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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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모델, 가수 영화/드라마 배우

마릴린 먼로는 1950년대와 60년대 초를 대표하는 미국의 배우, 모델, 가수이다. '금발 미녀' 이미지로 섹스 심벌이 되었으며,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화려한 외모 뒤에는 복잡한 사생활, 중독, 우울증 등의 고통을 겪었다. 연기 변신을 시도했으나 3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죽음의 원인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까지도 그녀는 대중문화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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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26

[마릴린 먼로 출생]

노마 진 모턴슨이라는 본명으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노르웨이인, 어머니는 스코틀랜드인이었습니다.

1926년 6월 1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병원에서 노르웨이인 아버지 마틴 에드워드 모턴슨과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글레디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년기 이름은 노마 진 모턴슨이었다.

1927

[유아기 사진 촬영]

유아기 때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촬영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그녀의 어린 시절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유아기때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 1927년경에 촬영되었다.

1933

[불우한 유년기 시작]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면서 어린 마릴린 먼로는 양부모의 집과 고아원을 전전하며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이는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머니 글래디스가 마릴린 먼로를 양육했고, 아버지는 양육의 의무를 방기하였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면서 양부모의 손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1942

[첫 결혼]

16세의 어린 나이에 경찰관이었던 제임스 도허티와 첫 결혼을 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길고 복잡한 사생활의 서막이었습니다.

16세의 마릴린 먼로는 경찰관이었던 제임스 도허티와 결혼했다. 이는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이었다.

1944

[모델 활동 시작]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중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모델 에이전시에 들어가면서 핀업 모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녀가 대중에게 알려지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남편 제임스 도허티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집을 떠난 후 군수공장에 취직하여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였다. 한 사진작가가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이 공장을 방문했고, 유독 노마 진이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지 않은 포즈와 표정을 짓는 것을 눈여겨 보게 되면서 모델 에이전시에 들어가게 되었다.

1946

[제임스 도허티와 이혼]

모델 활동을 시작하면서 첫 남편 제임스 도허티와 이혼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경력과 사생활이 교차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모델계에 들어서면서 첫 번째 남편 제임스 도허티와 이혼했다.

1949

[영화 《러브 해피》 출연]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의 영화 《러브 해피》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의 영화 《러브 해피》에 출연하였다.

1950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

영화 《아스팔트 정글》과 《이브의 모든 것》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아스팔트 정글》에서는 짧은 출연에도 불구하고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조니 하이드의 소개로 존 휴스턴 감독의 영화 《아스팔트 정글》에 출연하게 되었다. 여기서 대사 몇 줄에 출연 장면도 두 군데밖에 없었지만 비중 있는 역을 맡게 되고 처음으로 연기다운 연기를 했을 뿐 아니라 배우로서의 무한한 가능성까지 보여주었다. 같은 해 영화 《이브의 모든 것》에도 출연하며 배우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51

['라이프'지 표지모델]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되면서 그녀의 인기는 정상 궤도에 올랐습니다. 대중적인 명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1년 1월 1일 '라이프'지 표지모델이 됨으로써 인기가 정상의 궤도에 올라섰다. 같은 해 영화 《당신도 젊다》를 찍으면서 감독이자 극작가인 엘리아 카잔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52

[다양한 장르 영화 출연과 누드 모델 파문]

《몽키 비지니스》 등 코미디 영화와 《밤의 충돌》, 《돈 보더 투 노크》 등 누아르/스릴러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과거 누드 모델 이력이 알려지며 파문이 일었으나, 오히려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폭스와 새로운 계약을 맺은 후, 2년 동안에 《당신도 젊다》(1951), 《몽키 비지니스》(1952)를 포함한 코미디 영화와 《밤의 충돌》(1952), 《돈 보더 투 노크》(1952) 등의 누아르와 스릴러 장르에도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유명해지기 전에 누드 모델로 일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잠깐 파문이 일기도 하였으나, 마릴린 먼로는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1953

[할리우드 최고 스타 등극 및 플레이보이 모델]

할리우드에서 가장 시장성 있는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영화 《나이아가라》에서 성적 매력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와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에서 '백치미 금발 미녀' 이미지를 굳혔습니다. 플레이보이 1호의 표지 및 센터폴드 모델로도 등장했습니다.

1953년, 마릴린 먼로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시장성이 있는 스타로 자리매김하였다. 누아르 영화로 먼로의 성적 매력에 초점을 맞춘 《나이아가라》에 출연하였고, '백치미 금발 미녀'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만든 코미디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와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에도 출연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플레이보이 1호의 표지와 센터폴드의 사진으로 먼로의 누드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1954

[폭스 계약 갈등 및 영화 제작사 설립]

폭스와의 계약 문제로 영화 출연을 거절하며 잠시 연기를 중단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자신의 영화 제작사를 설립하여 독립적인 활동을 모색했습니다.

자신의 커리어 내내 대중들에게 비춰지는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관리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먼로는 지속적으로 백치미 금발 미녀라는 비슷비슷한 캐릭터만 맡기는 것과 적은 보수로 인해 폭스에 실망하기도 했다. 또한 1954년 초에 한 영화의 출연을 거절하여 잠시 연기를 중단하기도 하였으나, 이윽고 먼로의 최고의 흥행작인 《7년만의 외출》(1955)에 출연하게 된다. 폭스가 먼로의 계약과 관련된 변경을 주저하자 1954년에 자신의 영화 제작사를 설립하였다.

[주한 미군 위문 공연]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많은 장병들에게 뜨거운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녀의 세계적인 인기를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위해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7년만의 외출》 '스커트 씬' 촬영]

뉴욕 거리에서 영화 《7년만의 외출》의 유명한 '스커트 씬'을 촬영했습니다. 이 장면은 마릴린 먼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1954년 9월 9일, 먼로가 뉴욕 거리에서 영화 《7년만의 외출》을 촬영하는 동안 찍은 사진. 그녀는 유명한 '스커트 씬' 촬영 도중 어느 순간 멈춰 서서 영화 촬영을 취재하던 취재진과 사진기자들을 위해 포즈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1955

[연기 공부와 최고 흥행작 개봉]

자신의 제작사를 세우는 데 전념하는 동시에,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메소드 연기를 공부하며 배우로서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같은 해, 그녀의 최고의 흥행작인 《7년만의 외출》이 개봉했습니다.

다음해인 1955년에는 회사를 세우는 데 전념하였으며,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메소드 연기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5년 말이 되어서야 폭스가 먼로에게 더 큰 급여와 통제를 제시하면서 새로이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의 최고의 흥행작인 《7년만의 외출》이 개봉했다.

1956

[연기 재도전 및 《버스 정류장》 호평]

기존의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재공부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영화 《버스 정류장》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고,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도 지명되었습니다.

1956년에는 그 동안 쌓인 고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고자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새롭게 연기를 공부하였다. 대학 공개강좌를 듣기도 하고 본격적인 연기공부를 위해 뛰어난 연기지도자로 꼽히는 미하엘 체호프를 소개받기도 했다. 미하엘 체호프는 '배우란 캐릭터의 단순한 모방자가 아닌 고도의 훈련을 거친 연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먼로가 추구하는 지적·예술적 관심을 높이 평가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버스 정류장》에 출연하여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골든 글로브상 후보로도 지명되었다.

1957

[독립 제작사 설립 및 수상]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을 창립하고 영화 《왕자와 무희》를 촬영하여 데이비드 디 도나텔로 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독립적인 예술가적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957년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을 창립하고 영화 《왕자와 무희》를 촬영하였고, 이 작품으로 데이비드 디 도나텔로 상을 수상하였다.

1959

[《뜨거운 것이 좋아》 출연]

비평과 상업적 성공을 모두 거둔 코미디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 출연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이듬해 골든 글로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비평적인 면과 상업적인 면에서 모두 성공한 《뜨거운 것이 좋아》(1959)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로 1960년 골든 글로브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1960

[골든 글로브상 여우주연상 수상]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로 골든 글로브상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1959년)로 1960년 골든 글로브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61

[생애 마지막 완성작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출연]

남편 아서 밀러가 각본을 쓴 영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에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습니다. 이 영화는 그녀의 생애 마지막 완성작이 되었습니다.

1961년에는 남편 아서 밀러가 각본을 쓴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에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주연 배우로 출연하였고 이것이 생애 마지막 출연 작품이었다.

1962

[미완성작 《썸싱스 갓 투 기브》]

영화 《썸싱스 갓 투 기브》를 촬영하던 도중 사망하여 이 작품은 미완성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썸싱스 갓 투 기브》(1962)는 먼로가 촬영 도중 사망하여 미완성작으로 남아 있다.

[마릴린 먼로 사망]

36세의 젊은 나이에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수십 년간 여러 음모론이 제기되었으며, 자살 가능성도 추정되고 있습니다. 로버트 케네디나 CIA 요원에 의한 암살설 등 입증되지 않은 주장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결국 1962년 8월 5일, 36세의 나이에 신경 안정제인 바르비투르 과다 복용으로 인하여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먼로가 사망한 후에 수십 년 동안 몇몇 음모론이 제기되어 왔고, 자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도 추정된다. 2014년, 기자 제이 마골리스와 작가 리처드 버스킨은 저서 《마릴린 먼로 살해: 사건 종결》에서 로버트 케네디가 정신과 의사 랠프 그린슨에게 독극물을 주사하게 하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2015년 4월, CIA 요원이었던 노먼 호지스는 1962년 8월 상관 지미 헤이워스의 지시에 의해 다량의 넴부탈을 주사해 마릴린 먼로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입증된 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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