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시타 고노스케
연표
1894
[마쓰시타 고노스케 출생]
일본 와카야마현의 유복한 가정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촌의회 의원을 지낼 만큼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와카야마현 가이소군 와사무라에서 아버지 마쓰시타 마사쿠스와 어머니 무메노 도쿠에다 사이에서 8남매(3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약 18만 4,000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소작인 7명을 두었으며 촌의회 의원을 지내는 등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이었다.
1899
[가세 몰락 및 형제들 사망]
5살이 되던 해, 부친의 쌀 선물거래 실패로 가세가 갑자기 몰락하며 극심한 가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형제들이 결핵과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홀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5살이 되던 해에 부친이 쌀 선물거래를 하다가 큰 손해를 보면서 가세가 갑자기 몰락하였다. 곤궁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형제들 모두가 결핵과 전염병으로 사망하고 혼자 살아남게 된다.
1901
[소학교 중퇴 및 오사카 상경]
소학교 졸업을 앞두고 학업을 중단하고 오사카로 상경했습니다. 9살의 어린 나이에 화로 제조 상점에서 가장 낮은 직급인 '뎃치' 신분으로 일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소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앞둔 4학년 도중 오사카에 사무직으로 취직해 있던 부친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오사카로 상경하면서 학교를 중퇴하였다. 9살의 어린 나이에 오사카로 상경한 마쓰시타는 처음 <미야다>라는 화로를 제조, 판매하는 상점에서 '뎃치' 신분으로 3개월 동안 일했다.
1902
[자전거 가게 사환으로 근무]
화로 가게가 문을 닫은 후, <고다이 상점>이라는 자전거 점포에서 5년 정도 '사환'으로 일했습니다. 이곳에서 주인 부부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주인의 사정으로 가게가 문을 닫자 <고다이 상점>이라는 자전거 점포에서 '사환' 신분으로 5년 정도 일했다. 열세살일 때 가게에 손님이 왔는데 주인이 없어 사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10%를 싸게 해주었다. 이 사실을 안 주인에게 혼났지만, 주인은 5%를 싸게 해주도록 했고 손님은 마쓰시타가 있는 동안 고다이 상점 자전거를 사기로 했다고 한다. 자식이 없던 주인 부부는 마쓰시타에게 잘해주며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
1910
[오사카 전등회사 취직 및 승진]
지인의 소개로 신흥회사인 오사카 전등회사의 옥내배선 부서에 '견습공'으로 취직했습니다. 신생 회사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여 3개월 만에 '직공'으로 승진하며 대형 공사를 맡았습니다.
1910년에 지인을 통해 신흥회사인 오사카 전등회사의 옥내배선 부서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였다. 첫 월급은 1엔이었다. 새로 만들어진 회사인 덕분에 승진 속도가 빨라 3개월 뒤 다카츠 영업소로 전근함과 동시에, 직급도 '견습공'에서 '직공'으로 승진했다.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으나 대저택의 배선공사, 해수욕장과 극장의 조명등 대형 공사를 맡아서 하였다.
1913
[간사이 상공학교 중퇴]
중간에 그만두었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간사이 상공학교 예과에 입학했지만,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2년도 지나지 않아 중퇴했습니다.
1913년에 간사이 상공학교 예과에 입학해 중간에 그만두었던 학업을 계속 하려 했지만, 학교생활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 2년도 지나지 않아 중퇴하였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인 이원복은 마쓰시타가 초등학교 졸업이라고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학력은 간사이 상공학교 중퇴이다.
1915
[모친 사망 및 결혼]
모친이 57세의 나이로 사망한 해, 큰 누나의 중매로 이우에 무메노와 결혼했습니다. 훗날 그의 처남은 산요 전기 창업자가 됩니다.
1915년에 모친이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그 해 큰 누나의 중매로 이우에 무메노와 결혼한다. 결혼하면서, 그의 처남은 산요 전기 창업자인 이우에 토시오가 된다.
1917
[개량소켓 개발 및 회사 퇴사]
오사카 전등회사에서 '검사원'으로 승진한 뒤, 전기기구 발명에 몰두하여 '개량소켓' 시제품을 개발했습니다. 그러나 상사의 무관심으로 회사를 퇴사하게 됩니다.
검사원으로 승진하면서 5시간 정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전기기구 발명에 힘을 썼고, 그 결과 '개량소켓'의 시제품을 개발하였으나 그의 상사가 관심을 보이지 않아 1917년에 오사카 전등회사를 퇴사하였다.
[선풍기 바닥판 주문 납품으로 자금 확보]
전기 상점 주인의 제안으로 도기제 선풍기 바닥판을 인조수지로 만들 수 있겠냐는 요청을 받아, 경험자의 도움으로 3,000개를 납품하며 초기 사업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곤궁한 가운데,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전기 상점 주인으로부터 도기제였던 선풍기의 바닥 판을 마쓰시타의 소켓 제조기술을 응용해 인조수지로 만들 수 없겠는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는 인조수지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경험자의 도움을 받아 1,000개의, 그리고 다시 2,000 개의 선풍기 바닥 판 주문을 받아 납품하면서 어느 정도 자금을 마련하게 된다.
[창업을 위한 자택 공장 개조]
퇴직금과 대출금을 합한 200엔으로 세들어 살던 집을 공장으로 개조하여 전구소켓 생산에 도전했지만, 초기에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의 사업가로서의 첫 시도였습니다.
오사카 전등회사를 퇴사함과 동시에 퇴직금, 적립금, 저축을 모두 합친 100엔과 지인으로부터 빌린 100엔을 보태, 세들어 살고 있던 오사카 이카이노의 집을 주거 겸 공장으로 개조해 전구소켓을 만들게 되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1918
[마쓰시타 전기기구 제작소 설립 및 어태치먼트 플러그 성공]
오사카에 '마쓰시타 전기기구 제작소'를 설립하고 '어태치먼트(연결) 플러그'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창적인 디자인과 저렴한 가격, 편리한 사용성으로 도매상들의 큰 호평을 받으며 사업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오사카의 오오히라키쵸의 조그만 2층 집을 빌려 '마쓰시타 전기기구 제작소'로 사명을 정한 뒤, '어태치먼트(연결) 플러그'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종래의 소켓에 비해 모양이 새롭고, 독창적인 제작 방법으로 값도 싸면서 사용도 간편하자 도매상들의 호평을 받으며 입소문을 타게 된다.
[2단 소켓 개량 및 사업 성장]
'어태치먼트 플러그'의 성공에 힘입어 '2단 소켓'의 개량에 착수하여 성공적으로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이 제품 또한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회사의 성장에 기여했습니다.
주문이 늘어나자 '2단 소켓'의 개량에 착수하였고, 개량에 성공해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19
[요시다 상점과 계약 및 공장 확장]
성공 소문을 듣고 오사카 <요시다 상점>으로부터 총대리점 자격의 판매권 제안을 받았습니다. 자금이 부족했던 마쓰시타는 요시다 상점과의 교섭을 통해 3,000엔을 빌려 공장을 확장했습니다.
'연결 플러그'와 '2단 소켓'의 성공 소문을 듣고 오사카 시내의 <요시다 상점>으로부터 총대리점 자격의 판매권을 주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게 된다. 요시다 상점은 오사카뿐만 아니라 도쿄 방면에도 판매망이 있는 만큼 생산설비와 인원을 늘리라는 제의를 하였고, 자금이 모자란 마쓰시타는 <요시다 상점>과 교섭하여 3,000엔을 빌려 공장을 확장하였다.
1920
[요시다 상점 계약 해지]
도쿄 동종 업계의 가격 덤핑 공세로 인해 <요시다 상점>과의 총대리점 계약이 해지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빌린 3,000엔은 천천히 갚는 것으로 원만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도쿄의 동종 업계의 업자들이 결속해서 '가격 덤핑'으로 강력히 대항하자, <요시다 상점> 측에서 총대리점 계약을 해지할 것을 요구하였고, 3,000엔은 천천히 갚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게 된다.
1921
[도쿄 판로 직접 개척]
계약 해지 후 난생 처음 도쿄로 직접 찾아가 지도를 손에 들고 생면부지의 도매상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상담하는 등 적극적으로 판로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마쓰시타는 난생 처음으로 도쿄로 가 지도를 손에 들고 생면부지의 도매상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상담을 하면서 판로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1922
[신규 공장 건설 착수]
판로 확대로 주문량이 급증하자, 창업 4년째인 이 해에 공장 건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습니다. 필요한 자금 10,000엔 중 부족한 부분을 건축업자에게 솔직하게 설명하고 매달 갚는 식으로 돈을 빌려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판로가 넓어지면서 주문량이 많아짐에 따라 창업 4년째인 1922년, 본격적으로 공장 건설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공장이 45평, 사무실 및 주거가 25평, 도합 70평 정도의 부지를 책정하고 건축가에게 견적을 문의한 결과 7,000엔 남짓한 금액이 예상되었고, 설비나 운전자금까지 포함하면 10,000엔 정도의 자금이 필요했지만 수중에는 4,500엔 정도에 불과하였다. 여전히 영세한 규모의 회사로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을 만한 신용이나 담보도 없는 상태에서 그는 용기를 내 건축업자에게 자신의 재무상황을 솔직하고 의연한 태도로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건축비를 매달 갚는 식으로 돈을 빌리게 된다.
1923
[포탄형 전지식 램프 발매 및 혁신적 마케팅]
자전거용 '포탄형 전지식 램프'를 발매했으나, 당시 자전거 램프에 대한 불신으로 판매가 부진했습니다. 이에 그는 직접 시험 마케팅을 실시하며 고객들에게 제품을 빌려주고 체험하도록 하여 판매를 성공시켰습니다.
1923년에 발매된 '포탄형 전지식 램프'는 자전거용으로 야간주행시 촛불을 켠 초롱이나 석유램프에 비해 획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자전거 램프 전체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때문에 판매가 부진하자, 특정 지역과 자전거 소매상을 추려 일일이 찾아다니며 제품을 무료로 빌려주며 직접 시험(test marketing)해 보도록 하면서 만족하게 되면 도매상을 통해 구입을 요청하도록 권유했다.
1930
[불경기 속 무해고 경영 실천]
심각한 불경기로 많은 회사들이 직원을 해고할 때도, 마쓰시타는 단 한 명의 직원도 해고하지 않았습니다. 연공서열제와 종신고용제를 유지하고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재고를 소진하는 등 혁신적인 무해고 경영을 실천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직원들의 복리후생에 신경 쓰지 않아, 이에 불만을 품은 직원들이 다른 회사로 쉽게 옮기는 일이 많았는데,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연공서열제와 종신고용제로 해결하였다. 실례로 1930년대, 심각한 불경기로 많은 회사들이 직원들을 해고했지만, 마쓰시타는 한 명의 직원도 해고하지 않았다. 마쓰시타는 노동조합과 정리해고와 임금삭감을 하지 않는 대신 재고를 모두 소진하는 단체교섭을 하였고,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서 재고를 모두 소진했다.
1952
[필립스와 기술 제휴 체결]
마쓰시타 전기산업은 PHP(Peace and Happiness through Prosperity) 연구운동을 시작했으며, 이 해에 글로벌 기업인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맺으며 기술력 강화에 나섰습니다.
마쓰시타 전기산업은 PHP(Peace and Happiness through Prosperity) 연구운동을 시작했고, 1952년에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1953
1953년에는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1964
[대형 컴퓨터 사업 철수]
사무용 대형 컴퓨터 사업에서 철수를 선언하며 과감한 사업 구조 조정을 단행, 기업의 선택과 집중 전략을 보여주었습니다.
1964년에는 사무용 대형 컴퓨터 사업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1965
[주 5일 근무제 선제적 실시]
직원들의 적절한 휴식과 노동의욕 고취를 위해 일본 기업으로서는 선제적으로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했습니다. 이는 직원 복지를 중시하는 그의 경영 철학을 잘 보여줍니다.
1965년 4월부터는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하여 직원들이 적당한 휴식으로 노동의욕을 높일 수 있도록 하였다.
1979
[마쓰시타 정경학원 창설]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정치인 육성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마쓰시타 정경학원'을 창설했습니다. 이는 기업을 넘어선 사회적 공헌과 인재 양성에 대한 그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정치인의 육성에도 관심이 있어, 1979년 마쓰시타 정경학원(松下政経塾)을 창설했다.
1989
[마쓰시타 고노스케 사망]
파나소닉의 창업자이자 일본 경제 성장의 상징이었던 '경영의 신'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의 사업가로 현재의 파나소닉을 세운 인물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리던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1989년 4월 27일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