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이 히데키
연표
1974
[마쓰이 히데키 탄생]
일본 이시카와현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당시 체중은 3,960그램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재능을 보이며 스모와 유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일본 이시카와현 노미군에서 종교 법인 교회의 주교인 아버지 마쓰이 마사오와 어머니 마쓰이 사에코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났을 당시 체중은 3,960그램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팬이 되었고, 6살 때 처음으로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경기를 관전하며 가케후 마사유키의 사인볼을 손에 넣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연식 야구 팀에 입단했으나 잠시 야구를 그만두었다가 5학년 때 다시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유도와 스모 선수로도 활동하여 스모 대회에서 우승하고 유도 대회 이시카와현 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3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네아가리의 모차르트'라고 불릴 정도로 재능이 있었습니다.
1990
[세이료 고등학교 입학 및 야구부 활동 시작]
세이료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입단했습니다. 처음에는 투수로 입단했으나 곧 야수로 전향했으며, 1학년 때부터 4번 타자로 활약했습니다. 같은 해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지만 첫 경기에서 패배했습니다.
세이료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애초에는 집에서 가까운 공립 학교인 고마쓰메이호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미 마쓰이의 실력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세이료 고등학교의 야마시타 도모시게 감독으로부터의 열렬한 권유와 중학교 야구부의 감독이나 코치로부터 추천받을 수 있어 세이료 고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 당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직접 프로에 입문하는 것이 아닌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투수로서 입단했지만 정작 본인은 “투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말해 곧바로 야수(1루수)로 전향했습니다. 그 후, 3루수로 다시 전향하면서 세이료 고등학교의 입학식이 열리기 전부터 야구부의 연습에 참가해 타 학교와의 연습 경기에서는 ‘4번·3루수’로 출전했습니다. 1학년 때는 4번 타자를 맡아(5번 타자는 당시 3학년이었던 무라마쓰 아리히토였음) 여름의 고시엔 대회에서 3타수 무안타라는 저조한 기록을 세우면서 팀은 첫 경기에서 패배했습니다. 덧붙여서 이 대회에는 나카무라 노리히로나 이치로(스즈키 이치로)도 출전했지만 모두 첫 경기에서 패배했습니다.
1992
[고시엔 고의사구 및 프로 드래프트 지명]
고등학교 3학년 봄 고시엔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고,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는 '5타석 연속 고의사구'라는 이례적인 기록으로 전국적인 화제를 모았습니다. 고교 통산 60홈런을 기록했으며, 11월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4개 구단의 1순위 지명을 받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며 프로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봄 대회에서는 한신 고시엔 구장의 럭키 존이 철거되어 홈런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쓰이는 개막 경기의 첫 경기인 이와테 현립 미야코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2타석 연속 홈런, 1경기 7타점, 2경기 연속 홈런을 연거푸 기록하는 등 당시의 대회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준준결승에서는 덴리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홈런이 나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책으로 팀이 패배했습니다. 이 해에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탄 마쓰이는 세이료 고등학교의 전교생들로부터 싸인 공세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고시엔 여름 대회에서의 2차전에서는 메이토쿠기주쿠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패배, 이 경기에서 마쓰이가 기록한 ‘5타석 연속 고의 사구’는 고교 야구 연맹이 급거 기자 회견을 여는 등 문제가 일파만파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마부치 시로 감독은 경기 종료 후 “고교생 중에 한 명만 프로의 선수가 섞이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통산 타율은 4할 5푼, 홈런은 60개였습니다. 9월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친선 고교 야구 대회 일본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출전했습니다. 11월 21일의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주니치 드래건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등 4개 구단으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아 추첨 결과 교섭권을 획득한 요미우리에 입단했습니다. 계약금은 1억 2,000만 엔과 연봉은 720만 엔이었습니다.
1993
[NPB 1군 데뷔 및 첫 안타, 타점]
프로 입단 첫 해인 시범 경기에서 부진했으나 2군에서의 활약 후 5월 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 7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며 1군에 데뷔했습니다. 이 경기 두 번째 타석에서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했습니다.
프로 입단 첫 해에 가진 시범 경기에서 7번 타자로 출전하여 기대에 못 미친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4월 7일에는 나가시마 감독으로부터 2군 통보를 받으면서 정규 경기 개막 이후 2군에서만 뛰었습니다. 2군으로 내려갔을 때에는 “2군으로 떨어뜨린 것을 후회시키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하면서 그 이야기대로 2군 경기인 이스턴 리그의 개막전에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신인 선수인 이토 도모히토로부터 홈런을 기록하는 등 12경기에서의 3할 7푼 5리, 4개의 홈런이라는 눈부신 활약을 보여 5월 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도쿄 돔)에 7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해 본격적인 1군 데뷔 무대를 밟았습니다. 첫 타석은 상대 투수인 니시무라 다쓰지로부터 유격수 땅볼을 기록, 두 번째 타석에서는 니시무라로부터 오른쪽 펜스 직격의 2루타를 날리는 등 데뷔 후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했습니다.
[NPB 첫 홈런 기록]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9회말 다카쓰 신고로부터 프로 입단 후 첫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신인으로서 센트럴 리그 고졸 신기록인 11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습니다.
다음날의 경기에서는 9회말에 다카쓰 신고로부터 몸쪽의 직구(야쿠르트의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다카쓰에게 마쓰이가 몸쪽에 강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 이를 던지라고 지시를 했다)를 우측 관중석에 날려 보내는 등 프로 입단 후 첫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6월에는 다시 2군으로 강등되었지만 8월 하순에 다시 1군으로 복귀하여 안타를 계속 때려내는 등 센트럴 리그 고졸 신인으로서의 신기록이 되는 11개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시즌 종료 후의 계약 개정에서는 1,060만 엔이 증가된 1,900만 엔으로 서명하면서 목표의 2,000만 엔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기자 회견에서는 차분한 표정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96
[NPB 센트럴 리그 MVP 수상 및 슈퍼스타 등극]
자신의 첫 개막전 4번 타자로 출전 후 7월과 8월 2개월 연속 월간 MVP를 석권했습니다. 팀의 대역전 우승에 크게 공헌하며 프로 데뷔 첫 센트럴 리그 MVP를 차지했습니다. 22세에 38개의 홈런은 오 사다하루와 대등한 연령별 최다 홈런 기록입니다. 연봉 1억 6천만 엔으로 고졸 최단 기간 1억 엔대 선수가 되며 NPB의 슈퍼스타로 등극했습니다.
자신의 첫 개막전 4번 타자로 출전하는 등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지만, 5월부터는 팀내의 간판 타자인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유일하게 4번 타자로 복귀하여 마쓰이는 3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팀의 성적도 급상승하면서 여름에는 7월과 8월에 2개월 연속으로 월간 MVP를 석권했을 뿐만 아니라 대역전 우승에 크게 공헌한 공로로 프로 데뷔 첫 센트럴 리그 MVP를 차지했습니다. 리그 최종전까지 야마사키 다케시, 다이호 야스아키와의 홈런왕 타이틀을 놓고 격돌했지만 야마사키와 홈런 1개 차이로 리드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 시즌 최종전인 주니치전에서는 모든 타석에서 고의사구가 되는 등 타이틀을 놓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22세에 38개의 홈런은 오 사다하루와 대등한 연령별 최다 홈런 기록입니다. 또, 동일 투수로부터의 시즌 최다 홈런 타이 기록의 7개 홈런을 사이토 다카시로부터 기록했습니다. 최종적으로 130경기에 출전하면서 타율 3할 1푼 4리, 38개의 홈런, 99타점의 성적으로 명실공히 ‘슈퍼 스타’로 등극했습니다. 시즌 종료 직후 계약 개정에서는 연봉이 증가된 1억 6,000만 엔으로 서명했고, 고졸 선수로서는 이치로와 대등한 최단 기록(당시)이자 입단 4년째인 1억 엔 선수로서의 동참을 완수했습니다.
1998
[NPB 첫 홈런왕, 타점왕, 최고 출루율 달성]
왼쪽 무릎 통증으로 슬럼프를 겪었으나, 5월 월간 MVP를 수상하며 본래의 컨디션을 회복했습니다. 시즌 34홈런, 100타점을 기록하며 첫 홈런왕, 타점왕,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모두 획득했습니다. 올스타전에서도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강타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전지 훈련 도중 왼쪽 무릎의 통증이 오면서 왼쪽 무릎 상태가 어떤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시즌을 보내면서 그 영향으로 인해 프로 생활 최대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개막 경기는 4번 타자로 출전 했지만 부상 슬럼프의 영향으로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4번 타자의 자리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4월 성적은 타율이 1할 9푼, 2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것에 그쳤지만, 5월에 월간 MVP를 수상하는 등 본래의 상태를 되찾으면서 이후에 계속 순조롭게 활약을 하는 등 7월 28일의 야쿠르트전에서 개인 통산 150홈런을 달성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시즌 34홈런, 100타점을 기록하여 첫 타이틀이 되는 홈런왕과 타점왕,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연거푸 획득했습니다. 올스타전에서도 4경기 연속 홈런(당시는 올스타전 신기록)을 때려냈습니다. 왼쪽 무릎은 당시 팀의 주치의로부터 ‘선반 장해’, ‘연골 파손’이라는 진단이 나올 정도의 중상이었지만, 환부 주위의 근육이 단련하는 것을 극복하여 수술에 의한 장기 이탈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인 2008년에는 결국 증상이 악화되면서 같은 해 9월에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2000
[NPB 3관왕, MVP, 일본 시리즈 MVP 수상]
시즌 개막부터 4번 타자로 전 경기에 출전하며 타격 3관왕을 노릴 기세로 활약했습니다. 시즌 타율 3할 1푼 6리, 42홈런, 108타점을 기록하며 NPB 홈런왕, 타점왕, 최고 출루율, 시즌 MVP, 일본 시리즈 MVP, 골든 글러브상을 석권했습니다. 정규 시즌, 올스타전, 일본 시리즈 MVP를 모두 획득한 역대 4번째 선수이자,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처음으로 수상하며 NPB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습니다.
그 해에는 시즌 개막 직후부터 4번 타자로 출전하면서 이후 일본 시리즈, 미·일 야구 등도 포함하고 있어 다른 타자에게 4번 타자의 자리를 양보할 것은 없었습니다. 오른쪽 새끼 손가락을 그립에 걸치는 타법으로 바꾸면서 너무 강하게 배트를 잡지 않고 릴렉스를 하여 시즌 중반까지는 타격 3관왕을 노릴 수 있을 기세로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7월 12일의 히로시마전에서는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 최종적으로 시즌 135경기를 모두 출전하면서 4번 타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모두 개인 최다인 타율 3할 1푼 6리, 42홈런, 108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정규 시즌에서의 전 경기 4번 타자로서의 출전은 요미우리에서는 1950년의 가와카미 데쓰하루 이래 50년 만의 기록이었습니다. 홈런왕, 타점왕, 최고 출루율, 시즌 MVP, 2000년 일본 시리즈 MVP, 미쓰이 골든 글러브상을 연거푸 차지하면서 요미우리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끈 중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해 일본 시리즈 MVP 수상에 의해서 가와카미 데쓰하루, 오시타 히로시, 후쿠모토 유타카에 뒤를 이은 역대 4번째의 ‘정규 시즌, 올스타전, 일본 시리즈에 있어서의 MVP 타이틀 획득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프로 야구계의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처음으로 수상했습니다. 같은 해 미·일 야구에서는 메이저 리그 선발의 보비 콕스 감독으로부터 “고질라는 좋네요. 배트 스윙이 빠르다”라고 칭찬을 받기도 했습니다. 11월 21일에는 이시카와 현민 영예상을 수상했고, 계약과 관련해서는 구단 측이 8년간 총액 56억 엔이라는 파격적인 장기 계약을 걸었지만 마쓰이는 “일년 내내 승부를 하는 기분으로 플레이하고 싶다”라고 밝히면서 단년 계약에 구애를 받아 프로 야구계 최고 연봉(당시)인 5억 엔으로 서명을 했습니다.
2001
[NPB 최고 연봉 계약 및 MLB 진출 시사]
FA권 취득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구단의 대형 계약 제안을 거절하고 당시 프로 야구 사상 최고 금액인 연봉 6억 1천만 엔으로 단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 후 기자회견에서 다음 시즌 FA권 행사와 함께 미국 메이저 리그 진출 가능성을 시사하며 새로운 도전을 예고했습니다.
FA권 취득이 눈 앞에 가까워지면서 교섭과 관련해서는 구단으로부터 5년 총액인 50억엔의 대형 계약이 제시되었지만 마쓰이 본인은 이것을 거절해 당시 프로 야구 사상 최고 금액이 되는 연봉 6억 1,000만엔으로 단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 개정 후의 가진 기자 회견에서는 차기 FA권 행사하는 것을 발언하면서 “이대로 요미우리로 남게 될지, 아니면 미국에 진출할 지는 양자택일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2002
[메이저 리그 진출 선언]
일본 시리즈 우승 다음날 FA권을 행사하며 미국 메이저 리그 진출을 공식 표명했습니다. 구단의 간절한 잔류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단한 이상 생명을 건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며 새로운 야구 인생의 막을 열었습니다. 이후 뉴욕 양키스와 3년 총액 2,100만 달러의 계약에 합의했습니다.
‘일본 제일’, ‘타격 3관왕’이라는 목표를 내걸어 스타트 끊으면서 정규 시즌이 개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4월 13일에 FA권을 취득했고, 7월 9일에 구로다 히로키로부터 통산 300호 홈런을 달성했습니다. 28세 0개월에서의 도달은 오 사다하루가 기록한 27세 3개월에 뒤를 이은 역대 2번째의 최연소 기록이며, 1200경기만의 달성은 역대 6번째의 빠른 기록입니다. 올스타전까지는 작년과 같이 타구가 오르지 않고 76경기에서의 18개 홈런을 기록하였지만 후반기에서는 64경기에서의 32개 홈런이라고 하는 경이의 페이스를 끌어 올리면서 계속 때려내는 등 개인 최다이자 일본 프로 야구 역대 8번째인 50개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센트럴 리그에서는 1985년 랜디 바스(당시 한신 타이거스 소속) 이래 17년 만의 일이었고, 요미우리에서는 1977년 오 사다하루 이후 25년 만의 쾌거였습니다. 홈런 부문에 있어서 최강의 라이벌이기도 한 로베르토 페타지니와의 9개 차이를 낸 50개째의 홈런은 2002년의 시즌 마지막 경기인 야쿠르트전(도쿄 돔)에서 기록했습니다. 7월과 8월에는 2개월 연속으로 월간 MVP를 수상했고, 9월 7일의 히로시마전에서 프로 야구 신기록이 되는 5년 연속 100득점을 기록했습니다. 시즌 종료 후인 10월 11일에는 하라 다쓰노리 감독, 16일에는 도이 구단 대표와 각각 면담을 했고, 나가시마 전 감독과도 장시간 면담하면서 잔류가 요청되었지만, 결론은 일본 시리즈 이후로 미뤄졌습니다. 10월 18일 뉴욕 타임스는 “뉴욕 양키스가 마쓰이의 영입을 노리고 있다”라는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2002년 일본 시리즈에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을 누르고 일본 시리즈 우승을 제패한 다음날 11월 1일에는 FA권을 행사해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진출을 표명했습니다. 11월 19일 뉴욕 양키스와 3년 총액인 2,100만 달러의 계약에 최종 합의했습니다.
2003
[MLB 데뷔 및 올스타전, 월드 시리즈 홈런]
뉴욕 양키스의 일원으로서 메이저 리그 정규 시즌 개막전에 5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했습니다. 첫 타석에서 로이 할러데이로부터 왼쪽 적시타를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진출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4월 8일에는 첫 만루 홈런을 때려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7월 2일에는 MLB 올스타전에 첫 출전했습니다.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월드 시리즈 2차전에서는 일본인 최초로 월드 시리즈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메이저 리그 진출 첫 해에 뉴욕 양키스의 일원으로서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3월 31일, 정규 시즌 개막전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전에 5번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여 첫 회에 메이저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 투수이자 우완 투수인 로이 할러데이로부터 왼쪽 앞에 적시타를 기록하여 메이저 리그 진출 첫 타석·첫 안타·첫 타점을 기록했습니다. 4월 8일 팀의 연고지 개막 경기인 미네소타 트윈스전에서는 전 타자인 버니 윌리엄스가 고의사구로 출루한 이후의 타석에서 볼카운트 2-3으로부터 상대 투수인 조 메이즈의 145km/h를 오른쪽 관중석을 향해 제1호 만루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4월 12일에는 메이저 리그 진출 후 처음으로 끝내기 안타를 쳐냈습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속구와 일본과는 비교해서 넓은 스트라이크 존의 외각구에 대응하지 못하고 심각한 타격 부진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6월에 조 토리 감독의 조언으로 타격 자세를 교정하며 컨디션을 끌어올렸습니다. 7월에 열린 MLB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아메리칸 리그 외야수 부문 3위에 오르며 올스타전에 첫 출전을 했습니다. 일본인으로서는 1995년의 노모 히데오, 2001년의 스즈키 이치로에 이은 3번째 올스타전 출전이었습니다. 7월 17일, 올스타전 출전 후의 후반기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 일본인 메이저 리거로서는 처음으로 끝내기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지구 시리즈에서는 포스트 시즌에서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월드 시리즈 2차전에서는 월드 시리즈에서의 일본인 첫 홈런이 되는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정규 시즌으로는 신인으로서의 양키스 선수로서 21세기가 된 메이저 리그에서 처음으로 시즌 163경기를 출전한 선수가 되었지만 기대가 된 홈런 개수(정규 시즌 기준)는 불과 16개에 그쳤습니다. 득점권 타율은 팀내 최고인 3할 3푼 5리, 타점은 팀내 2위가 되는 106타점을 기록하며 승부의 힘을 발휘했습니다. 신인왕 투표에서는 2위로 끝났습니다.
2006
[미일 통산 연속 경기 출장 기록 중단]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 중 수비 도중 왼쪽 손목 골절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부상으로 요미우리 시절인 1993년 8월 22일부터 이어오던 미일 통산 1768경기 연속 출장 기록이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재활을 거쳐 9월 12일 복귀하여 4안타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정규 경기 개막전에 열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의 출전을 포기하면서 정규 시즌에 대비하는 분주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춘계 캠프에서는 왼쪽 무릎 통증이 재발하거나 꽃가루 알레르기와 같은 건강 문제에 때문에 곪머리를 앓는 등 본인도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라고 말할 정도로 극도의 불안감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개막전에서 1개의 홈런을 포함한 4개의 안타를 날리는 등 개막전에서의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4월 18일에는 메이저 리그 데뷔 이래 처음으로 50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5월 11일에는 홈구장인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1회초 수비 도중 글러브가 잔디에 걸리면서 왼쪽 손목에 부상을 당해 경기 도중에 교체되었습니다. 1이닝 수비에 오르지 않고 교체했기 때문에 요미우리 시절인 1993년 8월 22일부터 계속되고 있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1768경기로 중단되었습니다. 뉴욕 시내의 한 병원에서 당일의 실시한 검사 결과, 왼쪽 손목(요골)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이튿날 아침에 수술을 하는 등 재활 훈련에만 전념했습니다. 9월 12일, 124일 만에 탬파베이 레이스전에서 홈구장인 양키 스타디움에 8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장, 만원의 관중으로부터 스탠딩 오베이션으로 맞이할 수 있어 이날 경기에서는 4타수 4안타의 성적으로 맹활약을 하는 등 부활을 이루었습니다.
2007
[미일 통산 2000안타 달성]
홈구장에서 열린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 미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인으로서는 스즈키 이치로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에 가입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개막 이후인 4월 7일에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경기에서 2회 첫 번째 타석에서 땅볼을 친 다음 1루로 출루하는 도중 왼쪽 넓적 다리에 통증이 일어나 4회의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서기 직전에 교체되는 등 벤치에서 신세를 져야만 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극도의 슬럼프에 빠기도 했습니다. 병원에서의 MRI 진단 결과 왼쪽 넓적다리의 가벼운 근육 파열이 있는 것으로 판명돼 부상은 순조롭게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부상자 명단의 기한이 지나는 4월 23일에 출장 선수로 등록되면서 같은 날에 있은 탬파베이 레이스전에서 16일 만에 선발 멤버로 복귀했습니다. 5월 6일, 홈구장에서 열린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 미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일본에서 뉴욕까지 찾아온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회장인 가네다 마사이치가 마쓰이의 2000안타를 달성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면서 명구회 가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당초 외야수의 실책으로 기록되었지만, 후에 판정이 번복되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후 판정에 대해 양팀 선수들간의 한바탕 실랑이와 난투극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인으로서의 미·일 통산 2000안타는 이치로에 뒤를 이은 역대 2번째였습니다.
2009
[월드 시리즈 MVP 수상]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13타수 8안타 3홈런 8타점의 눈부신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일본인 선수 최초로 월드 시리즈 MVP에 선정되었으며, 일본 시리즈 MVP와 월드 시리즈 MVP를 동시에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타율 3할대, 30홈런, 100타점, 도루 4개’라는 목표로 내걸어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작년에는 무릎 부위에 있는 수술 받으면서 재활 훈련에만 전념을 했지만 트레이닝으로의 조정하는 데에 출발이 늦어지면서 시범 경기에서의 초반은 타격 부진이 계속되었지만 부상 때문에 전력이 이탈된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바뀌는 등 4번 타자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4월 4일에는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 시범 경기에서 무려 4개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개막전에서는 4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면서 7회에 2점 홈런을 기록하는 등 요미우리 시절의 스승이자 감독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현역 시절에 기록했던 통산 444개를 넘으면서 미일 통산 445호 홈런을 달성했습니다. 이후 8월 중순부터 타격 호조를 유지해 타율 2할 8푼 1리, 25타점, 8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성적을 남겼고, 9월 19일의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 26호 홈런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지명타자로서의 연간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습니다(당시로서는 구단 기록). 메이저 리그 이적 후에는 2번째로 많은 28개의 홈런을 날리면서 팀 3위의 90타점을 내쫓는 승부의 힘을 발휘하여 팀은 3년 만의 지구 우승에 공헌했습니다. 포스트 시즌에서는 주로 5번·지명타자로서 출장,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지구 시리즈 제1차전에서는 결정적인 2점짜리 홈런을 날리기도 했습니다. 양키스는 4승 2패로 승리해 메이저 리그 1년차인 2003년 이후 6년 만에 월드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다시 5번타자로 복귀해 천성의 승부 힘을 마음껏 발휘했습니다. 제2차전에서는 페드로 마르티네스로부터 결승 홈런을 때려냈고, 제3차전에서는 대타로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제6차전에서는 선발 멤버로 복귀하여 선제 2점 홈런을 포함해 1경기 6타점이라는 월드 시리즈 타이 기록을 세웠습니다. 월드 시리즈에서 13타수 8안타 3홈런 8타점의 성적을 기록하여 메이저 리그에 이적한 지 7년 만에 팀의 9년 만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하는 등 일본인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시리즈 MVP와 월드 시리즈 MVP를 동시에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습니다. 양키스와의 계약 만료에 의해 11월 9일부로 FA를 신청했고, 12월 16일에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입단 교섭을 실시하여 추정 연봉인 650만 달러의 단년 계약(1년)을 맺었습니다.
2011
[미일 통산 500홈런 달성 및 MLB 은퇴 선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4번 타자 겸 지명 타자로 선발 출전하여 시즌 7호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이 홈런은 미일 통산 500홈런(NPB 332개, MLB 168개)이라는 대기록이었습니다. 경기 종료 후 일본 야구계 복귀 없이 메이저 리그에서 현역 생활을 마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스프링 캠프에서는 목이나 어깨 결림 증상과 화분증에 걸리는 등 슬럼프를 겪었으며, 시범 경기에서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습니다. 4월 3일(일본 시간 4일)의 개막 3차전에서 시즌 첫 안타인 2루타를 때려내 미일 통산 2500안타를 달성했습니다. 5월 3일의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는 2년 만에 끝내기 홈런을 때려냈지만 이후에는 부진에 시달렸습니다. 6월 9일 밥 게렌 감독이 해임되고 밥 멜빈이 감독 대행으로 부임한 이후 경기에 출전 기회가 늘어났습니다. 6월 10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 4호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7월 20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는 4번 타자 겸 지명 타자로 선발 출전하여 6회초 선두 타자로서 나와 시즌 7호 홈런을 때려내 미일 통산 500홈런(요미우리 시절의 332개, 메이저 리그 9년째인 168개)을 기록했습니다. 경기 종료 후에는 일본 야구계에 복귀하지 않고 메이저 리그에서 현역 생활을 마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7월 25일에는 6년 만이 되는 7월 세 번째 주의 주간 MVP를 수상했고 7월에는 타율 3할 6푼 5리, 3홈런, OPS 9할 9푼 7리를 기록하면서 팀의 월간 MVP를 수상했습니다. 오클랜드는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에서 멀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름이 되면서 상위 팀에 트레이드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9월 10일의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는 미일 통산 505호 홈런이 되는 12호 홈런을 때려내면서 일본인 통산 홈런은 역대 단독 7위가 되었지만 8월과 9월은 다시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시즌 통산 타율 2할 5푼 1리, 12홈런, 팀내 2위인 72타점, OPS 6할 9푼 8리를 기록하는 등 100경기 이상 출전에서는 메이저 리그 이적 후 최저 기록을 남기면서 시즌을 마쳤습니다. 10월 31일에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고 시즌 종료 후 영입 의사를 나타내는 메이저 리그 구단이 없어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무소속 상태에서 다음 시즌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2012
[현역 은퇴 선언]
뉴욕 시내의 한 호텔에서 긴급 기자 회견을 열어 2012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필사적으로 플레이했지만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며 은퇴를 결심한 이유를 밝혔고, '10년 전 모습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며 일본 복귀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의 은퇴는 일본과 미국 언론 모두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많은 동료와 관계자들이 찬사를 보냈습니다.
2012년 새해가 되고 나서도 영입 의사를 나타내는 구단은 나오지 않았고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무소속인 상태에서 시즌을 맞이했지만 4월 30일에 탬파베이 레이스와의 마이너 계약을 맺었습니다. 5월 1일에 마이너 계약을 맺은 선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입단 기자 회견을 열었습니다. 트리플 A 팀에서는 13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1할 7푼, 홈런은 한 개도 기록하지 못할 정도의 부진을 겪었지만 주력 선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인한 팀의 사정도 있어 29일에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었습니다. 등번호는 맷 무어가 55번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35번으로 착용하면서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등번호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메이저 리그 승격 당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 필립 험버로부터 2점 홈런(1호), 게다가 6월 1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에서 천웨이인으로부터 2점 홈런(2호)을 때려냈지만 이후에는 홈런이 없었습니다. 안타도 7월 1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전에서 2개의 안타를 때린 것을 마지막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 매든 감독은 마쓰이의 회복을 믿었으나, 7월 2일 뉴욕 양키스전에서 수비 도중 왼쪽 허벅지 뒷부분을 다치는 등 한 번도 타석에 서는 일 없이 경기 도중에 교체되면서 그 후 출전 기회는 줄어들었습니다. 7월 하순에는 홈 구장인 트로피카나 필드의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왔고 현지 신문에서도 마쓰이의 잇따른 성적 부진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실었습니다. 결국 34경기에 출전하면서 타율 1할 4푼 7리, 2홈런, 7타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겨 암울한 시즌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출전 기회가 없었던 7월 24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이 끝난 후 매든 감독으로부터 전력외 선수로 통보받아 다음날인 25일에 구단은 마쓰이를 방출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8월 1일에는 본인의 희망에 의해 자유 계약 선수가 되면서 타 구단으로부터의 오퍼를 기다렸지만 포스트 시즌 출전을 위한 이적 기한이 되는 8월 31일까지 마쓰이의 영입 의사를 나타내는 구단은 없었습니다. 퇴단 이후 거취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2012년 12월 28일(동부 표준시 27일) 오전 7시 넘은 시각에 뉴욕 시내의 호텔에서 긴급 기자 회견을 열어 2012년 시즌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은퇴를 결심한 이유에 대해 “필사적으로 플레이를 하여 메이저 리그에서의 힘을 발휘한다는 기분으로 10년간 뛰었지만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라고 말했고 일본 야구계 복귀를 선택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10년 전 모습을 기대하는 팬들이 많을 것인데 솔직히 10년 전 모습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라고 토로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많이 있다”라고 하면서도 “나가시마 감독과 단둘이서 매일 스윙 연습을 하던 시간”을 꼽았고 자신의 은퇴 후 거취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날 요미우리의 시라이시 고지로 구단주는 마쓰이를 미래의 요미우리 감독으로서 맡기고 싶다는 뜻을 나타내 뉴욕 양키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