미국 최고의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림과 동시에, 그의 고향 인근인 독일 쾰른시 정부로부터는 문화적 공로를 기리는 '슈테판 로흐너(Stefan-Lochner)' 메달을 수여받으며 대서양 양단에서 겹경사를 맞이했습니다.
1975
[뉴욕 및 파리 대규모 회고전 개최]
타계하기 불과 1년 전,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과 파리 그랑 팔레에서 각각 대규모의 웅장한 회고전이 연이어 열렸습니다.84세의 고령이었던 에른스트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 개막식에 직접 참석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이 두 번의 거대한 전시회는 20세기 미술의 지형을 바꾼 그의 찬란한 창작 생애를 마지막으로 장엄하게 결산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